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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 마치면 애국한 듯 보람되다] 부산 신항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갠트리 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는 황월영씨[52세]. 그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총 높이 55.8m[조종석 높이 28m]의 갠트리 크레인. 황씨는 14년째 수출입 컨테이너 박스를 배에서 부두로 내리거나 부두에서 배로 선적하는 일을 하고 있다. 황씨는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한복점을 운영하셨고, 아버지는 사회봉사 활동을 주로 하셨다. 고향에서 초·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집안의 경제 사정을 감안해 수산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1986년 고등학교 졸업 후에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중장비 자격증을 따는 것이 붐이었다. 중기차 운전 수요가 증가하면서 자격증만 있으면 어디든 쉽게 취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씨는 자동차 1종 보통을 시작으로 지게차 자격증까지 취득하였다. 황씨처럼 중장비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학력이 요구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중학교 졸업 이상은 되어야 업무 수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중장비 기사만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은 아직 없고, 공업고등학교나 직업 훈련원에서 관련 과정을 이수할 수는 있다. 또 사설 학원을 통해 단기 훈련을 마치고 자격증이나 면허증을 취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면허가 있다고 하더라도 업무의 성격상 해당 업체나 회사에서 숙련된 운전원의 감독 하에 최소 3개월부터 일정 시간 동안 운전 기능 습득이라는 수련 과정을 거쳐야 현장에 투입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격증을 딴 후에도 황월영씨는 생각처럼 취업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천 숭의동 연탄 공장에 첫 직장을 얻었다. 그곳에서 1년 정도 근무하면서 덤프차 면허를 딴 뒤 군복무를 다녀왔다. 제대 후 5년 정도 부산에서 덤프차 운전을 하였다. 낮에는 부산 지하철 공사 현장, 밤에는 만덕 터널 공사 현장을 누볐다. 이 무렵 부모님이 형제들의 귀향을 종용하여 부산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박물관 사업을 잠시 도왔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해서 전에 따 둔 자격증을 믿고 한진해운에 입사 원서를 제출하였다. 중기차 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에 트레일러 운전 시험을 쳐서 합격한 후에 한진해운 울산 지사에 첫 발령이 났다. 이후 부산 재송동 한진해운 본사로 발령이 났고, 그곳에서 트레일러 운전을 하였다. 회사 창고 안에서 운전하며 근무하는 형태였다. 트레일러는 워낙 경쟁이 치열하여 회사로부터 언제 자신의 트레일러를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황씨는 과감하게 직종 변경을 희망하여 중기차 운전인 지게차로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따 놓았던 지게차 면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3년 동안 회사 내에서 지게차로 컨테이너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지게차 운전을 하면서 크레인 운전면허에 도전하였다. 기회가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일이지만 곧바로 투입 가능하도록 면허를 우선 만들어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TC 같은 경우는 높이가 아파트 5층 정도 돼요. 인간이 일반적으로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래요. 고소 공포증이 없는 사람도 이 높이에 서면 못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무인 자동화 시스템인가 하는 게 고소 공포증보다 더 무서워요. 부산 신항 사무실에서 자동으로 다 조정하니까 TC 운전기사들은 일자리가 그만큼 없어지는 거죠. 한진해운이 신항만에 자동화 터미널을 도입하면서 업무 효율 면에서는 수동으로 할 때보다 나아졌겠죠. 속도도 그만큼 개선되고, 일 처리 시간이 정확하게 예측되니까 후속 업무도 미리 미리 대비할 수도 있고. 뭐 예를 들면 몇 시까지 다 선적할 수 있다는 말로 화주에게 신뢰감도 줄 수 있잖아요. 우리는 좀 허무하죠. ‘오라이’, ‘스톱’하는 소리가 사라지니까 신바람도 안 나고. 나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고. 뭐, 그래요.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황씨는 갠트리 크레인을 운전한다. 