(공중)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아를 알기 전에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은 고(苦)가 그렇듯이 보고 듣고 알고 새기는 가운데 생긴다
그런데 매일 보고 듣는 뉴스는 웃음보다는 인상을 찡그리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
뉴스보다 생활 정보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공부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삼가테 보디 스바하
가세가세 너머가세 모여너머가세 보리 사바하
<반야심경> 주문만 읊어도 마음이 편해지지 아니하는가..
'무안이비설신의' 도 '무색 무수상행식' 과 마찬가지로
공(空)을 주어로 삼고 있다. 곧 공에는 안이비설신의[6입처]가 없다는 것.
그러면 5온의 '색불이공 색즉시공.. '은 무슨 뜻인가?..
나를 설명할 때 이 몸과 의식[識身]을 떠나 설명할 수 있나?.. 없다
해서 몸과 의식인 색수상행식 5온이 곧 나인데..
그런 나를 <심경>에서는 공으로 설명하니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 한다.
'어떻게 5온이 공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있겠지만..
그 앞에 관세음보살[관자재보살]이 5온이 곧 공임을 보아 일체 고에서 벗어났다고 했으니..
아~, 5온이 본래 공인가 보구나 하고 믿을 뿐^^..
또 이어서
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하여..
공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지 하고 공감하는데..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라 하지 않는가.
바로 앞에서 공즉시색[5온]이라 하더니
어떻게 침도 마르기 전에 공 가운데 색(수상행식)이 없고, 안(이비설신의)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한편 '안이비설신의'에 대해
시중에 돌고 있는 불교 서적을 보면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행미촉법을 6근, 6경이라 하여,
6내입처와 6외입처인 12처는 6근 6경이라고 설명한다.
6근 가운데 안이비설신 5근은 생물학적으로 몸에 있는 다섯개의 기관으로
안근은 볼 수 있는 능력, 이근은 들을 수 있는 능력, 비근은 냄새를 맡는 능력,
설근은 맛을 알 수 있는 능력, 신근은 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것들은 살아서 망가질 수도 있지만 몸이 죽으면 따라서 그 능력이 사라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 의근은 뇌의 작용으로 앞의 다섯 능력을 총괄하는 능력이 되고..
6근에 대응하는 외부 대상에 있다고 여기는 것을 6경.
그런 6근 6경은 석가세존 당시 인도에서 알고 있던 개념인데..
세존께서는 세상이 알고 있는 6근 6경을 보며 6내입처와 6외입처라 하여 12처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만일 12처가 곧 6근6경이라면 굳이 새로 12처라는 용어를 만들 이유가 있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6근6경으로 설명할 수 없던 12처의 의미는 무엇인가?..
12처의 바른 의미를 안다는 것은
혹..
석가세존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핵심을 아는 게 아닐까..
세상에서 알고 있는 안근(眼根)은
생물학적 의미로 '볼 수 있는 기관이요, 능력'을 말한다.
시체도 안(眼)은 있으나 보지 못하는 것은 볼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맡고, 생각하는 능력은 살아있다는 생명의 특징이 된다.
세존께서
안근이 아닌 안입처라고 지칭하는 것은 바로 살아서 보는 것을 말한다.
이근이 아닌 이입처라고 지칭하는 것은 바로 살아서 듣는 것를 말한다.
...
의근이 아닌 의입처라고 지칭하는 것은 바로 살아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안입처 등 6내입처[6입처], 6외입처, 12입, 12입처, 12처
할 때 나오는 '입처' 또는 '입', '처'라 지칭하는 것은 모두 '살아서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세존께서 처를 강조한 중요한 이유가.. 의미가 나온다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맡고, 생각하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그런 활동을 하는 자 곧 [나]가 있다고 인지한다.
하여 본다 또는 보고 있다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가 보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6입처를 모르고 6근의 활동으로 아는데..
6근은 부모로 부터 받는 것이기에
[나]는 부모로 부터 잉태되는 것으로 안다
해서 6입처를 모르고 6근으로 아는 자들은
5온 존재인 '내'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을 알고, 촉하고, 생각한다고 하게 되며
6근이 존재하는 한 [나]는 멸할 수 없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6근이 아닌 6입처를 바르게 아는 이들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을 알고, 촉하고, 생각하는 자를 '나[자아]' 라고 한다.
그렇게 알면
6근이 살아있어도 [나]를 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68. 육입처경(六入處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고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고 사실 그대로 관찰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사실 그대로 관찰하는가?
'이것은 색이다.
이것은 색의 발생이다. 이것은 색의 소멸이다.
