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가상응의 법칙
법칙의 정의에는 의식을 가진 존재의 행동의 결과를 관장한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법칙이란 창조주가 만물을 운영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자유법칙이 있는데 그 결과가 아무리 큰 재양이 예상된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동의 과정은 우주가 제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스실에서 대학살을 자행하고 핵폭탄을 투하하고 하는 과정을 우주는 제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재앙들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자유에 대한 선언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자신뿐 아니라 그 모든 후손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선악과를 다 먹을 때까지 아무런 주의나 경고 혹은 제지를 받지 않았습니다.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행동이 다 끝날 때까지도 그랬죠. 그러나 결과는 반드시 관장하는 것이 법칙이어서 그 결과로 인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가인의 경우 살인에 관한 법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에 대해 사형이 주어지진 않았지만 소정의 징벌은 있었습니다. 아담이나 가인의 경우 사전의 예고나 경고가 물론 있었죠. 그들은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는 자유법칙의 적용과 관련해서이고 유전법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고한 사람이 부당한 피해를 입지 않게 유전법칙을 조정할 수 있었겠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아 아담의 모든 후손은 예외 없이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죠. 법칙의 적용에는 참작이란 없습니다. 누구든 손을 불에 넣으면 데고 물속에 10분 이상 빠져 있으면 익사합니다. 개인적인 상황은 조금도 참작되지 않죠.
그러므로 인간은 법칙에 두려운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세속 교육에서 이러한 상식들을 배우지 않아 사람들에게 그런 인식이 없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법칙 적용의 부정적인 면을 살펴보았는데 긍정이 부정을 앞선다는 것도 일종의 원칙이 될 수 있으므로 그 점을 살펴봅니다.
만물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행복법칙이죠. 창조주가 인간을 만들고 인간에게 첫 번째 한 선언이 축복인데 이는 삶의 결과가 행복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속의 법칙이 있습니다.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법칙의 적용은 인간의 선택에 의합니다. 법칙거스름에 의한 부정적 결과를 상쇄할 마련이 주어져 있는데 그 유익을 얻는 것은 인간 개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그 법칙과 마련은 각각 동가 상응의 법칙과 대속의 마련입니다. 창조주의 직접적 피조물인 완전한 아담의 죄를 그 동가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속해야 한다는 것이고 창조주의 독생자인 예수가 그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마련은 예수가 향주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 마련을 통해 유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마련을 인식하고 그렇다는 것을 나타냄으로써 입니다. 그 방법은 그 마련과 관련된 예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인데 그것은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개념과 지식이 없습니다. 성서에 전혀 언급이 없는 부활절과 성탄절을 지키려 할 뿐이죠. 오히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지식을 은폐하여 인류가 대속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하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올해 주의 만찬은 4월 4일인데 이를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천만명 정도이고 이를 실제 기념하는 사람도 찬만대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를 외면하죠.
인간은 어렵지 않은 원칙들을 알고 순종함으로써 영원한 향복이라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법칙이란 부정적인 측면으로도 엄격하게 적용되지만 긍정적 측면으로는 더 강하고 확실하게 그러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