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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민족의 숙원을 담은 세번째 법률공포,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라. 조사 682건 체포 305건 자수 61건, 친일파 민족 앞에 죄를 고하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해방후 1949년, 민족의 고혈을 빨아내던 친일파들이 처음으로 법의 심판대에 올랐습니다.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공판대에 선 친일파들의 최후 변론을 들어볼까요.
친일 반민족행위자1: 잘못했습니다.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 받는다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를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주시오!---1949.3.28. 반민특위 1차공판—뒤늦게 석고 대죄형
친일 반민족행위자2: 난 그저 꼬스까이, 심부름꾼에 불과했어요. 일제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3.1운동 때 우리 집에서도 만세를 불렀다니까요!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1949.3.28. 반민특위 1차공판---목구멍이 포도청형
친일 반민족행위자3: 난 친일파 맞소. 조선보다 문명국인 일본의 조선통치가 훨씬 좋은 것이오. 한일강제병합을 주도한 이완용을 매국노라 비난하는데 그는 국난을 당한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사람입니다!---1954<술회>中---모르시겠소? 친일이 곧 애국이었단 말이오! 내가 애국자다. 호통형---신념으로 무장한 친일끝판왕!
최원정: 세 사람은 과연 누구며 왜 친일파가 된 것일까요? 그리고 일제는 이들을 어떻게 이용했을까요? 역사저널 그날 친일파 3부작, 제2부 친일을 애국이라 믿었던 일제통치의 협력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우는 놈, 발 빼는 놈, 뻔뻔한 놈).
-1919.3.1 일제에 맞선 대규모 만세시위,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의 주역 민족대표 33인이 헌병과 순사들에 의해 체포된다. 이들은 1년 후 내려진 최종판결에서 최고 3년형을 받고 복역한다. 그러던 1921년 12월 22일, 민족대표 중 최린, 한용운 등 6명이 가석방된다. 그것은 일제 당국의 ‘배려’였다.
최원정: 3.1운동 당시 독립선언했던 민족대표 33명 중에 무려 6명이나 가석방이 되네요.
이윤석/방송인: 민족대표 33인이면 일제 입장에서는 평생 감옥에 가둬두고 싶었을텐데~ 그래도 분이 안풀린다 이럴텐데~가석방을 해줬어요.
류근/시인: 실제 일제 당국의 배려? 출옥을 했다고 하는데 배려라는게 사전적 의미로 도와 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거든요. 일제가 우리 민족대표를 도와주려고 마음을 썼다? 뭔가 이상하고 찜찜하지 않습니까?
박재민/배우: 그냥 가석방을 해주었을리는 없고 뭔가 배려라는 명목하에 뒤에서 무슨 딜(거래)이있었던 것은 아닐까? 뭘 바라본게 아닐까 싶네요.
심용환/작가: 의심이 되지요. 합리적 의심이 드는데 실제로 배후가 있었습니다. 그 배후가 당시 민족대표들의 석방을 도운 일본인입니다. 한국 사람도 아니고,
일동: 일본인 이에요?
이윤석: 혹시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이 아닐까요?
최원정: 조선인들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류근: 친일파 특집인데 오히려 일본인 의인을 부각시킴으로 해서 친일파들을 더 나쁘게 만드는 거예요.
최원정: 오늘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계시는 경희대의 김민철 교수님 나와주셨는데~교수님, 반갑습니다. 그 일본인이 우리가 지금 기대하는 의인인가요, 어떤 사람인가요?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의인이 아니고요. 아베 미쓰이에 라는 경성일보 사장인데, 총독부 기관지죠. 개인적으로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의 개인정치자문을 하고 1920년대 조선민족운동을 분열시키는데 실질적인 기획, 전체를 조정했던 최고의 고급정치브로커죠.
아베 미쓰이에(1862~1936)-경성일보 사장, 조선언론인-문인들과 깊은 친분, 조선통치전략자문 (제2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그림자 고문).
류근: 이른바, 제국의 브로커~
최원정: 정치자문을 했다면 사이토 총독의 비선실세, 그런 사람이니까 더욱 이 사람의 행보에 의심이 가는데~ 왜 민족대표 가석방에 도움을 준 걸까요?
심용환: (테이블 위에다 상자 하나를 올려 놓는다), 이게 뭐 같으세요?
류근: 돈?
박재민: 현금 다발?
일동: 어이구, 이게 뭐야? 돈봉투 아니예요?
심용환: 돈 봉투가 아니라 아베가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보냈던 편지입니다. 200통이 넘어요. 이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면 왜 그가 이런 행동을 했는지를 그의 속내를 알 수 있겠죠.
이윤석: 둘이 사귀었어요, 왜 이렇게 편지를 주고 받았데요?
박재민: 여기 편지 한 통을 제가 집어 들었거든요. 꺼내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1919년 8월 13일, 사이토 총독께, 각하가 부임하실 때 조선인에 대한 일대 선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번 국사범 죄인에 대한 일대 은사입니다. 이것은 인심완화를 위한 첫걸음으로 오히려 조선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최원정: 은사라는 것은 은혜로운 사면~ 특사네요, 특사~
심용환: 어차피 총독이 새로 부임하니까 특별사면으로 민심을 달래라
류근: 민심완화 라는 표현을 쓴 걸 보니까 민족대표를 위해서 민심을 얻겠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어쨌든 순수한 의도에서 석방시킨 것은 아니에요.
이윤석: 편지를 하나 더 꺼내서 제가 읽어 볼게요. 민족대표 6명이 석방된 바로 다음주에 보낸 편지예요. 1921년 12월 29일, 오늘날의 형세로 보아 민원식, 선우순 따위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일대 세력을 이룩하기 어렵고 일을 꾸미자면, 이번에 가출옥한 위인 중 최린이 안성맞춤의 친구입니다. 안성맞춤이 무슨 라면 이름도 아니고? 뭔가 수상해!
박재민: 최린이라면 독립선언의 주역이잖아요. 최린은 천도교에서 활동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독립운동정신을 심어줬던 지주인데~ 사이토 총독과 최린은 양쪽 끝과 끝에 있는데 어떻게 그런 문제가 생긴 거죠?
