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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해방전쟁을 도와>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 97(2008)) 본문 요약“림표 부대에 포병지원·수풍의 전기를 중국으로 보냈다”
글 : 윤홍석 극동문제연구소 동북아연구실장·정치학 박사
⊙ “김일성동지가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힐 군복 만들기 위해 황해도 면직물 총동원 내렸다”
⊙ “1946년 봄 진운이 모택동 주석의 부탁을 안고 평양을 방문했다. 위대한 수령께서는
10만여 정의 무기와 탄약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 “소련군 88여단장 주보중이 부하였던 김일성에게 군사전략 의지했다”고 주장
⊙ 김일성의 지원으로 중국 공산당이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장개석 국민당과 치른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
[편집자 주]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이 입수한 <중국 동북해방전쟁을 도와>는 크게 8부분으로 구성돼 있다(편의상 각 부분을 장으로 나눴다). 1945년 5월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까지 약 5년 동안 북한 김일정 정권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한 내역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강인덕 전 장관이 이사장으로 있는 (재)극동문제연구소와 〈월간조선〉은 이 책 내용 가운데, 지금까지 중국, 일본,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부분과 사료적으로 의미가 있는 부분을 요약 정리했다. 요약 내용은 이 책에 나와 있는 목차 순서와 맞춤법, 지명, 사람이름, 직책 등을 그대로 따랐다. 한글만으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단어는 한자를 넣었다.
■ 3장 《국가적 후방》의 역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동북해방전쟁 전기간 숭고한 의리로 중국인민에게 사심 없는 원조를 주시였다.
당시 우리 나라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그렇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중국인민이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하시며 국제주의적 의리를 다하여 성의껏 도와주시였다.
중국의 당과 정부의 지도간부들과 인민들이 오늘도 위대한 수령님을 잊지 못해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바로 그 당시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사심 없이 중국혁명을 도와주신 그 은공 때문이다.
조선주재 東北局 瓣事處
1946년 국민당군이 중장철도인 심양-장춘의 중요 간선을 점령한 후부터 동북의 식량과 석탄, 대련의 식료품과 피복, 의약품과 의료기구들, 공업원료들을 수송하지 못하게 되어 전선과 후방에는 매우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게 되였다.
이로부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동북국은 조선의 북부를 통하여 수륙수송통로를 개척하고 인원과 물자의 수송을 보장하며 물자교류를 진행하도록 해줄 것을 우리 나라에 제기해 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제의를 쾌히 수락하시고 해당한 실무적 문제들을 시급히 대결하시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측과 중국공산당측이 판사기구를 통하여 려러가지 방법을 적절히 배합해 가면서 내적으로는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라고 하고 외적으로는 《평양리민공사》라는 명칭으로 중국의 동북해방작전에서 제기되는 려러 가지 물자수송과 인원수송, 물자교류를 진행하는 상설기관을 내오게 하시였다.
판사처의 중요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1) 부상병들의 안전한 철수보장, 안전하게 전략물자의 이전 보관, 2) 조선이 외랑으로서 동북지구의 남북만의 련결, 대련과 기타 근거지의 물자 교류, 인원들의 국경넘어 수송보장, 3) 조선으로부터의 지원과 전략물자의 구매, 4) 조중 당과 인민의 우호합작관계의 발전, 경제무역거래보장, 5) 조선과 협동하여 화교들과의 사업진행.(《료심결전》<상>(중문), 인민출판사, 1988년, 627~630페지)
판사처는 1946년 7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존재하면서 자기 사업을 진행하였다.
판사처는 이외에도 중국혁명가들의 전권대표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물론 중국에 인민의 새 정권이 탄생하기전이여서 정식 국가간의 관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무런 타산이나 부대조건도 없이 또 외교관계나 원칙도 앞세우지 않고 판사처를 정식 국가대표부 못지않게 존엄있게 대해 주시였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동지들에게 중국의 사정이자 곧 우리의 사정이라고 하시며 진심으로 동북해방전쟁을 지원하시였다.
바로 그러하였기 때문에 판사처가 자기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여 동북해방전쟁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는 그후 조선주재 중국대사관으로 승격되였다.
필요한 무기도 서슴없이
김일성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던 진운(왼쪽). 오른쪽은 등소평. |
주체35(1946)년 봄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중국의 모택동 주석의 부탁을 안고 평양에 찾아온 진운(陳雲)을 접견하시였다.
당시 진운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시 진운과 담화하시던 일을 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때 그는 나에게 상해에 있는 자기네 사람들을 배에 태워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보내겠으니 그들을 상륙시켜 동북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것과 자기네 군대가 지금 동북지방에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 무기를 좀 달라는 것을 비롯하여 려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진운이 모택동 주석의 이름으로 제기한 문제들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기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였다. 무기문제는 우리 나라에서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렇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택동 주석의 어려운 처지를 자신이 처한 처지로 생각하시였고 모택동 주석 또한 자기의 부탁을 우리 수령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시리라 믿어 마지 않았던 것이다.
진운이 떠나간 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당부분의 일군들을 부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당부분 일군들에게 지금 중국혁명이 큰 시련을 겪고 있는데 우리는 국제주의전사로서 이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다, 그래서 자신께서는 중국에 무상원조를 주기로 하였다고 하시고는 병기창고에 있는 일제침략군들에게서 로획한 무기와 탄약의 보관정형을 료해(이해하다-편집자주)하시고 10만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장장비를 중국에 주자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당시 중국혁명을 진심으로 도와주시였다고 하시면서 조선인민군 지휘구성원들에게 《중국공산당에서는 그때 수령님께 무기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도 무기가 매우 귀한 때였지만 오백룡 동지에게 과업을 주어 일제침략군에서 빼앗은 10만여 정의 무기와 탄약을 동북민주련군에 넘겨주도록 하시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수령님께서는 국제주의에 매우 충실하시였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무기를 보내 주시였는데 그때마다 북조선 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의 명함으로 화물들을 조사하지 말고 무사히 통과시킬 것을 지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 다음에는 지금 중국국방부 부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소경광이 와서 포와 그밖에 무기를 또 요구하였습니다. 그때도 원조를 주었습니다. 지금 란주부대 제1정치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소화가 와서 무기들을 가져갔습니다.》
림표 부대에 포병연대 지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가 중국의 혁명가들에게 포병련대를 보내준 데 대하여 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였다.
