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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흥은 청풍김씨 23세손으로 자는 起賢(기현)이며 호는 凡齋(범재0이다. 1972년(고종9년) 6월 13일, 충북 옥천읍 문정리 6번지에서 조선시대의 세가집 자손으로 태어났다. 김규흥의 증조부와 조부는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폐해를 피해, 서울 집을 버리고 시골로 낙향하였는데 곧 충청북도 옥천군 교동이다. 낙향하던 당시에는 거부의 소리를 들었고 한동안 그 부는 지속되었지만 대원군과의 악연으로 인해 경복궁 중건 시 무리한 과세로 인해 가산이 몰락되었다고 전한다.
김규흥은 조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향리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어느 하루 “나는 너에게 줄 것을 다 주었지만 네 그릇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미치지 못할 것을 가득 채워서 쓸모 있는 큰 그릇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는 스승의 뜻에 따라 상경하였다. 거처를 재동에 마련하고 당대의 명사와 교유하였고 특히 충정공 민영환과 대단히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김규흥이 15세 되던 1886년에 집안의 기둥이었던 조부가 별세하고 평소 병약하던 부친마저 1891년 40세를 일기로 작고하자 김규흥은 어린나이에 불구하고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김규흥은 평생을 통하여 장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집안은 그의 모친 정부인과 동생에게 맡기고, 가세가 기운 상태였지만 경성에 계속 머물면서 동지들을 사귀는데 더욱 힘썼다.
그는 당시 선진화되고 있는 일본을 방문하여 정치․경제 ․문화․군사 등 여러 방면의 문물을 살피기도 했다. 특히 국민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고향인 옥천에 사재를 출연하여 진명(창명)학교를 설립하는데 힘을 쏟았다. 2)
이 무렵 김규흥은 윤치호가 회장으로 있는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나라를 개화하는데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대한자강회는 장지연, 박은식, 양기탁 등 개화파 인사들과의 교분을 맺는 통로이기도 했다.3)
김규흥은 참봉이란 보잘것없는 벼슬에 머물렀지만, 시(詩)의 황현(黃玹)과 문(文)의 이건창(李建昌)과 더불어 한문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가로 불렸으며, 역사서술에도 힘을 기울였던 창강 김택영이 인정한 재야 역사가로 문명을 날렸다. 창강은 이때의 인연을 기억하여 1913년, 범재 김규흥이 홍콩에서 향강이란 한중합작 잡지를 발간할 때 창간호에 “遙祭黃梅泉文”이란 황현을 추모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리되어 우리나라의 이조 말년에 특별히 문장가의 이름을 들어 광무가 갑오경장 이후에 그전 대제학의 직위를 부활시키어 홍문관당상 이라는 자리(그것이 처음이요, 마지막)를 만들어 출용하였던 송도선배 창강 김택이, 김규흥의 사혼에 반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규흥은 가산으로나 사환으로나 자기의 소원을 풀지 못할 일개의 불편한 선배이었다. 더구나 一九○五년 五조약을 치루고나 다른 것 할 것이 없으니까 심심하면 읽는 것으로 여러 날을 읽었는지 그 책 한질을 능통하여 외다시피 하였다.
