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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반구대와 활쏘기
정진명(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1. 반구대 암각화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 그림으로 유명하다. 고래도 종류가 많은데, 어떤 고래인지 알아불 수 있을 만큼 고래의 특징을 잘 잡아서 그렸다. 포경 어업이 금지된 1970년대까지 울산 방어진 장생포를 중심으로 고래 사냥이 유명했기 때문에 반구대 그림은 그 연장선에서 세상의 관심을 끌었고, 그에 따라 반구대 암각화도 고래 그림이라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반구대 암각화에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은 호랑이이다.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의 주서식처여서 조선시대 그림과 설화에 활쏘기만큼이나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호랑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조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가장 가까이 있던 짐승이다. 이런 짐승이 7,000년 전의 사람들이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다. 활쏘기 그림이 적지 않다. 우리는 활쏘기 벽화에 익숙하다. 2,000년 전의 고구려 고분 벽화부터 시작해서 문명사회로 접어든 뒤 수많은 그림을 보아왔다. 그러니 석기시대 사람들이 그린 절벽에 돌로 파서 그린 활 그림이 있다는 것은, 특히 활을 쏘는 활량으로서는 이 땅에 살았던 선배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기도 해서 발품을 팔아서라도 확인해야 한다. 온깍지궁사회 활동 이후 한 동안 멈추었던 답사 본능이 꿈틀거렸다. 이 본능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은 고헌정의 김동욱 접장이다.
2. 고헌정 습사
2021년 8월 4일 아침 8시 반. 청주에서 류근원 교두의 차를 타고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고헌정을 향해 남쪽으로 출발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를 타고 백두대간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쏟아놓은 웅장한 산줄기를 따라 달리기를 3시간 남짓, 강을 막아서 만든 대암댐 밑에 야트막한 산을 바라보며 놓인 고헌정에 다다랐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김동욱 접장과 본정 사원 몇이 우리를 반가이 맞는다. 반갑게 인사하고 궁방에 들어가서 각궁을 얹었다. 활터가 제법 크고 짜임새 있게 지어졌다. 원래 개천 가에 있었는데 홍수 때마다 과녁이 떠내려가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대암댐이 만들어지면서 거기서 나온 돌과 흙을 쌓아올려 활터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사원이 타준 오미자차를 마시며 더위를 식히고 각궁을 식히는 사이 마련해간 애기살 덧살과 육량전을 꺼냈다. 본정 사원들에게 한 번씩 쏴보라고 가져온 것인데, 애기살은 본정 사원 중에서도 쏘는 분이 있다고 하여 생략하고, 육량전만 쏴보았다. 아무리 당기고 줌손을 높이 들어도 활터 중간도 못 나가는 육량전을 쏴보며 사원들이 모두 혀를 내두른다.
활터 답사도 여행도 오랜만이라, 타정에서 활을 쏴보는 일도 참 오랜만이다. 본정 사원과 어울려 2순을 냈다. 살이 자꾸 넘는 바람에 각기 2시와 1시로 순점을 했다. 활을 부리고 활터를 나섰다. 대암호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아구찜을 먹고, 반구대로 향했다.
3.집청정에서 반구대를 보다
반구대로 가는 길은 내내 아름다웠다. 좁은 골짜기로 파고든 좁은 길이 개울을 따라서 구불구불 돌아갈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연신 나타났다. 길이 강을 따라가는 건지 강이 길을 쫓아오는 건지 구분이 안 갈 만큼 길과 물은 서로 경쟁하듯 달린다. 나무 하나라도 자르지 않으려고 가운데에 나무를 두고 길이 갈라졌다 다시 만난다.
움막이 있는 풀밭에 차가 멈춘다. 그 옆에 멈춘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집청정의 주인장 최원석 접장이 우리를 맞이한다. 반갑게 인사하고 돌아보니 개울 건너편에 그림 같은 바위들이 금강산처럼 섰다. 반구대다.