《우리 나라가 해방된 다음에도 중국공산당이 장개석 군대와 계속 국내전쟁을 하기 때문에 일본놈들에게서 빼앗은 포를 가지고 포병련대를 하나 조직하여 중국에 들여보냈는데 그 포병련대가 장개석 군대를 답새기면서 해남도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그때 우리 포병련대가 아니였더라면 림표(林彪) 부대는 다 전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포병련대가 중국 해남도까지 밀고 나갔다는 소식이 일본잡지에도 났던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해방 직후 일본놈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들을 다 중국에 보내주었습니다.》
주은래 총리는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종장에까지 찾아가 그곳 로동자들 앞에서 지난 시기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을 지원해준 데 대하여 진심으로 되는 사의를 표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중국 동북해방전쟁에 무기와 인원을 보내준 데 대하여 적측에서도 알고 아연실색해하였다.
주체36(1947)년 7월 23일부 《로동신문》은 장개석군의 장령, 두률명이 외국기자들과의 회견 시 동북민주련군이 북조선으로부터 무기와 인원의 원조를 받고 있다고 불평을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중국혁명의 비밀통로
연안 시절의 임표(왼쪽)와 모택동. |
한때 동북해방전쟁에서 관내와 동북, 남만과 북만 사이의 통로가 장개석 국민당군대에 의하여 다 막혀 버린 때가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주보중(周保中·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제88국제여단 지휘관 출신-편집자주)은 반변부대(유격부대-편집자주)를 구원할 방도를 협의하기 위해 대표들을 연방 우리 나라에 보냈습니다. 왕일지(王一知·주보중의 아내-편집자주)도 그 대표의 한 사람으로 라남(함경북도 국경에 있는 도시-편집자주)에 왔다 갔습니다. 그 후 우리는 반변부대가 우리 나라 령토를 거쳐 동부만주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권, 263페지)
강환주는 라남에 가서 강건 동지를 만나 구원을 요청하고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려 하였다. 강환주와 왕일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강건동지의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184사(장개석 군대 가운데 184사단. 사단장이었던 번삭단이 장개석에게 반란을 일으켰다-편집자주)를 위하여 우리 나라 대문을 열어 놓으신 뒤였다.
184사는 그 후 렬차로 매우 빨리 남양에 도착하였고 남양-도문다리를 거쳐 길료해방지구에 가서 주보중 등 군구 지도자들과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다시 장개석을 반대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를 동북해방전쟁에서 중국의 후방기지로 리용하도록 하시였다. 후방도 전선이다. 전쟁에서 후방이 없으면 전방도 있을 수 없다.
1946년 10월말 장개석 군민당군대의 공격에 의하여 단동이 함락되였을 때 많은 인원들이 신의주로 피신하였는데 미군정보고서에 의하면 그 인원은 1만~2만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때 주보중은 방금 조선에서 돌아온 안해(아내) 왕일지를 다시 평양으로 보내여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가 동북국의 명의로 위대한 수령님께 남만에서 철수하는 군대와 전략물자들을 우리 나라에 소개시켜 줄 것을 부탁하도록 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때를 회고하시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왕일지는 주보중을 대신하여 동북해방작전을 려러모로 도와준데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는 인사부터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에 2만여 명의 부상병들과 가족, 후방인원, 2만여t의 전략물자를 안전한 곳으로 소개시키자면 아무래도 또 조선땅을 빌려야 할것 같은데 김장군의 도움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즉시 해당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왕일지는 전체 동북민중이 김장군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거듭 사의를 표하였습니다.》(《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권, 263페지)
▣ 강건(강신태) |
200t의 폭약, 200t의 염산, 100t의 류산동, 15만 켤레의 신발을 구입
1946년 8월 27일 김일성이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보유하고 있는 ‘광목’ 전부를 수집하여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로 보내라고 편지를 썼다. |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주체36(1947)년의 첫 7개월 동안 우리 나라에서 운반한 전략물자는 21만여t이였고 주체37(1948)년 한해 동안 우리 나라 경내를 통하여 수송한 전략물자가 30만900t에 달하였다. 인원은 주체 35(1946)년 하반년에 18개의 부대가 우리 나라 경내를 통과했다. 주체36(1947)년 9개월간 우리 나라 경내를 통과하여 동북근거지에 들어간 인원수는 1만여 명에 달하였다. 주체37(1948)년에 남양을 경유한 인원만도 8685명이였으며 기타는 우리 나라의 다른 지역을 통과했다.
사업상의 관계로 우리 나라를 경유한 중국공산당 간부들로는 주보중, 진운, 소화, 주서, 리부춘, 류아루, 장애루, 장애평, 한선초, 우약목, 채양, 리립삼, 오수권, 등대원, 한광, 구양흠, 두평, 리일맹, 려동, 하장공 등 수없이 많다.(《료심결전》<상>(중문), 인민출판사, 1988년, 628페지)
중국 동북해방전쟁시기에 중국공산당군대에 지원한 2000여 화차분의 물자들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버리고 간 물자들이였는데 이것들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상으로 또는 일부는 물자교환의 방법으로 넘겨주도록 하시였다. 대치하거나 교환한 물자중에는 주체35(1946년) 산동성에서 판사처에 이진을 보내여 구입해 간 200t의 폭약, 200t의 염산, 100t의 류산동, 15만컬레의 신발을 구입해 갔다.(《포연천리》(중문), 료녕민족출판사, 1997년, 279페지, 《중국 조선족력사연구론총》<2>(중문), 연변대학출판사, 1992년, 53~57페지)
이러한 물자들은 남포에서 배로 대련에 수송한 다음 산동까지 보내였는데 산동 및 화동해방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주보중은 당시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면서 1946년 여름부터 1948년까지 2년 반 동안에 우리 나라에 보내온 지원물자가 2000여 차량에 달한다. 그때의 형편에서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해방전쟁에 돌려주신 김일성동지를 위시로 한 조선인민의 사심 없는 국제주의적 지원에 대하여 중국인민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우의의 장정》(조문),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년, 90페지, 《포연천리》(중문), 료녕민족출판사, 1997년, 280페지)
군복과 신발까지
군대에 있어서 군복과 신발 역시 중요한 것이다. 동북해방전쟁시기 중국공산당군대에서는 군복과 신발문제가 크게 걱정거리로 된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 문제를 풀어 주시였다.
