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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3․1운동의 중심 인물 차희식
이 동 근(수원박물관 전문위원)
1. 차희식의 고향, 삼괴지역
차희식(車喜植)은 1870년 11월 10일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출생하였고, 봉습(奉習, 鳳習), 춘섭(春習) 등의 이명을 가지고 있었다. 현저동에서 출생한 이후 줄곧 화성시(당시 수원군) 장안면 석포리에서 생활하였고 부인 이씨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우정면 주곡리에 거주하였다.
차희식은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술이 높아 여러 사람들과 교유가 많았고, 힘도 장사였다고 한다. 차희식의 부인은 양영대군파 전주이씨로서 구술리에 거주하였던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차희식이 자라고 생활한 석포리와 주곡리 주민들은 대부분이 유교를 숭상하였고, 대부분 연안 차씨와 장씨 집안들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석포리 마을에는 연안 차씨들이 100여 호 모여 살면서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은 조선시대 이시애의 난 때 순직한 강열공의 사당이 있어 전통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차희식의 고향과도 같은 우정면과 장안면은 경기도 서남단에 위치한 반도로 예부터 세분의 정승(김상로․정태화․이정구)을 배출했다 하여 삼괴(三槐)지역으로 불렸다. 조선후기 이 지역은 남양군 압정면(우정면), 장안면으로 있을 때 동리마다 서당이 있어 책 읽는 소리가 계곡을 울려 퍼질 정도로 어느 지역 보다 교육과 문화의 수준이 높았던 곳이었다.
일례로 이곳의 차씨 가문 사람들로 당시 차희식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한 차병한과 차병혁 등은 유교적 소양이 높고 민족적 성격이 강했던 지식인층이었다. 3․1운동 당시 석포리 구장을 맡고 있었던 차병한은 당시 35세로 석포리에 사는 차병혁과는 8촌간이었다. 그는 1913년 2월부터 석포리의 구장이었으며, 13세부터 한문공부를 하여 통감, 논어, 맹자 등 기본 한학을 공부한 지식층이었다. 차병한은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열렸던 3월 27일의 구장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한편 차병한은 1918년 여름까지 매일신보를 직접 구독하였으며, 그 후에는 7촌이 되는 차상문의 집에서 매일신보를 보고 3․1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차병혁은 3․1운동 당시 31세로 우정면 석포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지주 송영만의 마름을 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친 차상문과 동생 차병억은 포목상을 하고 있었다. 차병억은 당시 솔가리 수백개를 사 모아 배에 실어 서울 쪽으로 싣고 가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차희식은 차병한과 차병혁 보다는 한 항렬이 높았으며, 문중의 이러한 전통적인 유교적 분위기 속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전통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소양을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3․1운동 당시 49세(판결문 44세)로 이 지역의 장년층으로서 마을의 젊은이들을 통솔할 수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농민군의 활동과 의병운동을 지켜보아왔다.
차희식에 대한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의 부족으로 직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활동은 3․1운동에 대한 것뿐이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차희식이 살면서 활동했던 화성지역의 역사적,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펴보고, 우정․장안면의 3․1운동 속에서 차희식이 보여주었던 업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삼괴지역에는 여섯 개의 포(浦)가 있어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고, 작은 선박들이 드나들며 물물교환이 성행하였다. 그러다보니 임진왜란 당시에도 왜군이 이 곳 남양만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아 주민들에게 해를 끼쳤고, 청일전쟁 당시에도 남양군 내에서는 제일 먼저 일본의 침략 야욕에 다른 곳보다 크게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삼괴지역은 아산만의 관문으로 청군이 아산에 주둔했을 때 일본군은 포항에 있던 여단 병력을 이곳에 상륙시켜 안중과 평택을 거쳐 직산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후방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일본군은 압정면(우정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의 함대와 해전을 전개해 청군 함대를 격파하는 한편 아산에 주둔한 청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기지로 삼았다. 때문에 압정면(우정면) 해안지방에 상륙한 일본군의 수탈과 민폐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차희식은 성년의 나이로 조선후기 일제의 침략 야욕과 그 피해를 고스란히 경험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사회모순은 농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1860년 4월 최제우에 의해 ‘동학(東學)’이 창도되었다. 동학은 당시 신분제 사회에 억눌려 있던 일반 농민들에게 새로운 평등사상을 제공하며 전파되었다. 결국 동학은 민족과 민중을 바탕으로 한 사상과 그 조직체를 바탕으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봉건제의 모순에 반대하고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며 민중들의 의식은 성장했다.