반구대는 대곡천에 있는 명승지다. 명승지에는 반드시 화공의 붓놀림이 있고, 탐방객이 있다. 이 뛰어난 풍경은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도 옮겨갔다. 겸재다운 눈으로 겸재답게 그렸다. 그리고 조선 시대 내내 수많은 선비가 다녀갔을, 물 건너 반구대가 가장 보기 좋은 자리에 정자가 하나 들어섰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정자가 집청정이다. 맑은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는 이름처럼 앉기만 해도 머리까지 맑아지는 곳이다.
집청정의 주인 최원석 접장의 안내에 따라 신발을 벗고 오랜 세월을 그대로 떠받치고 견디어온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에 앉으니 겸재가 그렸던 반구대가 바로 눈앞에 보이고,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식힌다. 나는 준비해간 책을 몇 권 최 접장에게 사인하여 드렸다. 그리고 고헌정 부사두인 강철조 접장에게도 책을 드렸다. 시원한 기운에 더위가 저절로 식어가는데, 집 주인이 이 집의 내력을 설명한다.
반구대는 정자 건너편의 바위를 말한다. 흘러오던 산이 개울을 만나서 끊어지는 자리에 바위가 드러냈는데, 그 바위 모양이 꼭 거북이를 닮아서 반구라고 했다. 지금은 한여름, 반구대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가을과 겨울이다. 옛날에 나무를 해서 때던 시절에는 반구대에도 나무가 별로 없어서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에도 바위가 그대로 다 보여서 그야말로 볼 만했는데, 나무를 자르지 않은 지 벌써 40여 년, 자랄 대로 자란 나무들이 바위를 가려서 무성한 여름에는 바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잎이 다 진 겨울에 오히려 웅장한 바위 거북이 보여주는 진경이 드러난다.
이곳 집청정은 대곡천이 돌아가는 곳에 바짝 붙었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벼랑이다. 지금은 차 한 대가 오갈 수 있는 길이 났지만, 원래는 그 길이 이 정자의 마당이었다. 반구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구경꾼이 오갈 수 있도록 길을 내는데, 최씨 집안에서 길에 편입된 땅을 기증했고, 그리로 길이 나면서 원래의 정자 안마당을 잘라버린 것이다. 길로 가는 작은 솟을 대문은 뒤로 더 물려서 지금은 집청정 정자와 두 팔을 벌리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집청정 안주인이 내주는 시원한 차를 한 잔 마시고, 정자 문을 나서서 길로 내려섰다. 길 밖은 깎아지른 벼랑이다. 이 집의 소유주이자 산 증인인 최 접장이 정자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길이 나기 전에 그 밑으로는 바위에 그려진 바둑판이 있었다고 한다. 충북 괴산에도 깊은 산속 골짜기의 바위에 그려진 바둑판이 있어 몇 년 전에는 괴산바둑협회에서 신선 옷을 입고 바둑을 두는 퍼포먼스를 한 적 있다. 집청정 앞 바위에 그런 바둑판이 있다는 사실을, 주인장이 알려주지 않으면 누가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가장 훌륭한 문화해설사와 동행하는 중이다.
집청정을 비롯하여 이 일대의 땅은 최씨 소유이다. 최씨는 그 유명한 경주 최씨이다. 반구대암각화가 발견되면서 박물관도 들어서고 길도 나면서 거기에 필요한 땅을 최씨 집안에서 기증했다고 한다. 그 덕에 우리가 이렇게 손쉽고 편안하게 반구대 암각화를 구경한다.
좁은 길이 물길을 따라가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습이 달라지는 반구대를 보여준다. 반구대의 거북 머리가 거의 정면으로 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김동욱 접장이 손으로 가리킨다. 집청정 밑 개울에 모래톱이 있고, 여기서 그 모래톱으로 활쏘기를 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이제야 우리가 반구대 행을 한 까닭에 이른 것이다.
