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를 원하는 남녀들에게”
- <신앙의 말씀 세계 확장 센터>의 광고에서
과거에 우리는, 복음의 기쁨 소식은 죄인들이 바로 원죄와 개인이 지은 죄(자범죄)의 파멸로부터 구원받고 구출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옛날의 복음에서 문제는 바로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을 받아들이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복음에서는 바로 문제가 “어떻게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받아들이는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정 초점의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사회가 가는 데로 교회도 똑같이 간다.
쾌락주의
청교도들이나 개신교도 일반에게는 쾌락 추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불경건한 추구였다. 그들은 방종에 대하여 건전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켐벨의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청교도가 삶에서 모든 쾌락을 완전히 추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합리적인 레크레이션은 허락되었다. 19세기의 청교도 계승자들인 복음주의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금지시키려고 노력했던 것과는 달리 청교도들은 음주를 금지시키지 아니했다. 청교도들은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독신주의 사상을 지지하지 아니했다. 절제는 하나의 덕이지만 금욕은 하나님의 명령과 상충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청교도 성직자는 일찍 결혼하였으며 종종 여인들도 그들의 남편으로부터 의무 이상의 더한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캐롤의 말대로, ‘청교도들은 결혼에서의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의 새로운 연합을 지지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복음은 건강과 재물과 행복의 복음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행복과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과 영광을 위하여 존재한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교회의 이름을 “행복한 교회”라고 지었는데 이러한 이름 속에 이런 태도가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여론 분석가들인 조지 바나와 윌리암 메케이는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전체적으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먹혀 버렸고 심지어 충성스런 종들에게 요구되는 헌신의 대부분을 거부하는, 볼장 다 본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나르치시즘(자아 도취)
나르치시즘(narcissism)이란 말은 수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흠모하여 연못으로 찾아가곤 했던 그리이스의 한 젊은 운동 선수였던 나르치수스(narcissus)에 대한 옛날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미국이 (그리고 일반적으로 서구 유럽이) 그 퇴락의 면에서 얼마나 고대 그리이스와 로마 문명을 닮았는지 주목할 만하다. 쾌락주의(에피큐리안주의의 쾌락 숭배)는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들어 자기들이 생산한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하면서 또 바로 눈앞의 안일과 자기 만족을 위하여 문명의 미래의 이익을 팔아버린 얼빠진 소비자들이 되게 했다. 그들의 연못들과 목욕탕 그리고 온천 등에서 그들은 제 멋대로 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마음껏 발산했던 것이다. 내가 방문했던, 화산 폭발로 재를 뒤집어 쓴 폼페이는 벽들을 뒤덮은 풍부하게 장식된 프레스코들로부터 넓은 온천에 이르기까지 방종의 증인이었다.
나르치시즘은 미국에서 계몽주의 이신론과 함께 처음으로 일어났다. 자기 몰입은 거기에 맞는 신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죄인들이다. 그리고 나르치시즘은 모든 다른 죄들의 근원적 죄이다. 자아 도취를 향한 사람들의 승인과 지지가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데 힘입어 계몽주의는 “나는 나의 운명의 주인이고 내 영혼의 선장이다”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는(비록 반이성주의적이었지만) 사람들을 내면으로 전환시킴으로서 또다른 좀더 집중적인 단계의 나르치시즘을 추구했다. 계몽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직시하도록’(look to themselves) 요구하였다고 한다면 반면에 초월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도록’(look within themselves) 촉구하였다.
개인은 공동체로부터 계속해서 분리되었으며 결국 자기 몰입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몰입 현상은 치유적 행복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였다.
나르치시즘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우리 세대만큼 이 자아 도취에 중독되어 있는 세대는 없을 것이다.
루이드 해리스는 “미국인들의 대다수가 자신들의 외모에 거의 병적으로 사로잡혀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라고 경고한다. 기독교도 기독교적인 외모 가꾸기에 관한 책을 내놓고 있다. 이교들로부터 나올 때는 자아 중심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형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나올 때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되기를 바라는 모습 그대로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슐러는 심지어 얼굴도 붉히지 않고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지 인간 중심적이 아니라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과거에 루터와 칼빈이 신본주의적으로 생각한 것은 적절했다. 그러나 이제는 형세가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아 존중이라는 “새로운 종교개혁”에서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에게서 신적인 존엄성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무엇이나 죄”라고 주장한다. “바로 나나 혹은 다른 인간으로부터 그의 자아 존중을 탈취하는 어떤 행위나 생각이 바로 죄이다”라고 슐러는 말한다.
