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부터 우리는 점점 덜 신학적이 되었다. 그러나 확언컨대 더 종교적이 되었다.”- 앤드류 카네기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상대주의는 세속적 인본주의의 한 요소이다. 그러나 문화적 상대주의라고 비난받고 있는 상당 부분이 복음주의자들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무디는 자기를 결코 신학자가 아니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마틴 마티에 따르면 “한 자유주의 신학자가 이사야서는 두 저자에 의해 씌어졌다고 주장하면서 무디 당신의 입장은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무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질문을 피하면서 ‘글쎄요, 이사야서를 누가 썼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신학 말입니까? 내게 무슨 신학같은 것이 있었는지 난 잘 모르겠군요. 내 신학이 뭔지 당신에게 얘기해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
신학적인 상대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의도적인 악이 아니라 흔히는 시간을 바쳐서 사실들을 확인해 보려는 정열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미국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의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신학으로부터도 벗어나 버렸다. 미국 우리 선배들은 옛 세계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구속적이며 교조주의적인 속박들에서 해방을 제공하는 계몽주의에 이끌려 속박 없는 합리주의의 개인주의에, 그리고 후일에는 감성주의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도날드 블뢰쉬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특별히 미국 교회 생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교리적이며 사도적 내용의 소멸이다. 미국 교회는 내적 생활의 개발이라든지, 총체적 구원이라든지 하는 것에 집착해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재발견되고 새롭게 검증된 사도적 신앙에 대한 절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볼테르의 방임적 정신이 루터와 칼빈의 교리적 입장을 눌러 버렸다. 또한 우리는 모든 견해들은 피상적으로 보면 다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다른 견해들에 대하여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융통성 때문에 미국 교회가 “예언자적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계몽주의와 함께 과학이 기독교를 밀어내고 지적인 권위의 자리에 앉았으나 궁극적인 물음들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는 일에 실패하자 상대주의가 과학의 자리를 밀쳐 버렸다. 체스터톤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린다면 그 뒤에 오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이나 다 믿게 될 것이다.”
교육에서의 상대주의
오늘날의 학생들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간에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고 일을 잘 마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기술을 제공하지 못하고 진급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지식에 대해서는 인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자들이란 “카페테리어의 음식 진열대에 줄을 서서 음식을 고르는 것 마냥 진리를 취사 선택하는 사람들”이라고 한 마틴 마티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교육에서 가장 위대한 전통은 기독교의 위대한 전통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우리의 최상의 그리고 가장 찬란한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에 굳게 서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설립되었던 하바드, 예일, 프린스톤, 브라운, 다트마우쓰 등의 대학들이었다. 그러나 미국 교육의 그 위대한 전통은 제 2차 대각성 운동 이후 복음주의 운동을 오염시켜 왔던 바로 그 상대주의 때문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현대의 기준들에 따르면 청교도들은 교조적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타터에 따르면 “세상의 어느 공동체가 메사추세츠 해안의 공동체보다 더 학문과 지성의 가치를 깊이 믿고 있었던 공동체는 없었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뉴잉글랜드로 하여금 이 나라의 교육과 학문의 성취를 장장 300년 동안이나 이끌고 나갈 수 있게 해준 그러한 지성적이며 학문적인 전통을 세웠던 것이다.”
뉴에이지의 상대주의와 반지성주의가 “우리 문화의 그 커다란 학습 무능성”의 주범인 것이다. 알란 믈룸은 “오늘날 대학의 정문에는 여러 방식으로 그리고 여러 방언으로 ‘진리는 없다- 적어도 여기에는 없다’고 씌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내용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그저 상투적인 말로 떼워 버리고 설교 대신에 위로하는 말로 대신해버리고 진지한 가르침 대신에 모호한 감정으로 떼워 버릴 때에도 우리는 그러한 상대주의자들과 똑같은 일을 범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경의 명료성
루터와 칼빈은 “성경 그 자체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모호하지 않다. 모호한 것은 교회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성경의 위험한 교훈들에 노출되기를 꺼려했던 교회는 어떤 신학적인 입장을 취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런 모호한 태도를 청산하였다.
칼빈은 말했다. “사역자가 가르치려고 강단 위에 서는 일은 희귀해졌다. 대체 설교라는 것이 부인네들이 자기 집 난로가에 앉아서 수다로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괴상 망측한 상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설교가 아닌가?”
성경의 권위
자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내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 신학이란 것은 별반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자유주의는 생각(사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느낌(감성)에 의해 생겨났다. 신학적 현대주의의 건축자들은 세속주의자들이 아닌 “머리의 지식”이 아닌 “가슴의 지식”을 원했던 경건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교리적 정통성을 중요치 않은 것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서 불트만은 기적들과 부활과 성경에 나오는 소위 “설화”들을 비신화화시켰다. 기독교의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성격, “우리의 외부에서 발생한 것”에 대하여 경멸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처럼 경건주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주관주의는 마침내 자유주의를 만들어 냈고 전통적 복음주의를 포함하여 계속해서 미국 기독교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나이로비 선언에 따라 “교리는 나누어지되 섬김은 연합으로”라는 확신 위에서 활동해 왔다. 그러나 집행부 책임자는 교리적 합의점 없이 연합으로 수년간 봉사를 시도해 본 결과 협의회는 ‘섬김이 분열시키고 교리가 연합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성경에 대한 지식
불룸의 말이다. “최근의 유행의 하나로서 막연히 신성성에 대한 동경심이 일어나면서 참된 신앙과 성경에 대한 지식은 쇠잔해 버렸다.” 예일 대학의 조지 린드백 교수도 말한다. “계몽주의 지도자들은 --- 신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박식했으며 성경의 교양 가운데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는 근본주의자들이 놀랍게도 성경의 내용에 대해 무지한 때가 종종 나타난다.
