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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연배와 우리 윗대 학장 사람들은 구덕령을 넘어다니던 애틋한 향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연배인 최용현(수필가)작가의 구덕수원지에 얽힌 사연이 하도 애틋하여 소개해 봅니다.
구덕수원지 붕괴 모습 1972.9.14 아침
구덕수원지는
1900년에 축조되었으며 석축의 둑은 길이 50m 높이 20m 수면의 폭은70m 정도였다.
구덕야영장과 대신공원에 있는 두 곳 수원지도 거의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는데, 이 세 곳 수원지의 물이 동아대학교 구덕캠퍼스 아래에 있었던 정수장(고원견수원지,엄광산수원지)을 거쳐 대청동의 배수지에 저장되었다가
중구와 서구 1만여명의 식수로 공급되었다.
1972년 9월 14일 폭우로 둑이 붕괴되어 주민 60명 사망, 15명 실종, 48명이 부상당하는 아픈 상처를 남겼다.
그 후 수원지는 복구되었으나 1981년 구덕터널공사가 착공됨으로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900년에 1일 2,000㎥ 생산규모의 구덕수원지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현대적 상수도 시설로 기록되고 있다.
구덕수원지 붕괴 복구 공사 모습 1972년 9월, 왼쪽 상단 건물은 당시 광성공고(현 부산 신학교)
따오기(구덕수원지)
최용현(수필가)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한 번쯤은 전기(轉機)를 맞이하는 시점이 있다. 이때의 휘청거림으로 그 후의 삶이 변모한다. 더욱 강해지는 사람, 아예 부러져 버리는 사람, 또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사람….
1972년 3월, 부산에서 형과 함께 하숙을 해오던 나는, 남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합류하자 서대신동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자취 생활이었지만 근엄하고 부지런한 형이 아침담당, 고3 수험생인 난 점심담당(?), 졸병인 동생은 저녁담당으로 역할분담을 하여 제법 오붓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집에는 주인집을 포함하여 네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주인집 옆 중간 방엔 30대 후반의 한 과부가 세 딸, 외아들과 함께 세 들어 있었다. 큰딸은 부산여상 1학년, 둘째 딸은 초등학교 6학년, 셋째 딸은 4학년, 그리고 일곱 살 난 막내아들.
그 엄마는 아침에 딸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들은 교회 모자원(母子院)에 맡겨놓고 옷 보따리 행상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저녁준비는 항상 큰딸이 맡았는데 큰딸은 착하고 유순했다. 키가 크고 갸름한 얼굴에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다.
둘째딸은 호리호리하고 예뻤다. 머리띠를 한 긴 머리, 암록색 주름치마를 입은 모습이 깜찍했다. 둘째딸, 그 아이는 나를 잘 따랐다. 저녁을 먹은 후 매일 그 애랑 산책을 했다. 그 애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구덕운동장 담장 길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산책 코스였다.
“너, 어디 갔다 오니?”
처음엔, 그 애에게 설거지를 시키려고 기다리던 언니가 닦달을 했다.
“오빠랑 데이트하고 온다.”
그 애의 대답은 맹랑했다. 내가 뒤따라 들어오자 언니는 얼굴을 붉히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밤 열 시쯤, 가끔 나는 머리를 식히러 대문간에 나가곤 했는데, 엄마를 기다리던 그 애도 내 인기척을 듣고 배시시 웃으며 나오곤 했다. 춥다며 내 풍성한 잠옷 윗도리 단추를 열고 그 속에 들어와 단추를 채우고 함께 앞을 보고 서 있곤 했다.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내가 두 손을 그 애 가슴에 모으고 있으면 그 애는 가만히 내 손을 밀어 내렸다. 나는 또 살며시 손을 올렸고 그 애는 또 밀어 내렸다. 그 애의 가슴에 봉긋하게 무엇이 돋아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대학생인 형과 고1인 동생은 고향으로 가고 나 혼자 자취방에 남게 되었다. 내가 보충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가고 나면 내 방은 언제나 그 애 차지였다. 책상서랍도 뒤지고 노트에 낙서도 해놓고, 부채에다 ‘성부 성자 성신’이라고 써놓기도 했다. 어떤 때는 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있었다. 치마가 올라가 요염한 모습으로.
‘이 애가 크면 이 애랑….’
나는 달콤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 애는 내게 천사였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다. 9월 13일 밤,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날 밤늦게 대문간에 나와 서있는데 그 애가 쪼르르 나왔다. 엄마가 아직 오시지 않았단다. 내 잠옷 속에 들어온 그 애가 노래를 불렀다. 따오기를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 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돋는 나라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 메이뇨
내 아버지 가신 나라 해돋는 나라
1972년 9월 14일 목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 옆 도랑 물소리가 요란했다.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었다. 형은 벌써 일어나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고, 곧 아침밥이 들어왔다. 나와 동생은 책가방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그 아이가 마루 끝에 서서 약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 학교에 안 간다~. 엄마가 가지 말라고 했다~.”
