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사에서 여성항일운동이 두드러졌던 3.1운동기는 전국적인 규모만큼 한국여성의 역할도 변모시켰다. 당시 집안 내조자에 머물렀던 한국여성이 역사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변화를 어디부터 주목해야 할까.
문호개방과 종교유입, 근대교육의 확대로 교육기관에서 수학하는 여학생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민족운동의 대열에 서는 폭도 넓어졌다. 물론 이런 변화는 거슬러 올라가서 동학의 인내천(人乃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 박영효의 남녀동권론(男女同權論)에서 강조했던 인간존중과 평등에 개화의지가 고스란히 묻어 있지만 근대교육의 확대는 남녀구분 없는 교육기회의 균등을 법적으로 제도화하고 현실화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나 기존의 여성교육은 가정교육에 의존했지만, 근대교육기관의 등장은 지방여성이 학교와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부산의 경우, 1895년에 호주 기독교장로회의 여자전도사였던 맨지스와 페리가 부산지역의 고아를 돌보기 시작한 이래 1895년에 정규교육과정을 갖춘 일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여성교육은 본격화된다. 일신여학교는 1909년에 고등과를 추가로 개설해 1913년 1회 졸업생 4명, 이어 1925년까지 12회 5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기독교정신과 남녀평등사상의 전파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시대변동과 맞물려 근대교육은 여성의 사회인식과 민족의식강화에 많은 영향을 줬다. 그것은 부산지역 3.1만세운동의 시발점이 일신여학교인 것에서 알 수 있다.
서울 파고다 공원의 만세시위 이후 부산경남에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전달되면서 일신학교 기숙사는 학생들이 밤을 새워 태극기를 제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신여학교의 교사 주경애(朱敬愛)의 주도로 교사 박시연(朴時淵)과 일신여학생 김응수, 손명진, 김반수, 박차정, 심순의 등 11명, 지역학생들이 모여 3월 11일 오후 9시 좌천동 거리는 만세울음을 쏟아내며 태극기를 흔드는 가녀린 손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들의 가녀린 손은 태극기를 힘차게 흔드는 여장부의 손으로, 소녀의 울부짖음은 부산의 만세시위를 앞장서는 메아리로 이어졌다. 그렇게 일신여학생의 만세시위는 부산경남의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일신여학교의 만세울림! 그것은 가녀린 민족혼의 떨림을 나타내는 또 다른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