차희식의 생활했던 화성지역도 일찍이 동학과 기독교가 전파되어 민족의식이 강했고, 특히 동학이 천도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천도교의 교세가 매우 강하여 지역 주민들은 자주의식과 독립의 의지가 투철했다.
조선후기 봉건체제의 모순 속에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 곳 민중들도 분노를 폭발시켰다. 1889년 김홍집이 수원유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전승지 김명기와 전군수 윤수영의 가렴주구에 대항하여 수백 명의 민들이 성내에 모여들어 관아와 관리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1891년에는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에 주둔하는 현륭원원군(顯隆園園軍)이 능참봉 민병성의 탐학에 대해 봉기하여 이를 규탄하였다. 이러한 탐관오리들에 대한 대항에 이어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도 지역 주민들은 반봉건․반침략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항쟁하였다.
이 곳 남양지역 민들은 1894년 6월 28일에 고을 관아를 습격하면서 봉기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관리의 탐학에 대한 항거였다. 남양부민의 주모자는 정인식과 이군옥 등이었다. 또한 당시 우정․장안면의 농민들도 수원의 고석주 접주가 거느리는 농민군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일본군과 관군에 패하여 많은 피해를 입은 후 백낙렬의 인솔 하에 집으로 돌아와 관헌들의 눈을 피해 포덕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이 지역은 의병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이 남양만 일대의 도서지방으로 피신하여 수적(水賊)세력과 연계하여 활빈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00년 무렵부터 남양군을 잇는 경기도 남서부 해안지대는 수적의 항일항쟁이 지속되었다. 이곳은 바닷길로 중부 이남지역과 연계하기가 쉽고, 또 서울과도 가까웠다. 곡창지대인 충청도, 전라도에서 생산된 곡물이 세곡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었으며, 인천에서 선적된 화물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길목이었다. 남양만 일대는 지리적으로 항일 항쟁의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지역의 의병세력의 지역적 분포는 강화에서부터 인천 앞바다 영종도와 남양만 앞바다 대부도, 영흥도 등지였다. 이들은 부근 각처 섬으로 연결하였는데, 남양지역 해안에 상륙하여 수원 방면으로 진출하곤 하였다. 이들 수적출신 의병들의 근거지는 두 곳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남양군 양정면(兩井面) 일대에 주둔하였고, 단 한 세력은 수원군 서남방의 고온포(古溫浦)를 근거지로 삼아 주둔하였다. 남양만 해안지역 고온포를 근거지로 삼던 의병은 1907년 11월부터 남양만 일대에서 활동해온 정주원 부대이거나 또는 신경춘 부대로 알려져 있다.
또한 수원을 중심으로 양성(陽城)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천하준(千河駿, 당시 千主事로 불리움)이 많은 의병을 거느리고 남양군 삼괴(三塊)지역에서 크게 활동하였다. 당시 우정면과 장안면 지역에서 의병장 천하준은 방곡령(防穀令)을 내리고 쌀의 일본유출을 차단시켰다. 이때 삼괴지역 일부 주민들이 서울에 있는 양반지주의 조(租) 수백 석을 싣고 포구를 벗어나려 하자 의병들은 이를 빼앗아 부근 일대의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일제는 남양군과 수원군 접경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과 수적을 진압하기 위하여 남양수비대와 수원수비대에 명하여 수시로 토벌대를 파견하였고 이들은 수차 의병들과 충돌하였다. 또한 일제는 큰 군함을 이용하여 도서 각지를 수색하고 정찰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판단되자 큰 군함은 철수하고 기동성이 강하고 해안에 쉽게 상륙할 수 있는 수뢰정으로 바꾸어 수색과 토벌을 강화하며 인천 연안과 남양만 일대에서 대대적인 의병 소탕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1908년 9월 의병은 남양군 송산면 민가에 들어가 금품을 요구했고, 11월 14일에는 남양에서 활동하던 의병 10여 명이 남양군 저팔리면(楮八里面) 자양동(紫陽洞)에 진격하여 부호의 집에서 군수 물품에 필요한 경비를 징발하기도 하였다.
