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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7:27-32
성경에는 배에 관한 기사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이하를 보면 노아시대 대홍수로 세상이 심판받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만들고 지상에 있는 생물들을 암수 한쌍씩 혹은 두쌍씩 방주로 끌어들이고 노아의 여덟 가족도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주목할 것은 방주로 들어간 생명체만 대홍수를 피해 살아 남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방주는 구원과 보호를 상징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주경가들은 방주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로 보고 있습니다.
노아 당시 노아의 여덟 식구보다 잘나고, 똑똑하고, 돈많고, 잘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방주로 들어간 사람들만 구원 받았습니다.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그 배안으로 들어간 사람만 구원해 주셨습니다.
노아가 만든 배 안에는 온갖 짐승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오줌냄새, 똥냄새, 맹수소리, 새소리가 얽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교회도 비슷합니다. 남녀노소, 선인, 악인, 도둑놈, 알콜중독자, 사기꾼, 정치인, 교육자, 언론인, 기업인, 연예인등이 뒤엉켜 있습니다. 시끄럽고 냄새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주 안에 있는 사람만 구원 받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십니다.
교회가 시끄럽고 냄새난다고 해서 교회를 불질러 버리겠다든지 없애버려야 한다고 떠드는 것은 방주안이 시끄럽고 냄새난다고해서 방주를 폭파해 버리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 칼빈은 교회를 어머니와 같다고 했습니다.
방주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단 한 생명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구약성경 요나서를 보면 요나선지자가 배를 타고 가다 풍랑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성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항해 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를 잘못 탄 것입니다. 그는 배를 잘못 탔던 탓으로 풍랑을 만났고, 불신자들에게 수모를 겪었고, 결국은 바다에 던져 큰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굴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해선 안될 일, 가선 안될 곳을 가는 사람들이 겪게 될 수모와 고통과 실패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타고 가던 로마행 배에 얽힌 사건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로마 총독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탄 배는 로마를 내왕하는 무역선 알렉산드리아 호였습니다. 그 배에는 바울을 호송하는 백부장과 그 일행, 여행객과 장사군 등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항해전문가는 아니지만 여러차례 전도여행을 하면서 터득한 일기관측법과 영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볼때 때가 겨울철이고 지중해 바람이 거세게 부는 때여서 항해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겨울철을 지난후 떠나자고 건의했지만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떠나도 된다는 선장이나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본문이 주는 몇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1. 고집대로 떠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뻔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말씀 어기고 제 고집대로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 만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 역시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 부려 떠났다가 배가 파도에 휘말려 좌초당했습니다.
히브리서 12:25을 보면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고 했고, 히브리서 13:17에서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의 경우 백부장은 군인입니다. 그는 무력사용이 가능합니다. 선장은 기술자입니다. 그는 고도의 기능을 가진 자입니다. 선주는 배를 소유한 재벌입니다. 그는 돈으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력도, 기능도, 돈도 없는 가난한 전도자입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무시했고, 그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풍랑을 만났고,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했습니다.
고집과 소신은 다릅니다. 고집은 강할수록 손해고, 소신은 강할수록 좋습니다. 고집은 버려야 하고, 소신은 지켜야 합니다. 소신은 일을 성취하고 꿈을 이루지만, 고집은 인간관계를 깨트리고 분위기를 망칩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가 고집 부리고 떠났다가 풍랑 만난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그것은 "고집을 버려라, 고집 부리지 말고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믿으면 안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배가 좌초되어 위경을 헤메고 있던 어느 날 밤 하나님은 바울에게 "걱정마라 내가 이 배에 탄 276명의 생명을 네 손에 맡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배에 탄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은 안심과 평안을 갖는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 때 상황이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앉고, 안개와 비바람 때문에 해와 달은 몇 날째 보이지 않고, 배고픔과 추위는 겹치고, 배에 있는 물건들은 다 버린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안심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노라"고 소리쳤습니다. 마태복음 14:27을 보면 갈릴리바다에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폭스체이스 암센터의 수잔 밀러는 "가장 훌륭한 의사에게 자기 건강을 맡겼다고 믿고 마음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상담가 폴 스톨츠는 "대부분의 걱정은 사실에 근거하기 보다는 부정적 상상과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안심하고 살수 있습니까?
누가 거센 인생의 풍랑과 비바람과 안개와 폭풍우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습니까?
누가 좌초하고 있는 배속에서 안심하라고 소리칠 수 있습니까?
그는 바울의 외침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받은 사람만 가능합니다. 안심과 평안을 내 것으로 내 마음속에 받아들입시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아멘 "
3. 살려면 끊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라고 했고, 19절에서는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2절을 보면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버리니라"고 했습니다.
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짐도 버리고, 기구들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비상탈출용으로 매어 둔 구명보트의 줄을 다 끊어버렸습니다. 오직 배와 사람만 남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수단, 도구, 방법, 처방을 다 잘라 버리고 포기한 것입니다. 그것들이 남아 있으면 그것들을 의지하고 그것들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한손으론 예수를 붙잡고, 한손으론 세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도 믿고, 석가도 믿으려 합니다. 예수도 의지하고, 세상 것들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끊고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애착도 연민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애착도 연민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6·25때 있었던 일입니다. 인민군 부대가 대부분 UN군에 의해 사살되고, 소대병력이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미군들이 인민군들에게 총을 겨누고 손을 들리고 했습니다. 말은 못 알아 듣지만 전쟁터에서 총을 겨누고 총구를 들어올리며 소리치는 것은 "손들엇"이라는 싸인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민군이 손을 들었습니다만 그 중에 한 사람이 뭘 꺼내려는 듯 윗주머니로 손을 넣으려는 순간 미군의 총구가 불을 뿜어댔습니다. 그 인민군은 현장에서 쓰러졌습니다. 손을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내 것으로 받으려면 빨리 버리고, 자르고, 손들고, 항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제가 졌습니다. 제가 항복합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라며 두 손을 들어야 합니다.
4. 배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대로 배는 예수님과 교회를 의미합니다.
칼빈은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돈을 버리고, 명예를 버리고, 지식을 버리고, 권력을 버리고, 성공을 버리더라도 배 안에 있어야 합니다. 배를 떠나는 것은 폭풍우 몰아치는 지중해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4:12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도 배 안에 있었기에 구원받았고, 로마로 가던 276명도 배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제 서재에는 분재 화분 한 그루가 있습니다. 통풍도 햇빛도 없는 방 안에 몇일동안 놔두면 잎이 시들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밖으로 내놓고 물을 주고 햇빛을 쪼이면 금방 싱싱하게 되살아납니다. 저는 이 분재의 생존을 위한 변화를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고 죽는 이치가 매우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살고, 예수 밖에 있으면 죽는다는 것, 영원한 생명의 빛을 받으면 살고, 어둠과 짝하면 죽는다는 것, 물 주면 살고, 물 마르면 시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22이하를 보면 갈릴리바다를 건너가던 제자들이 풍랑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4:24을 보면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고 했고, 32절에서는 "배에 함께 오르시매 바람이 그치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다에 오시면 폭풍과 파도가 잔잔해지고, 배에 오시면 그 배가 안정되었습니다. "배 안에 있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현장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났더라도, 실패했더라도, 절망과 좌절의 파도에 휩쓸렸더라도.
배 안에 있으라!
예수 안에 있으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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