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장]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입니다.
1 우스<변론> 땅에 욥<핍박 받는>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純(생실, 순수할 순)全(온전할 전)하고 正(바를 정)直(곧을 직)하여 하나님을 敬(공경할 경)畏(두려워할 외)하며 惡(악할 악)에서 떠난 者(사람 자)더라
1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우스 땅: 특정지역이 아니라 ‘의논하다.’ 혹은 ‘토론하다’ 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이사야서의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라는 말씀과 연결되는 의미를 지닙니다. 본 욥기가 그리스도와 선민들과의 영적 쟁변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4장] 18 그 怨(원망할 원)讐(원수 수) 에돔<붉은>은 그들의 産(낳을 산)業(업 업)이 되며 그 怨讐 세일<많은 털>도 그들의 産業이 되고 그 同(한 가지 동)時(때 시)에 이스라엘<하나님이 상대해 주신 자>은 勇(날쌜 용)敢(감히 감)히 行(갈 행)動(움직일 동)하리로다
➺ 세일: ‘털이 많은’ 의 뜻으로 ‘에서’ 와 같은 의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일의 후손들이 살던 세일 산에 호리족이 살았고, 그 후에 에서가 그곳에서 살았고,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이 그곳에 살았다고 전해지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인 의미는 본문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돔과 세일을 동의어로 쓴 곳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에돔 = 에서 = 우스 = 세일 = 장자의 명분을 버린 자 = 유대인 = 모든 멸절 당하는 세대의 공의를 관장하던 자가 됩니다. 이 우스 땅이 실제 성경 상으로는 그리스도가 오신 유대 땅이 되는 것입니다.
우스 땅이란 멸절된 선민의 땅이며, ‘어둠에 덮인 온 세상’ 을 뜻하는 것이고, 욥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를 뜻합니다. 시편 60장에는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변론의 승리로 십자가 사건이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60장] 8 모압<씨앗>은 내 沐(머리감을 목)浴(목욕할 욕)桶(통 통)이라 에돔<붉은>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진흙탕에서 뒹구는>아 나를 因(인할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9 누가 나를 이끌어 堅(굳을 견)固(굳을 고)한 城(고개, 재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붉은>에 引(끌 인)導(이끌 도)할꼬
➺ 신을 던진다: 세상에 왔다간 흔적인 이전 공의를 관장하던 자들을 멸했다 혹은 세상을 이겼다는 증거를 ‘세상에 속한 자’ 들에게 줘서 멸절의 증거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 그들의 멸망의 증거로 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다가 가시면서 벗은 신발이 곧 욥기입니다. 결국, 장자의 명분을 버린 선민들에게 와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그들에게 신을 던진 것이 되는 것입니다.
➺ 에돔에 인도할꼬: 이 말씀은 아가서 2장 4절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와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 견고한 성: 견고한 논리적 구조를 가진 구원의 논리,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달림으로 공의가 실현이 되며 완성되는 성령의 법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논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2 그 所(자리, 바 소)生(날 생)은 男(사내 남)子(아들 자)가 일곱이요 女(계집 여)子(아들 자)가 셋이며
2 그가 낳은 자식들은 남자가 일곱이며, 여자가 셋이었고
# 남자 일곱: 남자는 선민으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구원을 얻은 자들의 수입니다. 일곱 명이 아니라 선민 중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수’ 를 뜻합니다.
# 여자가 셋: 여자란 낳을 수 있는 자로 그리스도 이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선택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된 이방인들입니다. 셋인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 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이기에 셋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숫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복음서의 이해]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셋은 셋째 하늘이나 삼층, 노아의 세 아들 등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은혜의 수’ 입니다. 삼십 배가 그것이고, 요한계시록의 사방에 있는 세 개의 문이 그것입니다.
