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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 스크랩 견진성사 종합교리
김흥식이냐시오 추천 0 조회 122 14.06.27 06: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본당 견진성사를 맞이하여, 견진 종합교리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은 아니고, 지난 번 성령강림 대축일에 했었던 성령세미나 강의와 견진성사에 대한 내용을 조금 추가하여 만든 것입니다.
내용이 조금 길기 때문에 필요하신 분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2014년 6월 26일(목요일. 견진성사 종합교리)

+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견진성사 종합교리를 준비하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견진성사’가 무엇인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고, 견진성사를 통해 받게 되는 선물인 ‘성령’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교회법은 제879조에서 견진성사에 대해 정의합니다....

제879조 견진성사는 인호를 새겨 주며 이 성사로 영세자들은 그리스도교 입문의 여정에서 진보하여 성령의 은혜로 충만케 되고 교회에 더욱 완전히 결속된다. 견진은 영세자들을 말과 행위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신앙을 전파하고 수호하도록 굳세게 하고 더욱 철저하게 의무를 지운다.

견진성사는 ‘인호’가 새겨지는 성사입니다. 유효하게 세례와 견진과 성품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박히는 소멸될 수 없는 표지를 말합니다. 즉 인호가 박힌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보호의 수단(창세 4:15), 하느님의 소유를 뜻하는 계약(창세 17:11) 등이 인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하느님의 도장(묵시 7:2-8), 성령의 표지(에제 1:13, 4:30, 2고린 1:22) 하느님의 모상(히브 1:3) 등의 의미로 유비적(類比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역사상 인호에 관하여 중요하다고 여겨온 것은 성사를 받은 결과 남아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인호의 모습이 어떠하든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실은 되물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견진성사를 받는다는 것은 그 인호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난 그리스도교 신자 안할래.’라고 말씀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로 인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인호가 있지만, 견진성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인호가 새겨지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못 박히시는 셈입니다.

그러나 인호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뜻할 뿐이므로 이에 응할 때 비로소 의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 강론에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영광을 찾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셔야만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인정받으실 수 있습니다. 단지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는다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호는 네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① 인호로써 구원의 표지인 교회에 속하고(교회론적 실재성), ②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는 종말론적 선택이 이루어지며(종말론적 실재성), ③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받아들여지고(그리스도론적 실재성), ④ 교회의 일원이 됨으로 인격적인 존재를 규정짓게 된다(존재론적 실재성).

견진성사로써 세례로 새로 태어난 사람이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인 성령을 받게 되고, 이로써 “특별한 능력을 받고” 견진성사의 인호를 받아 더욱 완전히 교회에 결합되며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며 옹호할, 좀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됩니다. 마침내 견진은 성체와 밀접히 연결되는 것이니, 세례와 견진으로 인호를 받은 신자들이 영성체를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되기 위해서입니다.(교회헌장 11항, 선교 교령 11.36항, 사제 직무교령 5항)

그래서 견진성사는 어른의 나이에 도달한 영세자들이 받는 성사입니다. 태어난 후에 성장하듯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신앙의 삶 안에 성장한 어른이 견진성사를 받습니다. 견진성사는 두 번째 세례성사가 아니고, 성숙한 연령에 이르러서 하는 세례성사의 쇄신이고 강화입니다.

그런데 이 견진은 성령의 성사로서 새로운 성령 강림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는 성령을 세례성사 때 받기는 하지만 견진성사 때 충만히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받은 이를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견진성사와 세례성사는 결코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는 성화를 향하여 나가는 두 단계입니다.

견진성사가 ‘성령의 성사’이고 새로운 성령 강림을 의미한다면, 이제 또 다른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령은 누구이십니까?’