주체35(1946)년 3월 25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시 길동분구사령부에서 군복문제 때문에 조국에 온 정두환을 접견하시였다.
정두환은 길동분구의 사령원과 정치주임이 련명으로 수표한 청원편지를 위대한 수령님께 드리고 나서 군복천을 해결하려고 우리 나라 여러 곳을 다녀 보았으나 해결하지 못하였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방직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여 집들에서 베를 짜거나 무명나이를 해서 옷을 만들어 입는 형편이었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많은 량의 군복천과 군복을 시급히 해결하기 위하여 공장과 기관, 개인소유의 면직물들을 수집할데 대한 지령들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의 명함으로 하달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4월 26일에 하달하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지령 제50호 《면직물 일체(광목, 무명 등등) 수집회송에 관한 건》에서 황해도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황해도의 모든 면직물을 수입하여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만포진 사무소로 보낼 것을 지시하시였으며 주체35(1946)년 4월 27일에 하달하신 지령 제51호 《면직물통제를 강화하여 만포진 무역소에 수송함에 관하여》에서는 평안북도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신의주 등지에서 생산되는 모든 면제품을 수입하여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만포진 무역소에 수송할 것을 지시하시였으며 주체35(1946)년 8월 17일의 지령 제141호 《광목이양에 관한 건》에서 평안북도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신의주의 공장들에서 보유하고 있는 모든 광목천들을 수입하여 평양으로 수송할 데 대하여 지시하시였다.
그가 군복천과 군복, 의약품을 가지고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환성을 울리며 기뻐하였다.
분구사령부에서는 공급부 부부장의 귀환보고를 감동 속에 청취하였다.
1945년말에 27만4000여 명이던 동북민주련군이 다음 해 말에는 36만명, 그 다음 해 여름에는 51만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신발이 부족하여 일부 전투원들은 맨발로 가시덤불을 헤쳤고 자갈밭을 행군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주보중은 신발문제를 풀기 위하여 1947년 여름 또다시 자기의 안해 왕일지를 우리 나라에 보내였다.
이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왕일지를 접견해 주시고 그가 요구하는 신발문제를 쾌히 풀어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때를 회고하시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모든 신발공장들에서 다른 신발생산은 다 중지하고 중국의 전우들에게 보낼 신발만 생산할데 대한 긴급지령을 내렸습니다.》(《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권, 284~265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발뿐 아니라 싸우는 전우들의 식량을 걱정하시여 우리 나라 평안북도에서 생산한 쌀을 동북지방에 보내 주시였고 다량의 의약품과 생활필수품도 무상으로 제공해 주시였다.
(남만에 있는) 리홍광지대에 평안북도 청년들이 많이 입대하여 활동하고 있던 1946년 겨울 몽강일대에서는 소금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제기되였다. 리홍광지대에서는 소금문제를 해결하려고 두 사람을 압록강을 건너서 우리 나라에 보내였다. 며칠 후 이들은 자동차 10대에 소금과 신에 댈 고무재료를 싣고 부대로 돌아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금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자 즉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였던 것이다. 해방직후 새 조국건설을 위해 사방에서 요구하는 것이 전기였지만 싸우는 동북전선을 도와주기 위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수풍발전소의 전기를 중국에 보내주시였다.
■ 5장 위기타개의 방략
1946년 5월 쏘련군대가 중국 동북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장개석은 이 기회에 어떻게 해서라도 전 동북을 타고 앉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22개 사단을 동북에 투입하여 주요도시들과 군사요충지들을 거머쥐였으며 공산당군대가 손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6월 29일 국민당군대의 중원해방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로 전면적인 제3차 국내혁명전쟁의 막이 열렸다….
이 위기를 타개하도록 도와주시고 동북해방전쟁이 승리하도록 지원하여 주신 분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이시였다.
소화 사령원의 요청
소화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받은 긴급지시에 따라 1945년 9월 바다를 건너 동북으로 진군하여 9월말에 심양 동북국에 도착하였다. 소화는 중앙에 보고한 후 부대를 단동지구에 배치하였다.
1945년 11월에 들어서면서 장개석 국민당군이 단동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소화에게는 조성된 어려운 난관을 타개할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 장개석 국민당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밑에 중국 동북지방을 일격에 타고 앉아 보려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중국 공산당군대는 8·15직후 차지하고 있던 단동시를 비롯한 압록강연안의 넓은 지역과 중요 대도시들과 철도연선지대를 내놓고 일시 농촌산간지대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부대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급한 시각에 소화는 위대한 수령님께 방조를 요청하였다.
