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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세의 인문학
(1) 부록까지 400쪽이 넘는 이 책의 저자 신동준에 대하여 출판사는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 찾는 고전연구가이자 역사문화평론가다. 그의 저서는 독자들에게 고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에서 정치부기자로 활약했고, 1994년 다시 모교로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으며 일본 동경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춘추전국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무경십서》《후흑학》《사마천의 부자경제학》《조조의 병법경영》《팍스 시니카》《열국지 교양강의》《조선국왕과 중국황제》《인물로 읽는 중국현대사》《삼국지 군웅과 치도를 논하다》등이 있으며, 역서 및 편저로는 《자치통감 삼국지》《춘추좌전》《국어》《전국책》《초한지》등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책 표지에는 “난세 중의 난세 춘추전국시대에 꽃피운 제자백가 12인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은 국가와 기업, 개인에 이르기까지 적용 가능한 천하경영 이론을 제공한다. 『한비자』를 통해 결단과 타이밍의 의미를 이해하고 『손자병법』을 통해 복잡한 세계경제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찾아내고 『논어』를 통해 신용을 근본으로 삼는 신뢰경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나아가 제자백가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해 모택동의‘신 중화제국’창립배경, 애플제국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성공비결 등 역동적 혁신의 지혜를 읽어낼 수 있다.”고도 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백가쟁명(百家爭鳴)」은 이미 들어본 단어이기는 한데 그들과 그것의 사상과 철학은 지금도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진행될 역사의 교본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책에서는 난세였던 춘추전국시대를 산 12명만을 표본으로 삼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의 학단(學團)을 만들거나 학파(學派)를 구성할 정도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유가의 공자, 맹자, 순자. 도가의 노자와 열자, 장자. 법가의 상앙과 한비자. 묵가의 묵자. 병가의 손자. 종횡가의 귀곡자. 상가(商家)의 관자 등이 그들로 그들의 이름은 수천 년 동안 잊어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책 읽으면서 잘 못 알고 있는 내용이나 인식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이들의 천하경영 이론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저자도 책머리에 “제자백가가 제시한 난세의 타개방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를 바라고, 제자백가의 천하경영 이론을 배경으로 21세기 동북아 허브국가의 실현에 앞장서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했다.
처음 내세운 인물이 공자인데 “공자는 대다수의 사람은 서로 비슷한 바탕의 질(質)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보았다. 그러나 질을 그대로 둔 채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거나 스스로 배우려 노력하지 않을 경우에는 거칠고 비루한 ‘야비(野鄙)’한 사람으로 남을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 한 것이다. 학이는‘문질빈빈(文質彬彬)*’의 문(文)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문질빈빈 : 외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아름다움이 서로 잘 어울린 모양
공자는 왜 학(學), 즉 학문을 배우라고 했을까? 『논어』「술이」편에 그 회답이 있다.
“군자가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을 드러낼 길이 없다. 배워야만 고집스럽지 않게 된다. 충성과 믿음을 주로하고 자신보다 못한 자와 벗하지 않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여기서 방점은 바로 학즉불고(學則不固)이다. 풀이하면 ‘배워야만 고집불통*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집불통을 장자는 일곡지사(一曲之士라)라 했는데 한 가지만 아는 편협한 자라는 뜻이다.
『논어』「옹야」편의 ‘문질빈빈’은 「술이」편 ‘학즉불고’를 설명한 것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한 군자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을 통해 인문을 통찰한 독서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학즉불고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책을 놓지 않는다는 이른바 수불석권의 행보를 고수한 사실과 무관치 않다. 수불석권의 자세로 독서를 제대로 한 자만이 위정자의 자격이 있다는 불문율(不文律)이 통용된 시대가 있었으니 송나라 때로 이 시대를 독서치학(讀書治學)의 시대라고 한다. 공자사상이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찬연한 빛을 발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배움에 대하여 공자는 “인(仁)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지혜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방자하게 된다.”고도 했다. 공자는 이 ‘인지합일(仁知合一)’의 단계에 이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호학을 말하고 있다. 인(仁)이 학지(學知)와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쉽게 알 수있는 대목이다. 학은 반드시 심사숙고하는 사(思)와 연결되어야만 한다. 『논어』「위정」편에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공자가 말하는 지(知)는 반드시 학과 사의 겸행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배우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지를 얻을 수 없다. 학과 사가 함께 어우러져야 지가 비로소 ‘인지합일’의 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안회(安回)가 있는데 노애공(魯哀公)이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안회라는 사람이 배우기를 좋아했습니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그와 같은 사람이 없어서 아직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애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안회처럼 배우기를 좋아하고 ‘인지합일’의 단계에 이르면 뭐가 좋고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논어』「안연」에 그 해답이 있다.