3 그 所(자리, 바 소)有(있을 유)物(만물 물)은 羊(양 양)이 七(칠)千(일천 천)이요 약대가 三(삼)千(일천 천)이요 소가 五(오)百(일백 백) 겨리요 암나귀가 五百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東(동녘 동)方(모 방) 사람 中(가운데 중)에 가장 큰 者(사람 자)라
3 그가 가지고 있던 소유물은 양 칠천, 낙타 삼천, 소 오백 겨리, 암나귀 오백에 종도 많이 두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입니다.
# 양이 칠천: 양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사람이고, 7은 ‘만민 중에’ 를 말하고, 천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의 완전함’ 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 약대 삼천: 이것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파하신 이후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받는 자의 수이며, 역시 꽉 찬 수로 표현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입고 왔던 옷이 약대 털옷입니다. 약대는 광야로 변한 악한 세상에서 생활하기 적합한 짐승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이후에 구원을 획득하게 되는 이들은 모두 부정한 가운데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므로 이 짐승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세상이 완전히 부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부정을 상징하는 누런 털옷을 세례 요한이 입고 있었다고 묘사된 것입니다.
# 소가 오백 겨리: 소는 일꾼을 상징합니다. 오백이란 죽음을 인지한 선민의 수입니다. 사도들도 이 오백 겨리의 소에 해당합니다. 5는 죽을 자이면서 하나님을 향한 자들의 수입니다. ‘선지생도 50인’ 도 그런 의미입니다. 백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가 씨를 뿌려 얻은 수이고, 또 이것이 일천이 안 되고 아직 오백인 것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나누어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 암나귀가 오백: 나귀는 이방인을 뜻하며, 암나귀라고 한 것은 ‘낳을 자’ 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이후의 제자들은 모두 낳아야 하는 소명이 있지만, 그리스도 이전에 선민들에게는 육신의 자식을 낳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낳음이 되었고, 그 낳음이 곧 선민으로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낳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후의 모든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를 통해 영이 사는 자를 낳아야 합니다. 그래서 암나귀란 그리스도 이후 죽을 수밖에 없던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살아난 이방인을 일컫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가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본 나라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을 위하여 보내지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 모든 사람, 즉 양, 나귀, 약대, 소는 모두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입니다. 십자가 이전에 공생애 기간 동안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게 된 모든 이들을 말합니다.
뒤편에서는 위의 것들을 모두 ‘배로 받는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그 배라는 것도 당연히 숫자를 말함이 아닙니다. 신구약을 통합하는 완전함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의 ‘실과를 지키는 자’ 가 ‘이백’ 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의 율법과 마음의 율법을 통하여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기 때문에 백배의 두 배인 이백이 되는 것입니다.
# 종도 많이: 사도를 포함한 제자들입니다.
# 동방 사람: 홍해를 가른 바람은 동풍입니다. 그리스도의 때와 노아 때와 출애굽 때가 같을 것이라고 복음서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해(말씀) 뜨는 곳이 동편이듯 말씀과 관련된 것이 오는 방향은 모두 동편에서 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아기 그리스도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동방박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방에서 가장 큰 자’ 란 말씀이 오는 방향에서 가장 큰 자인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4 그 아들들이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 生(날 생)日(해 일)이면 各(각각 각)各(각각 각) 自己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請(청할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4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 되면 각각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 생일엔 누이도 청한다: 누이라는 말은 ‘낳을 자’ 를 뜻하는 말입니다. 후반엔 이 누이들만 이름을 얻고, 또 딸임에도 유산을 상속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땅을 유업으로 받는 것을 뜻합니다. 누이도 청한다는 것은 이방인도 청한다는 말입니다. 이 생일은 그리스도로 인해 생긴 ‘산 자로 거듭난’ 생일입니다. 또한, 이들의 생일은 그리스도의 생일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생일이기도 합니다.