“너, 까불면 물에 떠내려간다.”
그 애에게 꿀밤을 한 대 먹이고 나오는데, 그 애 엄마가 부엌에서 보고 빙그레 웃었다. 경남상고 앞길에 나오자 무릎까지 오는 물살을 건너지 못한 여학생 몇 명이 서있었다. 그 애 언니도 서있었다. 손을 잡고 물살을 건너게 해주고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둘째시간 수업 중에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구덕저수지가 터졌다며 대신동에 사는 학생은 빨리 집으로 가보란다. 우리 집 뒤 산중턱에 저수지가 있던 것이 생각났다.
집 가까이 언덕에 오자, 우리 집 주위의 단층집, 이층집, 가게, 도랑, 다리, 나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운동장처럼 훤했다. 사람들이 모여서 시체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주위에서 80명이 넘게 죽었다.
기록상으로는 사망 60명, 실종,15명,부상
우리 집 네 가구 열여섯 식구 중에서 8명이 죽고 8명이 살았다. 집안에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 애 집엔 학교에 간 언니만 남겨놓고 나머지 네 사람이 모두 죽었다. 우리 3형제는 모두 무사했다. 형이 설거지를 하고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선 지 10분쯤 뒤 저수지 둑이 터졌다고 한다. 만일 그 둑이 한밤중이나 아침 일찍 터졌으면 어찌 되었을지….
그날 오후, 그 아이의 시신을 찾았을 때 나는 그 아이를 안고 하늘을 보며 울었다. 내 열세 살 소녀는 그렇게 갔다. 그때 살아난 언니에 의해 그 아이는 엄마, 두 동생과 함께 화장되었다. 그 애와의 6개월, 그때 시작된 열아홉 살 소년의 인생앓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그 아이는 별이 되어 내 가슴에 남았다.
내 인생 여정에서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십이 다된 지금, 시 나부랭이를 적어서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피 끓는 젊은 날에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인생사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사랑’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뻔하지 않았는가.
부자란, 가슴속에 샛별처럼 영롱한 추억을 여럿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동아일보 1972.9.15 부산여상1학년 소녀의 가족4명 사망 기사
구덕수원지 붕괴 이재민 반여동 무지개마을(재송동옆)로 이주하여 천막집에서 생활하는 모습 (1972년말)
구덕수원지 복구 완료후 모습 '70년대 중반
'80년대 초반 구덕터널 대신동쪽 공사중인 모습.. 이 공사로 구덕수원지는 매립되어 없어지고
보수천(구덕천)은 복개처리 되어 구덕터널 진입로 밑으로 흐르고 있다.
따오기, 20년 후
최용현(수필가)
‘따오기’ 라는 제목으로 필자의 고3시절의 아픈 추억을 소개한 바 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오늘은 그 과부집에서 혼자 살아남은 큰딸을 찾은 얘기를 하고자 한다.
1972년 9월 14일 목요일, 집중호우로 부산 서대신동에 있던 저수지가 붕괴되어 그 아래 주택가를 덮치면서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내가 자취하던 집에도 4가구 16명이 살았는데 8명이 죽었다. 우리 3형제는 모두 학교에 가는 바람에 무사했다. 우리 방 옆 과부 집에는 세 딸과 외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부산여상 1학년이던 큰딸만 남겨놓고 엄마와 세 아이가 모두 죽었다.
죽기 전날 밤 내게 ‘따오기’ 노래를 불러준 초등학교 6학년 둘째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나는 페시미즘에 빠져 인생의 진로가 바뀔 만큼 휘청거렸고, 결국 글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동생은 몇 년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살던 집이 송두리째 떠내려가 버린 뒤 나는 은하여중에 마련된 수재민수용소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동대신동에 방을 얻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며칠 뒤 집 앞에서 우연히 그 과부 집에서 혼자 살아남은 큰딸을 만나게 되었다. 삼촌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 언니(그냥 언니라 해두자)를 따라가니 ‘여기’라며 삼촌 집을 가르쳐 주었다. 공교롭게도 우리 형제가 새로 얻은 방과 아주 가까웠다. 그 언니가 삼촌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삼촌이 엄하시니 자주 전화하지는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 후 가끔 전화로 그 언니의 소식을 듣곤 했는데, 그해 내가 대학입시에서 낙방을 하고 나서부터는 ‘인생무상, 삶의 회의’에 빠져 그 언니에게 연락도 하지 못했다. 일 년 후,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왔고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3년 후에 제대를 하자마자 그 집에 전화를 했으나 이사를 가고 없었다. 그로부터 영영 그 언니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지난번 ‘따오기’를 발표하고 난 후, 갑자기 그 소녀의 안부가 사무치게 궁금해서 부산에 사는 친구에게 부산여상에 가서 그 소녀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어떻게든 현재 살고 있는 주소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학적부엔 주민등록번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더라고 연락이 왔다. 언제 부산에 가면 옛날 그 삼촌 집을 찾아보고 이사 간 집을 계속 추적해 봐야지….