그 요청이란 밤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단동으로 건너오시여 위기에 직면한 료녕군구의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고견을 주실 것을 바란다는 것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당시를 회고하시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가 나라를 해방한 해는 1945년 겨울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단동에서 소화가 나에게 사람을 보내여 왔습니다. 그는 국민당군대가 곧 단동으로 다시 공격하여 오게 되어 단동을 해방한 자기 부대는 철수한다고 하면서 당장 나를 만날 것을 제기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의주에서 밤에 승용차를 타고 단동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날은 주체34(1945)년 11월 29일이였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온 적지 않은 팔로군 부대들은 아직 유격투쟁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군사작전과 행동에서 일치성도 보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지방에 분산적으로 주둔하고 있으면서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들을 사수하는 데만 급급하였고 국민당군대의 대규모적인 군사적 공세에 대처하기 위한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리지 못하고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료해하시고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그때 단동주둔 팔로군 부대 지휘관들을 만나 적들의 대규모적인 공세와 각개격파 전술앞에서 지역사수에만 매여달리는 것은 결국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의 형편에서는 적극적인 대선회 작전과 포위전으로 심양, 장춘을 비롯한 중요도시들과 철도연선에 집결되여 있는 적들의 병력을 분산 약화시키며 적들을 한 지역씩 단계별로 섬멸해 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전략 전술적 방안을 내놓으시였다.
첫째로, 무모한 정면충돌을 피하고 도시들을 내주어 적들의 력량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그 대신 농촌에 강력한 근거지를 꾸려야 한다.
둘째로, 군대 내에서와 인민들 속에서 정치사업을 활발히 벌려 승리의 신심을 읽지 않고 계급적 원쑤들을 반대하여 끝까지 투쟁하도록 하여야 한다.
셋째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꾸려진 해방지구를 끝까지 고수하면서 적후에서 대부대기동전과 유격전을 광범히 전개하여 끊임없는 소탕전으로 적들의 력량을 극도로 약화시켜야 한다.
넷째로, 해방지구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하며 군민관계를 옳게 유지함으로써 인민들로 하여금 장개석 국민당군에 식량과 물자를 내주지 말며 팔로군을 성심성의로 원호해 나서도록 하여야 한다.
그 사실의 주인공인 소화 사령원은 우리 나라에 친선참관단 단장으로 왔을 때(1979.9)에도 그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김일성동지께서 조선은 중국의 믿음직한 후방이다, 중국혁명을 성심성의로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신데서 큰 힘을 얻어 싸워 승리하였다.》고 말하였다.
주보중을 만나시고
주체 35(1946)년 3월 28일이였다. 두만강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의 북단 남양에 찬란한 해빛이 비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여기에 오시였던 것이다.
장개석이 동북을 차지할 야심 밑에 여기에 들이민 국민당대군이 길림, 교하를 거쳐 돈화와 연변지구에로 물밀 듯이 쓸어 들어오며 해방지역까지 위협하였다.
주보중은 당시 중국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원, 길료군구 사령원으로서 이 정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이런 때 주보중의 심중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고견을 받아야만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불같이 떠올랐다.
마침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혁명을 돕기 위하여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되여 있던 강건동지와 박락권의 사업을 료해하고 급변하고 있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방도를 밝혀 주시려고 그들을 남양으로 부르시였다. 주보중은 급기야 강건동지와 박락권과 함께 남양으로 가기로 하였다.
주보중은 중국혁명이 처한 위기를 타개할 출로를 열어 주시고 전국을 역전시킬 방략을 제시해 주실 것을 바라며 위대한 수령님께 동북의 군사정치정세와 난관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선 할바령을 중심으로 한 로야령 산줄기와 송화강계선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그에 의거하여 적의 침공을 결정적으로 좌절시킴으로써 이미 혁명의 보루로 꾸려 놓은 해방지역을 보위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시면서 주보중에게 모택동동지의 특사로 진운이 찾아와 무기를 요구하였는데 이제 곧 보내주겠으니 무기걱정은 하지 말라, 앞으로도 자신과 조선인민은 중국 동북혁명에 최대의 지원을 줄 것이라고 강조하시였다.
주보중은 항일의 그날처럼 동북해방전쟁의 시기에도 사심 없는 지원을 주시고 고견을 주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자신과 중국인민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리였다.
▣ 周保中과 金日成의 관계 193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김일성은 중국유격대에서 활동하던 중 ‘민생단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첩자로 몰리게 되는데, 이때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사령관이었던 주보중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 오히려 상급자로 올라가는 계기가 된다. 1939년 들어 일제가 대규모(7만5000명) 토벌단을 조직하여 유격대를 색출, 처벌하자 1940년 8월 김일성은 소련 원동지구로 들어가 88여단에 들어간다. 이때 88여단장이 은인이었던 주보중. 여기에서 김일성은 제1대대장을 하다가 광복 이후 귀국하게 된다. |
제1차 장춘 해방전투
일제가 패망한 직후 동북의 대도시들을 중국공산당군대가 차지하였으나 《중쏘우호동맹조약》에 따라 도시들을 내놓는 바람에 1946년 1월 장춘도 장개석에게 넘겨주게 되였다.
장개석 군대는 심양-장춘간 철도를 따라 철령, 사평계선으로 계속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이것을 막아 보려고 중국공산당군대가 사평계선에서 필사적으로 버티였으나 아군은 8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적들의 포위에 들게 되였다.
공산당군대는 좁은 포위망 안에서 군수물자도 받지 못하고 탄약과 식량도 떨어져 날이 갈수록 더욱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바로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체35(1946)년 3월 28일 남양에서 강건동지와 박락권을 만나시였을 때 동북민주련군을 도와 장춘해방전투를 조직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북에 파견되여 있는 강건동지와 박락권동지들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장춘 해방작전을 벌려 사평계선에서 포위되여 위급한 처지에 있는 중국공산당부대들의 퇴로를 열어 주라고 교시하시였다.
장춘해방전투에는 길동분구사령부 산하 박락권이 인솔하는 1련대와 포련대를 비롯한 2만여 명의 조선인사단이 동북민주련군부대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전투는 1946년 4월 14일에 시작되였다. 먼저 장춘시 교외에 널려 있는 적들을 섬멸하였다.