“자신을 억제해 예(禮)로 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통해 인(仁)을 이룰 수 있다. 하루만이라도 극기복례하면 천하가 모두 인으로 돌아가는 천하귀인(天下歸仁)을 이룰 수 있다. 이를 이루는 것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으로 어찌 다른 사람에게서 비롯될 수 있겠는가”인지합일의 경지가 바로 극기복례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면 천하귀인이 되는데 이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생애를 바쳐 ‘치평국(治平國)’을 위해 왜 헌신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공자 사상을 읽는 동안에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 심기’와 관자(管子)의 명언을 소개했는데 이는 공자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자』「권수」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년지계로 곡식을 심는 것보다 나은 게 없고, 십년지계로 나무를 심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 종신지계로는 인재를 키우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 한 번 심어 한번 거두는 건 곡식이고, 한 번 심어 10배의 이익을 얻는 건 나무이고, 한 번 키워 100배의 이익을 얻는 건 사람이다. 인재를 키우면 마치 그를 귀신같이 부리는 것과 같다. 일을 귀신같이 행하는 자만이 왕자(王者)의 자격이 있다.”
‘인재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知遇至恩)는 말은 상기해 볼 가치가 있는 말인 것 같다.
(2) 전국시대 말에 공자의 학문이 크게 일그러진 적이 있다. 이는 맹자의 교조적인 언설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아들여지면서 ‘통치이념이 화석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원래의 공자로 복원시킨 인물이 전국시대 최후의 대유 순자(荀子)이다. 순자는 맹자와 달리 미신적인 음양오행설과 점복술 등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하늘을 자연의 질서로 해석하고 ‘인간이 두려워할 것은 어떤 전조(前兆)나 신령이 아니라 악정(惡政)과 혼란’이라고 단언했다. 《순자》〈천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 순자에게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리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라고 물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이상할 것도 없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는 내리기 때문이다.”고 했다. 순자는 제자백가들의 비합리적 사유를 통렬하게 질타하면서 온갖 이설로 오염된 공자사상을 바로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합리적인 사고는 공자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그가 학문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순자》〈권학〉편을 보자.
“학문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가? 방법은 『시』와 『서』를 송경(誦經)하는 데서 시작해 『예』를 읽는데서 끝나고, 그것의 의의는 선비가 되는데서 시작해 성인이 되는 데서 끝난다. 자신의 힘을 다하여 오랫동안 노력해야만 성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니 학문이란 곧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유가 중에서 이처럼 학문을 강조한 사람은 없다. 공자사상의 적통이 맹자가 아니라 순자로 이어졌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합리적이고 엄청난 속도 그리고 임기웅변이 적실히 요구되는 21세기 G2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뛰고 있다.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살아남아서 성공할 수 있을까?
삼국시대 제갈량(諸葛亮)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제갈량을 신출괴몰한 군신(軍神)으로 그려 놓았으나 실제『삼국지』나 『자치통감』등 정사에는 사뭇 다르다. 제갈량은 결코 임기웅변에 능한 전략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식의 신중한 삶을 살았다. 『삼국지』의 원저자 진수*의 평가가 그 증거다.
*진수(陳壽.233∼297)중국 서진(西晋)시대의 역사가로 촉나라 사람이었으나 촉나라 멸망 후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이어진 뒤에 삼국시대 역사 <삼국지>를 저술했다.
“제갈량은 군사통솔 방면에 능력은 있었으나 기발한 모략이 부족했다. 오히려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용병하는 재능보다 우수했다.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줄 아는 장수로서의 지략은 그의 장기(長技)가 아니었다.”
제갈량은 역발상의 재능이나 임기웅변이 요구되는 ‘창조경영’보다는 기존의 것을 공평한 잣대를 적용해 체계적으로 보수하며 관리하는 ‘합리경영’에 더 밝았다. 아랫사람에게 위임하면 안심할 수 없어서 모두 자신이 결재하는 바람에 2번의 북벌 도중에 과로로 스스로 몰락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합리경영을 중시한 이병철 삼성그룹 전회장도 제갈량과 많이 닮았다. 반도체를 삼성의 주력 종목으로 선택하는 과정에 그는 초기에 아들 이건희의 공격적인 접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합리경영의 요체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방안을 선택하는데 있는 것인 만큼 아무리 난세가 극에 달할지라도 기본적 의미마저 퇴색되는 것은 아니지만...
