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진영에서 나오는 정기 간행물과 테이프와 책들을 간단히 일별해 보면 효용적인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요구와, 새로운 제품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불신자의 욕망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뉴에이지 신비주의보다, 자기 개발 프로그램보다 훨씬 기독교가 더 효과가 좋고 실제적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문을 가지고 출발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심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성숙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이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실용주의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복음주의는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연결시켜 주는 일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해야만 한다.
테크닉 중심의 전도는 두 가지 점에서 결핍이 있다.
첫째로, 테크닉 중심의 전도는, 청중들을 회심시킬 수 있도록 조작되어야 하는 과녁으로 삼는다는 점이 잘못되었다. 테크닉 중심의 전도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이요, 타락하여 말씀 선포를 통하여 그를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의 사역을 필요로 하는 피조물로 보지 않는다. 방법 중심의 접근법은 일단 문제들의 본질은 제쳐두고 지킬 수 없는 약속들을 남발한다. 심지어 불신자들과의 우정조차도 순수하지 못하게 만들고 일종의 전도 테크닉이 된다. 그러나 성경적 전도는 프로그램이 아닌 사람에 관심을 기울인다.
둘째로, 테크닉 중심의 전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재지주로 취급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본질적으로 실용주의적 종교는 이신론적이다. 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내버려 두고 관여치 않는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적 종교는 회심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라기보다는 “수단의 올바른 사용”으로 본다(찰스 피니). 구원의 성사 여부는 효과적이며 영리한 전도자들에게 맡기셨다고 주장한다. 진정 미국인의 신앙은 미국 건국의 조상들의 종교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과연 비극적으로 그 신앙을 본받고 있다. 기독교에서 초자연주의를 다 제거해 버리고 공공의 도덕성이라는 뼈다귀만 남겨 놓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신론이 바라보았던 ‘부드러운 종교’인 것이다. 실용주의적인 복음주의는 기독교를 실로 그와 같은 꼴로 만들 버린 것이다.
사회학 교수인 제임스 헌터는 열 여섯 개의 복음주의권 학교들의 학생들과 교수진들을 분석하였다. “대부분(67%) 자기들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제시할 이유의 첫 번째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인식’을 들거나 ‘하나님이 내 삶에 변화를 주셨다’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복음주의 신학교 학생들의 “거의 절반(46%)이 대부분의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아주 밥맛없이’ 느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실용주의적 복음을 가지고 기독교가 해결한다고 얘기되는 문제들이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가져 왔던 것들(예를 들면, 심판 또는 지옥과 같은 주제들)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개인 전도의 어떤 면들은 남을 깎아내리고 논쟁적이며 무례한 것이 사실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뚜벅뚜벅 걸어가서 “당신은 당신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내 삶을 바꾸셨다”는 인간 중심의 실용적인 초점이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관심을 대체해 버렸다면 아무도 복음을 제대로 전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마틴 마티는 옛 교리적인 입장이 가지고 있었던 추진력을 결여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에 대하여 “사람들이 마치 카페테이러(셀프 서비스 식당)에 주욱 줄지어 서서 자기에게 맞는 식단을 쟁반 위에 올려 놓으려고 이 진리를 뒤적여 보고 저 진리를 선택하고 하는 꼴이다”라고 논평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는 칼미니안(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를 절충한 입장)이야”라거나 “나는 은혜와 공로 사이의 적당한 균형을 좋아해요”라고 한다. 참이거나 아니거나가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만병통치약을 제공하려고 세상과 경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그 오아시스가 다름아닌 신기루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은 기독교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이전보다 더욱 굳게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실용주의적 복음을 반대해야 한다. “이 은막의 스타들을 보십시오, 성공한 사업가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 체육인들을 보십시오. 기독교가 이들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실용주의적 복음을 배격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께 기회를 드립시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틀 안에서는 기도도 인격적인 관계가 아닌 하나님을 조작하고 조종하는 테크닉이 되어 버린다. “나는 기도를 통해 비전이 펼쳐져 보이는 그 역동적인 차원의 실체를 발견하였습니다”라고 로버트 슐러는 선언했다. “그 점을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그저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실제 있어요. 그냥 즐기면 그 차원이 느껴질 겁니다. 내가 해봤어요.”
그렇다면 기독교는 더 넓은 시장을 목표로 하여 자기 긍지를 개발하기 위한 더 나은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하는가? 자녀 양육의 더 나은 방법을--? 아니면 도덕 증진을 위해 더 큰 자극을 제공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가?”라거나 “어떻게 하면 당신의 크리스찬 라이프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와 같은 설교를 듣는 일에 신물이 났다.
나에게 다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4단계”의 다른 목록을 주려고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 단계라는 것들을 다 시도해 보았는데 그 단계라는 것들과 방법이라는 것들이 인생의 더 깊은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주기는커녕 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변도 되지 못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이것이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된 주장들이 난무하고 집 주소를 어떻게든지 알아내어 우편 주문하도록 획책하는 구세주들이 횡행하는 시대에 신선한 자극이 아닐 수 없다.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