전기의병 시기에는 척사론적 유생층을 중심으로 한 의병운동이 이어졌으나, 그 항쟁은 일반 지역 민중들과 결합하여 반침략적 항일투쟁으로 격화되었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많은 의병들이 남양군과 수원군에서 활동하였고, 일부는 남양만 일대의 여러 섬으로 흩어져 농민군 및 활빈당의 수적세력과 연합하여 항쟁하였다. 이 지역의 의병은 자연발생적 측면이 강하였다. 그 참가층의 중심은 농민층으로 역사 속에 나타난 의병운동의 전통과 가까이는 동학농민군의 항쟁과 계속되었던 활빈당 활동 등 민중적인 저항 성격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화성 3․1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지역민의 처지
1910년대에 농민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정책의 시행으로 기존에 지녀왔던 농민적 제권리(도지권, 입회권, 영소작권)를 박탈당하였다. 그로 인해 농민들의 토지상실과 토지로부터의 이탈과정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토지소유로부터 이탈된 농촌 과잉인구는 대부분이 그대로 농촌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농가 1호당 평균 경작면적을 축소시켰고, 농업경영의 영세화 현상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화성지역의 주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처지와 상황은 전통적으로 대부분이 농민이었고, 주로 소작농의 위치에서 일제에게 수탈과 탄압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일제는 전통적으로 농업선진지역이었던 수원군(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양군과 수원군이 수원군으로 통합됨)에 잘 정비되어 있던 농업기반시설을 토대로 식민농정의 정책기구인 권업모범장을 1906년에 설치하였다. 일제는 권업모범장이라는 식민농정의 전위기구를 설치하여 곡물 종자를 강제로 바꾸며, 생산과정에 직접 개입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농업기술을 일방적으로 도입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동척농장이 설치되었고, 많은 일본인 지주들이 혜택을 받으며 이주하여 이곳의 소작인들은 그들의 경제적 예속관계에 놓이며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식민농정의 피해자로 전락해 갔다.
1922년 12월의 조사에 의하면 수원군은 경지면적 34,440정보 중 자작지가 33%, 소작지가 67%였다. 농업자는 22,581호의 123,711명으로 수원군 총호수 대비 83%에 해당한다. 이 중 소작농의 비율이 53%, 자작겸 소작이 37%, 지주는 4%, 자작농은 6% 정도였다. 이 통계로 보았을 때 수원군이 전통적인 농업지대였음을 알 수 있고 농민들 대부분의 처지는 소작농임도 알 수 있다. 수원군의 경작지 중 논의 71.8%, 밭의 60.8%가 소작지이다. 이 중 우정면은 논의 71.5%, 밭의 63.6%, 장안면은 논의 66.8%, 밭의 62.9%가 소작지이다. 그리고 수원지역의 자작 겸 소작과 소작의 비율은 88.1%이며, 순소작농만도 51.6%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중 장안면은 92.2%, 우정면은 91.7%가 소작농이었다. 장안면과 우정면은 소작농의 비율이 수원군의 평균보다도 높게 나타나고 있다. 우정․장안면은 소작농지의 비율이 다른 면들 보다 높지 않게 나타나는 반면 소작농의 비율은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개인 소작농의 소작지가 다른 면보다 적다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우정․장안면의 소작농들은 다른 면의 소작농들보다도 더 열악한 처지였음을 알 수 있다.
