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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미국 사상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리고 그의 손에 의해서 미국 정신(프런티어 정신)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고, 동시에 테일러와 피니와 같은 부흥사들의 사상을 형성했던 실용주의적 경향이 하나의 철학 체계가 되었다.
존 듀이는 실용주의를 좀더 폭넓게 적용했으며, 그리하여 특별히 교육에 실용주의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교육의 목적은 어떠한 특별한 사상 체계나 가치 체계나 사실 체계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효용성에 있다고 주장되었다.
모든 실용주의자들 중에서 윌리암 제임스(1842-1910)만큼 그와 같은 실용주의적 사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학자의 아들이었던 제임스는 생리학과 심리학과 철학을 1872년에서부터 1907년까지 하바드에서 가르쳤다. 비록 제임스가 실용주의를 체계화시킨 중심 인물이었지만, 실용주의 사상이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은 산업혁명의 영향이었다. 어떠한 철학 학부도 서구 여러 나라들을 휩쓸었던 산업혁명과 기술혁명에 견줄 수 없었다. 가장 빠르고 가장 적은 비용으로 일을 처리하고 물건을 만드는 것이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어떤 구체적인 진리 하나를 아는 것의 가치는 “그 진리가 실제 경험적으로 현금 가치가 얼마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식의 사고 방식이 얼마나 철저히 현대 사회 일반에, 그리고 특별히는 그리스도인의 사고 방식에 침투해 있는가를 인지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이 교리를 알고 저 신학적 입장을 아는 것의 가치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벧후3:18)의 장성함이라는 목표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 용도(효용성)에 근거해서 혹은 “그 실제적인 현금가”에 비추어서 판단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파워”(power)의 원천이나 실용적 원리들을 가르친 선생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간직하고” 계신 분으로 계시하고 있다(골2:3). 그러나 더욱더 중요하게는 성경은 그리스도를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제물로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타산적인가?
윌리암 제임스에게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하나님의 쓸모에 달려 있다. 새로운 분무용 살충제가 나오면 시장에 내보내기 위해 얼마나 효율적인가 하는 테스트를 거쳐야 하듯이 하나님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효용성의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얼마나 신속하고 효율적이며 용이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윌리암 제임스는 종교가 그 도그마적(교조주의적)인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종교는 실용주의와 함께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간증들이란 것은 기독교가 한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즉 어떻게 맞아떨어졌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었다. 일단 그 간증자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달라고 기도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린다(간증의 천편일률적인 행태를 풍자하는 말임-편지자 주). 그런데 몰몬교도들이나 다른 이단 종파들이 똑같은 “간증들”을 주장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혼했던 사람들이 다시 재결합하고 알콜 중독자들이 건강한 시민들이 되고 재정적인 파탄에서 회복된다는데, 우리가 그런 이단 종파들이나 사이비 종교 집단들에 대하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들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실제적이지 않은가?
신약성경은 기독교의 승리를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객관적 진리에서 보고 있지, 우리가 좀더 즐겁고 유쾌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데 그리스도 사건이 얼마나 유용한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지 않다.
복음주의적 신앙의 실용주의적인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는 다른 자기 개발 프로그램들과 경합해야 한다. 건강과 부와 행복을 약속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이 기독교보다 더 잘 작용하고 역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독교는 과연 역사하는가? 효용성이 있는가?
성경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이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3:10-12,23/6:2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문제이다. 성경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종류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어떤 물음들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성경을 봐야 하며 또 그 대답들을 알기 위해 성경을 보아야 한다. 마치 성경이 생활의 어떤 실제적인 문제들을 말하기 위해 씌어진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성경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일을 이제는 중단해야 한다. 그러한 실제적인 주제들에 대해서는 성경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여러 면에서 기독교는 실용성이 없다. 기독교는 삭개오라는 사람의 그 수단 좋은 사업을 망쳐 놓았다. 삭개오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그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했으며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그 빼앗은 양의 네 배나 갚아야 했다.