김민철: 1910년대는 무단통치라고 보통 얘기하는데 군인이 직접적인 행정과 치안을 지배한 폭압통치를 하였는데~ 계엄령 통치죠. 이런 상태로는 3.1운동이 일어났던 조선인들의 분노를 다스리기가 너무 어렵다.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놓고 나름대로 기본적인 큰 틀을 짜지요. 핵심적인 거는 조선인 지도자급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써야 되겠다.
심용환: 또 준비한 게 있습니다. 이 사람의 어떻게 보면 대조선의 새로운 통치 방식을 정리해 봤습니다. 읽어 드릴게요.
사이토 총독의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中
①조선인 핵심 ______인물을 발굴하여 귀족, 양반, 종교, 교육들에 침투하여 _____단체를 만들도록 한다.
② 종교, 특히 불교단체는 중앙집권화하고 그 수장 _____파를 앉히고 일본인 고문을 둔다.
③ ‘수재교육’이란 이름으로 ______지식인을 만들고 그를 통해 조선청년의 사상문제를 해결토록 한다. 언더라인 반칸에 뭐가 들어갈까요?
류근: 요새 같은 말로 어용? 어영지식인?
최원정: 핵심? 인싸인물? 그런 어감이 아닌가 싶은데~
류근: 말 잘 듣는 온건? 온건단체, 온건파?
심용환: 친일
최원정: 설마, 친일, 저 단어를 저렇게 노골적으로~ 너무 뻔한 거를,
사이토 마코토<조선 통치에 대하여> 中 (1921)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생각컨데, 장래의 운동은 작년 봄 행해진 만세소요 같은 어린애 장난은 아닐 것, 사이토 총독의 새로운 조선통치의 핵심-친일
박재민: 대놓고 친일파를 만든 거잖아요. 이렇게 문서까지 만들어가지고 전략적으로 접근했다고는아예 상상도 못했어요.
최원정: 정말 곳곳에 친일파를 만들어서 민족 끼리 이간시키고 분열시키고 우리 민족영혼에 쇠말뚝을 박겠다는 거잖아요.
김민철: 기본적으로 그거는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하는데 조선 뿐만아니라 전 세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분열시켜서 지배하는 거죠. Divide & rule 이니까 1919년 일본이 생각하지 못했던 3.1운동이라는게 터졌으니까 그러면 제일 중요한게 조선의 민족운동가들을 분열시키는게 중요하다. 사이토가 총독으로 올 때 가장 먼저 크게 고민했던게 저 문제였습니다.
심용환: 매로 다스릴 수 없으니까 지도자들을 분열시켜서 민중들의 정신을 분열시킨다.
류근: 그런데 3.1운동 때 조선의 항일정신과 단합된 결집력을 보았잖아요. 그런데 혹시 민중들 속에 친일파가 미리 심겨져 있었다고 한다면 그 정보를 쉽게 얻어가지고 항일운동을 저지하는데 도움이 됐겠다 라고 생각했을 것 같애요. 그런데 특히 그 친일파들이 민족을 대표하는 자라면 그 정보의 파괴력이 엄청났겠지요.
이윤석: 광고 모델을 누구를 쓰느냐에 따라서 기업매출이 엄청 차이가 나듯이~ 의외의 인물을 캐스팅 하거나 아니면 반전 스토리를 주거나 이러면 효과가 쫙쫙 올라가잖아요.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민족대표를 친일파의 어떤 선봉으로 세운다면 그럼 소문이 막 돌 거 아니에요. 민족대표가 변절해서 친일 하더라 이런 소문이 막 퍼지면 조선사회에 엄청난 충격인 거지요.
최원정: 아베 라는 사람이 전략가인데요.
이윤석: 그러니까 무서워요, 작전이 발굴->침투->단체->임명->문제해결, 논리적이고 또 스스로 친일파가 되기도 했겠지만 친일파로 만들어지고 키워지기도 했구나 라는 것도 놀랍고~
최원정: 예나 지금이나 아베가 문제예요~
박재민: 그러니까 민족대표 6명은 가석방을 시킨거네요. 이 33명 중에서도 우리가 포섭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봤던 탑 6를 뽑은 거네요. 한마디로~
김민철: 당시 민족운동에서는 천도교가 굉장히 조직적이고 전국적이었고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선 천도교를 집중적으로 대상 삼은 거죠.
최원정: 그 여섯명이 이런 작전에 넘어갔나요? 우리의 민족대표들이~
심용환: 가석방된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들이에요-한용운(불교), 권동신(천도교), 오세창(천도교), 이종일(천도교), 김창준(기독교), 그리고 최린(천도교), 그 중에 변절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오늘의 주인공 아까 처음에 나와서 울면서 반성한 사람, 그 사람 최린 (P.1-친일반민족행위자1)-단단한 민족의 지도자가 아닌 비굴한 친일파로 역사에 남게 된 최린-
최원정: 그럼 최린 빼고, 나머지는 변절 안한 거예요?
김민철: 네, 그렇죠. 예를 들면 옥파 이종일 선생은 선언서를 인쇄할 때 직접 주도 하셨으니까~
류근: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1935년에 영양실조로 굶어서 돌아가셨데요.
최원정: 아, 최린이 문제구나, 최린~
류근: 나혜석 편에서도 잠깐 등장했다가 시청자들에게서 특히 여성 시청자들에게서 공분을 샀던 최린이잖아요.
나혜석은 최린과 파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에 빠지고 만다. 원고 나혜석, 피고 최린, 나혜석이 최린에게 위자료를 청구한다. 하지만 아침에 보도된 기사가 석간신문에서 삭제된다. 최린의 압력 때문이었다.
최원정: 사랑했던 여인인데 남녀간의 사랑에 의리도 못지켰던 사람이 결국 민족도 배신을 한 거예요.
류근: 그러니까 일치감치 변절했다고 보는 거지요.
이윤석: 민족대표 중에서도 손병희랑 함께 어떤 상징성이 높은 지도자급인데~아, 최린이 변절을 했다고 하니까 굉장히~ 마음이 아프네요.
박재민: 뿌리가 흔들린 거네요.
최원정: 그러니까요, 최린은 한 자리해요?