이 역사 (물론 그것이 중국 역사이니, 전국 때로 시작하여 당조말년까지 혹 송조 이전까지를 포함것)의 지식으로 인하여 그 전, 그 후와 그 외의 다른 역사 서류들을 많이 섭렵하였다. 그 결과로 김규흥은 큰 문사도 아니요, 큰 열설가도 아니었으나 좌담으로 역사의 사론을 하는 대는 덮을 사람 없는 참으로 재주 있는 사람이요, 능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1905년 을사년은 일제에겐 축복의 한 해였다. 그 해 9월 5일,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고 11월 17일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서 조선왕조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만주진출을 확정지은 한 해였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치르는 와중인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14만 명이 궐기한 소위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제1혁명이 시작되는데, 니콜라이 2세가 국민의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 및 선거에 의한 전국적 제헌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등 10월선언을 발표하게 된 것은 러일전쟁의 패배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 일본, 조선이란 세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아청은행’이란 러시아와 청나라 합작은행이 파산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이 은행은 고종의 비자금을 은닉한 은행이라고 한다. 숨겨진 비사를 보도한 언론은 하와이교민들이 발행한 국민보란 신문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규흥은 아청은행과 민영철에게서 돈을 받으라는 조칙을 얻어 가지고 자기의 원하는 일이 잘 되었거니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그렇게 알게 된 친구가 일자리에 들어서서 돕겠다고 한 것은 김규흥, 강홍대 양인의 참으로 서로 온 후에 김규흥은 별임시 액정, 세가들을 추축하여 추선한 것은 제실 재산 재정이라고 상해(상하이), 아청은행에 가져다가 맡기었던 돈과 서경 풍경궁을 짓는 통에 제실 재산돈 험축낸 것을 민영철에게 반을 가량으로 그것을 다수 합하며 약 九천만원 가량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한 동안 얼마나 떠들었던지 어린 아이들까지라도 다 알게 되었던 것은 왜채 이천 五백만 즉 변리를 병하여 三천만원이 있던 것이다. 三천만원 왜채에 그렇게 쪼들리던 광무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의 二배 혹 三배 되는 돈을 상해(상하이) 아청은행에 임치하였던가 하는 것이 물을 만한 말이다.
…광무의 제一 좋아하는 것은 금전과 미색인데 그때에 벌써 엄상궁의 세도가 한물 올랐던 때임으로 이용익은 광무에게 새악씨를 소개한 일은 있다는 말이 없었으나 광무가 좋아한 돈을 거두어들이는 데에 능하였다.
…이렇게 거두어들이는 돈을 국고에나 은행에 넣지 않고 지전으로 모았던 것을 상해(상하이) 아청은행으로 보내었는데 여러 천만 원어치 금은을 가지고 광무의 특병을 발취서간 이는 이 상궁이라 하는 이었는데 이 상궁 그전에 하와이에 왔던 이항우 (본명은 종운)의 고모 혹 이모가 되는 이었다고 한다.…광무가 부탁하고 이 상궁이 신실히 전달한 것은 즉 그 돈을 어느 때든지 광무 자기나 혹 그의 왕자들이 친히 가거나 혹 광무의 조축을 가지고 가는 사람 이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주지 말라고 한 것이다. 저 때에 김규흥이 만일 조칙을 가지고 가려는 길을 갔다면, 또한 그 돈을 어떻게 모이었던 것인지를 불구하고 교육 대사업에 주게 되었다면 오죽이나 좋았으랴만은 호사다마가 그 돈을 왜통감, 그 후에는 왜 총독들이 찾으려고 누누이 시험하였으니 실패하고 그 후에 필경은 아라사(러시아) 혁명 후에 그 은행이 파산되고 본즉 그저 다 잃은 모양이다.…”1)
조선말기, 고종은 당시 우리나라 외채 3천만 원의 3배 정도 되는 9천만 원이란 엄청난 금액을 비자금으로 조성하여 상해 소재 ‘아청은행’에 입금해둔 모양인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이용익으로 서술하고 있다.
고종은 이 비자금의 일부를 그가 총애하는 이 상궁에게 권한을 주고 일부는 김규흥 등에게 조칙을 주어 상해에 무관학교를 설립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규흥 일행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됨으로서 그 돈의 향방이 일본통감부 또는 조선총독에게로 이관될 뻔했지만, 러일전쟁의 여파로 은행이 파산하게 되자 모든 것이 만사휴의가 되었던 사정을 이 신문은 이야기하고 있다.
