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현대 미국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감정, 다름아닌 감정”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는 주관적이며 사적인 것이 되어 버렸으며 개인적이다. 이는 인간 중심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소비 지향적이고 나르치시즘적인 경향과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조차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적어도 주관적인 종교 경험의 기초 위에서 흔히 정당화되고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이 내 가슴 속에 살아계신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종종 오늘의 경건주의자들은 내일의 자유주의자라고 말해 왔다. 경건주의의 후예로서 오늘날의 자유주의자들은 신앙의 정조(情調,센티멘트)는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신앙의 합리적이며 역사적인 기반은 배격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원한 영혼을 직관적인 느낌에 두려고 하며 도무지 신앙의 확신을 주기 위한 합리적인 논증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더러 찾지도 않고 있다.
계몽주의
기독교가 언제나 철저한 초자연주의로 일관해 왔다면 이성(理性)의 시대 동안에는 경험적 관찰에 강조점을 두어 왔다. 자연(自然)이 그들의 교회였다면 이성(理性)은 그들의 성경이었다.
계몽주의를 주창한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지시에 의하여 이성을 속박시켜 놓았던 교조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로 성직자들이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었던 프랑스에서는 주로 무신론자들과 이교도들이 계몽주의 신앙의 중심 내용을 창작해 내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무오성이 거부될 수 있다는 증거였는데 합리주의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 뿐만 아니라 계시도 뒤집어 버렸다.
직관적 개인주의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초자연적 전망에서 인간 중심적인 자연주의적 전망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기여했지만 청교도 이후의 미국인들은 계시도 이성도 진리의 중재자로 결코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대신에 그들은 심판자의 자리에 직관을 앉혀 놓았다. 직관이란 “진리에 대한 즉각적이며 본능적인 지각으로서 사유의 과정 없이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미국인 각각은 각자 개인적인 상표를 단 철학을 가지고 있다. 자기 식대로 자기 종파를 만들 수 있었다. 19세기 동안에 이단 종파들이 양산되었다.
이러한 직관주의적 개인주의는 제 1차 대각성 운동에서 2차 대각성 운동으로 넘어가면서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가 바로 사건의 진원지라는 주장이 나의 책의 기본 골격이다. 최초의 각성 운동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합리적인 확신의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였다. 제 1차 대각성 운동은 전혀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인의 회심(回心)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제 2차 대각성 운동에서는 그 초점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시는가’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떻게 하는가’로 변하였다. 그 변화는 신학으로부터 감성으로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제 2차 대각성 운동의 목표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 중심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성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제 2차 대각성 운동은 개척 지대의 톱밥 먼지를 따라 모이는 캠프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개척지 설교자였던 피터 카트라이트는 19세기 초의 캠프 집회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첫 경련이 일어난 다음 여자들의 끈 달린 모자나 남자들의 모자나 빗 따위가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를 숙였다가 젖혔다 하는데 그들의 긴 머리체가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채찍이 휘둘려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정신없이 웃어댔는데 그들은 이를 가리켜 ‘거룩한 웃음’이라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개처럼 펄쩍 뛰며 사방을 돌아다녔으며 다람쥐를 쫓아다니며 짖어대는 개처럼 ‘귀신을 쫓는다’고 소리쳐댔다.
낭만주의
낭만주의가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서 나왔다.
낭만주의는 “진리의 진정한 증거는 주관성에 있다”고 했고, “모든 신비로 향하는 길은 내부로 나 있다.”고 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초월적 이단들의 탄생을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퀘이커교는 모든 사람 안에 “신성한 불꽃”이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 시기 동안에 성장하였다. 많은 퀘이커 교도들에게 성경은 최고의 권위가 아니었다. “내적인 광채”가 권위였다(이것은 합리주의자들에게 이성이 권위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례와 성찬과 같은 성례는 배격했다. 그들 밖에 있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에 의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초월주의
1830년대에 유니테리언에서 한 조류가 부상했는데 그것이 바로 초월주의였으며 유니테리언 내부에서조차 그 사조를 이단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 이름이 제시하고 있다시피 그 추종자들은 물질적이며 유형적이며 객관적인 세계를 초월하여 영의 원천에 도달하여 그 공급을 받기를 원했다. 신성과의 합일을 꿈꾸었던 그들 초월주의자들은 그 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이었다. 점차 이신론에서 범신론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알미니안주의는 미국에서의 복음적 신앙의 민주주의화를 향한 첫걸음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초월주의는 그 과정의 극대화였다.
초월주의는 인간의 신격화였다. 에머슨은 “나는 하나님의 일부이며 분자이다”라고 말했다.
