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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청교도적 미국이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변모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반언약제(半言約制)
다른 종교개혁자들처럼 칼빈은 교회가 결코 완전히 개혁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했다. 서로를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들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외형적 모양만으로는 누가 진짜 택함을 받은 자들인가를 판단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칼빈은 “우리는 보이는 교회의 구성원들을 그들이 진짜인가 아닌가 조사하기보다는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도록 요청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우리가 보기에 완전히 타락하여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으로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확고한 것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자주 실족하여 타락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예정에 따라(어거스틴이 말했듯이) “교회 밖에 많은 양들이 있을 수 있고 교회 안에 많은 이리들이 있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1630년대의 청교도들은 입교인이 되려면 회심에 대한 분명한 외적인 증거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특별히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인가를 분별하기 위하여 엄격한 심사를 했다. 이리하여 결과적으로 도덕주의가 뉴잉글랜드 신학에 침투하기 시작했으며 사회에서 도덕이 타락함에 따라 교회에서의 도덕주의는 더욱더 강화되었다. 청교도들이 그들의 신앙의 핵심인 은혜의 복음에 대한 강조는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개혁 지향적인 충동을 따라 개인의 품행의 개선과 사회적인 도덕 향상을 통한 구원이라는 사상을 용인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는 품위 있고 시민적이며, 신학에는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회 결속 기관이 되어버렸다.
초창기 뉴잉글랜드 정착민들에게는 그들이 건설한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 결국 같은 이야기였다. 그 둘 사이에 아무런 긴장이 없었다. 시민적 정치 유기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그들은 필히 교회 안에서 존경받는 교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회심의 체험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스톤 지역의 인구 밀집 지역을 채우게 되자 교회는 현실적 상황과 타협하게 되었다. 교회의 입교인의 자격에 회심의 체험을 요구한 지 불과 30년이 지난 1662년에 와서 성찬이 “중생의 여부와 관계없이 품행이 단정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 「반언약제」(the half-way covenant)는 믿지 않는 부모라 할지라도 만약 그들의 삶이 방탕하지 않고 뉴잉글랜드 교회의 기본 교리를 지지한다면 그들의 자녀들도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3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이 중생을 받았는지 아닌지 조사하는 엄격한 심사는 사라지고 기독교는 타협을 통하여 (한 사회를 통합 유지시켜 주는) 「시민 종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청교도들이 채택한 국가의 제도나 체제가 그들이 영국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하던 바로 그와 똑같은 제도와 체제였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타협 정책이 「반언약제- 절충 언약제」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제는 시민들이 좀더 쉽게 인간 도성(人間都城, 즉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의 시민이 되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지상 나라의 시민이 되는 길이 쉬우면 쉬울수록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도 쉽게 되었다. 30년이 지나자 청교도들이 초창기에 가졌던 “언덕 위에 빛나는 하늘나라 도성의 건설”에 대한 비전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고 대신 기독교는 일종의 시민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알미니안주의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배교(背敎)의 시작에 불과했다. 하바드 대학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인간성과 구원에 관한 비정통적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이 사상들은 청교도적인 사상과 경건이 세상과의 타협을 거치게 되면서 나오게 된 산물이었다.
청교도들이 즐겨 지칭했듯이 하바드 대학은 “열방의 소금”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학식 있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을 배출하기 위해 1636년에 설립되었다. 1707년에 와서 하바드가,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주장은 인간의 의지와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불가항력의 은혜를 부인했던 알미니우스(1560-1609)의 비정통적 이론을 수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일기 시작했다. 알미니우스는 화란의 신학자로서 이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라는 주장은 인간의 의지와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본다.
1735년에 있었던 유명한 사건으로서 로버트 브렉 사건이라는 것이 있다. 그는 당시 하바드 신학부 졸업생으로서 지역 목회자협의회가 알미니안주의자로 고소한 자이다. 그러나 리차드 홉스타터에 따르면 “18세기 중반 이전에 이미 알미니안주의는 존경받는 목회자들의 공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어떤 진리 하나 정도(일개 학설)로 전락하였다. 그 진리는 뉴잉글랜드 지역에 거주하는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신앙적 진리로 믿지 않는 그러한 ‘진리’(일개 학설) 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하바드 대학이 더 이상 자신들의 자녀들을 보낼 곳이 못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의 자녀들이 예일 대학으로 진학하기 시작했다. 교회법은 대학 심사위원회의 학자들에게 알미니안주의 혐의가 있는 교수들을 조사하는 권한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알미니안주의가 원죄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에 관한 복음적 개혁파 교리를 약화시키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알미니안주의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부인했던, 그래서 초기 교회 역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아리안주의와 혼합하게 되었다. 알미니안주의와 아리안주의의 혼합은 오래지 않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니테리언 보편주의」(Uniterian-Universalism)로 나타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하바드 대학은 공식적으로 이러한 유니테리언 교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이리하여 한때는 청교도적 정통주의 신앙의 요새였던 보스톤 지역의 선도적인 수많은 회중파 교회들이 이단 유니테리언 교파의 최후의 거점이 되고 말았다.