김동욱 접장은, 첫 인상이, 뭐랄까, ‘대책 없는 순수 열정’ 같은 느낌이었다. 뜬금없이 나에게 메일을 보낸 것도 그렇고, 한 번 만났을 때 반구대 암각화에 활 그림이 나오니, 반구대에서 활량인 우리가 활쏘기 행사를 하는 것도 지역 울주를 홍보하는 효과가 있지 않겠냐? 그런 것을 추진하려고 하다 보니, 반구대 그림 외에는 자료가 너무 없어 공무원들과 얘기를 해보아도 일이 잘 안 된다는 것이었고, 그런 고민을 어떻게 하면 좋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문의를 나에게 해온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30년 정도 활터에 몸담은 나로서는, 그의 순수한 열정이 앞으로 가져올 결과가 더 걱정되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면 꼭 뒷말이 무성하여 상처받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청정 주인장을 만나고, 반구대의 거북머리를 바라보며 서보니, 정말 거기서 반구대 모래톱을 향하여 활을 한번 쏘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 그곳 사원들의 의지가 있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방식의 대회는 반구대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 개량궁에 카본살로 이곳에서 대회를 한다면 반구대 암각화에 활을 그려넣은 7,000년 전의 신석기인 선배들에게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러니 최소한의 예의를 대회 조항에 넣어야 할 일이다. 그 최소한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까? 그래서 생각한 것이 화살과 복장이다. 각궁은 다루기 어려워서 당장 준비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화살은 마음만 막으면 죽시를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복장을 옛날 분위기가 나는 옷으로 하는 것이 좋은데, 마침 이곳이 화랑의 자취가 있는 곳이서 화랑 복장도 있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이 잘 된 일이다.
그러니까 반구대 전통 활쏘기 대회 모습은 이렇게 된다. 화랑복장을 차려입은 활량들이 지금 우리가 선 이곳에 나란히 서서 저쪽 개울 건너 반구대 밑 모래톱에 세워진 헝겊 과녁(솔포)을 향해서 죽시를 쏜다. 여기다가 획창까지 붙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갖춰서 몇 차례 하다보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고 걸러져서 저절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면 7,000년 전의 활량들과 함께 호흡하며 전국에 특색있는 대회로 자리 잡는다면 나부터 나서서 참가하고 싶을 것이다.
4.반구대 암각화
최 접장의 설명을 들으며 작은 호수를 지난다. 몇 만 년 전에 대곡천은 더 멀리 돌아서 이 곳을 지났는데, 중간에 물길이 산 중턱을 끊으면서 지금의 모양이 되었고, 그 전에 물이 흐르던 이곳은 호수가 되었다. 거기서는 옛날에 연꽃을 심어서 연뿌리를 길러 먹었다고 한다. 그 위로 안내 다리가 나서 대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대나무가 왕대이다. 어른 팔뚝만하다. 대나무를 보기 힘든 청주 손님인 나와 류근원 교두는 연신 감탄한다. 대나무 숲이 트인 개울로 내려가니 바위너럭이고, 곳곳이 패이었다. 공룡 발자국이란다. 한두 개가 아니다. 그 공룡발자국에 물이 고이면, 개구쟁이들이 물놀이를 하다가 차가워진 엉덩이를 거기에 담가 따뜻하게 대우곤 했다고 최 접장이 말한다.
50년 전과 몇 만 년 사이를 순식간에 왔다리갔다리 하는 사이, 강으로 변한 개울이 탁 트이고 먼 건너편에 거대한 절벽이 나타난다. ‘반구대암각화’다. 댐이 생기면서 물이 차고 빠진 자취가 바위에 그대로 남았다. 너무 멀기도 하고 색깔도 거무스름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거기 준비된 망원경으로 보니, 흐릿하게나마 그림들이 보인다. 최 접장이 친절하게 망원경의 해상도를 조절하여 활쏘기하는 7,000년 전의 사내를 향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다. 그 화면을 들여다보노라니, 감탄이 절로 난다. 내 궁체와 똑같다.