사가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에피소드는 그저 야사의 하나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범재 김규흥이란 한 개인에겐 그의 일생을 바뀌게 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김규흥이 일본 헌병에게 잡히어 조칙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혹은 아청은행이 파산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다른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었을 터이지만, 상해무관학교 설립이란 계획은 범재에게 진형명이란 평생의 동지와 교분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진형명은 김규흥, 손문, 당소의와 함께 신해혁명을 함께한 동지이자 먼 후일 흥국실업은행(주)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한 평생의 지기였다.
“김규흥이가 상해(상하이)에 가서 있는 동안에 그 무관 양성의 계획을 말하니까 중국인 중에는 진형명, 당소의 등 얼마 친구들이 찬성하고 영국 장관 급 덕국(독일) 장관 몇 사람은 그 계획을 찬성하여 자기들이 무료로 그 학교의 치리와 교수를 하여 주마고 하였다.”1)
일단 이 사건이 진실이라면 범재 김규흥은 고종에게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역사에 범재 김규흥이란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도대체 김규흥은 누구일까?
김규흥이 고종의 비자금 관리와 회수를 위한 조칙을 받았다는 것은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신하의 한 명이었음을 증명한다. 김규흥이 이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은 민영환과의 교우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의 성품은 평소 벗들과 사귀기를 즐겨하였다고 한다.
김규흥은 조칙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뒤에도 상당기간 일제의 의해 거주 제한을 당하다가 1908년 초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 때 본명 김규흥을 김복으로 변경하고 그 외 또 다른 변성명을 사용함으로서 신분을 철저히 은폐한다.
아쉬운 점은 김복 외의 별명에 대한 정보 부재로 인해 김규흥에 대한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범재 김규흥의 재조명을 위해 향후 학계는 필히 이 숙제를 풀어야할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우국지사들이 만주나 연해주를 망명지로 선택했지만 김규흥은 망명지로 광동을 선택한다. 이것은 상해 무관학교 설립 건으로 인해 형성된 진형명, 당소의 등과의 인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된 김규흥의 중국인 인맥은 구봉갑, 추노 등 신해혁명의 주요 인사들로 확대되며, 1910년의 광동 나부산 방문 등을 고려하면 혁명 이전부터 상당히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규흥의 망명은 독립운동사에 3가지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첫째, 공화주의의 정착을 들 수 있다.
1911년 무창봉기 부터 시작된 3차례의 혁명과정은 보황주의자 김규흥을 공화주의자로 거듭 나게 한다. 김규흥 자신이 신해혁명에 참여하면서 경험한 공화주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몇 년 후 중국 관내에 망명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등에게 영향을 주어, 보황주의가 중심인 만주, 연해주 방면의 독립지사와 차별화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훗날 공화주의가 임시정부 정강, 정책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되는 결정적 역할을 범재 김규흥이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중국혁명지사들과의 유대관계이다.
진형명, 손문, 당소의, 추노 등 당시 중국의 역사를 주도했던 혁명인사들과 누구보다 먼저 교분을 맺음으로서 항일전선을 한중 협력 하에 투쟁할 수 있는 분위기로 형성하는데 범재 김규흥이 선구적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이 이루어지면 독립운동사의 많은 부분이 바뀌어 질 것이라고 본다.
셋째, 상해가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이 되게 한 점이다.
1910년대 초기, 상해․북경․광동 등 중국관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김규흥이 터를 잡고 신해혁명동지를 통한 인맥을 형성하며, 사재를 털어 가면서 망명초기의 독립지사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박은식, 신규식 등 독립운동 명망가들이 망명지로 중국 관내를 선택할 수 있는 동기와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러한 결과, 수많은 인재들이 상해, 남경 등 중국 관내에 집결함으로서 3‧1운동의 기획, 파리강화회의 참여, 임시정부 수립 등 훗날 상해가 독립운동본부의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범재 김규흥은 역사의 전면에 들어나지 않는 그림자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박은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도산일기, 지산외유일지, 일제의 기밀문서 등 여러 상황자료를 종합하면, 김규흥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주도한 인물 중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김규흥의 업적 중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동제사라는 비밀단체의 조직을 들 수 있다. 동제사는 '동제(同濟)'의 의미가 말하듯이 동포들이 다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동제사는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내 지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상부상조의 기관 역할과 함께 독립운동지사를 양성했으며 독립운동총본부이기도 했다.