# 잔치를 베푼다: 마태복음의 비유 중에 잔치에 초대하는 내용을 뜻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이 곧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자가 된 선민의 아들들이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함께 먹고 마신다: 말씀에 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나보다 승한 자가 있으랴.” 많이 먹고 돼지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지혜의 말씀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다는 말입니다.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핍박 받는>이 그들을 불러다가 聖(성스러울 성)潔(깨끗할 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名(이름 명)數(셀 수)대로 燔(구울 번)祭(제사 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핍박 받는>이 말하기를 或(혹 혹)時(때 시) 내 아들들이 罪(허물 죄)를 犯(범할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背(등 배)叛(배반할 반)하였을까 함이라 욥<핍박 받는>의 行(갈 행)事(일 사)가 恒(항상 항)常(항상 상)이러하였더라
5 그리고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이 그와 같이 한 것은 혹시 자기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항상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 잔칫날이 지나면: 생일을 즐거워하고 나면 다음부터는 고난과 핍박이 시작됩니다. 죽을 때까지 성결을 유지하며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지혜’ 를 구하고 받아 자기 안에 있는 세상을 향한 마음을 지우며 흠이 없는 거룩함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거룩함에 나아가게 하는 ‘성령의 법’ 이 아직 서지 않은 때이므로 그리스도의 기도가 언제나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공의가 완성되고 성령의 법이 서기 때문입니다.
# 아침에 일어나서: 그리스도가 오신 때가 새벽별이 뜬 때이며,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가 세상에 빛을 비추기 시작한 아침입니다.
# 마음으로: 그리스도 이전에 선민들은 행위의 법으로 치리를 받았습니다. 욥은 구약의 인물로 전제되어 있으므로 행위의 법에 치리를 받는 사람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문제를 염려하여 마음을 기준으로 한 제사를 드립니다. 행위의 법이 아닌 ‘마음의 법’ 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성이 된 법입니다. 행위의 율법이 관장하던 시대의 제사법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나타난, 욥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대항하다, 코스모크라톨(세상 모든 허상의 지배자), 바알세불(허상적 욕심의 왕)>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과 함께 있게 되었는데
7 여호와께서 사단<대항하다, 코스모크라톨(세상 모든 허상의 지배자), 바알세불(허상적 욕심의 왕)>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對(대할 대)答(대답할 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7 그때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너는 어디를 다니다 왔느냐?” 하고 물으시니 사단이 말했습니다.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습니다.”
#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사, 선지 등의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또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단은 하나님과 적대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는 ‘도구’ 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단은 죽지 않고 ‘물러가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사단이 마음을 장악하는 것은 사단에게는 악을 위한 것이 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악을 인식하고 선을 향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선을 위한 도구가 됩니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감으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뿐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행위의 법안에서는 주어진 법으로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보는 관점에서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법은 선이므로 행위의 법의 실천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됩니다.
행위의 법에서는 그렇게 되었었으나 이제 마음의 법으로 바뀐 상태에서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들었으나 이제는 이렇게...” 라는 패턴으로 법을 다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도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시편에 모든 사단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사단은 선을 위한 수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 여호와께서 사단<대항하다, 코스모크라톨(세상 모든 허상의 지배자), 바알세불(허상적 욕심의 왕)>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핍박 받는>을 留(머무를 류, 유)意(뜻 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純(생실, 순수할 순)全(온전할 전)하고 正(바를 정)直(곧을 직)하여 하나님을 敬(공경할 경)畏(두려워할 외)하며 惡(악할 악)에서 떠난 者(사람 자)가 世(대 세)上(위 상)에 없느니라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네가 내 종 욥을 보았겠구나.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앞에서 욥을 묘사한 내용이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의 말은 해설과 같은 3자적 입장에서 한 말이었으나 이 부분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 순전이란 완전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육신을 입었던 사람 중에서 그렇게 악에서 떠난 자는 그리스도뿐입니다. 당대의 의인이라는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악을 떠난 자라면 굳이 ‘은혜’ 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완전한 의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9 사단<대항하다, 코스모크라톨(세상 모든 허상의 지배자), 바알세불(허상적 욕심의 왕)>이 여호와께 對(대할 대)答(대답할 답)하여 가로되 욥<핍박 받는>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敬(공경할 경)畏(두려워할 외)하리이까
9 그 말씀을 들은 사단이 욥의 행실을 비꼬았습니다. “하지만 욥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겠습니까?