활쏘기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프랑스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이다. 25,000~30,000년 전의 그림으로, 동굴 속에 그려져서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었다. 이 연대를 어떻게 추정했는지 그 방법이 자못 궁금하고 의심스럽지만, 학자들의 말씀이니 최대한 존중하고 받아준다면, 인류는 이 시기에 활을 쏘았다는 뜻이다. 이 시기는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요즘은 세석기라고 시대를 따로 분류한다. 세석기란, 그 전의 구석기 유물이 돌도끼나 돌칼처럼 큰 데 반해, 이 시기의 석기는 크기가 훨씬 더 작아져서 그렇게 부른다. 돌을 간 게 아니라 잘게 깨서 만든 화살촉이 발견된다.
구석기인들은 화살을 쓰지 않았다. 창을 던지는 것이 그들의 원거리 무기였다. 하지만 빙하기를 거치고 맘모스 같은 거대 동물들이 사라지면서 몸이 날랜 작은 동물들을 잡기 위해 멀리 날아가는 무기가 나타나고, 그를 대표하는 무기가 화살촉이다. 이 화살촉들이 2만년 전쯤부터 발견되고, 신석기로 넘어오는 15,000년쯤 되면 오늘날의 화살과 다름없이 아주 정교한 형태로 나타난다. 몽골의 알타이산맥 돌벽에 그려진 활쏘기 그림이 이때쯤에 그려졌다고 한겨레신문기자는 답사기로 전한다.
그런데 특징이 있다. 알타미라도 그렇고 알타이도 그렇고 이들의 활은 길다. 활채가 서양의 장궁을 보는 느낌이다. 반면에 반구대에 그려진 활 그림은 거의 궁사의 상체와 비슷한 길이이다. 세상에서 가장 짧지만 가장 큰 탄력을 내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각궁과 비슷한 형태이다. 이곳 반구대에서 활을 쏘던 사람들의 활이 짧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림이 그것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활량들은 그것을 안다. 반구대 암각화 속에서 활을 당긴 사내들의 모습이 더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같기 때문이다. 내 만작 궁체를 보고서 7,000년 전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베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망원경에 확대된 그 돌벽 속으로 나도 슬그머니 들어가 본다. 궁체와 활이 아까 고헌정에서 활을 쏘던 내가 분명하다. 오늘의 반구대인이 7,000년 전의 반구대인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반구대 암각화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계속 새로운 그림이 더 발견된다. 전자 장비가 나오고 촬영기법이 발달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반구대 암각화가 더 빨리 망가지는 것도 사람의 재주가 불러들인 재앙이다. 하류에 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겼다 드러나기를 되풀이하는 30여년 동안, 지난 7,000년 동안 망가진 것보다 더 많이 망가졌다. 석회암 지대이다 보니 물에 약하고 그림은 계속 지워져가는 중이다. 나라도 주민도 사람이 불러들인 이 재앙에 고민이다.
반구대에서 발길을 돌려 동네로 들어섰다. 사료용 옥수수가 심어진 밭을 가리키며 저 옥수수를 베어내고 활쏘기 대회를 해도 된다고 최 접장이 말한다. 가을걷이가 끝난 밭은 바로 활터로 변할 수 있다. 길을 따라서 돌아가다 보니 집이 몇 채 있다. 왼쪽으로 솟은 봉우리는 섬이다. 대곡천 물이 흐르다가 중간의 산중턱을 넘는 바람에 물길이 바뀌어 몇만 년 전에 개울이었을 이곳은 논으로 바뀌었다. 옛 물길과 지금의 물길 사이에서 섬으로 남은 산을 끼고 돌아서 처음 그 자리로 돌아왔다.
땀을 흠뻑 흘렸는데, 집청정 주인이 또 수박을 내온다. 시원한 수박 세례에 몸이 식는다. 대곡천은 큰 골짜기라는 뜻이다. 옛날에 여기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대곡이라고 했다고 최접장은 설명한다. 그 얘기를 듣다가 조심스럽게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말의 어원에 평생 관심을 갖고 살아온 내가 생각하는 ‘대곡’의 어원이다. ‘대’는 당연히 크다는 얘기다. 곡은 우리말로 ‘골’인데, 우두머리를 뜻한다. 머리통을 ‘골’이라고 하지 않는가? 경남 해안은 아이누 부족이 널리 퍼져살던 곳이고, 아이누어에서 이런 말들은 크거나 높다는 뜻이다. 그러니 대곡이란 큰 부족장이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곡은 사람이 많아서 붙은 것이 아니라 이 일대를 지배하던 부족장이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개똥철학을 내놓았더니, 맘씨 넓은 최 접장은 또 그럴듯하다며 맞장구를 쳐준다.