(3)“큰 도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 어진 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에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 노인은 편히 여생을 마칠 수 있고, 젊은이들은 자기 능력을 발휘할 곳이 있고,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다. 홀아비·과부·고아와 자식 없는 노인과 병든 자들 모두 부양을 받으며 남자는 일정한 직업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다.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신이 하려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음모와 잔꾀의 마음이 끊어지고 도둑이나 폭도가 생기지 않기에 밖에 문은 있으나 잠그지 않는다, 이를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이상은 유가의 『예기』「예운」에 실린 글이다. 그런데 『한비자』「대체」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치국의 큰 요체를 터득한 사람은 천지자연과 더불어 사는 순응의 이치를 터득했다. 천지자연의 도리를 거스르지 않고 사람의 본성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지극히 태평한 세상인 ‘지안지세(至安之世)’에서는 법(法)이 아침 이슬처럼 만물을 촉촉이 적셔준다. 백성은 순박함을 잃지 않고 마음으로 남과 원한을 맺지 않는다. 전쟁 따위가 일어날 일이 없으므로 수레와 말이 먼 길을 달려 지치는 일이 없고 용사들이 깃발 아래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 일도 없다. 그래서 다스림을 간략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주는 게 없고 민생의 안녕보다 더 오래가는 복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교해보면 한비자의 ‘통치자’와 유가의 ‘성인’이 둘이 별반 차이 없다. 한비자가 상앙(尙鞅)의 법치(法治), 신불해의 술치(術治), 신도(愼到)의 세치(勢治)를 하나로 녹일 수 있었던 것은 노자의 『도덕경』에 주석을 붙이면서 노자사상인 도치(道治)까지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상을 ‘법가의 4대 통치술’이라고 하는데 최상의 통치를 도치에서 찾는 점에서 노자와 한비자가 일치하고 있다. 근대 정치학에서 볼 때는 노자사상이 무치(無治)를 주장한 장자가 아닌 지극히 편안한 세상을 만든다는 ‘지안지세’의 『한비자』로 이어졌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난세 제왕학의 뿌리로 간주되는 『한비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오랫동안 이단서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송대 주희(朱熹-朱子)에 의해 성리학이 대두되면서 법가사상 자체가 이단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한비자의 스승이던 순자가 패도(覇道)를 수용하고 맹자의 왕도(王道)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된 때문이다. 이후 『한비자』는 금서로 묶였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때에도 법가의 통치술을 구사한 삼국시대 조조가 공식적으로 찬역자(簒逆者-거슬러 빼았음)로 낙인찍히면서 법가사상은 사망선고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조가 찬역자가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목이 달아날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신(魯迅)이 「중국소설사략」에서 조조를 ‘글의 형식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창시자’라고 평가하면서 법가사상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조조를 만고의 간웅으로 치부하던 상황에 비춰볼 때 노신의 평은 나름대로 우호적인 평가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중국이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난세의 상황에 들어가자 비록 북벌 끝에 명목상이기는 하나 중화민국의 총통이 된 장개석은 입만 열면 ‘인의’를 역설했다. 하지만 그는 조조를 높이 평가하며 법가의 통치술을 구사한 모택동에게 패해 섬으로 도주해야만 했다.
진시황을 ‘만고의 폭군’으로, 조조를 ‘만고의 간웅’으로 매도한 이후 근 2천년 만에 법가사상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진 것은 전적으로 모택동 덕분이었다. 그 결정판이 바로 지난 세기말에 빚어진 문화대혁명이다. 모택동이 장개석을 제압하고 ‘신 중화제국’의 창업주가 된 데는 『한비자』의 4대 통치술을 적극 활용한 덕분으로 노자사상에서 차용한 도치술은 외세와 군벌에 신음하는 인민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도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공산사회의 환상이 그것이었다. 이는 유가의 대동사상과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 3국 소장 학자들 사이에서는 『한비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법가사상이 역사 발전의 추동세력이었다는 평가에 따른 것이다. 괄목할만한 논저도 쏟아지고 있다. 이는 『한비자』의 통치술이 인간의 본성인 호리지성(好利之性)에 대한 냉철한 분석 위에 기초해 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4) 유세(遊說)는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선전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런 일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3,4,5공 때 정치판에서도 많았지만... 공자, 묵자, 맹자, 순자, 한비자, 장자 등이 모두 유세하고 다녔다. 유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는’치세(馳說)와 같은 말이다. 유세는 선전, 치세는 순방에 방점이 찍힌 것만 다를 뿐이다. 치세라는 말은 『사기』「이사열전」에 처음 나온다. 이사가 2세 황제 호해에게 올린 상소에서다.