우정․장안면을 포함한 남양군의 주민들은 열악한 소작농의 처지뿐만 아니라 일제의 강압에 의해 송충이를 잡는데 동원되고, 바닷가의 간척공사 등에도 강제로 동원되어 이중고를 겪고 있었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사에 고용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처지와 일본인들의 진출은 우정․장안면을 중심으로 한 남양지역에 또 다른 경제적 변화를 몰고 왔는데 그것은 염전의 침탈이었다. 남양군의 경우 주민들의 주업은 농업이면서 대부분이 부업으로 염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남양은 경기도에서 제일 큰 규모로 제염이 행해져 전통적으로 전국에서도 잘 알려진 소금 생산지였다. 그런데 이러한 남양의 염업은 개항이후 일본염의 수입과 중과세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1885년 일본상인에 의해 수입된 일본염과 1903년에 수입된 청국염은 조선염의 반값으로 판매되어, 제염업자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또한 당시 남양군의 염전 형태는 전통적으로 행해졌던 방식인 염분이 농후한 함수(鹹水)를 만들어,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전오제염법(煎熬製鹽法)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자연적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천일제염법(天日製鹽法)을 조선에 도입하려고 1907년에 주안에서 천일염전을 실험한 뒤 1909년 본격적으로 천일염전을 설치했다. 이로 인하여 남양의 염전 규모가 줄어드는 상황까지 초래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1907년 염업조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염업조사는 생산지, 생산관계, 생산방법, 판매 등에 대하여 조사되었다. 생산지의 조사는 염세부과를 위하여 생산고까지 상세하게 조사되었다. 일제는 이를 통하여 재정수입의 확대와 종래의 한국인 제염업자를 제거함으로써 염전주와 소작관계 또는 한국인 제염업자의 경영을 해체하려고 했다. 그리고 구종업원만을 노동자로서 흡수함으로써 식민지적 생산관계를 창출하고, 나아가 전매제의 실시를 모색하였다.
1907년 통감부의 염업조사에 의하면 남양군의 염전지주는 301명이다. 염전지주는 명으로 계산했지만 소유주이므로 이는 호수로 볼 수 있다. 이에 딸린 소작염민까지 합하면 상당수의 농민들이 부업으로 염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제 통감부는 1906년 10월 조세징수규정을 제정하였다. 통감부는 면장, 임원에 의한 지세의 부과를 세무관 또는 세무주사와 면장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세수취구조로 바꾸어 군수와 이서층을 배제했다. 군수의 지세수취권이 세무서로 넘어갔고, 지세가 일본의 은행으로 납부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반발하여 납세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염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염민들도 반발투쟁으로써 염제조면허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제조업자들은 장부를 작성하지 않고 소금을 만든 즉시 이를 반출함으로써 대부분 염세를 납부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양군의 염세저항운동의 발단도 조세징수규정에 있었다. 남양군에서는 1906년 군수 방한덕이 염세를 늑봉하여 염민들의 원망이 자자했다. 그리고 1907년 5월에는 염민 수십 명이 탁지부 앞에 몰려가, 원래 매 염정(鹽井)에는 매년 봄과 가을로 나누어 평당 40냥 씩 세금을 걷기로 되어 있는데도 수원세무관이 탁지부 훈령이라면서 매석(每石)에 3냥 씩 납부케 하여 살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남양군에서는 본격적으로 1906년부터 염세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07년 말까지 염민들은 염세 납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통감부는 세무주사들에게 염세를 완납시키라는 독촉을 하였으나, 오히려 염민들은 조직적인 저항을 위해 ‘염업회의소’를 출범시켰다. 일제가 염전을 줄이고 염전주들을 더욱 곤궁한 처지로 내몰았고, 여기에 소금의 수출은 줄고 수입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 염민들은 민회와 같은 조직인 염업회의소를 만들어서 적극적인 대항을 해나갔다.
당시 남양군에서 염전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 거묵골의 우경팔과 기봉규는 천도교 신자였고, 이들은 많은 성미를 내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우정․장안면의 3․1운동에 동참했던 많은 사람들이 염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밝혔다. 김삼만은 운동 당시 제염소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가 운동에 참가했으며, 최경팔, 박경모, 김성순, 정순업 등도 조서에서 염전에 가서 소금 굽는 일을 했고, 해가 진 후 늦게 귀가했다고 진술하며 알리바이를 대기도 했다. 남양군의 대부분의 농민들은 이처럼 농한기에는 염전에 가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던 일제 염업정책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었다.