수박으로 식힌 몸을 이끌고 집청정으로 다시 갔다. 현판 붓글씨가 뼈로 쓴 것 같다고 말했더니, 사람들이 웃는다. 집청정 현판도 그렇고, 그 옆 오른쪽에 붙은 대치루(對峙樓)도, 왼쪽에 붙은 청류헌(聽流軒)도 그렇다. 글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5언절구 주련이 기둥마다 붙었다. 세 칸 정자에 딱알맞은 배치다. 검정 바탕에 흰 글씨인데, 그 글씨 또한 일품이다. 그래서 저건 누가 쓴 것이냐고 물으니 스승이라고 답을 한다. 스승에게 글을 받아서 최접장 자신이 서각을 하여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역시 집은 집주인이 관리해야 한다는 새롭지 않은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 집청정은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으로 잠시 침묵이 뜸을 들였는데, 강철조 부사두가 집청정의 부재에 대해 설명한다. 알고 보니 고건축을 이전하고 짓는 대목장이다. 자신의 직업이니만큼 설명 하나하나가 생생하다. 내 붓글씨 얘기에 핸드폰을 꺼내어 찍어온 현판의 글씨를 보여준다. 글씨가 살아있다. 붓글씨를 조금 배워보면 평면에 쓰인 글씨들이 3D화면처럼 입체로 움직인다.
최 접장의 옛 집과 전시실도 들렀다. 곳곳에 서각이 걸렸는데, 체험실로 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멋진 작품들이 벽마다 즐비하다. 나는 서각을 잘 모르지만 보통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경상도 사나이들의 겸손은 도가 지나치다. 자랑은커녕 칭찬을 해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사래를 친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그렇게 겸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도 겸양을 한다. 대책이 없는 경상도 예절이다.
잔디밭 끝에 과녁이 보인다. 맞은편 2층 원두막으로 올라가니 거기가 사대다. 그런데 백일홍 만발한 저 밭 너머 멀리 과녁이 절반쯤 보인다. 바로 코앞의 과녁은 학생들 체험용이고, 백일홍이 잘라먹은 먼 과녁은 실제 145미터 과녁이란다. 또 한 번 감탄했다. 백일홍 핀 저 과녁을 향해서 한 번 쏘고 싶은 생각이 치솟았지만, 참고 돌아섰다. 천전리 각석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5. 집청정을 떠나며
최 접장의 얘기를 들으니, 반구대 바위 밑으로 가보면, 그곳을 다녀간 옛날 선비들의 이름과 싯구가 엄청 많다고 한다. 이름을 보면 정말 유명한 사람들도 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단양 사인암이 생각났다. 사인암에도 엄청나게 많은 낙서(?)들이 있다. 낙서를 자행한 사람들이 석공을 불러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새겼다. 현행범이다. 조선시대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다녀간 지 반년도 안 되어 파직되었다고 한다. 당파 싸움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대부분 남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성리학의 뿌리가 된 곳이다. 낙서의 자취는 그런 근거이다.
단양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왜 선비들은 이렇게 좋은 곳에 낙서를 하고 돌아다녔을까 하는 점이 늘 궁금했는데, 그 의문이 풀렸다. 이곳은 포은 정몽주의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포은 정몽주가 머문 자취를 찾아서 그의 아득한 후배들이 성지순례 삼아 다녀간 것이다.