이름은 ‘갠트리’, ‘골리앗’, ‘STS’ 등 다양하게 불린다. 황씨의 첫 갠트리 크레인 운전은 감천 부두였다. 1990년 후반에 감천 부두가 생기면서 운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10년 정도 감천항에서 운전하다가 2008년 부산 신항이 개항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부산 신항에서 한진해운이 소유한 갠트리는 모두 12대란다. 한 조에 19명씩 3개조가 3교대로 근무하며, 12대를 관리 운전하고 있다고 했다. 황씨는 조장을 맡고 있다. 감천항에서 일할 때는 갠트리가 4대였고, 한 조에 8명씩 2개조로 관리했는데, 부산 신항의 근무 환경이 더 열악한 셈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황씨는 고소 공포증이 없고, 트레일러와 지게차 운전 경험이 있고, 회사 동료 기사들에게 크레인에 대한 이야기도 꽤 들었다. 이런 간접 경험 등이 왠지 크레인을 익숙하게 해 주었다. 고생은 덜었지만 사고를 몇 번 목격한 뒤부터 굉장히 조심하게 되어 일의 속도가 더디다고 한다. 크레인 사고는 인명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셀 가이드(Cell Guide)에 컨테이너가 끼이는 사고나 컨테이너가 손상되는 사고가 발생하면 입장이 난처해진다. “컨테이너는 선박으로 화물을 반복적으로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도록 「선박 안전법」에서 규격화해 놓은 직사각형의 용기예요. 선적 및 양하하는 데 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수송 대상 화물을 커다란 상자 속에 넣고 이 상자를 그대로 선박 등의 수송 수단에 기계로 적재하여 편리하고 신속한 수송이 이루어지도록 만든 거죠. 현재 곡물 등 살물[撒物, 포장하지 않은 상태로 운반되는 화물]과 유류 등 액체 화물 이외의 화물은 대부분 컨테이너를 이용한 수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면 돼요. 컨테이너의 재질은 일반적으로 강재 또는 알루미늄이 많이 사용되고 있고요. 이런 컨테이너는 셀 가이드에 따라 고정적으로 격납되는데, 그 간격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면 끼이고 파손의 우려가 발생한다는 거죠. 클레임 요청이 들어오면 싫은 소리 들어야 되고 그러면 자존심도 상하고요. 무엇보다 금전적인 손해가 커요. 사고 처리까지 시간이 소요되면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손해도 있고, 또 수리 경비도 들어가니까요.” 황씨의 갠트리 크레인이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는 40.6톤이다. 51m의 긴 팔을 가지고 있고, 총 중량이 761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일꾼이다. 황씨는 자신이 조종하는 갠트리 크레인으로 시간당 20ft 컨테이너 박스 25개를 들어 올리고 내린다. “항만 근무의 특성상 설과 추석 명절을 제외하고는 별도의 휴일이 없는 것도 큰 어려움이죠. 가족과 함께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 한 게 늘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힘든 것은 야간 근무 때 고공에서 혼자 근무하면서 느끼는 피로입니다. 밤새도록 휴식과 작업을 번갈아 가며 똑같은 작업을 하다 보니 내가 기계가 되는 느낌을 받아요.” 황씨와 같은 크레인 기사의 작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작업 지시서를 보고 운반할 블록을 확인한다. 크레인의 작동 상태를 확인한다. 전원을 확인하고, 신호수와의 통신 상태를 확인한다. 와이어로프와 새클[Shackle, 연결용 쇠고랑]을 체결하고, 신호수의 신호에 따라 작업물을 감아올린다. 작업장 주위의 상태, 주위 시설물 등을 고려하여 주의 깊게 이동한다. 신호수의 신호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놓는다. 작업이 종료되면 장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전원을 차단하여 크레인의 작동을 중지시킨다. 이 작업 과정이 익숙해지면 여기서 어떤 부분을 더 배울 필요는 없고 단순한 일을 무한 반복하는 업무다 보니 황씨처럼 내가 기계인지 기계가 나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수많은 컨테이너 박스들이 자기 손을 거쳐 간다는 자부심에 늘 가슴이 뿌듯하다고 한다. 갠트리 크레인 기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황씨지만 요즘 고용 불안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형제와 같이 일해 온 동료들과 함께 안심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왔으면 하는 게 그의 최고 바람이다. “한때 갠트리는 ‘항만의 꽃’이라고 불렸어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임금도 좋았고, 근무도 기계 1대에 기사 2명꼴이고 2시간 일하고 2시간 쉬었어요. 그래서 누구나 자격증을 따두려고 했고, 언젠가 갠트리 크레인에 오르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항만의 화려한 꽃이 아니라 시들어 버린 꽃이 되었죠.”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