이미 지난 성령강림대축일 강론에서 짧게 말씀드렸던 내용이지만, 견진성사를 준비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넘어 ‘바로 그 성령이 도대체 우리 안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가?’도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단지 성령이 누구이신지만 생각하고, 내 안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분이라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따른다. 누구의 이끄심에 몸을 맡긴다.’고 말할 때, 전제가 되는 것은 그 주체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는 정도의 차이가 다를 수는 있어도, 모르는 존재를 따라 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처음의 전제가 잘못되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따르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때, 말은 그를 따른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느님을 따르는 삶,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산다고 말은 하지만 다른 엉뚱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요한 14.17;15.26;16.13)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진리의 영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6,1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다시 어려운 질문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진리는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진리는 정말로 실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을까?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은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본질적이고 심오한 진리는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인간은 스스로 그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이성의 능력을 뛰어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지 ‘하느님이 계시다.’라고 인지하듯이, 인지적이고 존재적인 차원에서만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인간이 움켜잡거나 소유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납니다. 진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며 진리의 말씀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강림대축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일깨워 주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이신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호자’ 곧 ‘도움을 주기 위해 오시는 분’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를 깨닫는 여정을 돕기 위해 우리 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성령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결정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곧 ‘하느님은 없다.’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진리라는 것은 우리의 동의나 바람, 즉 욕심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결정적인 것이 존재하고, 하느님이 계시다고 고백을 하더라도, 우리의 바람이나 욕심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들을 성령의 이끄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나의 우상이 탄생하는 것 입니다. 심각한 것은 이런 우상이 우리 가운데 탄생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것이 마치 ‘하느님’인 것으로 포장하고 그것을 우상으로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의 인간의 모습, 그리고 전야미사에서 살펴 볼 수 있었던 ‘바벨탑’이야기는 그런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진리와 일치한 상태, 하느님과 일치한 상태에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뱀에 다가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지만, 단 한 가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은 금지하셨습니다. 그 일치가 파괴되는 순간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잃고 죽음을 걱정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풍족하게 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뱀에게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하고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먹지 마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지지 마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먹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열매를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져야만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인간은 ‘만지지도 않고자’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존재가 지닌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겠지요. 그저 하느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그 한계를 알고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뱀은 단 한마디의 말로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 버립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 보다 정확히는 존재적 한계 때문에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을 마치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유혹합니다. 바로 하느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이 욕심이 생기자, 인간은 지금의 삶 이상의 것을 찾게 되고 그것을 주지 못하는 하느님에 대한 의심이 일어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뱀이 인간을 교묘하게 죽음으로 이끌 때, 마치 성령께서 인간을 생명으로 이끄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뱀은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 때, ‘눈이 열려 하느님을 알아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과 교묘하게 비슷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을 배신하고서도 자신들이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말하며 스스로를 정당화 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또한 이런 인간의 모습은 하느님을 따라 사는 사람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는” 지혜를 깨닫게 되자, 즉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자, 인간은 하느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생깁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이 경우에도 사람들은 마치 성령께서 ‘일치’로 이끄시듯이, 인간 사이의 일치를 위한 것처럼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정당화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정당화 되는데, 더 이상 하느님은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인간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는데, 앞으로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성령께서는 결코 하느님을 필요 없는 존재로 생각되도록 이끄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일 그렇게 느껴진다면 이미 그것이 성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처음에 제시하였던 두 번째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진리로 이끌기 위해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교회의 삶에서 무슨 일을 하실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이들의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고,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선택의 기준이 되고, 우리의 삶을 이끄는 원칙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아야하는 원칙을 깨고, 그것을 소유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유혹의 순간에 그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에제키엘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다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에제 36,25-27) 이 위대한 예언이 성령을 통해 실현되는 일들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결심을 하든, 바벨탑을 세우자는 결정을 하든, 모두 우리 마음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 또한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성령께 마음을 열면, 성령은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단지 하느님께 돌아서는 결단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습니다. 단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면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데, 그 말을 듣고서도 머뭇거리게 됩니다.

집안에 우환이 가득하여, 점쟁이를 찾아가면 그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리면, 우환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고는 제사를 위해 돈 천만 원쯤 요구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우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흔쾌히 그 돈을 지불하게 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러하였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예물을 성전에 바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제사장들의 이런 행위를 경고하시며 예물이 아니라 신실한 마음과 자비의 마음을 강조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런 폐단을 물리치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미사를 봉헌하는데,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가난한 이들, 소외 받는 이들까지 포함한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독사의 유혹은 살아 있습니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죄의 용서에 반신반의 합니다. 그저 어쩌다가 미사에 일찍 가서 다행히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면 고해를 합니다. 아니면 맙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10분 일찍 미사를 가는 것이 그렇게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해소에 들어가도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정당함을 말하고만 싶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그 죄를 지었고, 사실 그 죄는 나의 의도가 아니라 다른 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바리사이가 그러하였듯이, 자신은 십일조를 바치고 매일 미사에 성실히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죄는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결국 구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공로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큰돈을 벌어 예물봉헌을 많이 하면 은총을 받을 것만 같습니다. 액수가 적거나 미천한 저 과부의 헌금은 아무런 은총도 가져오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마음 또한 하느님은 필요 없는 마음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모든 것을 마련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진리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이 진리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고,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예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듯이 성령은 “모든 진리 안으로”(요한 16,13)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그분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뿐 아니라 그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느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우리가 언제나 예수님과 더욱더 깊은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이것은 우리 힘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내적으로 비춰주지 않으신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실존은 표면적인 수준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그저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은 다음, 신자가 해야 할 의무만 다하면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런 마음은 하느님을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마음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성령의 활동에 마음을 열고 있는가? 성령께 빛을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또한 내가 하느님의 일에 순응하도록 이끌어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몇 명이나 날마다 성령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정말로 하느님에게서 생기를 얻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하느님보다 앞에 놓고 살아갑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선물하시는 그리스도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 전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길로 인도해 주시라고 더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의 빛에 휘감기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번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진리 안으로, 곧 우리 삶의 유일한 주님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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