김규흥은 동제사를 기반으로 하여, 프랑스 조계지역내에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지사들을 양성했으며, 중국인과 유대관계를 위하여 <신아동제사>를 결성하고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 홍콩에서 향강이란 한중합작잡지를 발간하여 언론의 중요함을 일찍이 인식하기도 했는데 이는 3‧1운동 이후에 발간된 진단. 천고의 발간으로 이어진다.
또한 동제사 인맥을 중심으로 중국관내, 만주, 연해주뿐 아니라 일본, 미주와 조선본국을 아우르는 주요 독립지사들에게 대동단결선언, 2‧8동경선언(留日本東京學生界獨立國之宣言書) 대한독립선언(國外韓人代表團獨立宣言書) 삼일독립선언(國內韓人獨立宣言書) 등 각종 독립선언서를 지역별로 선언하게 함으로서 동제사가 3‧1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게 했으며,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운동과 동시에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기초 작업도 시행했는데, 독립선언서의 발표와 시위․임시정부수립․파리강화회담 참여 등은 제각기 별도의 운동이 아니고 동제사가 치밀하게 기획한 하나의 작품으로 보아야한다. 즉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통하여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함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그 다음 순서로 조선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서 독립선언을 함으로서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갈망과 의지를 보여주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우리의 수권능력을 인지시킴으로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것이 범재 김규흥을 정점으로 하는 동제사의 독립운동방략이었던 것이다.
김규흥이 고종의 비자금 관리와 회수를 위한 조칙을 받았다는 것은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신하의 한 명이었음을 증명한다. 김규흥이 이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은 민영환과의 교우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의 성품은 평소 벗들과 사귀기를 즐겨하였다고 한다.
김규흥은 조칙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뒤에도 상당기간 일제의 의해 거주 제한을 당하다가 1908년 초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 때 본명 김규흥을 김복으로 변경하고 그 외 또 다른 변성명을 사용함으로서 신분을 철저히 은폐한다.
아쉬운 점은 김복 외의 별명에 대한 정보 부재로 인해 김규흥에 대한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범재 김규흥의 재조명을 위해 향후 학계는 필히 이 숙제를 풀어야할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우국지사들이 만주나 연해주를 망명지로 선택했지만 김규흥은 망명지로 광동을 선택한다. 이것은 상해 무관학교 설립 건으로 인해 형성된 진형명, 당소의 등과의 인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된 김규흥의 중국인 인맥은 구봉갑, 추노 등 신해혁명의 주요 인사들로 확대되며, 1910년의 광동 나부산 방문 등을 고려하면 혁명 이전부터 상당히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규흥의 망명은 독립운동사에 3가지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첫째, 공화주의의 정착을 들 수 있다.
1911년 무창봉기 부터 시작된 3차례의 혁명과정은 보황주의자 김규흥을 공화주의자로 거듭 나게 한다. 김규흥 자신이 신해혁명에 참여하면서 경험한 공화주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몇 년 후 중국 관내에 망명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등에게 영향을 주어, 보황주의가 중심인 만주, 연해주 방면의 독립지사와 차별화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훗날 공화주의가 임시정부 정강, 정책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되는 결정적 역할을 범재 김규흥이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중국혁명지사들과의 유대관계이다.
진형명, 손문, 당소의, 추노 등 당시 중국의 역사를 주도했던 혁명인사들과 누구보다 먼저 교분을 맺음으로서 항일전선을 한중 협력 하에 투쟁할 수 있는 분위기로 형성하는데 범재 김규흥이 선구적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이 이루어지면 독립운동사의 많은 부분이 바뀌어 질 것이라고 본다.