계몽주의
알미니안주의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보다는 인간의 잠재력(가능성)을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게 되자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라는 새로운 폭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하였다. 계몽주의 주창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까지 무시하고 부인하며 과거 하나님의 말씀이 차지했던 곳을 자기들 자신의 이성(理性)으로 대치시켜 버렸다.
오늘날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만일 자신들이 종교적인 도그마(감정, 정서)에 의해, 특별히 성경에 의해서 자기의 생각(지성)이 구속(拘束)을 받는다면 사고력(思考力)이 있는 지성인으로서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지성과 감정은 서로 별개라고 생각한다. 지성과 감정과, 종교개혁 신앙이 향유하는 개혁 정신이 조화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사상에서 고무되어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고, 정서의 감동을 받아 공동체에서 행동으로 떨쳐나섰다. 시편 기자는 “내 마음(정서)에서 좋은 말(사상)이 넘치네”라고 노래했다(시45:1). 숭고한 생각(사상)으로 고귀한 감정이 솟구쳐 나오며, 이 두 가지(숭고한 생각과 고귀한 감정)의 조화가 주변 세상을 개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종교개혁 신앙으로 말미암아 미국에는 많은 훌륭한 학자들과 이러한 학자들을 대부분 배출하는 지성의 산실(産室)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리차드 홉스타터는 “청교도 목사들이 뉴잉글랜드 지역의 지성주의 전통을 세웠다. 그리고 이 전통은 다수의 뉴잉글랜드 지역 주민이 다른 지방에 이주할 때 함께 따라갔고 19세기와 20세기에 계속된 미국인의 활발한 지식 추구의 삶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이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된 지성주의 전통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내용면에서 본다면 아마도 미국 독립전쟁(1775-1785)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절충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메사추세츠 만에 정착했던 청교도들보다 학문과 지성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던 공동체가 세상 또 어디에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고 홉스타터는 지적하고 있다. 문학사가인 모세 타일러는 청교도들의 삶의 우선 순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애초 뉴잉글랜드 지방은 농업 지역이 아니었고 제조업이나 상업 지역도 아니었다. 뉴잉글랜드는 사색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즉, 사상을 취급하는 시장과 같은 것이 형성된 곳이 뉴잉글랜드였다. 뉴잉글랜드는 한 권의 책(성경)을 모퉁이돌로 삼아 그 위에 사회의 틀을 세웠다. 존 윈드롭이 살렘 항에 도착한 지 채 6년이 지나지 않아서 메사추세츠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자신들의 금고에 깊이 감추어 두었던 돈들을 꺼내 대학을 설립하는 데 사용했다. 그리하여 잘라진 나무의 그루터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메사추세츠의 허허 벌판에 자신의 자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이스 역사가인 투키디데스, 그리고 로마의 시인 호래이스와 역사가 타키투스, 또한 히브리어로 씌어진 구약성경에 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홉스타터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청교도주의는 성경 중심의 신앙으로서 성경 해석과 합리적인 논증을 강조하며 감정주의의 열광을 삼가고 있다.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철학과 경건과 문학의 기본 사상들이 설교 안에서 표현되는데, 청교도 대중 교육의 목표 중 하나가 그러한 설교를 듣고도 이해할 수 있는 평신도를 훈련하는 데 있었다. 청교도 성직자들의 설교는 심오한 신학적 깊이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청교도 성직자들의 설교는 유머 예화에만 신경쓰고 청중의 귀만 즐겁게 해주는 천박한 현대 성직자들의 설교와는 천양지차가 난다.”
복음주의자들이 칼빈주의적 정통 신앙을 포기할 때, 그들은 가족과 교회와 지역 사회 및 학교와 직장 속에서 그들에게 성경적 원리대로 행동하며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지적 사고의 체계 또한 함께 버렸던 것이다. 지식과 정보가 고도화됨에 따라 단편적인 정보들이 전체 세계관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계몽사조의 이런 지식의 편린화(片鱗化)로 인한 결과를 유대인 철학자 윌 헐버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인간 사회 내의 사회 질서상의 문제는 본질상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이다. 서구 문화의 보루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전통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영적 유산은 고도의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우리는 사방에서 우리의 지적 추구의 전통이 파멸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영적인 혼돈 상황에서는 자유나 질서가 제대로 보존될 수 없다. 자유 대신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쾌락과 권력의 소용돌이만 남고, 질서 대신 기준이 없는 방종의 광막한 정글만이 남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양상의 시대를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성과 계시의 절연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한 예가 프랑스에서 발생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이성주의가 성경의 계시를 부인한 나머지 노틀담 사원에서부터 십자가와 그 외 모든 기독교 상징물들을 제거하기까지 하였다(프랑스 혁명 때). 그리고 그 자리에 거대한 이성의 여신상을 세웠다. 도그마, 즉 교리를 강조하는 종교는 진정한 발전에 장애물이 된다고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은 말한다. 아무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인간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그들은 믿었다.