성리학은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왔고, 그 비조는 안향이다. 단양에 사는 우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역을 다 이해하고 설명한 사람이다. 그래서 호도 역동, 즉 역이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서면서 사대부들은 선택해야 했다. 조선을 섬기느냐 마느냐? 여기서 권근 정도전 같은 사대부는 조선의 섬기는 쪽을 택했고, 정몽주 길재는 고려에 남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조선은 섰고,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벼슬을 하지 않는 사림으로 남는다. 김종직을 사림의 우두머리로 보는 것은 그가 출사를 하지 않고 길재의 도통을 이어받아 성리 공부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조선을 섬긴 사람들은 이런 법통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사림파를 관리로 임용하고, 사림은 여기에 응하면서 조선 중기 이후의 조선은 사림파가 통치의 주도권을 잡는다.
이렇게 보면 왜 조선의 사대부들이 포은과 역동이 머물던 곳을 찾아왔는지 이해가 된다. 이슬람교도들이 성지 메카를 순례하려는 것이나, 예수교도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이나 같은 맥락이다. 성리학은 종교이기에 그들의 법통을 시작한 선배들의 자취를 찾아서 성지순례를 한 것이다. 그런 자취가 사인암과 반구대에 ‘낙서’로 남은 것이다.
6.천전리 각석
차 2대가 움직였다. 천전리로 간다. 거기에도 그림이 그려진 바위가 있다.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걸어들어가니 개울이 나온다. 개울을 건너 조금만 가면 다시 내리막이고, 거길 내려가면 바로 왼쪽에 천전리 각석이 나온다. 높이 2미터 길이 10미터쯤 되는 바위이다. 마치 기운 칠판처럼 닮았는데, 앞으로 조금 기울어 빗방울에 노출되지 않았고, 거기에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졌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김정배 문명대 이융조가 찾아낸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이들이 어떻게 이 산골짜기의 흙과 이끼로 뒤덮인 이 바위를 뒤져서 그림을 찾아냈을까? 이들이 귀신인가? 이런 의문은 반구대암각화도 마찬가지이다. 학자들이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대학 때 이융조 교수의 강의를 직접 들은 나로서는 이융조 교수의 인품을 잘 안다. 단양에서 사람 뼈가 발견되었다. 시멘트 회사에서 시멘트를 만들려고 돌을 깨다가 동굴을 발견한 것이고, 거기서 뼈 비슷한 것을 발견한 현장감독이 유물이 발굴되면 공사가 지연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교수에게 연락하여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회사 측에서는 짜증 났을 것이다. 결국 거기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고, 한국 고고학계의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그 굴의 이름은 ‘흥수굴’이다. 흥수는 그곳 현장감독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현장 감독의 이름이 김흥수였다. 이융조 교수는 불편을 감내하고 자신에게 연락한 김흥수 소장에게 그런 이름 부여로 값진 보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천전리와 반구대에는 그런 자취가 없다. 백과사전에 '한 주민'으로 남았다. 최 접장은 마치 어제 있던 일이라는 듯이, 이곳이 발굴되는 과정을 잘 안다. 원래 발굴팀은 이 근처의 반고사 절터를 찾아서 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과사전에 설명된 ‘주민의 제보’로 이곳에 이상한 그림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흙 묻은 벽을 씻어보니 실제로 그림이 나왔는데, 처음에는 마애불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끼를 걷어내고 흙을 씻어내면서 점차 마애불과는 다른 그림이 나타나서 절터를 찾아왔던 교수들이 긴장을 하기 시작하였고, 결국은 천전리 각석이라는 국보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어째서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물으니, 그 ‘주민’이 바로 최 접장의 선친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겪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니, 당연히 잘 알 수밖에 없을 일이다. 반구대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가 알려줘서 교수들이 찾아와 조사를 했고, 거기서 탁본을 뜰 때도 아버지가 도와주었고, 탁본을 말릴 때도 집청정 집에 와서 군불을 때며 말렸다. 반구대가 물에 잠긴 뒤에도 조사는 계속 이루어졌기 때문에 물에 잠겼는지 안 잠겼는지 묻는 문명대 교수의 편지가 최 접장의 전시실에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 집청정 주인은 백과사전에 ‘주민’으로 사라졌다. 그러니 이쯤에서 정사에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을, 이곳 야사에서는 기록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최경환. 이 분이 아니었다면 천전리 각석도 반구대 암각화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최 접장에게, 그러면 선친의 직업이 뭐였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또 여기서도 경상도의 지나친 겸양이 끼어든다.