“명군(名君)은 홀로 결단할 뿐입니다. 권력이 신하에게 있지 않은 이유입니다. 인의를 전면에 내세운 유가의 주장을 없애고, 치세의 입을 막고, 열사(烈士)의 행위를 억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릴지라도 능히 마음속으로 홀로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법가와 유세가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가(說家)는 그럴듯한 비유와 화려한 수사(修辭)로 사물의 실정과 득실을 논하는데 능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실제와 거리가 멀다.”이는 전한시대 왕충이라는 이가 한 말이다. 현란한 언변을 밥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보를 질타한 것이다. 당시종횡가, 즉 세가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우호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귀곡자(鬼谷子)는 전국시대를 풍미한 세가의 시조다. 귀곡자는 대략 기원전 390년에서 330년 사이에 활약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이름은 왕후를 비롯해 왕훈, 왕선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통설은 황후(王詡)다.
『사기』「소진열전」에 “소진(蘇秦)은 동주 낙양출신으로 동쪽 제나라로 가 스승을 찾아 섬기면서 귀곡자 밑에서 배웠다.”이게 귀곡자에 관한 언급의 전부다. 소진은 진(秦)나라와 대항한 연 초 한 위 조 제 등 6국의 합종책을 이뤄낸 인물이다. 이런 인물의 스승에 대한 기록치고는 너무 황당하다. 「장의열전」도 별 차이가 없다. “장의(張儀)는 위나라 출신으로 일찍이 소진과 함께 귀곡자를 선생으로 섬기며 종횡술을 배웠다.”
장의는 6국을 진나라와 결합시키는 연횡책(連橫責)을 주도한 인물이다. 소진 못지않게 명성을 떨쳤다. 『사기열전』은 사마천이 발품을 팔아가며 자료를 수집한 것인데 소진과 장의의 스승에 대해 이렇게 ‘바람이 호수 위를 스치듯’적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일세를 풍미한 종횡가의 스승인 귀곡자에 대해 제대로 적지 않은 것은 그가 전한 초기까지만 해도 그저 전설상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손빈(孫矉)과 방연(龐涓)도 귀곡자에게 병법을 배웠다는 등 부풀려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5) 공자와 묵자, 노자 등이 각각 유가와 묵가, 도가의 효시로 간주되고 있는 것과 달리 병가(兵家)는 아직까지 누가 효시인지 정설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춘추시대 말 오자서(伍子胥)와 함께 오왕 합려(闔閭)의 패업을 도운 손무(孫武)를 들거나 전국시대 위문후(魏文候)의 패업을 도운 오기(吳起)와 제나라에서 활약한 손무의 손자라고 하는 손빈을 들기도 하나 통설은 손무다. 그러나 손무는 미스터리 인물로 실존인물인지 명확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사기』「손자오기열전」과 『오월춘추』등 기록을 토대로 추론할 수밖에 없는데 손무는 가공인물이고 저서로 알려진 『손자병법』역시 후대인이 전래돼 오던 병법들을 요약해 정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설들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손무를 실존인물로 보았던 사마천은 『사기』「손자오기열전」을 쓰기 전에 손무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고 다녔다. 그러나 합려의 궁녀들을 대상으로 손무가 병법을 시험해 보였다는 일화밖에는 수집할 수 없었다. 다른 것은 수집하지 못했으므로 손무가 가공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는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손자오기열전」에 있는 손무 관련 기록이다.
“합려는 손무가 궁녀들을 대상으로 군령을 바로 세우는 것을 보고 그가 병법에 뛰어난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곧바로 그를 장수로 삼았다. 이후 손무는 강대한 초나라를 격파해 초나라 도성을 함락시키고 북쪽으로 제나라와 진나라를 제압했다. 합려는 손무 덕분에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을 그게 떨치게 되었다.”
기록이 앞뒤가 없다. 또 『춘추좌전』에는 손무란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합려를 도와 활약한 참모로 오직 오자서와 백비(伯嚭)밖에 없다. 손무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면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손무가 『손자병법』을 지었다는데도 의구심이 많다.