볼테르는 “나는 내 평생 루터와 칼빈이 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나는 기독교가 겨우 열두 명의 사람에 의해 세워졌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 왔다. 나는 이제 그들에게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데 단지 한 사람이면 족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말했다(볼테르가 살고 있던 집을 지금은 성서공회가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고 계심을 독자 제위들에게 지적하고 싶다). 인간의 의지(알미니안주의)를 강조했든지 아니면 인간 이성(계몽주의)을 강조했든지간에 이것이 바로 세속주의의 시작이었다. 자립적인 인간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 대신 진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이 진리의 자리에 들어섰다고 해서 종교가 완전히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였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도덕성과 정서를 제공하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에게 기도하든지간에, 아무튼 어린아이가 기도하는 것은 좋은 습관으로 인정되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그리이스 로마의 고전 문화를 모델로 삼으면서 기독교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힘을 빼는 방법을 모색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국가로서 태동하였다. 토마스 페인,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이성주의 사조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들도 반(反)기독교적 입장을 취했다. 만약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라는 호칭이 이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 사람들의 모델을 본따서 오늘날 기독교의 갱신을 기대할 수는 없다. 토마스 페인은 “내 자신의 이성이 바로 나의 교회다”라고 자랑했으며 또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나 정치 같은 인간 이성의 영역에 속해 있는 일들에 간섭하지 않고 사람들의 윤리성이나 시민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공공의 종교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는 볼테르가 주장했던 것과 일맥 상통한데 볼테르는 “우리가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위대한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연이라는 책이다. 종교라는 것은 다름아닌 자연 속에 있는 신을 경배하고 또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연처럼 이렇게 순결하고 영원히 계속되는 종교는 결코 우리 인간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계몽주의자들의 이러한 사상은 그 후 18세기 중엽에 와서 아메리카의 여론 주도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 후 윌리암 헨리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아무에게도 정복될 수 없는/ 나의 영혼으로 인해/ 신들에게 나는 감사하네/ 그 신들이 어떤 신들이든지간에 —/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네”
역사학 교수 윌리암 스위트는 말한다. “알미니안주의는 보통 사람들의 신학이 되었다. 그 이유는 알미니안주의가 보통 사람들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실제적이며 실용적인 사람으로서 교리적인 난해함과 철학적인 추상성을 싫어했다. 18세기 중엽 이후 계속해서 칼빈주의에 반대하는 일련의 운동이 미국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세력은 특별히 보스톤과 그 주변에서 주로 부유한 상인들과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 계층이 점차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점점 칼빈주의의 엄격한 교리에 대해 불편해 했다. 그들은 부를 쌓는데 성공하게 되자 쉼게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운명의 결정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변경을 개척하고 있는 개척 주민들에게도 똑같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 스위트, “구원 문제에서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칼빈주의적 주장은 현세적 구원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고 철저히 믿고 있는 변경 개척자들에게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 당시 칼빈주의 선교사들은 “다른 많은 교파는 전지역에 걸쳐 매우 활동적이었지만 칼빈주의적 기독교의 활동은 형편 없는 상태에 있다”는 보고를 했다.
알미니안주의의 설교와 이신론적인 설교는 그 차이점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프랭클린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케치프래이즈는 미국 독립전쟁을 고취하는 시기에 여러 곳의 교회 현수막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까지 포함해서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이 프랭클린의 이 슬로건이 성경에서 발췌한 말인 줄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알미니안주의와 이신론의 비교가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하며 계속적으로 의미가 있는가를 증거해 주고 있다.
계몽 사조와 함께 알미니안주의는 미국인의 새로운 정서에 잘 맞는 것이었다.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만 보더라도 알미니안주의의 주장은 민주주의적이었다. 즉, 알미니안주의는 자기 도성의 시민이 될 사람들을 혼자서 선택하는 독재적인 하나님을 제시하지 않고 자유 시민에 의해 피택되는 통치자인 하나님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든지 그렇지 않든지간에 누구나가 한 사람의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불신 세속 철학자인 마이클 해링톤은 “계몽주의는 전통적으로 우주 중심에 자리했던 하나님을 인간으로 대치하면서 동시에 우주를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정의했다”고 말했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계몽주의 사조에 뒤이어 “문화가 철저히 뿌리채 뽑히는 징조가 보였으며 종교의 물결은 점점 쇠퇴해 늪과 물이 교여 있는 웅덩이만 남기면서 사라져 가고, 국가들은 자기와 다른 나라를 파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적대 진영끼리 서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 세상이 이보다 더 세속적인 적이 없었으며 사랑과 선이 이처럼 궁핍한 시대가 과거에 없었다”고 말했다. 볼테르는 계몽주의 사조하에서는 종교적 교조주의나 종교 전쟁이나 다른 종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앙적 독선과 불관용 등은 이성주의(합리주의)에 의해서 일소되어 버릴 것을 예고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하나님의 계시 사이에 균형을 이루었던 초기 청교도주의에서와는 달리 계몽주의는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으며 설령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이 있었다하더라도 인간에게 끝없는 절망만 안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