바로 그 하나님은 그분을 믿었던 조니 이어릭슨 테이다를 그분의 신비스런 경륜 속에서 수영 사고로 영구적인 반신불수로 만드신 그런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한 비극이 없었다면 오늘날에 기독교가 내세울 수 있는 증거(간증)라는 것은 아주 빈약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고를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 조니가 그토록 치료받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다. 기독교는 세속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면으로는 전혀 ‘작동하지’(work) 않는 종교이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기독교를 실용적 토대 위에서 정당화 시키고자 한다면 우리가 제시하는 그런 기독교라는 것은 세상에 많이 나와 있는 여러 가지 개발 프로그램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특효약과 장치들이나 제도들(보험, 사회 보장제 등)이 범람하는 가운데서 기독교도 이런 대열에 한몫 낄 수 있을지 모르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효용성에서 다른 것을 제압할 수 있는 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구닥다리로 치부되어 교체되고 만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생활에 아주 중요한 측면들인 재정 문제, 정치 문제, 민족 문제, 물질적인 문제로부터의 자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무엇을, 예컨대 즉석 처방 같은 것을 결코 약속하신 적이 없다.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확실히 하신 말씀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요16:33)이다. 이것이 바로 구주이신 주님이 하신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지키지 못할 헛된 공약을 남발하지 않으신다!
신앙에 대한 수탈
시민 종교(사회를 위해 최선의 역할을 하는 종교)의 씨는 이전 시대에 이미 뿌려졌다. 실용주의는 단지 애매모호해진 기독교를 좀더 조직적으로 수탈한 체계이다. <옥스포드 분석>은 “미국의 종교(기독교)는 그 기능적 유용성을 위해 착취당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무너져 내릴 것이며 유럽 종교(기독교)의 붕괴 이상으로 훨씬 더 교묘하게 변형될 것이다”고 전망한다.
여러 면에서 기독교는 기독교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착취당해 왔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를 특징지워 주는 성경의 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잠언일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와 바로 뒤 이어지는 시대를 특징지워 주는 책은 로마서였다. 그 초점의 차이를 주목하여 보라. 물론 잠언도 건전하고 실제적인 충고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를 보면 로마서는 놀라우리만큼 훌륭한 성경의 조직신학이다. 자신의 경제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에 잠언의 지혜를 활용하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칭의는 설명하지 못하는 신자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것이 바로 신앙을, 궁극적으로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착취하는 집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진리와 테크닉을 혼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기독교 에어로빅에서부터 기독교 상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행할 때에 기독교적인 방식이나 방법이나 테크닉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식으로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그 부요한 내용들을 희석시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음 세대는 그러한 신앙이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시시한 문제들을 가지고 시시한 해결책이나 제시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진짜 문제들에 대한 진짜 해결
그렇다면 기독교는 문제 해결 종교인가? 만약 그 문제라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말한다면 대답은 “그렇다”이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된 것을 없애버리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정죄함이 없다”(롬8:1). 하나님의 문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사 자신의 거룩함으로 인하여 심판자로서만 관계하실 수밖에 없는 그 죄인된 백성들에게 아버지가 되시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공의를 유지하면서 그 사랑하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으셨을까?
하나님은 죄를 그저 지나쳐 버릴 수 없으셨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 만약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롬3:23)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면 모든 사람을 죽어야 한다. 이것이 진짜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 대신에 자신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삼아 죄 없는 한 희생자에게 그분의 진노를 퍼붓고 의로운 선고를 내릴 생각을 하셨다. 이 놀라운 교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불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고(골2:13-15)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구좌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칭의는 믿는 자가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는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18-21)
우리 사회의 엄청난 큰 근심의 하나인 죽음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되고 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4,56)
죽음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다. 죽음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통로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부활, 육체와 영혼의 완전한 형체로의 연합을 대망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 즉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과 부활이 제공해 주는 많은 은덕들이 우리의 심대한 문제들(아마도 성경이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지 않았다면 우리로서는 저 뒤편으로 제켜두었을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무엇이 실제적인 것이냐에 대한 생각이 돌연 크게 바뀌게 되었다.
물론 기독교 진리에 수직적인 측면(하나님과의 관계)과 함께 수평적인 측면(인간과의 관계)이 있긴 하지만, 기독교는 생활의 안전핀과 음식을 잘 만들 수 있는 주방 용기에 관심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에 죄인들이 어떻게 안길 수 있느냐를 다루고 있다. 기독교의 주제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롯하여 부서진 관계를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기독교는 아주 근본적인 인간 문제를 해결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릇된 질문이나 하고 아니면 주변적이며 지엽적인 질문들이나 하고 있을 때 자주 무시되어 버리는 그런 것들이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목소리나 흉내내고 있을 때 세상은 교회를 불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석 해결자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신은 가공적 인물이며 미국식 풍물의 한 파편일 뿐이다. 제임스 보이스는 나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기독교는 인간 문제들의 주변에서 맴도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 공경하면서 인간 문제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