10 主(주인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所(자리, 바 소)有(있을 유)物(만물 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主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福(제사에 쓰는 고기와 술, 복 복)되게 하사 그 所有物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0 주님께서 그 집의 모든 소유물을 넘치게 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손으로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소유물이 늘게 하시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11 이제 主(주인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所(자리, 바 소)有(있을 유)物(만물 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丁(고무래 정)寧(편안할 녕) 對(대할 대)面(낯 면)하여 主를 辱(욕될 욕)하리이다
11 만약에 하나님의 손을 펴서 그가 가진 모든 소유물을 치신다면 아마 욥은 주님을 욕할 것입니다.”
12 여호와께서 사단<대항하다, 코스모크라톨(세상 모든 허상의 지배자), 바알세불(허상적 욕심의 왕)>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所(자리, 바 소)有(있을 유)物(만물 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12 그러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그의 소유물을 네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하마. 단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라.” 이 말씀을 들은 사단은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갔습니다.
#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따르던 자들이 흩어진 것이 소유물을 친 결과입니다.
13 하루는 욥<핍박 받는>의 子(아들 자)女(계집 녀)들이 그 맏兄(맏 형)의 집에서 食(밥 식)物(만물 물)을 먹으며 葡(포도 포)萄(포도 도)酒(술 주)를 마실 때에
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 그 맏형: 사도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선민이기에 아들로 표현되며, 맏형이라고 표현된 것은 제자 중에 가장 작은 자가 선민 중 가장 큰 자인 엘리야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먹고 마시는 것은 말씀입니다. 식물이란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포도주란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 실현을 위한 일을 하고 나서 얻는 결과를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 실현의 과정의 길을 가는 중에 얻어진 결과가 제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제자들은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터 위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고 있다.’ 라는 표현을 위와 같이 한 것입니다.
[전도서 11장] 1 너는 네 食(밥 식)物(만물 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後(뒤 후)에 도로 찾으리라
[잠언 9장] 5 너는 와서 내 食(밥 식)物(만물 물)을 먹으며 내 混(섞을 혼)合(합할 합)한 葡(포도 포)萄(포도 도)酒(술 주)를 마시고
# 유의해서 봐야 할 것은 본 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때’ 입니다. 전제는 ‘하루는’ 이라고 묘사되어 있으므로 마치 어느 한 날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때’ 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하루’ 는 범위에 차이를 두고 인생의 범위, 그리스도의 범위, 하나님의 섭리의 범위에서 각각 ‘그 전체’ 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와 같고 하루가 천 년과 같다.” 하는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시간적 개념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가르침입니다. 천이란 그리스도의 범위 안에서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하루와 천 년은 실제로 성경 안에서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본 절은 시간적 개념을 바탕으로 읽으면 다음 절의 내용과 연결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절이 묘사하고 있는 ‘때’ 는 그리스도가 포함된,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나타내는 묘사입니다.
14 使(시킬 사)者(사람 자)가 욥<핍박 받는>에게 와서 告(알릴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4 욥의 사자(전하는 자)가 욥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마시기 위한 의구심>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避(피할 피)한 故(옛 고)로 主(주인 주)人(사람 인)께 告(알릴 고)하러 왔나이다
15 갑자기 스바 사람들이 몰려와서 소와 나귀를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습니다. 저만 겨우 피해 왔습니다.”
# 밭 가는 소는 종이며, 나귀는 꼴을 먹어야 하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란 유대인을 포함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던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告(알릴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羊(양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避(피할 피)한 故(옛 고)로 主(주인 주)人(사람 인)께 告(알릴 고)하러 왔나이다
16 그 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또 한 사람이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양과 종을 살라버렸습니다. 그 와중에 저만 홀로 살아남아 이렇게 왔습니다.”