이렇듯 남양군의 지역민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일제 식민통치의 최대의 피해자였다. 특히나 일제의 경제적 침략으로 염업 등에 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염민들은 염세납부를 거부하는 적극적 조세저항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은 3․1운동이 이 지역에서 격렬하게 전개되는 배경이 되었고, 그 조직력은 3․1운동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유교의 종교 조직과 함께 하나가 되어 나타났다.
3. 우정․장안면의 3․1운동과 행동대장 차희식
1910년대 일제의 혹독한 무단통치와 식민지체제는 결국 강력한 민족적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조선의 민중들은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적극적으로 맞서며 3․1운동을 일으켰다. 3․1운동은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의 강압통치에 저항한 민족해방운동의 정점이었다.
서울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3월 1일의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3월 1일 이후 전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지역의 여건에 따라 그 시기와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다. 3․1운동은 지역적․시기적으로 분산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운동에 참가한 계층들은 지역적으로 정신적․종교적․경제적인 기반이 다르며, 또한 일제의 식민통치에 의한 피해도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다.
화성지역의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사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곳이다. 화성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어 일본 순사 노구찌(野口廣三)를 처단하였고,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주민이 피살되었으며, 이에 주민들은 한층 격해져서 4월 2일에는 주변 14개소의 산상에서 횃불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 2천 5백여 명이 참여하여 일제의 말단행정을 수행했던 우정면사무소와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파괴하며 일본 순사 가와바다(川端豊太郞)를 처단하는 등 격렬한 항쟁의 기치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행위로 4월 15일 제암리 교회당에 주민들을 가둬 놓고 불을 질러 살해한 ‘제암리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조직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다양한 계층들과 전 지역 주민의 참여와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3․1운동이 비폭력운동이었다는 것과는 달리, 지역적 배경 속에서 적극적인 저항의 형태를 띠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질적으로 3․1운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역적으로 확산되어가면서 조직적으로 폭력투쟁화하였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방식과 경제정책으로 인하여 지역민들은 생존권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들의 처지 또한 열악한 상황으로 전락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의 공격 목표가 주로 면사무소와 주재소였던 것은 면사무소의 경우 면장이나 면서기들이 친일을 하거나, 일본 통치의 하수인으로 앞장서고 있었고, 면사무소는 일제 정책을 집행하는 말단 통치기구였기 때문이었다. 우정․장안면에서는 장안면장 김현묵이 끌려 나와 시위 군중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시위에 참여했고, 우정면장 최중환은 집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도망쳐 시위 군중들의 원한을 샀다. 또한 면사무소의 공격에서 지세를 비롯한 서류들이 소각된 것은 일제 통치의 근거를 제거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백낙렬과 김흥렬의 주도아래 천도교 전교사들을 중심으로 사전 조직되고 모의되었다. 천도교 전교실은 우정․장안면의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기에 교도들과 주민들을 동원하기가 더욱 용이했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3월 27일에 보를 쌓는 일로 구장회의가 열려 만세운동이 사전 계획 되었다. 사실 우정․장안면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은 구장(里長)들이었다. 백낙렬은 수촌리 구장이면서 장안면의 구장대표이기도 했다. 차병한도 석포리 구장의 신분이었으며, 주민들을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장들은 누구보다도 향촌조직을 쉽게 통솔할 수 있었으며, 지역민들의 일제 수탈에 대한 정서와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구장회의에서 석포리의 구장 차병한이 만세를 부르자고 했으며, 또 4월 3일에도 시위 전에 차병한과 차병혁 등이 장안면사무소에 가서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우정면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시위주동자들은 이미 계획되어 있던 3․1운동에 면장의 동참을 촉구했다.