아무튼 『손자병법』을 정밀하게 읽고자 할 경우 반드시 조조의 주석을 참고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송대의 문인 정후칙(鄭厚則)이 “손자병법은 그 내용이 간략하면서도 풍부하고 쉬우면서도 심오하고 하나로 요약되었으면서도 두루 통한다.”고 한 때문이다. 『도덕경』이 그렇듯이 『손자병법』을 이해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조조가 『손자병법』에 주석서 『손자약해(孫子略解)』를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런 경험이 이론에 바탕을 두고 실제를 겸비한 군사전문가로 성장하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조조는 온갖 잡문이 끼어들어 훼손된 『손자병법』에 대대적인 손질을 가해 『손자약해』를 지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병가의 성전’으로 칭송받고 있는 『손자병법』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시킨 것이다. 『구당서』에 ‘이기고 지는 것은 늘 있는 일’이라는 ‘승패병가상사(勝敗兵家常事)’라는 말에서 보듯이 당시 조조는 한번 범한 실수를 두 번 다시는 범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그것은 유비와 손권과는 다른 점이다. 조조를 시대를 뛰어넘는 최고의 전략가로 꼽는 이유다.
21C 현재 G1인 미국의 행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와 외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교를 배제한 군사는 맹목적이고 군사를 배제한 외교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손자병법』은 전술보다 전략에 방점을 두고 있다. 흔히 말하는 병략, 무략, 군략은 『손자병법』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요즘은 주로 ‘군사전략’으로 표현하는데 국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력을 이용하는 기술과 과학을 뜻한다. 줄여 ‘군략’이라고 한다. 최고의 전략가를 말할 때는 흔히 『손자병법』의 저자로 손무를 꼽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병가의 효시는 춘추시대 제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룬 관중으로 보아야 한다. 병가뿐 아니라 제자백가의 사상적 효시가 관중이다. 그의 저서로 알려진 『관자』「병법」은 그 내용이 『손자병법』을 방불케 한다. 「병법」에 이런 기록이 있다.
“용병을 원대하게 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적들로 하여금 마치 공허한 곳에 머물며 그림자와 싸우는 것처럼 만들 수 있고 적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아군의 자취를 추격하지 못하고 임의로 작전할 수 없게 만들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 이를 일러 ‘병도’라 한다. 사라졌으나 있는 것 같고 뒤에 있으나 앞에 있는 것 같으니 병도의 위엄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손자병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관자』에는 군사력의 강약에 의해 국가의 존망과 안위가 결정된다고 했다. 관중이 전쟁불가피론에 입각해 군비강화를 역설한 이유다. 그는 ‘고대 성왕들의 전성시대에도 군대가 있었다.’고 했다.
『관자』「치국」의 다음대목은 부국강병 논리의 탄생배경을 보여준다.
“백성이 농사를 지으며 농토가 개간되고 농토가 개간되면 곡식이 많아지고 곡식이 많아지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나라가 부유해지면 군사가 강해지고 군사가 강해지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토가 넓어진다.” 지금 시점에서 보아도 손색없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부국강병(富國强兵)책이 아닐 수 없다.
(6) 약간 생소한 이름지만 진시황이 진(秦)나라를 통일하기 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도록 하는데 공헌한 인물 중에는 상앙(商鞅)이라는 이가 있다. 나중에 진시황이 통일국가의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봉건제를 중앙집권적 군현제로 바꾸고 인구를 늘이는 정책 등을 폈는데 이는 바로 상앙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상앙의 변법은 현재까지도 중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개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진시황의 윗 할아버지 진효공이 죽으면서 시작되었다. 재위 24년만인 기원전 338년 효공이 병사했다. 이에 상앙은 비명횡사할 운명에 닿았다. 중국 역사에서 타국 출신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이른바 기려지신(羈旅之臣)은 거의 예외 없이 종말을 맞았는데 상앙도 마찬가지였다.
*진나라 계보: 25.진효공-혜문왕-무왕-소양왕-효문왕-장양왕-31.진시황
가장 큰 이유는 후계자와의 갈등 때문인데 상앙 역시 이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앙이 실권을 잡자 기득권 세력인 세족들을 가차 없이 권력일선에서 배제했다. 이로 인해 세족들이 앙심을 품는 것은 불문가지. 진효공이 죽고 뒤를 이어 혜문왕으로 즉위한 태자 사(駟)는 일찍이 상앙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기득권 세력은 혜문왕이 즉위하자 상앙을 헐뜯기 시작했다. 그것은 혜문왕이 태자시절 태자 잘못으로 대신 의형(劓刑-코를 베는 형벌)과 묵형(墨刑-이마에 자자하는 형벌)의 형벌을 받은 태자의 사부이던 공자 건과 공손가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대신의 권세가 너무 크면 나라가 위태롭고 수종하는 좌우의 권세가 크면 자신의 신세를 망친다고 했습니다. 상앙이 비록 법을 세워 진나라를 다스렸습니다만 백성들은 원망키를 ‘진나라에는 상앙만 있을 뿐 국법은 없다.’고 합니다. 상앙은 15개 성읍을 식읍으로 갖고 있는데다 병권까지 쥐고 있어 권세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난을 일으키고야 말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튿날 혜문왕이 말했다.