# 양: 꼴을 먹어야 하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세리와 창기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렸던 어린 양이란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의 양이었으나 길을 잃고 헤매던 자였음을 인지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모든 자입니다.
# 종: 제자들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견지에서 종이며, 그리스도의 견지에서 낳으셨으므로 아들이며, 이방인은 딸이 됩니다. 이방인은 모세의 행위의 율법에 대하여 직접 치리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하여서는 반드시 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에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들이 되고, 또 일해야 하는 일꾼으로서 종이 되며, 전도자의 모양으로는 씨를 뿌릴 때는 남자가 되고, 피전도자를 얻은 자는 태가 형성된 것이므로 그 태의 아기를 양육할 때에는 여자가 됩니다.
#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게 해 보라는 복음서의 표적 요구를 상징한 말로 결국 내려오게 하지 못하므로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서 표적을 요구한 자들이 그리스도를 멀리하여 영이 죽게 되었다는 것을 일컫는 역설적인 묘사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단 유대인들은 십자가 형벌이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내리신 불로 생각을 하지만 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단 것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내리신 불을 맞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본 욥기에 친구들과 욥이 이 상황에 대하여 누가 진짜로 불을 맞은 것인가를 설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욥기 재판의 쟁점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의 주장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불로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판결하신다면 그리스도는 가짜가 되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 달리심이 공의 실현이라는 것으로 판결이 나면 유대인이 그 불을 받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17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告(알릴 고)하되 갈대아<객관에서 주관으로 전환시킴>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避(피할 피)한 故(옛 고)로 主(주인 주)人(사람 인)께 告(알릴 고)하러 왔나이다
17 이번에도 또 그 피해온 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습니다. 저만 홀로 피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 ‘세 떼’ 의 ‘셋’ 은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행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세 떼가 보내진 것은 사단 임의의 판단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의 공의 실현을 위한 필연적인 순서입니다.
그래서 본서에도 선민으로 등장하는 인물인 ‘친구’ 가 ‘셋’ 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셋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됨을 나타내는 수이며, 넷은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되는 것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그래서 본서에는 세 친구의 말과 욥의 말이 끝나고 나서 한 사람이 추가로 등장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이후에 나타나는 또 다른 바리새인과 같은 성경 이론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서고 새로운 세대가 열림과 동시에 그리스도 이후의 ‘선을 위한 필요악’ 으로 부여되는 거짓 증인들을 총칭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의 대사 속에는 오류가 가득합니다.
선을 위한 필요악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던 바로의 행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단 사람들의 행위, 다윗이 계수를 행함 등이 그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섭리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사단이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그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할 뿐입니다.
또한, 그 섭리를 알고 있는 예수께도 그 섭리를 알든 모르든 그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 공의 실현이라고 해서 십자가 달림이 두렵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달림은 하나님의 공의 실현의 일환으로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순서이지만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께 십자가는 필연이 아닌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그 십자가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또 그 길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원’ 과 ‘아버지의 원’ 사이에서 나의 원이 있었으나 아버지의 원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속에 돈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단의 사자를 자기 속에 넣어 두셨다.” 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 위의 욥이 당하는 세 가지의 재난은 모두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에 의해 그리스도를 따르던 자들이 세상으로 돌아간 경우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달림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무서워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를 나타낸 묘사입니다. 사실상 앞의 세 경우를 표현법을 달리하여 반복 묘사를 한 것입니다.