1992년 1월 25일 토요일, 이종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부산에 갔다. 사고 후 20년 만에 대신동 그 수마(水魔)의 현장에 가보았다.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수마가 할퀴고 간 그 물길이 바로 시원하게 뚫린 8차선 도로가 되어 구덕터널로 이어져 있었다. 소 잃고 난 후 훌륭하게 고쳐진 외양간….
옛날 그 삼촌 집을 가까스로 찾았다. 그 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새 상가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난감했다. 목이 말랐다. 음료수를 마시려고 옆 가게에 들어갔다. 50대쯤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이 자리에서 장사를 오래 했는지 물었더니 25년쯤 되었다고 했다. 20년 전에 바로 옆집에 살던 사람을 찾는다고 하자, 놀랍게도 잘 알고 있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그 집 말씀이죠? 이사 간 지 오래 되었는데요.”
“그 집에 부산여상을 졸업한 키 큰 아가씨가 있었는데 혹시 아시는지요?”
“알죠, 그때 물난리 때 가족을 모두 잃고 이 집에 와서 살던 아가씨 말이죠? 목사와 결혼해서 서울에 산다던데요.”
틀림없었다. 그 아가씨를 찾으려고 서울에서 왔다고 했더니 교회에서는 알지 모른다며 그 삼촌 이름과 예전에 다니던 교회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남포동 그 교회를 찾아갔다. 젊은 여자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삼촌 이름을 댔더니 그 교회의 장로님이라면서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혹시 그 집에서 이상하게 생각 할까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라고 했고, 가까스로 그 언니의 서울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다음날, 서울에서 전화를 했다. 몹시 반가워했다. 그녀도 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드름투성이의 고등학생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다며, 그녀가 먼저 만나자고 말했다.
이튿날 저녁, 고등학생이던 소년과 소녀는 20년 후 서울 신촌에서 다시 만났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역시 들은 대로 목사 부인이,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20년 전의 여학생 그대로의 밝고 순수한 얼굴이었지만 이제 수줍어하지는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다. 엄마와 동생들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무신론자이고 심정적으로는 불교 쪽에 가까운 편이지만 종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 소녀를 오늘까지 지탱하게 해 준 것이 하느님의 보살핌, 즉 신앙의 힘임을 나는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어느 누구도 의심치 못하리라.
그녀는 저녁 설거지는 꼭 저녁에 하고, 자기 전에는 주변을 항상 깨끗이 정리해 놓고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밤사이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해놓는 것이란다.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겐 한이 맺힌 절규이리라.
며칠 뒤, 그녀의 가족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오누이가 되기로 했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기로 했다. 아내도 쾌히 승낙을 했고 그녀의 남편도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돌아갈 때 아내가 설날 친정에서 갖고 온 찹쌀을 나누어서 비닐봉지에 담아 주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흐뭇했다.
나는 그녀가 갖고 온 동생 -따오기에 나오는 열세 살 소녀- 의 단 한 장 남은 20년 전의 사진을 선물로 받았다. 그 아이가 사진 속에서 밝게 웃고 있었다. 자꾸만 콧등이 시큰거려서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했다. 별 하나가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따오기, 20년 후"를 읽은 독자의 댓글과 작가의 답글
댓글
20년 후 ... 삼형제중 생존하신 따오기님 ... 세모녀중 생존한 큰딸 ... 예사롭지 않은 인연과 사연은 수필가 최용현님을 ... 닉네임 < 따오기 >로 ... 그 소중한 소녀의 사진을. 좀 보여 달라는 말조차 아니 나오려 합니다.
답글
대학 1학년을 마친 1975년 1월, 그 아픔에서 헤어나려고 군에 입대를 했죠. 그 무렵 한 여고생이 미스 춘향에 뽑혀 혜성같이 등장했는데, 제 눈을 의심할 정도로 따오기(1960년생)랑 닮았더랬어요. 그 소녀의 나이를 애써 확인(1958년생)했을 정도로... 그 여자가 배우 장미희예요. 그 아이의 사진을 공개하는 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현재의 구덕터널 대신동쪽 입구 모습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