“상앙에게 가서 상국의 인(印)을 반납하라는 과인의 명을 전하라.”
상앙은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궁으로 들어가 상국의 인을 바치고 물러났다. 미리 인을 반납하고 물러나는 등 대처하지 못했는데 불찰이었다. 그러자 이제는 다른 나라로 망명하거나 반기를 드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상앙은 후자를 감행하기로 하고 함양성을 떠나 1백리쯤 갔을 때 문득 뒤에서 함성이 들리고 군사들이 몰려왔다. 그는 급히 관과 옷을 벗어던지고 백성으로 가장해 달아났다.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어 객점으로 들어가자 객점 주인이 말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오.”
“떠날 때 깜박 잊고 가지고 오지 않았소.”
“그대는 상군의 법을 모르시오. 신분증 없는 자를 재우면 재워준 사람까지 형벌을 당하게 되어 있소.”
상앙이 탄식했다.
“내가 만든 법에 내가 걸려들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객점을 나와 야음을 이용해 관문을 벗어난 그는 곧바로 위나라로 도주했다. 『사기』「상앙열전」에는 상앙이 위나라 관문에 당도하자 위나라 관원이 이 사실을 급히 조정에 보고했다. 상앙으로 인해 도성을 대량으로 옮기는 등 위기를 맞은 적이 있는 위혜왕이 일갈했다.
“그 자는 지난날 공자 앙을 유인해 서하 땅을 빼앗아 간 자가 아닌가? 내가 어찌 그 자를 잊을 리 있겠는가. 즉시 그를 밖으로 내쫓도록 하라!”
위나라에서도 받아 주지 않자 할 수없이 상앙은 식읍인 상어로 돌아와 반기를 들었다. 무리를 이끌고 진격해 지금의 섬서성 화현 부근인 정현을 쳤다. 그러나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나라 대군이 상앙 일당을 일거에 격멸하고 상앙을 체포했다. 함양으로 압송되자 진혜문왕이 상앙의 죄목을 열거한 뒤 곧바로 거열형(사지를 찢어 죽게 하는 형벌)에 처했다. 그럼에도 진나라의 후왕들은 상앙이 실시하던 변법은 계속 유지했는데 그의 변법은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일대 혁신법이었다.
(7) 다 알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별로 아는 게 없는 맹자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전한 말기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에는 어린 맹자의 교육을 위해 맹모가 3번이나 집을 이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으나 맹자가 어렸을 때 편모 밑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고 또 맹자의 면학을 독려하기 위해 학업 도중에 돌아온 아들 앞에서 애써 짠 천을 끊어버리는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전설도 실려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맹자가 빈천한 환경 속에서도 어렸을 때부터 육예(六藝)를 익혔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맹자도 공자처럼 지방의 하급 사족(士族)출신이었을 공산이 크다.
맹자의 출생은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 외에 기록이 없다. 대략 공자가 죽은 후 90년 뒤에 출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공자의 직제자인 증자(曾子) 그리고 손자 자사(子思)의 학문을 이었다고 스스로 말한 맹자는 10여 년간이나 천하를 돌며 유세를 하고 다녔는데 위제송등추나라를 비롯해 여러 나라를 매우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다. 그러나 공자처럼 맹자의 뜻에 따라 정치한 나라는 역시 없었다.
맹자 당시에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여러 학설이 존재했는데 선도 악도 없다는 무선무악설(無善無惡說)과 선도 있고 악도 있다는 유선유악설 등이 그것이다. 흔히 순자의 성악설을 맹자의 성선설과 대비되는 이론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맹자 성선설에 대비되는 인성론은 한비자 등 법가의 성악설이다. 맹자와 논쟁하기도 했던 고자(告子-이름은不害)는 ‘사람의 본성은 선악의 어느 한쪽으로 단정할 수 없고 환경에 따라 선악이 구분된다.’고 하였으나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본래부터 선하고, 악하게 되는 것은 선한 본성이 주위환경에 의해 가려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린 아이가 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보게 되면 누구나 아이를 불쌍하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나는 현상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이를 토대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인(仁),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에서 나오는 의(義), 사양할 줄 아는 마음에서 나오는 예(禮), 시비를 가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지(知)는 누구나 갖고 있는 선한 본성이라고 했다. 인의예지의 마음을 잘 기르면 능히 성인이 될 수 있고 이런 마음을 통치에 적용하면 바로 왕도(王道)가 된다는 것이 맹자사상의 골자다. 맹자를 후대로 내려오면서 존중한데는 바로 성선설과 왕도를 주장한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8) 여기까지 공자 순자 한비자 귀곡자 손자 상자 관자 맹자에 대해 읽고 살펴보았다. 아직 묵자 노자 열자 장가가 남아 있으나 이들까지 모두를 읽어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을 다시 한 번 더 빌리지 않는 한 말이다. 그래서 조금은 생소한 이름인 열자(列子)를 읽고 시간이 되면 장자까지 읽어보고 책을 반납할 생각이다.(6.18)
통상 도가의 3대 인물로 노자 열자 장자를 꼽는다. 그러나 『사기』「노자한비열전」에는 열자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실존인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전한 말기의 유향은 『열자서』에서 실존인물로 간주해 “열자는 정나라 사람이다. 정목공(鄭穆公)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대략 도가에 속한다.”고 적었다. 또 선진시대 『여씨춘추』「심분(審分)」에도 “노자는 유(柔), 공자는 인(仁), 묵자는 겸(兼), 관윤자는 청(淸), 열자는 허(虛), 양주는 기(己), 손빈은 세(勢)를 귀하게 여겼다.”고 적고 있어 실존 인물로 본 모양이다.