시위주동자들은 시위 군중을 모으는 방법 등을 의논했고, 각 동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으니 각호마다 1명 이상씩 나오게 하자고 결정했다. 그리고 4월 3일에 주민들을 쌍봉산에 집결시키기로 했다. 이외에도 중요한 논의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일본인 순사 처단과 주재소 및 두 개의 면사무소를 파괴할 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이것은 주도면밀한 사전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고, 실행에 옮겨졌다. 3․1운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 날 시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면사무소 및 주재소의 파괴, 일본 순사의 처단이었다.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은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도 미리 알고 있었으며, 독립에 대한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4월 3일 오전 11시 장안면사무소에 약 2백여 명이 모여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장안면장 김현묵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쌍봉산을 향하여 출발했다. 군중들은 수촌리 천도교 전교실에서 만든 태극기와 깃발 그리고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쌍봉산에는 약 1여천명이 모여 있었고, 군중들은 오후 3시경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집기류들을 파손하고 불에 태워 버렸다.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군중들은 장안면장을 다시 앞세워 태극기를 들게 하고 군중의 선두에 세운 뒤,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오후 4시경에 화수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앞에서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곧 주재소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놀라 도망치는 가와바다(川端豊太郞) 순사가 권총을 발사하여 시위군중 1명이 넘어져 숨졌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가와바다 순사를 추격하였으며, 가와바다 순사가 도망가며 쏘아댄 총에 3명이 쓰러졌다. 도망가던 가와바다 순사는 곧 수십 명에게 포위되었고, 장안면 수촌리의 이봉구가 곤봉으로 순사의 후두부를 내리쳐 넘어뜨리고, 수십 인이 달려들어 순사의 얼굴 및 전신을 난타하여 순사를 처단했다.
당시 주곡리에 살고 있던 차희식은 주로 시위 군중들의 앞에서 직접 행동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차희식은 행동대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있던 수일 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유서방으로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주도한 차병혁, 차병한 등과는 일가였으며, 차희식이 한 항렬 높은 어른이었다. 차희식은 동지인 장제덕, 장소진, 김흥식 등과 함께 행동대로서 만세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차희식은 1915년 도박죄로 태형 60의 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결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 판결을 취소 받고 징역 3개월의 집행을 마쳤었다. 그 후 가와바다 순사가 부임한 이래 도박을 하지 말라는 권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항상 감시를 받고 있었다. 가와바다 순사는 도박 단속을 핑계로 동민들을 감시하며 통제하고 있었다. 사실 전통적으로 농민들은 농한기에 서로 모임이나 회합을 가지면서 단순한 놀이로 도박을 하기도 했는데, 일제는 이를 풍속죄로 단속하면서 동민들의 모임과 회합 속에서 일제에 대항하는 분위기를 억누르려고 했다. 실질적으로 풍속죄로 단속되어 잡혀가 벌을 받았던 사람들은 형을 마치고 돌아와 적극적인 항일의지를 불태웠으며 동민들의 영웅이 되었고, 3․1운동 당시에는 운동의 주동자가 되었다.
차희식은 차병한․차병혁과 함께 이영쇠 등에게 장안면 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계획을 알려서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연락하는 한편, 자신은 장제덕, 장순명, 장봉래, 이치덕 등과 함께 석포리 주민들에게 “오늘 한국독립만세를 외칠 작정이니 각 집마다 남자 1명 이상이 나오라”고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면서, 주곡리 구장 한규명(한규회)에게 “동리 사람에게도 전달하여 모두 나오기로 되어 있으니, 당신도 쌍봉산까지 나오라”하여 동리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우정면 주곡리와 석포리 주민들의 선봉에 섰다.
차희식은 군중 200여명이 모인 장안면 사무소에서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다시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이어서 차병혁․차인범과 함께 2천여 명으로 늘어난 만세시위 군중들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그 곳의 건물을 파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그리고 시위 군중들과 함께 화수리에 있던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불태워버렸다. 이때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가와바다가 권총을 발사하며 도망가자, 장소진 등과 함께 추격하여 이봉구 등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그를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운동 이후 잠시 산속으로 도피해 있던 중 4월 5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9년 2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 대부분은 서울 현저동에서 기거하다가 69세의 나이로 1939년 10월 18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2천 5백 명이라는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이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한 결과였다. 그것은 지역 주민들이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한 피해를 절감하고 있었으며, 백낙렬, 차병한 등의 구장과 차희식 같은 마을 지도자들의 투철한 항일 의식이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만세운동의 선봉에 서서 주민들을 격려하고 이끌며 조국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선열들의 정신은 오늘날의 큰 교훈으로 남아있다.
정부에서는 차희식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차희식의 묘소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또한 차희식이 기거하였던 집이 현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 81번지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상태로 남아있어 고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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