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만유의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팔 수 있는 어떤 물건으로 취급하는 일을 금해야만 한다.”
- 그레고리 루이스의 「하나님을 할인 판매합니까?」(Is God for sale?)
역사가 젝슨 리어스는 “번창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소비자 문화는 전국망을 가진 마케팅과 보급 조직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비에 도움을 주는 호의적인 도덕적 분위기 또한 필요하다”고 쓰고 있다(<구원으로부터 자아 실현으로>. 복음주의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부당한 착취를 중단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더 향상시켜 주었으며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를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로 대체해 버렸다.
19세기 말의 복음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는 회심하기 전에 구두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세일즈의 접근법을 그의 복음 전도 사업에 이용하게 되었으며 자기는 복음 전도자이지만 복음을 전할 때에 여전히 세일즈맨이라고 주장했다. 즉, 그는 단지 파는 상품을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세기가 바뀐 후에 빌리 선데이는 강단을 무대로 바꾸기가 일쑤였으며 자기가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자이며 한 영혼 당 단 2달러로 결과를 확실히 보장한다”고 자랑하곤 했다.
무디와 선데이 이전, 복음 전도에 “새로운 수단”의 아버지인 찰스 피니는 “부흥이 하나의 기적이 아니며 어떤 의미로는 기적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수단을 바르게 이용한 철학적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실용주의적 접근이며 에드워즈나 조지 휫필드의 하나님 중심의 복음 전도로부터 복음을 한 발씩 더 멀어지게 한 상업적인 방법론을 창조한 것이다. 산업혁명이 복음 전도자를 한 사람의 기계공으로 바꾸어 버렸으며, 자본주의 혁명이 복음 전도자를 장사꾼으로 변하게 한 것이다. 둘 중 어느 것도 이제는 복음이 더 이상 ---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 못하고(롬1:16), 많이 팔기 위하여 “수단의 바른 사용”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숫자 놀음이 대부분의 목사들과 선교 단체 지도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실제로 교회 지도자들에게 교회 성장 전략을 지도하는 세미나와 그런 세미나를 해마다 개최하는 기관들이 즐비하다. 초대형 교회들과 초대형 프로그램들에 초대형 목사들, 즉 모두가 우러러보는 영적 거인-영적인 헤라클레스들로 가득차 있다. 미식 축구 스타들, 미인 선발 대회의 여왕들과 영화 스타들이 복음주의 신학의 신학자들이 되었으며 그들이 복음주의 대변자가 되었다.
능력 판매
“성경의 해”라는 1983년 한 해 동안 전국은 “삶의 능력” 캠페인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예수야말로 자기 향상-자기 개발에 있어 최상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누구나가 성공과 능력을 원한다. 그 수요를 채워 주기 위해 기독교도 의당 만족스런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나 죄책감 등의 부정적인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지 말아야 하며 은혜나 칭의나 선택이나 대속적 구속과 같은 신학으로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파워 지향적인 이웃들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 하나님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2:1,4,5)는 말을 싫어한다.
문제는 바로 우리의 “복음” 자체를 하나님 중심보다는 상업 중심적인 것으로 바꿔버린 데 있다. 인간 중심주의,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미니안주의나 과거의 계몽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적 유산이다.
미국은 하나님을 포함하여 모든 주권자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문화를 만들어 내었듯이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종교를 창설하였다. 종교개혁이 찬양한 성경의 하나님은 왕으로서 자기 왕국의 국민들을 자기가 친히 선택하고 자신의 나라를 친히 다스리시는 군주셨다. 미국인들이 찬양하는 민주적 신은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국 국민들이 뽑은 시민의 한 공복이다. 이들의 사상 체계와 태도에서 하나님은 머물 자리가 없다. 미국인들은 성경의 하나님이 다만 아무런 방해나 하지 아니하고 한곁으로 빗겨나 있거나 상징적인 존재로서 미국 사회의 공적인 마스코트로 존재하는 한, 자기들의 사업체 안에 머물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경기의 심판이 될 수도 없으며 심지어 직접 몸으로 뛰는 선수도 될 수 없었다. 자기들의 마스코트 노릇이나 하라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하나님을 심부름하는 소년(급사)으로서 봉사하도록 요구했다. 하나님은 공리주의적 이익들의 승인을 얻어 일해야 했다. 우리는 진심으로 미국의 신을 만들기 시작했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다(롬1:25).