이들을 근거로 당나라 안사고(顔師古)는 『한서』「예문지(藝文志)」에 ‘열자의 이름은 어구(圉寇)라 하고 장자보다 앞선 사람이다. 장자가 그를 칭송했다.’고 주석을 달았다. 하나 「노자한비열전」과『장자』「천하」,『순자』「12자」등에 왜 열자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당시는 유학만을 관학(官學)으로 인정하던 시절로 도가의 학문인 황로학(黃老學)을 작게 혹은 취급치 않은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사기』「노자한비열전」에서 이미 노자와 장자를 거론한 마당에 열자까지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열자가 거론되지 않은 이유 중에 다른 하나는 『순자』「12자」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타효 위모 진중 사추 묵적 송견 신도 전병 혜시 등석 자사 맹자 등 각 학파의 대표적 인물 12명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순자가 비판대상으로 삼은 자들로 공자와 노자 장자 등도 여기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열자도 그 비판대상에서 비켜간 셈이다.
『순자』「12자」에 열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실존 가능성을 부인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열자’의 사상은 무엇이며 전해지는 기록이 미미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열자의 조국인 정나라는 춘추시대 초기에 일시적으로 세력을 떨치기도 했으나 이내 초나라와 진나라의 압력을 받아 전국시대에는 한나라에 병탄되었다. 열자는 이런 약소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포의(布衣)로 살았다. 그의 생애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할지 모른다.
『여씨춘추』에 ‘열자는 일찍이 관윤자에게 활쏘기를 배웠다.’고 했는데 관윤자는 노자를 스승으로 삼은 인물이다. 『사기』는 노자와 공자가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공자는 기원전 552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이를 종합하면 관윤자와 열자는 비슷한 시기 혹은 약간 늦은 시기인 춘추시대 말에서 전국시대 초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열자’는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장자』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른바 간세간(間世間)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열자』는 입세간(入世間)의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있는 까닭에 출세간(出世間)에 집착하고 있는 『장자』보다는 『도덕경』에 훨씬 가깝다. 이는 『열자』가 무(無)를 중시한 장자와 달리 허(虛)를 중시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노자와 열자, 장자를 출세간을 상징하는 불가(佛家)와 비교해 그 차이점은 그리 크지 않다. 노자 열자 장자는 불가와 달리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장자는 사후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암시하기만 했다. 장자는 살아있는 모든 인간이 두려워하는 즉음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살아 있는 생전보다 사후가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사후세계를 실제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도가사상은 기본 취지가 서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노자처럼 천하를 가슴 속에 품고 인류문화를 기치로 내세운 문화인으로 살 것인지, 열자처럼 도전적인 창업가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장자처럼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예술가의 길을 갈 것인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사자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텅 빈 마음인 ‘열자’의 사상을 크게 허를 중시하는 귀허주의(貴虛主義)와 주어진 삶을 즐기는 낙생주의(樂生主義)로 요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9) 장자(莊子)가 동양의 역사문화와 사상에 끼친 영향을 감안하면 출생과 성장 등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전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사기』「노자한비열전」으로 여기에 그를 소개한 내용도 225자에 불과하다. 「자객열전」에 위(衛)나라 자객 형가(荊軻-진시황을 시해하려 한 인물)에 대해서는 3,212자나 할애한 것과 비교하면 대비되는 부분이다. 『사기』「노자한비열전」에 적힌 장자에 대한 기록이다.