김민철: 대표적인게 1937년 매일신보 사장으로 취임을 합니다. 그런데 매일신보가 조선 총독부 기관지이기도 하지만 1937년이 어떤 해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거든요. 중일전쟁이 발발했죠. 그러니까 전체적인 조선인들을 동원하기 위한 선전전을 강화해야 되니까 매일신보에서 조선과 일본은 하나다. 이 전쟁에 조선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해라 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게 되죠. 그럴 때 매일신보 사장에 최린을 앉히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죠.
최린이 매일신보에 실은 기사의 일부입니다.
‘있는 힘을 다 바치라’-우리들 반도 민중은 창씨도 하였고 기쁜 낯으로 제국군인이 되어 무엇으로 보나 황국신민이 된 것이다.(1942.5.10)
이제 부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연성을 쌓아서 조국의 방패로서 부끄럽지 않는 심신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내선일체의 구체적 사실이 한 걸음 한 걸음 착착 실현되어감도 틀림없다. 망망한 대륙에서 또는 남방의 하늘과 바다에서 성스러운 피를 흘린 반도출신의 황군장병들의 충용무쌍한 자태가 그것이다. 무릇 국가의 역사는 국민 스스로가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 반도민중들도 과거에 모든 잘못됨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충성을 다하여 훌륭한 국민으로서 황국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에, 다시 말하면 새로운 대동아를 건설하는 그 결전의 마당에 달려가서 책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매일신보 1943.12.8. ‘양양하다, 반도의 앞날’ 中)
최원정: 정말 헛 웃음이 나오잖아요!
박재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갑자기 제국주의 만세를 외치고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 조국의 영광을 위해서 전쟁의 방패막이가 되라고 영광스러운 피를 흘리라고 말하는게 이게 제가 방송을 차분하게 진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는 거같애요.
류근: 놀라운 건 과거의 모든 잘못됨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충성을 다하라고 말했잖아요. 과거에 우리 민족이 잘못된 게 뭡니까? 3.1운동인가요, 독립운동 같은거?
심용환: 본인이 과거에 3.1운동 주도한 게 잘못됐다는 거지요. 깨끗이 씻겠다는 거지요.
류근: 그런데 더 악의적인 건 최린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전쟁에 참여해라, 황국신민으로 책무를 다하라 이런 연설을 하고 다녔다는 거예요.
최원정: 그를 정신적인 지주로 믿고 있었던 많은 민중들은 이 순간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지금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구분이 안되는 아주 혼돈스런 상태로 빠져들었을 것 같애요.
이윤석: 만세운동을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독립을 외쳤단 말이에요. 그랬던 사람이 변절을 하니까 다른 백성들이 보기에, 아~ 이제 친일해도 되나? 친일을 해야 되나? 이럴 수가 있는 거예요.
류근: 제가 이해가 안가는게 지금 감옥에서 꺼내주긴 했는데 명색이 민족대표 라는 자가 그렇게 간단하게 친일로 넘어 갔다는게 정말 납득하기가 어려워요. 똑같이 가석방이 되었지만 불교대표였던 시인 한용운 같은 경우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는단 말이죠.
변절자 최린과 다른 길을 택한 한용운,
-한용운의 시-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끝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아, 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민족대표로서 끝까지 일제와 맞서다 1944년 6월 29일 해방을 1년 남짓 앞두고 생을 마감한다.
류근: 왜 유독 최린은 변절을 택했을까?
심용환: 이것도 사실 뒷 배경이 있습니다. 사실 최린이 아베 미쓰이에가 사이토 총독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 알았다고 해요. 내가 이 상황에서 얘를 이용하면 조선 총독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겠구나 라는 전략적 판단을 한 거죠.
최원정: 최린이 이용하려고 했다, 어떻게요?
김민철: 미국에서 워싱턴군축회의가 열리는데 (워싱턴 군축회의 (1921.11.12~1922.2.6)-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군비축소 및 동아시아의 질서 재정비를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 이때 실제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거기에 많은 기대를 가졌습니다. 거기서 조선문제를 다루어줄 것이다. 미국이 일본에 이야기해서 조선에 대해 뭔가 이로운 이야기를 할 것이다 라고 해서 큰 기대를 했는데 그 회의에서 조선의 ‘ㅈ’ 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3.1운동을 마치고 뭔가 독립이 될 것 처럼 기대를 했는데 독립의 기대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독립이 안되는구나 이런 심리가 있는 상태에서 그 헛점을 사실은 아베가 노린 것이죠. 그래서 독립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러면 최소한 자치라도 얻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게 최린의 생각이었고, 일본으로서도 그걸 활용할 필요가 있는 거죠.
--영화 <암살>中---
배우1/전지현役: 왜 동지를 팔았나?
배우2/이정제役: 몰랐으니까 해방될 지 몰랐으니까
‘해방될 지 몰랐다.’ 친일파들의 한결 같은 변명,
최린-오늘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데, 확신을 하고 있으며 조선의회설치가 조선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가장 긴요하다-1926.10. 아베에게
최원정: 자치라는게 나라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지금 일제의 식민통치는 받아들이면서 이런 주장을 한다는게~?
류근: 주권은 일본이 갖되 자치권 만이라도 달라?
박재민: 일제에 협력을 한다고해도 자치권을 쉽게 줄 일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텐데~ 이러한 얘기를 계속하고 이런 걸로 거래를 했다고 하는 거는 사실상 독립을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져요.
김민철: 과연 일본이 조선의 자치를 허용할 것인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직접 통치예요. 일본이 조선에 단 한번도 자치를 허용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왜 그런 문제가 나왔느냐 그런 것을 흘린 거죠. 너희들이 만약에 실력을 기른다면 그렇게 되면 자치를 허용하게 될지도 몰라 이걸 이제 흘린거고,
최원정: 계속 미끼를 던진거군요~밀당을 계속한 거야~
김민철: 자기와 힘센 사람과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마치 초등학생이 대학생과 거래하는 것과 같은 경우죠. 이건 사실 거래가 아니죠. 이용당하는 건데, 그 이용당한다는 생각들을 못한 거죠.
심용환: 낚싯대를 누가 쥐고 있는가를 최린이 착각을 한 거예요. 미끼를 저기서 던졌는데 본인이 마치 미끼를 이용해서 낚싯꾼을 끌고 올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일을 진행을 한 거니까 결론은 뭐냐 밀당이 계속 진행되면서 최린이 친일화가 된 거지, 일본이 최린의 의견을 들어줄 리는 없죠.