다음 날 아침 6시부터 장춘시내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박락권이 지휘하는 1련대(조선인부대)는 법정대학과 공업대학을 점령한 후 적들이 장춘을 고수하는 남단의 가장 중요한 방어거점인 대륙과학원을 점령하였다. 밤 9시, 협화회중앙훈련소 건물과 만주광산 주택구역은 드디어 박락권 련대에 의하여 완전히 점령되었고, 적들이 주력이라고 떠드는 《철석부대》도 완전히 녹아났다.
박락권 련대와 동북민주련군부대들이 3일 간의 맹공격으로 시내의 1/3을 점령하자 바빠맞은(몹시 급한 상황을 맞은-편집자주) 적들은 담판을 제기해왔다. 박락권 련대장은 담판을 거절하고 무조건 항복하라고 들이댔다….
박락권 련대는 적의 증원부대를 견제하고 있던 최광동지가 지휘하는 부대의 후원 밑에 련속적으로 도시중심부로 전과를 확대하여 적들의 총지휘부가 도사리고 있던 중앙은행청사를 비롯한 주요기관들을 점거하여 장춘 전투 승리의 돌파구를 열어 놓았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훌륭한 군사지휘관이였던 박락권 련대장(29세)이 대오의 앞장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박격포단의 파편을 여러 군데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조중련합부대의 용감한 투쟁으로 하여 총공격을 개시한지 5일만에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이 위수사령으로 들어 앉아있던 장춘은 완전히 해방되였다. 장춘이 해방됨으로써 사평계선에서 포위되였던 중국공산당군대의 퇴로가 열리게 되었고 동북해방전쟁 승리의 전망이 열리게 되였다.
▣ 동북민주련군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 대비해 만든 동북인민자치군. 1946년 1월 동북민주련군으로 개칭하고 1948년 1월 1일 동북인민해방군으로 다시 개칭. 참고로, 김일성이 참여한 부대이름은 ‘동북항일연군’(조·중연합 유격대). |
휘남현성전투
1946년 10월 19일 동북 국민당군은 …남만근거지에 병력을 집중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일거에 남만부대를 소멸한 후에 전체 병력이 북으로 공격하여 전 동북을 독차지할 야망을 실현하려고 기도하였다.
이 전략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민당군은 9개 사단 약 10만명의 병력을 집중하여 세 개 방향으로 남만해방구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동북해방전쟁대사기》(중문), 중국당사자료출판사, 1987년, 86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때에도 조선인부대들이 백두산지구와 로야령 산줄기의 대산림 지대에 의거하여 유격전과 산악전, 동기대부대 기동작전을 벌려 적들을 숨 쉴새 없이 수세에 몰아넣으며 송화강 이남에 진출하여 적의 집단을 타격 소멸함으로써 남만일대에 집중되여 있는 적의 력량을 분산약화시키라고 가르쳐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에 의하여 리홍광 지대가 동북민주련군과 함께 진행한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가 휘남현성 전투이다….
1947년 2월말에 남만의 리홍광 지대는 중국동지들과 함께 휘남현성 주변마을에 박아놓은 국민당군 소부대들을 섬멸하고 휘남현성을 포위하였으며 …이때 대대장은 불을 뿜는 중기관총들을 까부실 데 대한 명령을 조성두에게 주었다. 조성두는 지뢰 3개를 몸에 지니고 적 중기가 있는 고지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적들의 기관총사격이 그에게로 집중되였다.
조성두는 부상당한 다리를 끌고 한치 또 한치 피를 흘리면서 기고 또 기여 갔다. 그는 적의 기관총구 앞에까지 다가가 화점에 지뢰를 던져 넣으며 방화선을 당겼다. 조성두는 이렇게 생을 마쳤고 영웅으로 되였다. 조성두는 이 전투에서 승리의 길을 열어놓은 첫 육탄영웅으로서 그후 동북해방전쟁에서 폭파수의 본보기로 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2살이였다.
■ 6장 동북해방의 승전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동북해방전쟁의 전 기간뿐 아니라 중국혁명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수시로 조선인부대들과 동북민주련군(후에는 동북인민해방군)의 지휘원들과 련계를 가지시고 그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시고 전화로 전선상태를 알아보기도 하시며 해당한 대책들도 취해 주시고 조언도 주시곤 하시였다….
바로잡혀진 《정풍운동》
한편 동북지구 해방지역들에서는 극좌적인 《정풍운동》을 바로잡기 위한 된바람이 불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주보중을 위대한 수령님께 보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하시려고 친히 남양까지 가시여 마중하시였다…. 주체36(1947)년 3월 26일 주보중은 도문에서 남양교두(남양 다리-편집자주)로 넘어와 위대한 수령님과 상봉하였다.
주보중은 현재 연변을 비롯한 동북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였다. 나중에 주보중은 현 사태를 수습하고 동북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키워 오신 항일투사를 연변지구에 보내주실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주보중의 의견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요구였다. 당시 동북국사업에 관여한 류소기도 위대한 수령님께 조선의 투사를 연변지구에 보내주실 것을 간청하여 명주천에 쓴 친서를 정중히 보내여 왔다.
우리 나라에서도 간부가 부족한 때였지만 우리 수령님께서는 서슴없이 자신께서 아끼시던 간부를 보내시였던 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림춘추동지가 동북에로 떠나기에 앞서 중요한 교시를 주었다.
림춘추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당시 길림성 기관들이 소개되여 있던 연길에 가서 주보중과 성당서기를 만나 협의한 후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성당의 요청으로 초기 성정부 민족사무청장의 직무를 맡고 사업하면서 먼저 조선인 고급간부반의 《정풍》을 책임지고 편향없이 진행되게 이끌었다.
얼마 후인 1948년 3월 27일 림춘추동지는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중국공산당 연변지구위원회 부서기를 겸임하게 되였다. 1949년 봄부터는 연변 각지 농촌과 향마다 소학교, 중학교가 문을 열게 하는 사업도 조직지휘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연변당정간부학교를 세우고 림춘추동지 자신이 교장을 겸임하면서 기층간부 양성사업에 힘썼다.
