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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반야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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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반야심경공부 아함불자가 보는 반야심경 2. / 무 안이비설신의..
효진 추천 0 조회 22 18.08.04 21:58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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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8.08.19 23:02

    첫댓글 어떤 것이 색의 발생[色集]이며, 어떤 것이 수(受)·상(想)·행(行)·식의 발생[識集]인가?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3事和合) 접촉[觸]이 생기며,
    접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생기고,
    수를 인연하여 애욕[愛]이 생기며
    나아가 이와 같이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기나니,
    이것을 색의 발생이라 하느니라. <잡. 68. 6입처경>

    내용을 보면..
    12처인 2법이 만나
    3사화합을 하여
    색 등 5온이 생긴다고 하고 있다.

    곧 12처에서 18계가, 18계에서 5온이 생긴다고 시설하고 있다.

  • 작성자 18.09.17 00:57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있습니까?
    행복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다(斷)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常),
    행복이 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을 고집하므로
    '완전 괴로움 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게 되는'
    集諦를 파괴합니다.

    가령 도솔미님과 같이
    내가 고정된 성품의 자성(定性)을 지니고
    존재하는 것이라면(常),
    실천(八正道)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道를 멸하므로 삼보(三寶)를 멸하며
    因果 등 세간출세간의 모든 것을 멸합니다.

    苦, 集, 滅諦가 없는데[斷],
    도(八正道)의 실천이 말이나 될까요?

    그런데 도는 실천할 수 있습니다.

    觀世音菩薩은,
    어째서 '無'라고 하였을까요? /분란

  • 작성자 18.09.17 01:07

    그러나 '행복'을 고집하므로
    '완전 괴로움 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게 되는'
    集諦를 파괴합니다./분란

    그럼 언제
    '완전 괴로움 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게 되는' 것인가?..

    무아를 깨쳐야 가능하다고 본다. 하여 설명을 시작하는 본문 두번째 줄에 바로

    "무아를 알기 전에 행복을 추구한다." 로 시작하고 있다.

  • 작성자 18.09.17 01:13

    그 말은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구경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발견한 자가 있다면
    그는 새로운 길을..
    무아를 깨치는 길로 접어든다는 것.

  • 작성자 18.09.17 01:13

    분란 역시 무아를.. 그런 의도를 갖고 있음을 바로 그의 글에서 본다.

    가령 도솔미님과 같이
    내가 고정된 성품의 자성(定性)을 지니고
    존재하는 것이라면(常), /

    그런데 왜 분란은 나의 글에서 무아를 못 본 것일까?..

    그의 오만이며 자만으로.. 무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그러니 그 다음부터 나오는 그의 댓글은 첫 단추를 잘못끼어듯이 실수가 떠나지 않는다..

  • 작성자 18.09.17 01:25

    苦, 集, 滅諦가 없는데[斷],
    도(八正道)의 실천이 말이나 될까요?

    그런데 도는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분란

    저 말을 보면 분란이 어떤 공부를 하는 지 알 수 있다.
    저 비슷하게 말하는 자가 떠오르는데.. 닉이 다르니 알 수가 없다.
    만일 그가 맞다면^^..

  • 작성자 18.09.17 01:28

    언어도단이라 하는데.. 그것을 물으면.. 경계를 벗어난 말이라 하여 아함불자는 그런 말에 무기로 대한다.
    지금 그는 언어도단인 답을 바라고 있다.

  • 작성자 18.09.17 01:33

    觀世音菩薩은,
    어째서 '無'라고 하였을까요? /분란

    저 질문을 수없이 앞으로 하는데..
    난 즉답을 않는다.. 그는 내가 말하는 어떤 답도 원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안타깝게도 그는 언어도단인 답만이 정답으로 인정한다.

    아함 불교는 지금여 존재하는[실유] 나에게서 무아로 향하는 불교다.
    마지막 골에 이르기 까지 엄연히 나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그는 출발이 무아이고 도착이 무아다.

    다른 길을 보면서 서로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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