최원정: 일제의 전략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아베라는 사람이 자치권을 조선에 주냐 뭐냐 그런 권한이 있었어요?
김민철: 아베는 그런 권한이 없죠. 그리고 사이토 총독도 해군출신이에요. 실제 일본의 정계핵심은 육군이 잡고 있기 때문에 육군이 기본적인 틀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사이토 총독이 설령, 자치를 생각했더라도 그건 일본 정가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거죠.
최원정: 애초에 자치문제 때문에 사실 아베한테 붙은 거잖아요. 그게 좌절 됐다면 깨끗하게 손 털고 이제 독립운동에 매진해야 되는 게 아닌가?
이윤석: 자치가 안된다면 주권을 찾자~ 더 큰 목표를 향해서~가야죠.
류근: 그게 정상적인 사람들의 인식이죠. 이 분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이러고 있었잖아요.
김민철: 한번 진흙탕에 발을 들여 놓게 되면은 처음에 조금 뭍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는 더 묻어도 상관이 없기 때문에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서는 거지요.
심용환: 맨 처음에는 두려웠는데 나중에 이 꾸정물이 좋은 거야~
김민철: 정치인 중에서는 최고직 중추원 참의로 간 경우가 별로 없는데 최린의 경우는 그 직위까지 올라가게 되죠.
류근: 이 사람이 변절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3.1운동 때 민족대표 한 게 변절을 했어요.
최원정: 그렇죠,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나혜석 한테 그렇게 등 돌릴 때부터 마음이 안들었어~
이윤석: 저는 지금 화가 나는게~결국 제국의 브로커~ 아베의 포석공작과 노력이 마침내 성공한 거구요. 내가 키운 최고의 친일파 최린이 있잖아요.
심용환: 최린이 중추원 참의에 오르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읽어드릴게요. 나는 월급 때문이 아니라 반일에서 친일로 돌아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중추원 참의에 취임했다.
이윤석: 월급 얘기 하는게 더 이상한데~
류근: 생계형 친일파가 아니다 라는 얘기예요?
심용환: 친일적 입장에서 일본이 조선에 벌인 일들을 비판할 거다. 우리 민족을 위해 최대 이익을 낼 것이다.
최원정: 중추원 참의가 되면 월급이 많나요? 월급 얘기를 한다는게 이상한데~
김민철: 명예직이긴 하지만 조선인이 최고의 직위에 도달할 수 있는 직위이기 때문에 1934년 기준 중추원 참의 수당은 한 해 1800원, 현재 가치로 약 4천만원입니다.
이윤석: 본인도 좀 겸언 쩍은 가 봐요.
박재민: 돈 때문에 나라 판 매국노가 아니냐 이랬는데 이건 매국이 아니라 내 신념이 있어, 이런 걸 강조할려고 했던 것 같애요.
류근: 친일적 입장에서 일본이 조선에 벌이는 일들을 비판할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뭔 말입니까. 옛날에 야당하다가 여당으로 들어간 정치인들이 늘 하는 말이 여당내 야당역활을 하겠습니다 란 변명을 했단 말이죠. 원조가 최린이었던 거네요!
이윤석: 본인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지금의 자리에 왔다고 믿지만 일제의 계획에 의해서 키워진 친일파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꾸 본인 머리 속에 뭔가 합리화를 시켜야 되는 거야~
류근: 아버지 한테 맞으면 더 아프니까 차라리 내가 때릴 게 하고 큰 형이 때리잖아요.
심용환: 더 쎄게 때려요. 더 오래~
최원정: 중추원이 어떤 곳인지 친일파들의 중추원 회의를 한번 엿보도록 하겠습니다. 1934년 4월 제15회 중추원회의 현장으로 가보시죠.
친일파의 상징-허수아비 감투 중추원 참의
우가키 가즈시게/제6대 조선총독/이윤석役: 어서들 오시오! 요새 말이야, 불온한 사상이 너무 많아서 조선인들이 미혹이 되고 있어요. 아! 우리 선각자들 아니겠습니까, 자, 이 사상을 정화하기 위해서 좋은 의견들을 좀 내 주시오!
박종렬 참의/박재민役: 가장 효과 있는 건 징병이 아니겠습니까? 조선특별대를 설치해서 보통학교 이상의 졸업생들에게 철저한 군대생활을 맛보게 해줍시다.
우가키 가즈시게: 진짜 사나이 구만!
박종렬: 진짜 사나이를 양성해야 됩니다.
장직상 참의/심용환役: 그건 약한 것 같고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한번 일으켜 보는게 어떻겠소? 학교를 총동원하고 신문을 빵빵하게 발행하면서 사람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그런 정치를 펼치면 어떻습니까?
우가키 가즈시게: 내용은 좋은데 연기 톤이 그만 심용환이네? 애썼소! 그래 그래 잘 들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그냥 듣기만 하겠소.
박종렬: 군대, 군대를 보내야 합니다.
장직상: 국민 총동원!
우가키 가즈시게: 알지 않소! 중추원은 그만 듣기만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회의는~ 참 회의적이오~ 회의 끝.
최원정: 연기들 대단하시네요.
박재민: 진짜 회의적이네요.
류근: 그런데, 군대가 무슨 취미생활입니까? 군대의 맛을 보게 해 준다느니~
최원정: (이윤석에게) 불온 사상을 얘기했는데 그 불온사상이라는 게 독립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게 말이 돼요? 진짜 불온한 사람은 이 세 명이구만~
이윤석/총독役: 나는 일본 사람이기도 하지, 이 두 사람은 조선인아네요? 그런데 스스로 조선인들을 궁지에 내몰기 위한 방책들을 경쟁하듯이 내놓고 있으니까~
박재민: 야, 너네, 불온 사상 있지, 군대가, 군대가면 조선 청년들이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전쟁에 투입되는 거잖아요
류근: 저는 회의내용을 들어보니까 중추원이면 엄청난 기관인줄 알았는데~, 오~ 잘 들었소, 끝, 사실 영양가가 하나도 없잖아~
최원정: 옛날에 개그 코너 중에 잘 돼야 될텐데~~ 하는 코메디가 있잖아요. 지금 그 꼴이에요.
