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서신문 창간 8주년 기념 범서둘레길 탐방
범서사람이라면 꼭 한번 걸어봐야할 길
전체 범서둘레길을 4차례에 걸쳐 진행하고 그 진행결과를 신문에 실는다.
첫 번째 길 - 배리끝에서 관문성가는 길
2007년 8월 13일 창간호를 발행하였으니 올 해로 8주년이다.
3만이었던 인구가 5만이 되었고 지난해 7만을 넘어서며 굴화지역에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며 8만을 향해 가고 있다.
사람이 많다는 것이 좋은 일일까?
거주인구가 많다는 것이 좋은 일일수도 있지만 천천히 살고 싶은 이들에겐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닐 듯 싶다.
범서신문은 그런 개발의 과정중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찾고 알리며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대안을 고민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범서둘레길 탐방은 범서옛길 탐방과 함께 범서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내가 사는 지역을 안다는 것은 지역을 사랑하는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다. 좋은 이웃이 많다는 것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좋은 사람들과 부담없이 동네뒷산을 걸어볼 수 있는 길.
그 길의 여정을 4회에 걸쳐 진행한다.
옛흔적을 찾기 힘들어졌지만 배리끝은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변한지 오래되었다. 누구나 배리 끝에 얽힌 남매의 애화정도는 얘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산이 없는 굴화주민들은 소를 먹이고 땔감을 하러 강을 건너 배리끝 뒷산을 올랐다. 차가 없던 시절 구영리사람들은 배리끝 길을 따라 울산시내로 장을 보러 갔다.
지금은 데크가 설치되어 과거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해가 저물녘 어스럼과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가족을 마중나갔던 추억 몇 개씩은 구영리 주민이라면 누구가 가지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이 데크를 따라 자전거 족이 가고 워킹족이 운동삼아 거니는 길이 되었다.
일행은 배리끝에서 범서산성을 지나 작은 장구산과 큰 장구산, 오심등 만디를 거쳐가는 길을 잡았다.
범서와 중구 다운동을 나누는 능선길이다.
범서옛길이 알려지면서 중구에서 둘레길을 만들다보니 중복되는 길에 범서옛길 리본과 중구둘레길 간판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팝나무길 소나무길 모지길 등 길에 대한 명칭도 임의로 만들어 붙이다 보니 정체성이 헷갈리기도 하다.
오심등 만디에서 베네치아 산장으로 내려가 중구 성안길로 접어든다. 구영리와 서사마을 사람들이 성안으로 넘나들던 길이다.
성안옛길을 따라 연동마을 범동골로 접어든다는 것이 길목을 놓치는 바람에 경상일보에서 개척한 어울길을 너무 많이 갔다. 어울길을 따라 가면 동구 꽃바위까지 갈 수 있다. 들어가는 초입에 이정표 표시가 필요할 거 같다.
덕분에 연등마을을 둘어보지 못하고 상아산으로 가는 능선길을 잡았다. 북구 달천과 범서 두산리를 가르는 능선길이 말구부리다. 말이 구부러질만큼 험하다는 말이다. 이 고갯길을 넘나들며 달천에서 생산한 철광석을 범서에 있는 쇠부리터 뿐만 아니라 밀양, 청도까지 운반하였다고 하니 철의 역사가 꽤나 깊다.
상아산(象牙山)에는 상아는 없다.
전에는 작은 표지목이 서 있더니 지금은 흔적이 없고 잠시 쉬어갈 만큼의 데크가 설치가 되어 있다.
상아산은 두산리와 농소면 달천에 걸쳐 있는 해발 224m의 산이다. 범서읍지에 따르면 상아산의 유래는 알 수 없고 소부골에 해일이 왔을 때 산꼭대기에 겨우 소 한 마리 누을 정도의 공간만 남았다고 전해지는데 해일이 왔을 때 상어가 올랐거나 산이 상어등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상아산을 뒤로 하고 관문성을 따라 내려오면 범서읍과 경주시의 경계를 넘나드는 관문이 있다. 지금도 옛성터가 남아있어 보존중인데 이 성은 신라 제3대 임금인 성덕왕 21년에 신라도성의 남방에서 제1방비성으로 화강암으로 축성되었다.
수도 경주를 지키던 첫 마을.
넘나들던 문도 문을 지키던 파수꾼은 없어졌지만 14번 국도를 따라 많은 차량들이 관문을 넘나들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또 천년이 흐르고 있다.
다음 여정지를 그려보며 1차 탐방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