“한학도 조금 하셨고, 농사도 좀 지으셨고, 이것저것 바쁘셨어요.”
경상도 사나이의 겸양을 싹 제거하고 들으면 최경환은 지역 한학자로 분류해야 할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집청정의 그 현판과 기문들이 이렇게 잘 보관되었을 리 없다. 집청정을 그냥 집으로 여겼다면 이런 부착물들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둑들이 떼어다가 파는 마당에 그걸 지키느라 애썼을 리가 없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있고,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볼 안목이 있기에 동네 바위 벼랑에 있는 이상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고, 그것을 학자들에게 안내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눈;이야말로 세계 인류사를 새롭게 쓰게 되는 출발점이다. 그러니 최경환의 이름을 보고서에서 지운 교수들을 대신하여 야사를 쓰는 내가 이 자리에서 야사의 이름으로, 국민의 이름으로, 구경꾼의 이름으로, 인류의 이름으로, 최경환 가문에 감사드린다. 결코 오미자 차와 수박을 얻어먹었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천전리 각석에도 활쏘기 그림이 있다. 천전리 각석은 반구대 암각화와 여러 모로 비슷하지만, 특징이 있다. 뜻을 알 수 없는 무늬가 많다는 것이다. 동물 그림이 많이 그려진 반구대 암각화는 많이 달라서 마름모 무늬, 회오리무늬 같은 것들이 더 많다. 그래서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데, 이 중에 활쏘기 그림이 하나 또렷하게 있어서 여기서도 우리는 활량으로서 묘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고대에 활이란 신의 기물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늘 높이 치솟기 때문에 하늘로 뜻을 전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원시인들이 하늘을 자유롭게 오가는 새를 신의 전령이라고 여겨서 섬기고, 스스로 새의 자손이라고 여겼다는 것도 같은 발상이다.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나 주몽신화가 그런 증거이다. 주몽이 부여군에게 쫓겨 엄체수를 건널 때 활로 강을 치며 탄식하자 자라와 물고기가 나타나 강을 건네준 것도 활이 신의 뜻을 전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요즘에도 무당들은 무구로 반드시 활을 갖춘다. 활은 고대 신성의 상징물이며 신탁의 수호물이다.
이 신성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천전리 각석 밑에 글씨로 쓰였다. 신라시대의 화랑들이 다녀간 자취를 그곳에 남긴 것이다. 이 대곡천 일대는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이다. 당연히 사람들이 오간 곳이고, 그 중에는 화랑들도 있어서 각석 위쪽 야트막한 산봉우리에는 널찍한 터가 있는데, 옛날 화랑들이 수련하던 장소라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그러기에 그 밑의 각석에 그들의 자취가 남은 것이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만작 궁체는 반구대 암각화 속의 활쏘기 궁체와 똑같다. 비슷한 기법으로 그려졌다는 뜻이다. 자세히 보면(마음씨 나쁜 사람에게는 안 보인다^^), 짧은 활을 가득히 당긴 만작 자세여서 금방이라도 화살이 튕겨나갈 듯하다. 이토록 선명하고 리얼하게 그릴 수 있나 싶고, 과연 이게 7,000년 전 사람이 그린 것인가 의심이 절로 들 지경이다. 엊그제 쇠끌을 대고 망치로 때려서 파놓은 것 같다.
결국, 이곳 반구대 주변에서 활쏘기를 한다면 화랑의 얼을 되살리게 되는 일이고, 그 이전 이곳에서 이 돌벼랑 속의 동작으로 활을 당기던 사람들의 얼을 이어받는 일이 된다. 화랑의 옷을 입고 이곳에서 활쏘기를 한다면 얼마나 멋진 풍물이 될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설렘이 인다.
