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삶의 일부다. 아니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 삶도 끝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전 세계인의 묵상집 「다락방」을 통해 기다림을 배운다.
「다락방」은 교단, 인종, 민족을 초월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신앙고백을 담은 매일 묵상집이다. 현재 세계 33개 언어로 번역되어 100여 개국에 150만 부가 배포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각 교회에서 개발해서 추천하는 책들이 많아 지금은 과거에 비해 판매 부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내가 「다락방」을 대한 것은 1960년 봄부터였다.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매일 아침 교사회의 시간에 「다락방」으로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이 작은 책은 나의 동반자였고 우리 집 가정예배의 지침서이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생명의 삶」이나 다른 QT집 등 전문인이 평신도의 묵상을 돕기 위해 만든 책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런 지침서들보다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평신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공유하기 위해 써놓은 간증의 글들을 더 좋아한다. 설명이 필요 없는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락방」을 읽으면서 나는 왜 이 책에서 세계 선교와 전도를 그렇게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을까 생각한다. 「다락방」 편집자들의 사역 목표는 “1) 개인의 영적 생활을 풍성하게 한다.”, “2)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만들어 낸다.”라는 것인데, 우리는 왜 세계 100여 국에 그리스도의 증인된 자기 삶을 전할 열정이 없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나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기다리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선거에 출마하면,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점쟁이를 찾아가서 당선될 것이지 아닌지 빨리 알고 싶어 한다. 당선 여부를 주의 손에 맡기고 기도하며 오래 참을 수는 없는 것일까? 「다락방」에 한국인 기고자가 없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미국의 「다락방」 본부에 원고를 보내면 회신을 받는 데 반년쯤 걸렸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이 빨라져서 한 달 내에 원고를 받았다는 회신이 온다. 그 회신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간증을 보내주어 고맙다. 4-6주 사이에 검토하고 연락을 줄 것이다. 3개월 동안 아무 연락이 없으면 채택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이번에 채택되지 않더라도 믿음을 간증하려는 당신 같은 사람이 없다면 「다락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다시 한 번 시도해주길 기대한다.
이 3개월은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동안 매일 우편함을 들여다보며 실망해야 한다. 만일 거절되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된다.
우리는 당신의 묵상 글을 채택하려고 원고를 보관 중이다. 최종 결정은 1년 또는 그 이상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정되면 편지와 서류를 보낼 터이니 작성해서 보내주기 바란다. 이것은 당신의 묵상 글이 확정적으로 출판된다는 뜻이다.
이 편지에서도 채택을 고려한다고 했으니 채택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최종 결정을 위해 또 1년 가까이를 기다려야 한다. ‘빨리빨리’가 아니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한국인이 어떻게 자기 원고를 보내놓고, 그것이 뭐라고 1년 이상을 기다리겠는가? 나는 이것이 「다락방」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글이 없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늘 기다리며 사는 것이 인간이다. 기다리는 일이 끝나면, 인생도 끝난다. 그런데 요즘은 휴대폰이 생겨서 기다리는 일을 더욱 못하게 만들고 있다.
1차 채택이 되면 나는 다시 날마다 우편함을 들여다보며 기다림을 시작한다. 여러 번 실망하면서. 나는 교회를 성실히 출석하기는 하나, 성서를 제대로 묵상하지 못하고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고 자책한다. 한의사인 친구가 집에 놀러와서 내 진맥을 하면서 요즘 숙면을 못 하느냐고 물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내는 내가 코를 골며 잘 잔다고, 스트레스는 말도 안 된다고 대신 대답해준다. 기다리느라 스트레스 받고 있는 내 속내는 모르고…. 정말 인생은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과정이다.
아일랜드 태생의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89)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이 있다.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길 저녁. 두 방랑자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온갖 행동과 말을 계속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이제 그만 가자고 한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놀라서 무슨 소리냐며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루해가 다 지날 무렵 한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고도가 아니고,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이다. 소년은 고도가 오늘 밤에 올 수 없으며 내일 꼭 오겠다는 그의 전갈을 남긴 채 사라진다. 그렇게 1막이 끝난다. 2막도 마찬가지다. 만일 3막이 있다 하더라도 같았을 것이다.