부흥사 섬람은 “인간의 의지는 주권적이다. 하나님도 그 주권성을 범할 수 없다. 여러분의 의지는 여러분이 책임지고 있다. 여러분이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며 바로 여러분이 운전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케네스 코플랜드라는 작자는 한술 더 뜬다. “신이 당신 안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신이다.” 로버트 슐러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는 말들을 주문(呪文)으로 사용하도록 충고하고 있다.
저울의 추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대한 찬양으로부터 인간의 행복과 선을 위한 능력으로 기울일 때 쾌락주의라는 불가피한 결과가 따른다. 복음주의가 그렇게도 종교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의 신앙에 중요했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에서 하나님을 소비자들의 “행복 추구”에 사용하는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자, 복음주의는 “나 중심주의”가 성장하도록 도왔다.
“(복음주의) 저술들이 하나님 중심 종교보다는 인간 중심주의 종교를 표현하고 있다. 복음주의 저술들은 능력이나 성공, 생활을 운영하는 법, 마음과 영혼의 평안 등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 서적들은 구원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이전의 의미를 버렸다”.
엘톤 트루블러드는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 싸웠던 진정한 영웅들은 전혀 행복에 관한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영웅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행복을 누렸지만 그들이 목표했던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이 관찰은 ‘쾌락주의적 역설(hedonistic paradox)이라고 오랫동안 알려져 왔던 것의 한 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행복이 한 사람의 일생의 직접적인 목적이 되면 행복은 사라져 버리고 반면에 행복이 무시될 경우 행복이 풍성하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물질주의
이제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 온유한 자들, 절망하고 짓밟힌 사람들과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종교가 아니며 오늘의 기독교는 부유한 자들, 거만한 자들, 성취자들, 세력 있는 자들 또 성공한 사람들을 위한 혹은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종교가 되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이, “내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잘 먹혀들어가는 성공 지향적인 「승리주의」가 되었다.”
소위 「번영의 복음」(prosperity gospel, 「성공의 복음」 혹은 「축복의 복음」으로 번역)이란 그 번영의 복음을 장려하는 설교자들에 의하여 그렇게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 번영의 복음은 적어도 (이러한 우상 신을 제공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폭넓은 관중을 확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3세계에서 번영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종교보다 더 심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 운동은 하나도 없다. 로버트 슐러, 로버트 틸톤, 오랄 로버츠, 케네쓰 코플랜드와 글로리아 코플랜드, 케네쓰 하긴, 그리고 선교 방송망을 쥐고 있는 많은 다른 전도자들도 이 물질주의적 복음을 장려하고 있다. 이 금으로 도금한 복음의 핵심은 “이름만 대세요, 요구만 하세요, 그러면 응답됩니다”라는 슬로건이다.
번영의 복음은 “나 중심주의 세대”(Me Generation)에 아주 적합하다.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당신은 가질 수 있다”고 코플랜드는 선언하고 있다. 알라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단지 램프를 세 번 문지르기만 하면 램프의 종인 요정이 나와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이루어 준다.
성경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다”(욥1:2)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바로 이 원리가 선지자들, 사도들, 순교자들, 교부들의 증거였으며, 특히 예수님 자신의 증거였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로 말씀하셨듯이 부자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 견해를 가진 분이시다.
세속적 물질주의 문화가 아주 다양하게 복음주의 안에 침투해 들어와 터를 잡은 것 같은데 그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것이 번영의 복음이다. 심지어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에서조차 물질 축복을 위한 기도들이 (주기도문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를 능가하여 행해지고 있다. 또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이상의 것을 요구할 정도에 이르렀다. 더욱이 심지어 주류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조차 고난과 고통을 위한 여지는 거의 없다.
옛날의 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강한 인격을 일구도록 했다. 고난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심지어 가난과 패망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석될 수 있다(욥). 환난과 고통이 뉴잉글랜드의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불가해한 충격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인격을 조성하고 형성하는 하나님의 합당한 계획과 목적의 일부로서 오는 것으로 간주했다. 현대 복음주의 전도자들은 그 원인을 마귀에게 돌리거나 혹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돌림으로써 우리 조상들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그 힘든 항해를 하면서 또 삶을 초토화시키는 절망적인 겨울 동안 의지하고 마음속에 생각했던 그 닻을 잃어버린 것이다.
해답은 하나님 중심 신학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경건한 인격은 법과 규율, 도덕성의 촉구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경건한 인격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됨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될 때 형성될 수 있으며 그것도 우리들이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급진적인 계시에 의하여 변화가 되는 것이다.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