7.또 다른 풍경
천전리에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 있다. 천전리 물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집청정이다. 우리는 차를 타고 오느라고 한 참을 돌아서 왔지만, 물길은 몇 분이면 집청정 앞을 지난다. 대곡천에는 이름난 정자가 몇 있다. 맨 위에서부터 백년정, 집청정, 관서정, 오산정 순이다. 천전리 각석 건너편은 바위이다. 건너가보니 온통 공룡 발자국이다. 발가락이 셋인 공룡의 자취도 또렷하다. 아마도 수백 개는 될 것 같다. 공룡 천국이다.
이곳의 돌은 떡처럼 켜켜이 쌓였다. 그 위 절벽으로 실낱같은 길이 걸렸다. 집청정에서 오는 옛길이다. 그 밑으로는 수로가 있었다. 집청정 동네에서 물을 쓰려고 절벽에다가 대못을 박아서 물길을 낸 것이다. 굵은 나무를 반으로 잘라서 파내고 그것을 절벽의 대못에 걸어서 물이 흐르도록 하여 집청정까지 유도한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지금까지 남았다면 이곳의 멋진 풍물이 되었을 것이다. 집청정에서 물이 끊기면 중간 어디선가 수로가 고장난 것이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서 최 접장은 그 산허릿길로 달려와서 고장 난 부분을 수선하고는 돌아갔다고 하다.
그런데 이 쇠말뚝 때문에 뜻밖의 사건도 일었다. 한 때 일제가 우리나라 산천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서 한국의 정기를 끊었다는 주장이 나왔고, 그것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쇠말뚝 뽑는 의식을 행하고는 했는데, 실제로 이곳에서도 그 쇠말뚝을 뽑는 행사를 했다고 한다. 뜻밖의 광경에 주민들은 말도 못하고 구경만 했다고 한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골라 보는 버릇이 있다. 나는 차라리 그 수로가 지금까지 남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 큰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복원까지 했으면 좋겠다는 주장도 하고 싶다.
8.마무리
경상도 사나이들이 예절을 또 차린다.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잡는 걸 극구 사양하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 눈으로 발품으로 먹은 것만으르도 배가 부르다. 오는 내내 류근원 교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감동을 공유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활쏘기 그림이 많다. 울산에서 활을 쏘는 활량들이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받았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것은, 김동욱 최원석 접장이 그리는 반구대 전통 활쏘기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반구대 모래톱에 솔포를 걸고 개울 건너에서 죽시로 쏘는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쿵쾅거리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활쏘기를 사격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2020년 7월에 활쏘기는 사격이 아님을 국가에서 선언했다. 문화재청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관련 글 : 7,000년 전 울주 천전리 각석(국궁신문 보도자료) 클릭
관련 글 : 선사시대까지 확장되는 한반도 활쏘기 역사(헤드라인뉴스)
참고글 : 한국어 기원은 9000년前 중국 동북부 요하의 농경민(다음)
첫댓글 마치 생중계 하는 듯한 울산 반구대 답사기를 두분 교두님 덕분에 시원한 공간에서 편하게 앉아서
잘보고 갑니다
만약에 반구대전통활쏘기대회가 성사된다면 저도 그 대회 만큼은 꼭 나가보고 싶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그날을 기대해 봅니다
반구대 암각화-이야기는 들었지만 정선생님이 생생하게 현장 설명을 해 주시니 꼭 한번 가 보고 싶어지네요. 암각화의 활쏘기를 현대에 이어나가려는 노력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재미있는 역사공부를 합니다.
여기에 첨부된 반구대 관련 사진자료는 아무나 가져다 써도 됩니다.원본이 필요하신 분은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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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v.daum.net/v/20211120070739332
컬러판 반구대 암각화 사진을 티셔츠로 만들어 입고 다녀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반구대를 보면서 든 생각은 모비딕을 쓴 허먼 멜빌이 이 암각화를 봤다면 대감격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주적 스케일의 대작 모비딕에 걸맞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암각화의 존재를 몰랐죠 소설에는 일본근해가 배경으로 나오는데 바로 근처에 이런 그림이 있는줄도 모르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