사평해방전투
사평시는 장개석 국민당군이 동북에 기여들어 저들의 사령부를 설치하고 있던 심양과 장춘, 해룡과 정가툰을 련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동북민주련군의 사평해방을 위하여 림표가 사령원으로 파견되였으며 사평 포위전에 30여만 명의 병력이 투입되였다. 당시 1종대, 12종대, 20종대 등 30여만 명의 병력 가운데는 조선사람이 절반 이상이나 되였다.
처음에 림표는 1947년초 동북민주련군의 중국인부대만으로 사평에 대한 공격을 2차에 걸쳐 진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1947년 6월에 조선인부대들과 함께 다시 공격하여 사평시의 2/3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장개석 국민당군대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무려 10개월이나 계속되는 속에 아군도 손실을 많이 입었다.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전화로 사평전투의 실태를 상세히 보고 받으시고 조선인부대의 지휘관에게 동북에 있는 전체 조선인부대들과 인민들을 총동원하여 적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집중적인 공격을 들이대여 사평 해방전투를 빨리 결속하도록 대책을 위해주셨다.
드디여 1948년 3월 최후공격전이 개시되였다. 사평전투에서 모든 전투원들이 다 잘 싸웠지만 특히 조선인대원들이 대오의 앞장에 서서 불굴의 투쟁정신과 높은 희생성을 발휘하여 전투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가운데는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 보낸 《황색폭약》을 안고 육탄이 되어 적의 화구를 막아 부대의 진격로를 연 김형두도 있었다. 김형두는 조성두에 이어 동북해방전쟁에서 배출된 두 번째 육탄영웅이다.
총공격을 개시한 지 4일 만에 적71군 군장이 도망치고 사평은 3월 13일에 완전히 해방되였다. 사평전투에서 승리한 후 당시 동북인민해방군 총사령원은 사평전투를 승리로 결속하도록 고견을 주시고 아낌없는 지원을 주신 위대한 수령님께 감사의 표시로 높은 신뢰와 존경을 담아 좁쌀 10만t과 흥안령산 수달피로 만든 외투와 사자털 돗자리를 선물로 드리였다.
지하 땅굴에 차려진 중공군 사령부를 방문한 북한의 김일성(가운데). 사령부 입구에서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양측 부장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금주해방전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동북해방전쟁의 전국을 내다보시고 제2차 장춘해방전투를 결속하기 전에 금주부터 해방시킬 데 대한 작전안을 내놓으셨다.
금주는 동북지방에서 중국관내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금주를 동북인민해방군이 장악하면 동북에 들어와 있는 장개석 국민당군대는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게 된다.(1948년 1월부터 동북민주련군을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니 금주를 해방시키면 국민당군대의 증원과 보급로를 끊어 놓기 때문에 동북해방작전을 승리로 종결하는 데서 큰 의의를 가지였다. 또한 금주를 해방하면 장춘은 완전포위에 들어가게 될 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사평전투에서 승리한 그 기세로 일격에 금주해방전투를 벌릴 데 대한 방안을 내놓으시였던 것이다.
네거리마다 영구화점을 만들어 놓고 쉴새 없이 기관총을 쏘아대고 포탄을 퍼부어대는 적들을 7종대 직속 지병학이 지휘하는 조선인포병대대가 보기 좋게 까부시기 시작하였다.
10월 14일부터 시작한 금주전투는 31시간 만에 아군의 승리로 결속되였다.
제2차 장춘해방전투
1946년 봄에 있은 장춘해방전투후 《중쏘우호동맹조약》에 의하여 국민당군에 다시 장춘을 내준 동북인민해방군은 1948년 4월부터 또다시 장춘을 포위하고 해방전투를 시작하였다.
그 기간에 사평과 금주를 해방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장춘 시내에 있는 국민당군은 완전포위에 들게 되였다. 당시 장개석 군대는 이미 저들이 차지하고 있던 동북의 주요도시들을 거의 다 빼았겼으므로 장춘만은 끝까지 고수하려고 더욱 발악하였다.
동북인민해방군 사령부에서는 련일 작전회의를 하였으나 전투에 진입할 엄두를 쉽사리 내지 못하고 있었다. 동북인민해방군에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알려드리고 고견을 요청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해 주신 한 개 포병련대의 도착은 장춘해방전투에 참가한 전체 대원들과 지휘원들의 사기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동북인민해방군에서는 조선사람들을 동원하여 적들에 들어가 적군을 랍치하고 적 60군을 끌어당기기 위한 공작을 맹렬히 벌리였다.
당시 길동지구에서 조직된 독립6사는 장춘의 동쪽계산을 포위하고 독립4사는 서남계선을 차지하였으며 독립11사 1련대는 독립4사와 6사 사이를 차지하고 독립11사의 2련대와 3련대, 37사는 장춘 북쪽의 비행장을 장악함으로써 장춘은 4면으로 3중포위망에 들게 되였다.
독립6사 3련대 파괴조장 리기춘은 조원 5명을 데리고 적의 화점 12개를 련속 까부시였다. 그러다 마지막 화점에 가서 그는 적들에게 발각되여 가슴에 폭약을 안은 채 적의 화점입구를 몸으로 막아 폭파시키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리기춘은 동북해방전쟁에서 세 번째의 육탄용사로 되였다.(조성두, 김형투, 리기춘 세 사람은 모두 육탄용사로 되어 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막다른 처지에 빠진 동북지구 국민당군 부총사령관 정동국은 하는 수 없이 부대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1948년 10월 19일 제2차 장춘해방전투는 승리적으로 결속되고 장춘시는 해방되였다.
장춘해방전투를 지휘하였던 소경광은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사람들이 지금까지의 모든 동북해방전쟁 때와 특히 장춘해방전투에서 중국 력사에 영원히 빛날 커다란 위훈을 세웠다.》
흑산, 대호산전투
금주가 함락되고 장춘이 해방된 후 금서, 호로도에서 장개석 군대가 동북인민해방군의 된 타격을 받자 심양에서 금주에 원군으로 나왔던 료요 상병단은 당황하여 북평선을 따라 관내로 통하는 길을 열고 화북으로 퇴각하려고 하였다.