수·상·행도 마찬가지이며,
이것은 식이다. 이것은 식의 발생이다. 이것은 식의 소멸이다'
라고 사실 그대로 알라.
어떤 것이 색의 발생[色集]이며, 어떤 것이 수(受)·상(想)·행(行)·식의 발생[識集]인가?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3事和合) 접촉[觸]이 생기며,
접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생기고,
수를 인연하여 애욕[愛]이 생기며
나아가 이와 같이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기나니,
이것을 색의 발생이라 하느니라.
이[耳]·비[鼻]·설[舌]·신[身]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의[意]와 법(法)을 인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기며,
접촉을 인연하여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인연하여 애욕이 생기며 나아가 이와 같이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기나니,
이것을 색의 발생과 수·상·행·식의 발생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색의 소멸[色滅]이고, 수(受)·상(想)·행(行)·식의 소멸[識滅]인가?
안과 색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긴다.
이 때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나아가 이와 같이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게 되느니라.
귀·코·혀·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의[意]와 법을 인연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긴다.
이 때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면
나아가 이와 같이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게 된다.
이것을 색의 소멸과 수·상·행·식의 소멸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비구는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고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잡. 68. 6입처경> 내용을 천천히 자세히 보면..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나 불교 내용과 무언가가 다른 점이 보인다.
무엇이 다른가?..
다른 점이 보일 때까지..
보시기를..()..

첫댓글 어떤 것이 색의 발생[色集]이며, 어떤 것이 수(受)·상(想)·행(行)·식의 발생[識集]인가?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3事和合) 접촉[觸]이 생기며,
접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생기고,
수를 인연하여 애욕[愛]이 생기며
나아가 이와 같이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기나니,
이것을 색의 발생이라 하느니라. <잡. 68. 6입처경>
내용을 보면..
12처인 2법이 만나
3사화합을 하여
색 등 5온이 생긴다고 하고 있다.
곧 12처에서 18계가, 18계에서 5온이 생긴다고 시설하고 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있습니까?
행복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다(斷)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常),
행복이 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을 고집하므로
'완전 괴로움 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게 되는'
集諦를 파괴합니다.
가령 도솔미님과 같이
내가 고정된 성품의 자성(定性)을 지니고
존재하는 것이라면(常),
실천(八正道)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道를 멸하므로 삼보(三寶)를 멸하며
因果 등 세간출세간의 모든 것을 멸합니다.
苦, 集, 滅諦가 없는데[斷],
도(八正道)의 실천이 말이나 될까요?
그런데 도는 실천할 수 있습니다.
觀世音菩薩은,
어째서 '無'라고 하였을까요? /분란
그러나 '행복'을 고집하므로
'완전 괴로움 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게 되는'
集諦를 파괴합니다./분란
그럼 언제
'완전 괴로움 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게 되는' 것인가?..
무아를 깨쳐야 가능하다고 본다. 하여 설명을 시작하는 본문 두번째 줄에 바로
"무아를 알기 전에 행복을 추구한다." 로 시작하고 있다.
그 말은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구경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발견한 자가 있다면
그는 새로운 길을..
무아를 깨치는 길로 접어든다는 것.
분란 역시 무아를.. 그런 의도를 갖고 있음을 바로 그의 글에서 본다.
가령 도솔미님과 같이
내가 고정된 성품의 자성(定性)을 지니고
존재하는 것이라면(常), /
그런데 왜 분란은 나의 글에서 무아를 못 본 것일까?..
그의 오만이며 자만으로.. 무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그러니 그 다음부터 나오는 그의 댓글은 첫 단추를 잘못끼어듯이 실수가 떠나지 않는다..
苦, 集, 滅諦가 없는데[斷],
도(八正道)의 실천이 말이나 될까요?
그런데 도는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분란
저 말을 보면 분란이 어떤 공부를 하는 지 알 수 있다.
저 비슷하게 말하는 자가 떠오르는데.. 닉이 다르니 알 수가 없다.
만일 그가 맞다면^^..
언어도단이라 하는데.. 그것을 물으면.. 경계를 벗어난 말이라 하여 아함불자는 그런 말에 무기로 대한다.
지금 그는 언어도단인 답을 바라고 있다.
觀世音菩薩은,
어째서 '無'라고 하였을까요? /분란
저 질문을 수없이 앞으로 하는데..
난 즉답을 않는다.. 그는 내가 말하는 어떤 답도 원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안타깝게도 그는 언어도단인 답만이 정답으로 인정한다.
아함 불교는 지금여 존재하는[실유] 나에게서 무아로 향하는 불교다.
마지막 골에 이르기 까지 엄연히 나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그는 출발이 무아이고 도착이 무아다.
다른 길을 보면서 서로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