김민철: 원래 중추원을 만들 때 부터 총독의 자문기구로 만들었어요. (중추원(1910~1945)-친일 유력인사를 포섭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 일반적으로 총독이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게 중추원의 기본적인 조직의 특징이죠.
심용환: 1920년 문화통치 회유책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나온 회의정책이에요. 실제로는 방금 우리가 했던 것처럼 아무 실권이 없어요. 그런데 놀라운게 뭐냐 조직과 직함이라도 이걸 내가 가지면 내 명예와 가문의 영광, 이게 되니까 이걸 하고 싶어해 가지고 벌떼처럼 달려들었고 그 다음에 친일파로 공인되고~ 이런 일들이 전국적으로 많았습니다. 그 중에 최고는 중추원 참의가 되는 거지요.
박재민: 이건 정말 허수아비들의 모임이잖아요. 아무런 실권도 없고 아무런 정치적인 힘이 없는데 이 자리에 오를려고 최고의 허수아비가 되려고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고 내 정신 혼을 팔고 이랬다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김민철: 1948년 반민법 (반민족행위처벌법 1948.9.22 제정)을 만들 때도 이건 친일파다.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이다 라고 규정을 했고, 2009년에 친일반민족 진상규명위원회 라는 국가 기구를 만들어서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천명 정도를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사람으로 정했는데, 그 중에 300명 정도가 중추원 참의 출신이죠.
박재민: 300명 이나요?
최원정: 굉장히 많았다는 얘긴데, 그 애매한 중추원 참의들, (중추원 참의 명단 슬라이드 화면에 나타남), 저게 300명이라는 말씀이죠?
김민철: 정확하게 313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최원정: 그럼 저 사람들은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이 된 거죠? 한 명도 빠짐없이 다~
김민철: 당연히 들어가 있죠.
류근: 중추원 참의 그러면 가장 적극적인 친일파 라는 뜻이네요.
이윤석: 제국의 중추 허수아비들의 역습! 이렇게 라고 많이 올라갔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최원정: 참의됐다고 얼마나 뻐기면서 우쭐대면서 다녔겠어요. 가문의 영광이다 이러면서~ 그렇게 생각하니까 분노지수가 점점 올라가는데 그나마 최린은 해방 후에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을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이야기할 두명이 더 있는데 그 사람들은 뻔뻔하기 그지 없습니다. 자, 최악의 친일파는 잠시 후에 얘기 하도록 하고요. 지금은 먼저 이 사람부터 만나보시죠.
1919년 9월 2일 서울 남대문역 새로 부임하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노리는 한 노인이 있었다. 바로 65세의 강우규 의사 였다. 품에 숨겨온 수류탄을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던진 강우규, 총독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일제에 큰 충격을 안긴 그는 의거 15일만에 붙잡히고 만다. 바로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 의해서였다.
류근: (강우규 의사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죠. 노인이라고 나왔잖아요. 그런데 그 강우규 (강우규(1855~1920)-만주 광동학교 설립) 의사가 수류탄을 투척한 연세가 65세에요. 그 당시 65세면 어떤 나이인지 아시겠죠? 체포된지 1년후 (1920.11.29) 에 사형을 받고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날의 의거는 3.1운동 이후에 한 풀 죽었던 독립의지를 다시 한번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죠. 지금 서울역에 가면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심용환: 체포를 빨리 못했던 이유도 이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의거를 했을 줄 몰랐다고 하더라구요.
이윤석: 어르신인데~ 소중한 독립운동가를 친일경찰이 잡았다고 하니까 애통하고 비통하고 분통이 터져요.
최원정: 그래요, 친일경찰 김태석이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지금 소환해서 이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최원정: 나와 김태석!!
-친일경찰 김태석 소환中-
검사: 피고 김태석씨, 경찰 왜 됐습니까? 누가 봐도 조선 사람처럼 생겼는데 독립운동 방해할려고 경찰이 됐습니까?
피고 김태석: 나 살자고 한 게 아니에요. 일본놈들 한다는 짓이 없는 사건도 만들어서 조선인들 잡아들인단 말에요. 아, 이래서는 안되겠다 내가 경찰이 돼서 흑백을 가려내야겠다는 비장한 생각으로~
검사: 비장한 생각으로~ 민족을 위해서 그랬다는 겁니까? 3.1운동 때 활동을 많이 했다는 소문 얘기가 다 있어요, 지금.
김태석: 만세사건이라는 게 혐의가 넓어서요~ 저의 집에서도 만세를 불렀는데, 이게 활동이고 뭐고 할 여지가 있습니까? 활동이라면 만세 활동을 했죠.
검사: 강우규 의사 사건도 피고가 검거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아닙니까?
피고 김태석: 그게 내가 그 사건을 취급하면 그 값이 얼마게요? 아마 큰 돈을 벌었겠죠. 저는 그저 심부름꾼일뿐입니다. 억울하다구요!
이윤석: 아니, 독립운동가 얘기하니까 바로 돈 얘기하고 큰 돈 못벌었다고 하고,
최원정: 당시 기사를 보면 김태석의 변명에 방청석에서 웃었데요 (서울신문 1949.4.4), 웃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데요.
박재민: 만세운동을 했다고 하잖습니까?
김민철: 화장실에서, 화장실에서 만세 불렀다는 사람도 많아요.
심용환: 김태석을 부르는 별명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별명일까요?
류근: 뺀질이?
이윤석: 독사! 독립운동 사냥꾼? 독사!
심용환: 정답은 고문왕, 독립운동 사냥꾼 독사 아마 그 표현이 적합한 거 같애요. 워낙 혹독하게 취조하고 고문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지까지 엄청나게 괴롭혔던 거죠. 이런 거로 유명했던 사람인데 실제로 증언이 하나 있는데 의열단원 홍종진 이라는 사람이 반민특위 법정에서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했던 증언이 하나 있습니다. 밀양 포탄 투척사건 (의열단원 홍종진 증언 中 1949.5.20), 당시를 이야기 하면서 학생이던 나의 동지 윤필하 이하 15명을 체포하여 고문과 극형을 하였고 나중에는 죽기까지 고문한 자가 바로 김태석이다.
이윤석: 나쁜 사람이구나.
최원정: 저희가 듣기에도 고문기술에 있어서는 일본경찰이 조선경찰을 못따라 왔다고 들었어요. 그만큼 같은 조선인 끼리 혹독하게 더 괴롭혔다는 얘기잖아요.