18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告(알릴 고)하되 主(주인 주)人(사람 인)의 子(아들 자)女(계집 녀)들이 그 맏兄(맏 형)의 집에서 食(밥 식)物(만물 물)을 먹으며 葡(포도 포)萄(포도 도)酒(술 주)를 마시더니
18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주인님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19 거친 들에서 大(큰 대)風(바람 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少(적을 소)年(해 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避(피할 피)한 故(옛 고)로 主(주인 주)人(사람 인)께 告(알릴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오더니 집 네 모퉁이를 쳐서 그 소년들 위에 무너져 모두 죽었습니다. 저만 홀로 피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함이 이 경우에 속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 네 모퉁이를 쳐서 모두 죽었다: 세상이 완전히 사단의 세력권에 들어 밤이 되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네 귀퉁이, 즉 동서남북의 온 세상이 ‘넷’, 즉 그리스도의 범위 안에 들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십자가 달림으로 인하여 그것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 또한 이와 같은 과정을 갑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또 스스로 지워내고 하는 것이 이 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견지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버리시는 과정으로 보이나 사실은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주기 위한 것이 됩니다. 이 과정이 있을 때에만 공의는 실현될 수 있습니다.
사단은 공의 실현의 도구 중 하나로 쓰이는 것이며, 사단의 공격을 당하며 고난을 감내하고 자기의 잔을 마시는 그리스도가 느끼시는 것은 ‘버림’ 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사람의 성정을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일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므로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그대로 갈 수 없다.” 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만을 빼고는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두 제자가 큰 성 길에서 죽었는데 거기가 십자가 앞이더라.’ 라는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 거친 들: 광야, 즉 ‘어두운 세상 중에’ 를 뜻합니다.
# 이상의 내용에 매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언제나 한 사람씩은 살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마다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이 파송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계속해서 이어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엘리야의 이야기에도 “전부 죽고 나만 남았습니다.” 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구약 선민들의 역사 끝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기에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역시도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는 유대 땅에서 나온 마지막 살아남은 한 사람이 됩니다. 물론 이 ‘살아남’ 은 이전과 달리 ‘부활’ 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20 욥<핍박 받는>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敬(공경할 경)拜(절 배)하며
20 그 말을 모두 들은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 겉옷을 찢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겉옷이 찢어져 나누어졌는데 그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옷은 십자가에 단 자들이 찢은 것입니다. 옷이란 어떤 것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상의 틀’ 을 뜻합니다.
똑같이 둘이 밥을 먹어도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밥을 먹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 밥을 먹으면 그것은 사단의 옷을 입고 먹는 것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일하시며 입으신 옷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찢었다는 것은 공생애 동안에 자신의 모든 언행이 사람들에게는 거짓인 양 보일 수 있게 되는 십자가 형벌을 받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동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 머리털을 밀고: 머리털이란 공생애 동안에 설파하시던 모든 말씀을 뜻합니다. 그것을 밀었다는 것 역시 옷을 찢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원래는 하나님이시나 아버지의 뜻에 의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므로 육신을 입은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21 가로되 내가 母(어미 모)胎(아이 밸 태)에서 赤(붉을 적)身(몸 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赤身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者(사람 자)도 여호와시요 取(가질 취)하신 者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讚(기릴 찬)頌(기릴 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1 말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니 또한 적신이 되어 돌아감도 당연한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이제 하나님이 가져가시니 이 일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22 이 모든 일에 욥<핍박 받는>이 犯(범할 범)罪(허물 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向(향할 향)하여 어리석게 怨(원망할 원)望(바랄 망)하지 아니하니라
22 이 모든 일에 욥은 범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 보통은 머리털을 밀고 옷을 찢는다는 표현이 억울하거나 원통해서 악을 쓰는 것처럼 이해되어 있으나 성경에 나타난 실제는 이처럼 겸손의 의미입니다.
2장 12절에는 세 친구가 행하는 찢음과 재를 뿌림이 나오는데 그들은 머리털을 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가식’ 으로 자기의 악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외국의 어느 법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판결이 나왔다고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찢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원래 의미가 이런 것임을 두고 보자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판결 때문에 옷을 찢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해치는 판결이기 때문에 악을 쓰며 옷을 찢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