-- 노만 빈센트 필의 시대만해도 자유주의적 청중이 성경 내용을 가지고 놀만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의 경우에서 보듯이 소위 “보수”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서 성경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크리스챤 문화도 비크리스챤 문화와 마찬가지로 탈기독교화되었으며 위험 천만하게도 그 기반을 상실하고 있다.“
성경이 그 명료성과 권위를 잃어버리게 된 하나의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주요 주제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지식의 결여, 가르치는 일의 결여, 강해 설교의 결여 때문이다. 자녀들이 소위 복음주의 교회라는 곳에서 몇몇 입증하는 구절과 “약속의 말씀들”을 제외하고는 성경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무지한 채 자라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복음주의자들의 약 절반 정도가 십계명 중에 다섯 가지도 대지 못하였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매일 “QT”(Quiet Time, 경건의 시간)을 갖고 있는데 약속의 말씀을 기록한 종이들을 넣어둔 상자에서 “약속” 하나를 꺼내 읽거나 인스탄트 통조림처럼 꾸며진 QT교재를 읽고 그 교재를 쓴 저자의 경험이나 예화를 읽고 끝낼 것이다.
“그저 예수님만 사랑하면 됐지!”
“이제 그저 예수님만 사랑합시다 — 신학은 방해만 될 뿐입니다”라는 말에 반영되어 있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연구 이상이다. 만약 하나님을 더 알고 배우는 일이 하나님 사랑하는 일에 방해만 된다면 무슨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우리의 헌신과 경외와 경배를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겠는가?
“교리주의는 편협한 마음을 만든다”
기독교의 진리성은 토론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확신하는 바가 정말 옳은 것임을 확인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위험 부담을 두려워하며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닫는다. “묵종적 신앙”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이 분연히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다. 교리는 검증되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 사고하기를 그치면 태만과 편협성과 죽은 정통이 나타난다. 우리의 분석력은 훈련을 쌓지 않으면 퇴화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그 전성기에 일깨워 마련한 지적인 생명력을 온 마음을 다하여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균형이 필요하다!”
칼빈은 경고했다. “절대적으로 균형만을 고집하는 것보다 더 불균형인 것은 없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균형”은 타협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경우 타협은 대결을 편하게 비켜 가는 한 방편이다. 그와 같은 타협은 우리의 분석적인 사유 과정을 회피해 버린다. 문제에 대하여 철저히 생각하는 대신에 단순히 우리가 보기에 양극단으로 보이는 의견들의 중간 입장만을 취한다. 많은 경우 그와 같은 “균형잡힌” 사람들은 ‘당신의 입장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경우 말문이 막힌다. 우리는 모순을 즐기고 그것을 균형이라 부른다. <칼미니안>, 즉 칼빈주의적-알미니안 심성을 가진 사람은 절충적 칼빈주의자이다.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명확하고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입니다!”라고 말한다.
상대주의의 실제적 효과들
상대주의는 우리의 머리를 혼동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흔들어 놓는다. 상대주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물들에 대하여 깊이 있는 사고를 할 때에 방해를 놓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느낌을 갖지 못하도록 만든다. 고통을 죽이기 위해 마취제를 찾는다. 마약이나 유흥이나 일중독이나 알콜중독이나 음란물중독이나 심지어 자살까지도 삶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순간적인 마취제로 볼 수 있다.
상대주의는 항의와 열정을 죽인다. 만약 세상에 호소할 수 있는 객관적인 표준이 없다면 어떻게 “정의!”를 요구하거나 “개혁하자!”고 외칠 수 있겠는가! 남아프라카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을 반대할 때, 우리는 도그마적이 된다. 만약 이러한 교리주의-도그마주의가 없었다면 노예제도는 여전히 미국 혹은 영국의 한 제도로서 존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팝 뮤직은 현대 생활의 심각한 이슈들에 대한 무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몇몇 유익한 곡들을 제외하고 “톱가요 40순위”에 들어가는 대중가요의 대부분은 비트가 강하며 천박하여 춤추기에 적합하지만 강력한 사상과 정서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참으로 요상하게도 이 “톱가요 40순위” 안에 드는 음악의 스타일이 정확하게 전체 기독교 음악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상대주의자들처럼 생각하면서 절대주의자들로서 행동할 수 없다.
결론
미국 종교는 실용주의에서 실존주의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대주의로 탈바꿈했다.
과학적 세계관은 인간 존재의 궁극적 물음들에 대하여 합리적이며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는 데 실패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세상에 참 대답은 전혀 없다고 계속해서 믿을 것이다. 우리가 의미 있는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상대주의가 유일한 대안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명제적 진리가 그리스도를 경험으로 아는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내일의 자유주의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각이 깊고 확신을 가지는 기독교를 회복하는 데 실패해서는 안 된다. 설 자리를 이처럼 절망적으로 찾고 있으며 그 창조자로부터의 초월적인 말씀을 애타고 찾고 있는 우리 문화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