개인은 마침내 지식의 지고(至高) 대상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실존주의
키엘케골은 내부로 향하였다. “진리는 주체성이다”라고 그는 말했다(내가 경험한 것만이 진리이다-요약자주). 진리는 이성과 증거를 통하여 변호될 수 있는 형식적 명제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 안에 계시며, 그 세계 안의 어느 곳에나 현존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곳에 직접적으로 계시지 않으며, 오직 개인이 자기의 내적 자아를 향할 때에만, 그러므로 오직 자아 활동의 내향성에서만 그의 의식이 일깨워지며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키엘케골은 새로운 철학파를 선언하지 않았다. 단지 14세기의 한 이름없는 신비주의자의 말을 반영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에 의하여 도달할 수 있지, 사상에 의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무지의 구름>)
교회사는 교조주의와 신비주의 사이의 끊임없는 반작용이다. 합리적인 답변들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의 도약”을 할 수 있다고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다름아닌 키엘케골이었다 이 도약이 세속적 실존주의에 있어서나 기독교적 실존주의에 있어서 그 중심 내용이다. 믿어지고 있는 내용의 객관적인 진의가 결정적이 아니라 결단이 궁극적이다.(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요약자주)
“문제는 더욱 깊어만 갔다. 도시 문화의 합리화와 기독교의 감성적 종교성에로의 몰락은 자아에 대한 건강한 의식을 침해하였다. 물질적인 위로만 주며 영적인 맛은 빠져 버린 무게 없는 문화는 무게 없는 인간들을 키워 내고 있었다. 이 새로운 개인주의는 ”개인 해방“이라는 수사적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리어스) 경험적 종교는 순간의 종교이지 일생의 종교가 아니다. 접착력이 다 떨어지면 매력도 상실된다.
이상스럽게도 기독교계를 뒤엎어버린 사람들은 경건주의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싸움은 교실이 아닌 기도실에서 나왔으며 자기들이 사악한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칸트에서 슐라이어마허로, 다시 키엘케골에로 복음주의적 경건주의는 현대 실존주의로 이르는 길을 열었다. 칸트는 심원한 사상가였지만 종교를 비이성의 범주로 격하시킨 첫 번째 사람이었다. 너무 많은 지식은 신앙에 위험하다고 여겼다.
슐라이어마허는 현대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모리비안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는 신비주의적 경건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에 따르면 신학적 명제들이나 교리적 명제들이 아닌 신앙적 감정이 기독교의 실내용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에서의 현재 자유주의는 지나친 사유(思惟)의 결과가 아니라 너무 적은 사유의 결과였다!
당시에 워필드와 메이천과 같은 사람이 너무나도 적었다.
마틴 마티는 다음과 같이 관찰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감성의 종교에 헌신한 신학교들은 후원을 잘 받고 있지만, ”신학“을 다루는 신학교들은 고통받고 있다. 그러한 교육 기관들은 항상 ”체험“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다. 신학이 일차적인 주제가 아니다. 그 교육 기관들은 인간의 잠재력 발견이나 신체적인 자각, 축제, 영적 경험 등에 사로잡혀 있다. 사려 깊은 사람들은 마침내 교회를 멀리하게 된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중세 교회의 지도자들, 종교개혁의 지도자들 모두 ‘논증을 했으며’ 사고 패턴을 건축하여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상황에다 대고 말하였는데 반해 새 시대에는 사람들이 논증하기를 멈추었다.--- 서구의 성직자들이 건설적인 사유의 호소를 그치고 그 자리에 그들의 신앙과 경험을 대체시키기 시작한 것이 치명적인 순간이었다.”
“좀더 옛날의 좀더 강직한 신조”의 상실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에게 있지 않다. 이 “좀더 옛날의, 좀더 강직한 신조”는 우리에게 “영적인 안정을 주는 무게”를 우리에게 실어 주었으며, 이 무게가 없을 때 우리는 “무게 없는 영혼들”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이성과 계시를 위한 편안한 집을 제공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논리와 증거들을 사용하여 그 주장들을 검증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며 오히려 그러한 자료들에 지지를 호소하는 신앙이다. 그렇지만 물론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 그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한계를 만날 때 계시가 개입하게 된다. 기독교는 반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이 아니다. 이성과 계시, 둘 사이에는 긴장이 있지만 균형이 있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신앙”이란 말은 잘못된 말이 아니다.
도덕주의는 도덕성을 좀먹으며 율법주의는 율법을, 합리주의는 이성을, 신비주의는 신비를, 경건주의는 경건을 좀먹는다. 현재 우리 문화는 미신과 무지의 새로운 암흑 시대로 미끌어져 들고 있다. 자기 실현과 내적 자아와 여타의 나르치시즘의 형태들을 추구하는 일에서 세상을 흉내내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