셋째, 상해가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이 되게 한 점이다.
1910년대 초기, 상해․북경․광동 등 중국관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김규흥이 터를 잡고 신해혁명동지를 통한 인맥을 형성하며, 사재를 털어 가면서 망명초기의 독립지사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박은식, 신규식 등 독립운동 명망가들이 망명지로 중국 관내를 선택할 수 있는 동기와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러한 결과, 수많은 인재들이 상해, 남경 등 중국 관내에 집결함으로서 3‧1운동의 기획, 파리강화회의 참여, 임시정부 수립 등 훗날 상해가 독립운동본부의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범재 김규흥은 역사의 전면에 들어나지 않는 그림자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박은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도산일기, 지산외유일지, 일제의 기밀문서 등 여러 상황자료를 종합하면, 김규흥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주도한 인물 중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김규흥의 업적 중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동제사라는 비밀단체의 조직을 들 수 있다. 동제사는 '동제(同濟)'의 의미가 말하듯이 동포들이 다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동제사는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내 지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상부상조의 기관 역할과 함께 독립운동지사를 양성했으며 독립운동총본부이기도 했다.
김규흥은 동제사를 기반으로 하여, 프랑스 조계지역내에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지사들을 양성했으며, 중국인과 유대관계를 위하여 <신아동제사>를 결성하고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 홍콩에서 향강이란 한중합작잡지를 발간하여 언론의 중요함을 일찍이 인식하기도 했는데 이는 3‧1운동 이후에 발간된 진단. 천고의 발간으로 이어진다.
또한 동제사 인맥을 중심으로 중국관내, 만주, 연해주뿐 아니라 일본, 미주와 조선본국을 아우르는 주요 독립지사들에게 대동단결선언, 2‧8동경선언(留日本東京學生界獨立國之宣言書) 대한독립선언(國外韓人代表團獨立宣言書) 삼일독립선언(國內韓人獨立宣言書) 등 각종 독립선언서를 지역별로 선언하게 함으로서 동제사가 3‧1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게 했으며,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운동과 동시에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기초 작업도 시행했는데, 독립선언서의 발표와 시위․임시정부수립․파리강화회담 참여 등은 제각기 별도의 운동이 아니고 동제사가 치밀하게 기획한 하나의 작품으로 보아야한다. 즉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통하여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함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그 다음 순서로 조선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서 독립선언을 함으로서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갈망과 의지를 보여주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우리의 수권능력을 인지시킴으로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것이 범재 김규흥을 정점으로 하는 동제사의 독립운동방략이었던 것이다.
범재 김규흥의 독립운동방략은 그가 관여한 5개의 선언서를 검토해보면 그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1919년 이전에 발표한 대동단결선언 ,대한독립선언 등에서 무력항쟁을 부분적으로 주장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론 외교론에 입각한 평화적 독립운동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파리회의가 승전국의 잔치로 끝나고 평화적 시위였던 3‧1운동의 결과가 7,000여명을 죽이는 무차별 학살로 이어지자, 그의 투쟁노선도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일명 의열단 선언서로 칭하는 조선혁명선언이 범재가 선택한 마지막 독립운동방략이었다. 이 선언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전후하여 발표되었지만, 그 배경은 외교론, 준비론, 무장투쟁론 등으로 분열된 독립운동방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동안 독립운동총본부의 역할을 하던 동제사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김규흥이 무장투쟁론을 선택함으로서 김규흥의 대리인 역할을 했던 신규식 등 많은 동제사 요원들과 노선상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김규흥이 추진했던 독립운동의 방략은 의열단 등을 통한 항일무력투쟁과 둔전제를 바탕으로 6개 사단 규모의 정규군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범재 김규흥과 운동노선을 함께하는 주요 인물들도 이 무렵 상당히 바뀌게 되는데, 동제사 요원이었던 신채호 이외 박용만, 이회영, 김창숙, 이유필, 김구 등 1922년 11월 4일 북경흥화실업은행 개막 기념식에 참석했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박용만은 동제사 시절 신규식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김구, 이유필의 경우 박용만, 신채호 등과 노선을 달리 했지만 북경흥화실업은행을 통하여 한국노병회의 자금을 조달했으며, 김원봉 등 의열단의 주요 행동대원들이 의열투쟁 노선을 포기했을 시기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의거 등 의열단의 의열투쟁을 계승하기도 했다.