흑산과 대호산은 료요상 병단이 륙로로 혹은 바다로 빠져나갈 수 있는 요충지였다. 금주를 거치면 륙지로, 영구를 거치면 바다로 도망칠 수 있는데 흑산, 대호산이 앞에 가로놓여 있어서 그것을 통과해야만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때 동북인민해방군 지휘부에서는 금주전투에 참가하였던 주력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3일간 료요상병단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흑산, 대호산을 지킬 데 대한 명령을 제10종대(28사, 29사, 30사)에 하달하였다. 제10종대도 조선사람들이 집중된 부대였다.
특히 동북인민해방군의 28사 84련대 2대대(조선인대대)가 지키고 있는 101고지를 빼앗기 위해 적들은 모든 대포와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10시간 동안에 4개방면으로 5차례의 맹돌격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조선인부대용사들의 육박전과 완강한 방어에 부딪쳐 실패를 거듭하였다.
동북인민해방군 28사지휘부에서는 밤을 리용하여 적지휘부를 습격할 임무를 조선인부대에 하달하였다. 101고지를 방어하던 조선인부대는 탄약도 식량도 떨어졌지만 끝까지 결사전을 벌리였다.
전투원들은 3일간 이 고지를 영웅적으로 사수하였다. 뒤이어 10종대와 금주해방전투에 참가했던 부대가 여기에 도착하였다. 아군은 25일 밤에 적들의 종심으로 공격하였다.
동북인민해방군부대는 5일간의 격전을 통하여 료요상병단의 5개군 12개 사단의 10여만 명을 섬멸하고 료심전역의 결정적 승리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동북인민해방군 총부에서는 흑산, 대호산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10종대를 크게 표창하였다. 28사 84련대 2대대 8중대(조선인부대)는 《강철8중대》란 칭호를 받았으며 전군에 그 이름이 소문났다.
심양해방전투
1949년 1월 북경에 입성하는 중공군. |
처음에 심양은 중국인부대들이 포위하고 있었는데 1948년 10월 30일 총공격을 개시하면서 조선인부대들이 주동이 되였다. 당시 심양에는 사방에서 쫓겨들어온 적군 30여만 병력이 공고한 방어진에 의거하여 반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진을 돌파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때 장춘해방전투에서 빛나는 공적을 세운 조선인부대인 독립4사와 37사(연길에서 조직된 부대)가 땅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달려와 순식간에 적 1500여 명을 살상하고 북쪽방어진을 돌파하였으며 비행장을 점령하고 수십대의 비행기를 로획하였다.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10월 30일 밤 적장교들은 비행기를 타고 달아나고 10여만 명은 아군에게 투항해 왔으며 일부 력량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심양이 해방된 다음 독립4사의 조선사람들은 심양 위수근무를 수행하다가 주체38(1949)년 7월에 조선에 나와 조선인민군 제6사에 편입되였다.
사평, 금주, 장춘, 심양해방전투에서만 하여도 무려 50여만 명의 적들이 살상, 포로되였다. 3년 만에 동북해방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 7장 지원은 전국해방의 날까지
심양을 해방한 후 중국인민해방군의 주력부대의 하나인 우리 조선사람들이 속한 제4야전군은 이어서 산해관을 해방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관내로 진격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1948년 11월부터 동북인민해방군은 이름을 바꾸어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으로 부르게 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내에서는 장강 이남으로 계속 진출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제기되였다. 중국해방에서 제4야전군이 핵심적인 주력부대의 하나이고 또 여기에서 조선사람들이 돌격대적 역할을 하고 있는 조건에서 조선인부대들이 중국혁명을 끝까지 도와주는 문제는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을 결속하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이런 데로부터 중국공산당에서는 이 사태를 놓고 토론하던 끝에 왕효명을 우리 나라에 파견하였다. 1949년 2월 왕효명은 우리 나라가 중국의 해방전쟁을 끝까지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평양에 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왕효명을 접견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혁명을 끝까지 도와주는 것은 조선의 변함없는 립장이라고 천명하시며 중국측의 요구를 쾌히 수락하시였다.
장강도하작전
제4야전군은 장강전선으로 떠났다. 조선인부대들은 두 개의 방향으로 남방진출을 진행하였다. 한 방향은 베이징을 포위하고 있던 제4야전군 13병단 47군에 속한 조선인부대의 진격로였고 다른 한 방향은 천진해방전투에 참가했던 43군 156사를 비롯한 15병단에 속했던 조선인부대들의 진격로였다. 그 외 38군, 40군, 44군, 49군에 속한 조선인부대들도 남방으로 진출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장강을 도하할 목적으로 수백만의 대군을 장강연안에 배치하고 도하준비를 다그치였다. 그런데 중국인민해방군에는 배도 없고 도하기재도 없었으므로 장강을 도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장강도하작전은 단풍전투로부터 시작되였다.
156사에서는 466련대로 하여금 단풍의 적을 불의에 습격하여 소멸하고 적들의 수중에 있는 선박들을 몽땅 탈취하게 하였다…. 또한 장강남안의 적들을 들이치고 300여 척의 각종 배들을 로획하여 제4야전군부대들의 장강도하를 신속히 보장하였다.
…제4야전군 44군 131사가 담당한 구역에서도 조선인전투원 60여 명이 나무배를 타고 노도 없이 손으로 물을 가르면서 장강을 도하하여 아군의 진격로를 개척하였으며… 제4야전군 13병단 47군의 139사, 140사, 141사에 속한 조선인부대들은 장강을 건넌 후 12병단과 함께 호남성 장사시를 반달형으로 포위하였다. 특히 두 병단의 조선인부대가 주동이 되어 모형, 헝양이남으로 진출한 결과 장사의 국민당군은 유일한 퇴각로가 차단당하게 되자 8월 4일에 1개 병단사령부와 3개 군단, 9개 사단, 3개 보안련대를 포함한 장사의 모든 적들은 해방군에 투항하였다.