“장자는 몽(蒙)땅 출신으로 이름은 주(周)다. 일찍이 몽 땅 칠원(漆園)의 관리를 지낸 적이 있다. 그는 양혜왕과 제선왕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그의 학문은 두루 통하지 않는 게 없으나 요체는 노자의 설로 귀착된다. 10여 만자에 달하는 그의 저서는 대부분 우화로 채워져 있다. ‘어부’와‘도척’‘거협’등을 지어 공자를 따르는 무리들을 비방하고 노자의 학술을 천명했다. ‘외루허’와 ‘항상자’등은 모두 꾸며낸 애기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분석과 정황에 대한 비유가 뛰어난 그는 이를 적극 이용해 유가와 묵가를 신랄히 공격했다. 비록 경륜이 높고 인망이 있는 학자일지라도 그의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는 언사가 광대하고 심원한데다 기탄이 없었던 까닭에 왕공대인들로부터 오히려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때 초위왕은 그가 현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장차 재상으로 삼을 요량으로 사자(使者)에게 많은 예물을 주어 그를 맞이해 오도록 한 적이 있다. 그가 웃으면서 사자에게 말하기를 ‘예물로 보낸 천금은 많은 재물이고 경상(卿相)의 자리는 매우 존귀한 자리이지요. 그런데 그대만 홀로 교제(郊祭)를 지낼 때 희생으로 바치는 소를 보지 못한 것이오? 맛있는 음식으로 몇 년 동안 먹인다 한들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소?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더럽히지 마시오. 나는 정녕코 더러운 도랑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갖고 있는 자들의 구속을 받지는 않을 것이오. 종신토록 벼슬을 하지 않고 내가 뜻하는 바대로 살며 즐길 생각이오.”라며 사자를 쫓아 보냈다고 한다.
‘사람들은 죽음이 삶의 바로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천지만물 가운데 삶을 끝까지 연장하려 드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오만한 짓이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갖게 되면 세속의 명리(名利)로부터 초연하게 된다. 유한한 삶 위에 권력과 재물, 명예를 쌓기 위해 부질없이 남들과 원한을 맺으며 정신없이 살아가느니 차라리 천지자연 속에 몸과 마음을 맡겨 유유자적(悠悠自適)살아가는게 더 낳다.’장자는 바로 이와 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우주를 품안에 껴안고 있는 까닭에 시공을 뛰어넘어 삶 자체를 관조(觀照-지혜로 사물의 실상을 비추어 봄)할 줄 아는 안목이 있다. 이를 글과 언행으로 남기면 그것이 바로 문화고, 문예창작이 된다. 그러려면 먼저 세속의 명리로부터 초연해야 하는데 관건은 맹자의 주장처럼 ‘온갖 외물로부터 해방된 자유정신’을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
(맺는글)이상 제자백가 사상을 대략으로나마 살펴보았다. 제자백가 사상이 ‘천지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인간학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서양의 사상가들과 달리 한 번도 ‘신의 죽음’을 선언한 적도, ‘자연의 노예화’를 말한 적도 없다. 장자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내세우며 자연을 도(道)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간주한 배경도 여기 있다.
전국시대 후기에 들어와 제자백가 모두 겉으로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을 전개하면서도 도의 개념을 매개로 상호 깊은 사상적 교류를 이룬 결과다. 서양은 만물에 내재하는 대립과 모순을 지양하기 위한 해법으로 ‘투쟁’과‘발전’개념을 제시하였으나 동양은 ‘조화’와 ‘순환’을 해답으로 제시했다. 제자백가는 본질적인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도에 몸을 의탁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천지변환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자백가가 하나같이 치지와 피치자간의 조화와 공평무사한 통치를 역설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 스마트시대, 기업의 성패의 관건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에 좌우될 수밖에 없고 잡스처럼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추진해야 한다. 그게 예술경영이다.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처음 출시할 때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언급했는데 예술경영의 중요성이 절실하고 중요한 이유다. 그는 2010년6월7일 샌프란시스코 모스콘 센터에서 열린 ‘아이폰4’출시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애플은 단지 기술기업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기업입니다!”그리고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이 애플과 다른 회사를 구별하는 기준이라고도 덧붙였다. 잡스는 인문학 전통이 강한 라즈대학에 다니다 중퇴하고 스텐퍼드대학에 다시 입학했는데 재학시절에 붓글씨에 매료되었다. 그는 2005년 스텐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붓글씨는 멋지고 역사성을 담고 있는데다 과학으로 분석할 수 없는 미묘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붓글씨에 관심이 많던 그는 훗날 이런 지적 호기심이 ‘맥컴퓨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2019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