동제사 시절과 달리 이 무렵 김규흥의 신분은 일제에게 상당히 노출된다. 이것은 의열투쟁,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으로 인해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검거됨으로서 나타난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하다.
한편, 김규흥은 1920년 10월에는 주간신문 진단을 발행했으며 1921년 1월에는 월간잡지 천고를 발간하여 언론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1913년에 발간한 향강 이후 언론활동 중요성에 대한 신념의 표출이기도 하다.
김규흥의 독립운동 방략 중 마지막까지 집념을 보인 것은 둔전제에 대한 신념이었다. 1911년 샌프란시스코 대한국민회에 보낸 편지에서 둔전제에 대한 야망을 표시한 이후 1920년 도산 안창호의 회담에선 한국, 중국, 러시사와의 3국 합작을 통한 시베리아조차를 피력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내몽고 등을 근거지로 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이념과 노선이 다른 만주 군벌 풍옥상의 군사고문, 장학량 군벌하의 在滿韓人入籍조사회 조직위원장에 취임하기도하였다. 그러나 김규흥의 대리인 역할을 했던 박용만이 1928년 암살당하고, 군벌의 몰락 그리고 만주가 일제의 화북분리정책에 의한 중국공산당, 국민당, 일제의 암투지가 됨으로서 끝내 실패하고 만다.
김규흥은 1908년 망명 이후 1936년 작고할 때 까지 단 한 번도 일본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더욱이 3‧1운동, 의열투쟁, 은행설립, 언론사 설립, 둔전제 실행 등 독립운동의 획을 긋는 주요한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하면서도 일경의 수배 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물론 김규흥 본인도 조심스레 처신했겠지만, 김규흥의 정체를 알고 있는 주위 독립지사들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려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김규흥은 한국독립운동사에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고 활동한 적은 없다. 하지만 독립신문에 朝鮮假政府의 首領 金凡濟로 보도되기도 했으며, 도산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총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그가 비록 음지에서 활동했지만 독립운동사에 얼마나 주요한 역할을 했는가를 웅변해주고 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는 다시 쓰여 져야 한다. 범재 김규흥이란 핵심 키워드를 제외한 지금까지의 근대사는 수많은 의문을 낳을 수밖에 없는 기형적인 역사였다. 주요 독립선언서의 작성경위와 기초자, 파리강화회담 파견의 주체, 3.1독립운동의 기획과 전개과정, 의열투쟁의 주관처 등을 검토할 때 마다 제기되는 수많은 의문부호는 김규흥이란 음지의 독립운동지도자를 대입하면 대부분 해소됨을 다시 지적한다.
"나는 이글을 범재기념사업회에서 발췌하였다. 물론 이 내용이 100% 진실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근현대사의 진실이 혹시 다시 한번 연구해야 되는 것이 아닐가하는 우리들 자신의 자성 및 각성이라는 취지에서 올려본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범재 선생의 위대함을 폄회하려는 의도도 아님을 다시한번 말해두는 바이다. 반대로 근현대사의 역사적 의미와 시실이 혹연 한 위대한 인물에 의하여 진두지휘되었다는 것도 우수운 일이다. 범재선생을 연구하시는 분들은 몽양선생, 예관 선생등의 역사적 업적에 손상이 되지 안은 범주에서 자료를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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