이렇게 하여 호남성 장사시는 전투없이 평화적으로 해방되였다. 장사시를 해방한 47군의 조선인부대들은 사천성으로 진격하였다. 47군사령부에서는 139사의 조선인부대에 호남성 서부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은 대용현 소재지를 점령할 임무를 하달하였다. 139사의 조선인부대 전투원들은 대용현 소재지를 해방하였다.
대용전투후 139사, 140사, 141사의 조선인부대는 적들을 끊임없이 추격하여 흑수전투, 목근포전투, 목동장전투를 벌려 수천 명의 적을 소멸하고 사천성에 들어선 후 매일 50㎞씩 산길을 행군하면서 17차례의 대소 전투를 진행하였다. 그후 조선인부대들은 1949년 11월 30일에 중경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해남도해방전투
1949년 12월 광동성과 광서성이 해방되자 중국대륙은 기본적으로 해방되였다. 광동성과 광서성에서 살아남은 국민당 잔여분자들은 앞을 다투어 해남도로 도망쳐 갔다.
제4야전군 사령부에서는 해남도를 해방하기 위하여 제40군과 제43군에 전투임무를 하달하였다. 제40군에는 조선인 포병부대가 있었다. 처음에 이 포병부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하여 동북해방전쟁에 보내주신 련대였다.
이때는 대대로 재구성되였는데 광서성을 해방한 후 광주에 와서 제40군의 직속 포병대대로 되면서 150명씩 2개 중대로 되였다. 광동성 뢰주 반도에서 이 포병대대가 해남도를 해방하기 위한 작전에 참가하게 되였다. 포병대대의 임무는 목선을 타고 적비행기와 군함과 싸우면서 보병들이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 해남도에 상륙할수 있게 엄호하는 것이였다.
조선인 포병대대는 12척의 배에 설치한 36문의 각종 포로 일제히 불을 뿜어 적함선과 해안에 설치하였던 적의 방어시설을 하나하나 소멸하였다. 이어 보병을 태운 500여 척의 배들이 해안에 닿았다. 보병들은 조선인포병대대의 엄호밑에 륙지에 오르자 파죽지세로 국민당군을 공격하였다.
1950년 4월 30일 해남도는 해방되였다. 중국혁명은 드디여 승리하였다.
■ 8장 국제주의전사들의 귀국
중국혁명의 승리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고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에는 오성홍기가 펄펄 휘날렸다.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에서 커다란 공적을 쌓은 조선인부대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조국으로 나오게 되였다. 조선인부대들은 중국의 동북 목단강, 연변지방으로부터 3만여 리를 피로 물들이며 귀주성과 해남도에까지 나갔다가 1950년 2월초 귀주성 유주와 해남도를 떠나 2월 중순에 계림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조선사람들은 15사 3련대를 조직하였다.
이 부대는 계림을 출발하여 무창에서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너 한구를 거쳐 호북성 무한에 도착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조선인부대를 데려올 데 대한 교시를 받은 한 일군이 여기까지 마중나와 그들을 인솔하고 정주시로 갔다.
당시 특수한 전투과업을 수행하고 있던 조선인부대 지휘관들과 전투원들을 제외하고 제4야전군내의 전체 조선인부대 지휘관들과 전투원들은 다 정주시에 집결하였다. 그때 하남성 정주시에 집결한 조선인부대 인원은 3련대를 제외하고도 2만2200여 명이나 되였다.
3월 중순 어느날 정주시 광장에서는 조선인부대들로 독립15사를 조직하는 의식이 있었다. 독립15사에는 4개 포병련대, 공병대대, 통신대대, 반땅크대대, 경위중대, 야전병원이 있었으며 사단 정치부와 참모부, 공급부가 있었다.
지병학(항일혁명투사)이 사단 참모장 겸 포병련대장이였다. 대렬편성의식에서 지휘관들과 전사들에 대한 표창사업도 있었다. 이 의식에서 제4야전군 정치부주임 등자회는 조선인부대 지휘관들과 전사들이 이룩한 공훈을 높이 평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무들은 3년반의 해방전쟁에서 간고분투하고 영용히 싸운 모범이였고 옹정애민의 모범이였으며 3대규률, 8항주의를 준수한 모범이였습니다. 조선민족의 아들딸들인 동무들은 조선민족의 자랑이며 또한 우리 중화민족의 자랑입니다.》
그는 조선사람이 중국이 곤난할 때 피로써 중국인민을 도와준 것처럼 중국사람들도 앞으로 조선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지원병으로 나가 조선인민을 도울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는 모택동(가운데). |
중국 공산당 지원했던 조선인 부대는 북한으로 돌아온 후 곧장 6·25 전쟁에 참여
조선인부대 15사는 주체39(1950)년 4월 15일을 전후하며 하남성 정주에서 직행렬차를 타고 조국에 나와 조선인민군 제12사와 제7사로 편입되였다. 사천성 중경에 나갔던 47군의 조선인부대들은 주체39(1950)년 4월초 호남성 장사에 모였다가 호북성 무한을 걸쳐 하남성 정주시에서 독립 4련대로 구성되여 주체39(1950)년 4월 20일경에 조국에 돌아와 조선인민군 제4사 18련대로 편입되였다.
모택동 주석은 귀국하는 조선인부대에 각종 무기와 탄약 3정량과 해당한 군사장비를 보내주도록 지시하였다. 47군의 조선인 부대들은 주체39(1950)년 6월에 심양에서 그동안의 사업정형을 총화하고 6월 19일에 신의주를 거쳐 6월 20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온 지 5일 만에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났다. 전 중국을 해방하는 전쟁에서 단련된 조선인부대 지휘관들과 전사들은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조국해방전쟁에서 또다시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