김민철: 특히 사상경찰이나 고등경찰의 경우에 고문과 조작사건에 굉장히 깊게 개입되었거든요. 그래서 그 고문과 조작의 계보가 있죠. 그 계보의 1세대가 김태석인데, 러일전쟁에서 시작해서 일본이 사용했던 고문기술을 그대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사용했고, 그 다음세대들이 이름이 꽤 많이 알려진 노덕술이죠. 그 기술과 계보가 결국은 1980년대 이근안까지 이어지는 거죠.
심용환: 박원순 서울시장이 변호사 시절에 쓴 책 중에 야만시대의 기록이란 책이 있어요. 일제시대 부터해서 해방 이후에 우리 역사에 있었던 고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데 일제시대 때 형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는 방식하고 해방 이후에 민주인사를 경찰들이 고문한 방식이 똑 같아요. 정말 이게 답답한 거죠.
류근: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누가 울면 우는 아이 뚝 그치게 하기 위해서 어른들이 습관적으로 저기 순사 온다고 했잖아요.
김민철: 저희들도 어릴 때 많이 들었죠. 원래는 1910년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저 구리 쪽에 호랑이가 나타나고 그랬거든요. 그때는 호랑이가 온다고 하면 다 울음을 그쳤는데~ 일제시대들어 오면서 부터 순사온다고 하면 다 울음을 그쳤다고 해요. 그만큼 경찰에 의한 지배통치가 폭력적인 지배가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류근: 공권력이 국민에게 당연한 공포로 작용하는 것 이것 자체가 사실은 다 일제잔재예요.
김민철: 네, 그런데 김태석 경우는 독특한 케이스예요. 순사 출신이기도 하지만 1920년대에 들어가서 고등과가 독립운동가를 담당하는 부서니까 거길 거쳐서 이후로 군수로 진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중추원 참의까지 가는데 경찰출신으로서는 최고의 출세가도를 간 사람이죠. 재미있는 거는 1924년인가 김태석이 언론사에 투고 (조선일보 1924.12.2)를 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게 좀 황당한 내용인데 자기는 충성을 다해서 열심히 일을 했다. 밤잠도 안자고 밀정들 풀어서 독립운동가들도 잡고 그랬는데~ 차별을 받고 있다. 무슨 차별이나~ 같은 직급의 일본인 경부 자리에는 전용전화도 있고 초인종도 있었으나 나에게는 전화기도 없어서 30원을 내서 마련했다. 자기가 충성을 다해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있지만 대접을 제대로 못받고 있다 라는 내용이죠. 눈물 겹도록 세상 억울한 친일경찰 김태석,
최원정: 그걸 또 구구절절하게 썼단 말이에요?
일동: 진짜 어이 없습니다.
이윤석: 말단 순사에서 시작해서 중추원 참의까지 올라간거 아니에요. 의지의 친일파네요.
김민철: 그거야 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죠.
류근: 이런 사람을 주구라고 하죠, 일제의 走狗, 권력의 주구
이윤석: 김태석이가 아까 나는 심부름꾼 뿐이었다라고 얘기했는데 그야말로 명대사 있잖아요. 비겁한 변명입니다. 또 누가 봐도 심부름꾼이 아닌 출세지향형 직업 친일파였다. 이게 맞는 말입니다.
류근: 아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논리를 폈는데 그런 논리가 가장 위험한 거예요. 이 시대는 이근안 이라는 고문 기술자가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그 사람한테 고문 당한 그 사람이 이런 증언을 했어요. 그 사람들도 인간이었다. 그들도 보통 사람이었다. 우리를 고문하면서 그들은 딸 이야기, 점심에 뭘 먹을까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용서가 된다. 할 수 없었다. 이건 사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었다는 건데 오히려 뇌가 정신이 제거 되어버렸다는 것이 아닙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거지요.
최원정: 지금 이제 우리가 두명 얘기를 해봤는데 예고해 드린대로 최악의 친일파를 만납니다. 최악의 친일파! 먼저 그 사람의 어록을 보시죠. 최악의 변명을 한 친일파는 누구?
존경하는 가쓰라 수상에게
하루라도 빨리 일본은
한국을 합병하여 이를 행할지라도
한국인은 이에 반항할 실력이 없으니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 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박중양-------------
일동: 이게 무슨 말이에요?
박재민: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반역자는 아니다.
류근: 나는 결혼은 하였으나 유부남은 아니다.
최원정: 딱 그거 잖아요.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너무나 비슷한 논리잖아요.
이윤석: 아니 대단하네요. 박중양은 사실 우리가 다룬 적이 있어요. 제가 기억이 나는데~ 별명이 일단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예요.
심용환: 끝났네~
이윤석: 어쩠거나 그러면 을사오적 중에 이근택도 이토의 양자였잖아요. 둘이 형제인가? 그건 그렇구, 그리고 3.1운동 때 그 이름도 유명한 자제단, 자제하자, 자제단 단장으로 활동을 했어요. 만세운동 탄압을 했지요. 그 공로로 총독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어요.
류근: 데라우치 총독한테 불량자를 청소하고 설득하겠다고 충성편지까지 보냅니다. 일제 때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이라는게 있는데 거기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어요.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 중에서는 박중양이다.” 최악의 친일파 맞습니다.
최원정: 일제가 인정한 친일파,
김민철: 박중양은 1910년 이전부터 이미 친일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러일전쟁 때 통역관으로 들어와서 실제로 일본군이 진출, 전쟁을 하는데 첨병역활을 하였고 그리고 그 이후에 1907년에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의병투쟁을 부정하고 탄압하는 이야기를 하게되고 일본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심용환: 태평양 전쟁 때가 되면 일본을 위한 적극적인 충성을 하게 되는데 1941년 태평양 전쟁 협력 친일단체 중에 조선임전보국단 이라는 단체가 있어요 (조선임전보국단(1941~1942)-군수 자재 헌납 활동으로 민중 수탈, 부녀층을 동원해 군복수리 노동강요), 이걸 조직해 여기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고 전국에 지부도 만들고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어떤 헌납과정을 주도하고 전국의 부녀자들을 총동원해서 군복 찢어진 거 수리 시키는 등등 소위 말하면 전쟁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뒷받침 했었던 그런 인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때 조선임전보국단에 단장이 최린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중양은 고문,
이윤석: 두 거두가 만났어요? 친일계의 네버엔딩 스토리네요.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최원정: 나중에 반민특위에서도 만나고~
이윤석: 이 사람들이 소위 엘리트들 아니에요? 그런데 청년들의 목숨과 인민들의 재산을 담보로 해서 고혈을 쭉쭉 짜내고 있는 거예요.
