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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三道軒정태수
자헌 이성순님의 작품세계
인사말씀
나의 삶 나의 사랑인 그림
성하의 계절에 월간 서예문화 초대로 조그만 작품들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여러 장르 중에서도 문인화를 선택한 것이 제게는 큰 보람입니다. 그림과 함께 세계를 다니면서, 때로는 오페라 가수의 아름다운 선율에 맞추어 춤추듯 붓을 들었고, 전시회를 통해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의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감동과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가을에 있을 뉴욕 전시를 위해 오늘도 붓을 들었습니다. 아직도 미숙하니 더 배우고 익혀 온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아름다운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세계에 전할 수 있도록 많은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붓 끝에서 꽃이 되고, 열매가 되는, 끝없이 솟아오르는 그분의 사랑. 그림은 나의 삶의 노래이며, 사랑의 고백입니다.
대전 전시는 더 많은 작품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그림을 통해 들려지길 소망합니다. 자헌 이성순
평문
자헌(自軒) 이성순(李成順)의 나무와 꽃
박 용 숙[ 미술비평가]
시경(詩經)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무꾼이여 그 나무랑은 손대지 말고 그 가지가 어떻게 뻗는지를 보라‘ 얼른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글귀로 보이지요. 흔히 쓰는 말에 숲만 보지 말고 나무도 보라는 말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문장의 의미는 산수(山水)나 화조(花鳥)를 그리는 화가에게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목재(木材)를 찾는 나무꾼에게 가지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는 이 나무 가지(枝)가 묵필(墨筆)과 선긋기(線描)가 왜 예술인지를 보여주는 실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무를 세심하게 관찰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줄기는 그냥 하늘만을 향해 높이 치솟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아! 참 대장부기상이다 라고 감탄하며 화가는 거침없이 위로 향해 붓을 끌어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줄로 알면 그는 화가가 아닙니다. 가지가 어떻게 뻗는지를 살펴야 하겠지요. 줄기에서 분가하는 가지의 운명이 결코 평탄치만은 않습니다. 줄기처럼 무작정 하늘을 향해 뻗을 수가 없습니다. 전후좌우에 무수한 형제들의 생존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가지는 그들의 의지와 부딪쳐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입사귀가 부딪치더라도 가지는 적절한 거리를 두며 뻗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한 구루의 나무가 힘차게 뻗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며 그 속에서도 가지가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는 일입니다. 하찮은 나뭇가지 따위가 어떻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알가 하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화론이 말하는 신변유미(神變幽微)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문인화가에게서는 사라져버린 전설이 되었습니다. 내가 화가 자헌 이성순을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전통을 잃어버린 문인화가(文人畵家)라고 부르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고. 그의 이전의 카탈로그에서 ‘전통적인 문인화에서 벗어난 격식과 기법은 공식(公式)이 아니라고 발언한 대목을 보고서야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를 간파했습니다. 오늘에 유행하고 있는 문인화가 실은 허상(虛像)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문인화에는 <시경>이 암시했듯이 자연의 신변(神變)이나 유미(幽微) 따위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헌 이성순의 이번 전시에서 그가 오랫동안 연마해오던 나무그림을 젖혀 두고 꽃그림을 선보이는 것도 무인(無人)화의 허상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라고 보고 싶습니다. 나무를 그리자면 ’선긋기‘가 주이지만 꽃그림은 색과 면의 기교가 주입니다. 이 기교를 우리는 ’그리다’라고 합니다. ‘긋기’가 직관의 세계라면 ‘그리다’는 대상의 얼굴을 본뜨며 화의(畵意)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성순의 이번 전시는 그러니까 그 양면성을 시도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무건 꽃이건 그 본래의 의도는 화의(畵意)를 선명하게 부각하여 사람에게 교훈(敎訓)하려는데 있다고 해야 하겠지요. 이를테면 나무를 선악(善惡)의 나무, 지혜(智慧)의 나무라고 비유하거나 꽃이 진리의 도상(圖上)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집트벽화에서는 로터스는 태양신의 상징이고 연꽃은 법(眞如)이고 그리스신화의 아네모네는 사랑과 영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성당벽화에는 백합이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기 합니다. 우리말에 ‘그리다’는 ‘그리워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성순이 꽃을 그리는 것은 ‘그리워하다’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그가 그리는 꽃들은 그에게는 모두가 법(眞如)이나 영혼이나 순결과 같은 것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은 그가 쓴 다음 시에서 그 흔적이 나타납니다. 비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 하얀 들국화 무리져 서서 겨웠던 여름 빗물로 쏟아내고 빈 마음, 가을을 담았습니다. 눈부신 햇살의 향기 파란 하늘에 한 마리 새 날개 쳐 오릅니다. [이성순의 ‘나의노래’ 전문] 꽃을 영혼의 ‘빈자리(영원)’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시에는 동양화가 말하는 여백(餘白)의 정신 같은 것이 배어있습니다. 자헌 이성순은 글로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넉넉하게 드러냅니다. 그의 꽃그림에는 그가 읊은 시가 숨소리가 되어 그 속에 숨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장미는 중심에서 시작하는 회오리의 움직임(展開)이고 그 꽃의 중심에 신들이 살고 있다고. 어찌 장미꽃뿐이겠습니까. 신화가 꽃은 ’팽창하는 ‘우주자궁’이고 그 중심에 신의 숨소리가 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지요. 분명한 것은 이 화가가 꽃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꽃 속으로 들어가 꽃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녀의 대담한 구도를 보십시오. 꽃이 화폭에서 모든 공간을 밀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한 송이의 꽃도 그렇고 꽃 한 잎이 주제가 될 때도 그렇습니다.
프로필
자헌(自軒) 이 성순(李成順)
sulramme LEE SU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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