지상명령
우리 주님의 지상명령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였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명령이다. 우리의 청중들이 느끼고 있는 수요에 따라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각색되어야 할 여지가 여기엔 전혀 없다.
우리가 성경에서 얻는 교훈은 복음을 값싸게 팔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죄인들에게 호소할 때에 그들의 소비자적인 입맛에 맞게 제공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전혀 성공이 아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은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이지 소비자들을 위한 가맹점들을 내라는 얘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교회 감량 프로그램
로버트 갓프리(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회사 교수)는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우리 주님의 복음 전도 전략을 언급할 때 “예수님의 교회 감량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공짜 점심을 얻어먹은 5,000명은 호수가에 있는 모든 배를 전세내어 예수님을 찾으러 강을 건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규모에 고심을 하셨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가장 먼저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즉, 대규모 군중의 무리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당한 이유로 따르고 있는지 다른 이유들이 있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의 소비자 군중이 따르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그분의 가장 인기 없는 설교 하나를 선포하시기 시작한다. 첫째, 그들의 진정한 문제는 육체적 굶주림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둘째,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그들이 무시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다”(요6:51).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얼마나 배타적이고 강경한가? 이스라엘이 나사렛 출신의 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고 나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3,44). 제자 중 여럿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고 했다고 한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그 말은 교회사에 있었던 복음 전도사상 큰 실패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열두 명이 남았고 그들 가운데 열한 명이 교회의 기초가 되었으며 죽을 가치가 있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자로서 죽었다. 무리가 모여들었을 때(사람들의 회집수가 증가했을 때)에 예수님은 자신의 전략을 바꾸어 사람들이 그들의 전생애 동안 느끼고 믿어 왔던 것을 뒤집어버리는 복음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 동안 30,000명 남짓의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선포하셨지만, 우리는 그분의 제자들을 오늘날 지극히 외딴 지역 족속들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의 텔레비전 설교자들은 매 주일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으나 나는 아직 그 전자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영접한 사람을 한 사람도 발견치 못했다(그러나 나는 그 전자 교회 때문에 복음을 포기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봤다).
제자들은 영상이 아니라 이웃들에 의하여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새신자들은 가까운 이웃 신자들의 신앙이 행동으로 증거될 때 그들의 삶과 행동에서 자기들이 배우고 있는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맛 볼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의 교회 성장 전략은 무엇인가? 성경의 선포와 해명(“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 전혀 힘쓰니라”), 공동체에 대한 헌신(“모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성찬식의 빈번한 시행(“떡을 땜”), 그리고 교회의 권징의 시행(성령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목숨을 앗아가신 사건이 이 권징의 사실을 폭 넓게 보여 줌) 등이다. 초대형 교회의 성장에 대한 누가의 설명은 무엇인가?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성장은 “주께서”하게 하신 것이다.
소비자 중심주의를 수용하면서 기독교는 저급화, 저질화하고 말았다. 기독교의 그 위대한 신비들은 값싼 슬로건이 되어 버렸다. 장엄한 기독교 찬송은 오버헤드 프로잭터에서 투사된 영상을 보면서 따라 부르는 경박한 징글벨 소리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광고주들이 판매를 촉진하기 위하여 고객들에게 보여 주는 영상 이미지들과 매우 흡사하다.
결론
우리는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구원자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상업적 복음 전도가 우리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지만 작금의 부흥 운동은 성경적 신앙과는 아주 다른 운동이다. 그렇지 않아도 냉소적이 될 다음 세대가 훨씬 더 냉소적이 되어 휘황 찬란하던 빛들이 다 꺼져 버리고 초대형 교회가 창고로 변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 교회가 연예 오락 산업의 기술적 세련도를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16세기에 요한 테쩰이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아주 값싸게 죄의 사면장이라는 면죄부를 다음과 같 팔고 다녔다. “돈궤 속으로 동전이 들어가 쨍그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 연옥 속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뛰어 올라갑니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상업주의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루터는 “바로 이 테쩰이라는 자가 면죄부를 들고 다니며 돈을 받고 은혜를 팔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그 잔혹하고, 피 묻은, 사람들을 거슬리게 하는 거침돌인 십자가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신 구세주를 값싼 상업주의자들의 손에서 구출해 낼 때이다. 구세주는 세일로 내놓은 상품이 아니다.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