심용환: 박중양은 일본의 명에 의해서 너 정말 일본을 위해서 대단하다 그래서 1945년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이 됩니다. 이게 쉽게 말하면 조선인으로 일본 국회에 진출한 거에요.
일동: 우~아!
심용환: 이건 정말 친일파 말고 상급~ 상급~ 최상급 그래서 일제 35년 이라고도 하죠. 7명, 7명 중에 한 명이 바로 박중양이 들어가죠.
김민철: 박중양의 경우는 관료 중에서 대표적인 친일 인물이죠. 박중양은 조금 아이러니한게 뭐냐면 뇌물은 받지 않았어요. 관료로서 청백리 라고 해야 되나 신념형이죠. 그래서 독실한 친일파 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면 이건 자기가 친일 하는게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고 조선을 위해서 좋다. 그리고 조선을 빨리 문명 개화로 발전시키는데 자기가 역할할 수 있다. 그게 관료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보통 우리가 말하는 확신범이죠. 해방된 이후에도 비뚤어진 마음을 이어간 박중양,
최원정: 여기 책 한 권이 들어와 있는데요. -述懷-
김민철: 이 책은 박중양이 쓴 술회 라는 회고록 같은 거죠. 과거를 돌아보고 회고하면서 서술하다. 그런 책인데~ 이 책의 한 부분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건 1954년에 쓴 겁니다. 일제시대에 쓴 게 아니고, 여기 보면은, 두뇌가 공허해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의 병이다. 자신감과 능력이 없는 자가 타인을 비난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 이런 이야기죠. 이게 조선인 열등론 또는 비하론의 기본적인 공식과 같은 겁니다. 조선인의 열등하고 비겁하고 나약하고 거짓말 잘하고 그런걸 일본이 문명으로 다스린다 하는~
최원정: 저도 지금 얼핏 한 구절 발견했는데, 조선인의 고혈을 흡취하였다고 일정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한 편견이다 (친일파 박중양의 일기 <술회>中),
이윤석: 그런데 내용이 확신범이 맞아요. 우리 스스로는 능력이 없으니까 일도 안되고 일제에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살길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확신을 하고 있어요.
박재민: 더 무서운 것은 이게 지금 8년 동안 집필이 되었데요. 1946년 집필을 시작해서 1954년에 집필이 완료가 되었는데 해방후 10년 가까이 이 생각을 갖고 있었고 8년 동안 집필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정말 뚜렷한 사상과 본인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심용환: 박중양을 조사했던 반민특위 조사관이 있는데. 일종에 그분의 술회인데, 여기 보면, 몸은조선인인데 생각과 행동은 일본인이다! 이런 기록까지 있어요.
이윤석: 우리가 지난 번에도 얘기했지만 이완용은 본인이 매국노인 걸 인정하더라구요. 그런데 박중양은 달라요. 둘다 친일을 했지만 이완용은 너희들을 위해 매국했다 했고 박중양은 지금 주장하는게 너희들을 위해 애국했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심용환: 합리화를 위한 게 아니고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류근: 들어보니까 어쩐지 낯설지 않은게~일제 덕분에 우리 경제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 논리와 같은 생각이 아닌가요? 우리 여름에 나왔던 어떤 책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 책 서문에, 한국은 거짓말을 하는 나라라고 하잖아요.
반일 종족주의 反日種族主義 거짓말의 나라-이영훈-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2014년에만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1,400명 입니다.
일본에 비해 172배 라고 합니다.
나라가 무슨 사기로
팔아 먹을 수 있는 부동산입니까
오랫동안 닫힌 가운데
전제정치의 폭압을 받아
대다수 백성이
노예근성에 물들고
정신문화가 타락하여
거짓말하는 악습이 횡행하고,
관리는 오로지 임금에
순종하는 것만이 충성인줄 아는데,
임금이 비겁하고 어리석어서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우리의 통념을 비판하고 있는 책, 몹시 불쾌하죠.
김민철: 같은 흐름, 맥락이죠 조선은 열등하고 야만의 상태, 또는 반야만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근대화로 나아가게 해준 분은 일본인 덕분이다. 이 세상은 강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니까 힘이 센 사람이 지배하는 게 자연의 법칙이니까 조선이 결국은 주권을 빼앗긴 것도 자연의 법칙 아니냐 19세기에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통치할 때 합리화 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논리에 그대로 빠져든 거죠.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는게 항상 얘기하는게 근대화에 기여했다 근대화에 기여했다 좋은 얘기만 계속 하거든요. 이게 우리가 많이 반론을 하는게 뭐냐하면 첫째 우리 스스로가 뭔가 해볼려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라는 부분도 큰 문제잖아요. 동학군들이 외쳤던 새로운 해방세상 이라든지 독립협회가 주장했던 새로운 민주주의의 발전 같은 것들, 우리는 하나도 하지 못했고, 일제 36년 동안 한번 따져 볼까 하면 정말 못한게 굉장히 많은데 사람들이 단적으로 마치 일제가 없었으면 우리가 잘 살 수 없었다는 논리로 만들어 버리니까 이거는 정말 윤치호나 박중양이 언제 때 사람이에요. 그때는 혼란스러웠다고 치더라도 지금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철: 가장 큰 문제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결정적인 약점이 뭐냐 하면 식민지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식민지는 없고 그냥 근대화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그것도 사실 통계만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죠. 1910년대 서당교육을 굉장히 통제했기 때문에 교육을 시키지 못했죠 그래서 지역 주민들이 공동재산, 문중재산을 가지고 서당을 가지고 학교를 설립하는 운동들을 하지요. 총독부는 그걸 허가를 안해 줍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군수가 도지사를 찾아가서 항의하고 그것도 안되면 중앙까지 가고, 그런 신문 기사들이 일주일에 한, 두건씩 전국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최원정: 교수님 말씀은 우리가 식민지 지배였지만 조선인들 나름으로 근대화 노력이 있었다.