고도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기다리기 위해 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도가 누구인지도, 또 언제 올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다. 답답한 연출자 한 사람이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때 베케트는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이란 그렇게 지루하고, 무료하고, 어쩌면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고통을 누가 참아내겠는가?
이수천 시인이 『빈방』이라는 제목의 시집에 발표한 <기다림>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과녁은
피를 토할 때까지
예리한 화살을 기다린다.
피를 토할지라도 기다림의 열매가 와주기를 인내하고 기다리는 심정을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2012년 나는 A4 용지 반장짜리 원고를 써서 「다락방」에 보냈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마침내 회신이 왔다. 원고료 25달러와 함께 저작권 양도서류에 몇 가지 내용을 기재한 후 서명을 해서 보내라는 엽서였다. 이제 고도는 온 것일까? 아니다. 나는 또 기다려야 했다.
내 글은 3/4월호의 4월 16일에 실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시 3월을 기다린다. 3월을 기다려서 아내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4월 16일 그날을 기다린다. 짝수 날은 아내가 본문을 읽고 기도하는 날이다. 그날 아내는 성서 본문을 읽은 후 묵상 글을 읽어 내려가며 “이거 당신 이야기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래? 저자를 확인해보지 그래.” 아내는 저자 이름을 확인하고서는 자기에게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기다렸지.”
아내는 나란히 앉은 내 왼쪽 다리를 철석 때렸다. 기다림의 열매를 보는 순간이다. 아, 드디어 고도가 온 것일까? 아니다. 나는 아직도 기다려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책을 마치면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는 마지막 주님의 음성을 전하고 있다. 이에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하고 있다. 그분이 언제 오실지, 어떤 형태로 오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요한처럼 여전히 주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내 이웃에게 기다리자고 권해야 한다. 자기를 반대하는 원수를 보면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기다리자. 아니면 공정한 재판에 맡기고 기다리자. 재판을 믿지 못하고, 힘과 권력으로 원수를 짓밟는 것은 폭력 집단이 하는 일이다. “동지여, 같이 고도를 기다리자.”라고 성급한 그들에게 간절히 권하고 싶어진다.
2018년에 나는 여섯 번째 원고를 「다락방」에 제출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원고를 보낸 것이 7월 말이었는데, 두 달쯤 지난 9월 13일에 소식이 왔다. 내 원고가 출판을 고려 중이며, 그곳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 기다림은 다시 시작되었다.
해가 지나 2019년이 되었는데도 감감 무소식이다. 고도의 전갈을 가지고 오는 소년도 없다.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있는데, 드디어 소식이 왔다. 7월 31일, 거의 1년 만이었다. 2020년 7/8월호에 실릴 것이라는 소식이다. 이번에는 엽서 대신 PDF를 네 개 보내왔다. 저작권 양도계약서, 내 약력, 그리고 원고료 30달러를 「다락방」에 기증하는 경우에는 필요 없는 계좌 정보, 세무 관련 서식이다.
얼마나 기다리던 소식인가! 곧장 뛰어가 아내에게 바로 알리고 함께 기뻐하고 싶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알리지 않는다. 「다락방」을 읽는 그날 아내가 읽으며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이다. 그러려면 앞으로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요한의 심정을 다시 생각한다.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육체를 떠나 하나님 품으로 가는 ‘소망의 인내’를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신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기다리기로 한다. 기독교사상 10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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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다리지를 못하는 급한 성미가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힘껏 밟습니다. 여유가 없고, 가진 것이 적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생활 속에서 성도의 모범을 보이는 신앙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늘 들어와 읽어주니 감사합니다.
저도 언젠가는 다락방에 기고하는 날을 기다리면서 감동적인 글에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꼭 기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