김민철: 그렇죠, 실제 통계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들 조선인들의 주체적인 노력, 이런부분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한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식민지 시대 민중을 이야기 했지만은 사실은 민중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죠.
최원정: 다시 친일파 3인방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당시 친일파가 득세는 했지만 우리는 해방을 맞이 합니다. 세 명 최린, 박중양, 김태석은 어떻게 됩니까.
심용환: 좋은 얘기를 하고 싶은데 잘 아시겠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친일파가 득세 했지만 반민특위가 제대로 운영이 안됐고 결국은 1년도 못가서 사실상 해산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조사대상이 그 당시 682건 이었는데 221건이 기소가 되었다고 하는데 기소자 중에 1명도 처벌받지 못했습니다. 단 1명 최린은 세번의 공판을 거쳤는데 병보석으로 석방이 됩니다. 김태석은 민족반역자 최초로 사형을 구형 받습니다. 그런데 무기징역과 50만원 재산몰수로 감형선고를 받은 다음에 한국전쟁 이전에 석방이 됩니다.
최원정: 그런데 박중양은 어떻게 되나요, 교수님?
김민철: 박중양은 워낙 상징적이죠. 친일파니까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은 됐죠. 반민특위 해산되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다시 풀려 나옵니다. 그래서 실제 처벌받은 사람이 없는 거죠. 박중양은 96세까지 살았으니까 오랫동안 장수했죠.
최원정: 최린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갔고 (80세 사망추정), 김태석은 한국전쟁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행적을 알 수 없습니다.
최원정: 이 세 명에게 그래도 오늘을 통해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 마디씩 따끔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윤석: 최린 한테는 동물원의 변해 가네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요. –너무 쉽게 변해가며 너무 빨리 변해가네- 김태석에게는 아무리 본인이 심부름꾼 이라고 우기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몸통입니다. 박중양에게는 좋은 사례가 있더라구요.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이었던 이용구가 눈을 감을때 이렇게 말해 줬어요.-“우리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이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최원정: 그런 말을 했어요?
박재민: 이 당시 리더들이 내가 너희들 위하는 거야 이게 맞는 이 길로 가야돼 얘기했던게 얼마나 우매하고 얼마나 속았던 일인지 그 얘기를 꼭 해주고 싶어요. 당신이 아는 것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라고 꼭 말해 주고 싶어요.
류근: 오늘은 우리 안에 친일파의 세 유형이 다 등장한 거 같애요. 확신범-박중양 나왔죠, 최린-기회주의자 나왔죠, 그리고 출세 만능주의자-김태석 나왔죠. 그들의 원죄가 단죄되지 않음으로 해서 오늘날 우리 공동체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저승에서라도 부디 각성을 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남겨 주고 싶네요.
최원정: 친일파를 통해서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마무리 하고요. 다음 시간에는 친일파 3부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을 선동했던 친일파 이야기로 찾아 뵙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부작 청산되지 못한 역사, “2부 민족 앞에 죄를 고하다”에서 정리).
① 60년전 초등학년시절 3.1운동 역사를 배울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 낭독하고 일경에 붙잡혀 갔다는 것만 배웠지, 그 중에 6명이 가석방되고 6명 중에 최린이 변절했다는 얘기는 못들었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의 주역 민족대표 33인이 체포된다. 이들은 1년 후 내려진 최종판결에서 최고 3년형을 받고 복역한다. 그러던 1921년 12월 22일, 민족대표 중 최린, 한용운 등 6명이 가석방된다. 그것은 일제 당국의 ‘배려’였다고.
② 1910년대는 무단통치라 군인이 직접 행정과 치안을 지배한 폭압통치, 계엄령 통치였다. 이에 3.1운동이 일어났는데 신임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새로운 통치방식을 고민했겠죠, 우선 민족대표 6명을 회유할려는 계획을 세운다. 6명의 민족대표 중 최린이 변절해 친일파가 됐다.
③ 최린은 1937년 매일신보 사장으로 취임한다. 매일신보는 조선 총독부 기관지다. 19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했는데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데, 조선인들을 동원하기 위한 선전을 강화해야 되니까 최린이 이 전쟁에 조선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기사들을 쏟아낸다. 일제가 친일 유력인사를 포섭하기 위해 조선총독의 자문기구로 중추원(1910~1945)을 설립했는데 이건 조직과 직함만 있지 아무 실권이 없고 정치적인 힘이 없는 허수아비들의 모임이었다고.
④ 그런데 많은 조선 사람들이 중추원 참의를 하고 싶어서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고 내 정신과 혼을 팔고 벌 떼 처럼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 다음엔 친일파가 되고 이런 일들이 전국적으로 많았다는 것에 너무 가슴 아프고 아프다, 1948.9.22.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는데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 진상규명위원회 라는 국가기구를 만들어서 조사를 하였는데 중추원 참의를 한 사람이 정확하게 313명인데 그들은 빠짐없이 반민족행위를 한 친일파로서 당연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 되었다.
⑤ 김태석의 별명은 고문왕, 독립운동가를 엄청나게 괴롭혔다고, 고문기술에 있어서 일본경찰이 조선경찰을 못따라 왔다고, 같은 조선인 끼리 혹독하게 더 괴롭혔다. 특히 사상경찰이나 고등경찰은 고문과 조작사건에 굉장히 깊게 개입되었다, 그 고문과 조작의 계보 1세대가 김태석이고, 그 다음 2세대가 노덕술이고, 그 기술과 계보가 1980년대 대한민국 경찰 이근안까지 이어졌다.
⑥ 친일파 3인방 최린, 김태석, 박중양은 해방을 맞이해 반민특위가 제대로 운영이 안되어 1년도 못가서 해산하게 된다. 조사대상 682건에 221건이 기소, 기소자 중에 1명도 처벌받지 못했다. 단 1명 최린은 세번의 공판을 거쳤는데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고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고(80세 사망추정), 김태석은 민족반역자 최초로 사형을 구형 받았으나, 무기징역과 50만원 재산몰수로 감형선고를 받았다. 한국전쟁 이전에 석방이 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박중양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었고, 반민특위가 해산되고 나중에 풀려 나와서 96세까지 살았다.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이용구가 눈을 감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우리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