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대 산장이 사라졌습니다.
지난한 역사는 월간 마운틴에서 소상하게 ->요기<- 적고 있는데요.
여기서는 그 처음과 중간, 틈새를 조금 메꾸어 볼까 합니다.
외설악에서 시작되는 천불동은 조선시대때부터 1960년대 한참까지 비선대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비선대 너른 암반에 새겨진 수많은 각자가 이를 증명합니다.
비선대에서 살짝 왼편으로 올라가자마자 그곳에서부터는 '무인지대'였습니다.
등산객들에게는 정상이 목표이지만, 계곡 탐승객들에게는 계곡의 시작이 목표가 아닙니다.
비선대가 그래서 천불동 계곡의 탐승객들에게는 최종 지점이기에 안성마춤입니다.
출처: 1962 07 25 동아일보
비선대 산장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뉴스입니다.
1962년인데,
'서울에서 수년전 이사를 해서 이곳에서 뿌리를 박고 있다는 중년부부가 있는데,
그들은 큰돌 바위 밑에 자연이 파여진 곳을 이용하여 집을 짓고 '비선산장'이라 스스로 일컬으며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구멍가게를 벌리고 있다.
그 부부는 우리 몇사람을 위해 약용으로 쓰던 술이 조금 남아 있다고 하며
설탕에 저린 생을 안주로 곁들여 잔을 권하는 것이었다....'
기사에 의하면, 서울에서 중년 부부가 1950년대 후반에 이곳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낌에도 '숙박'이라기보다는 '매점'의 뉘앙스가 강합니다.
실제로도 이곳에 숙박을 할 등산객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에서 관광객을 위한 매점이기 쉬울 겁니다.
신흥사에서도 적당한데다, 그리고 종점에 위치한 비경이고 해서 외설악 계곡에서 첫번째로 매점 자리입니다.
이들이 추정컨대, 비선대 산장지기의 첫 효시가 아닐까 합니다.
막걸리?
막걸리보다는 보존성이 강한 '담은술' 위주였을거고요.
당시까지만 해도 관광객이 얼마 없어 주된 생계수단은 산나물과 버섯 채취 등등이기 쉬울겁니다.
관광객은 한철장사 또는 뜨내기 장사였겠죠.
출처: 경향신문 1962.08 19
1962년이면 이기섭 박사 등에 의해 천불동 등산로가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그때도 비선대에서 귀면암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관광객들과 수학여행객들에겐 비선대가 여전히 끝입니다.
출처:1964.11.12 동아일보
비선대에서 '머루술을 마시며 혓바닥에 매끄러운 도토리 묵을 넘기면서'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당연히 비선대 산장에서 구입한 것이겠죠.
출처:1966 08 11 동아일보
"흥사에서 십리 산로를 돌아 산향도 그악한 비선대 산막(山幕) 머루술을 한모금 들이키면
차디찬 산정기가 뼈속가지 시리다"
이 기사에서는 '산막'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머루술이 산막에서 파는 대표적인 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기사에서는 '금강과 설악을 비교하고 있는데,
금강을 화용월태의 기생으로 설악을 기품있는 중년여인으로 하고 있네요.
조금은 작위적인 것 같습니다.
설악을 산머슴아같은 산골소녀라고 했으면 더 정확했을텐데요...
출처: 1966 11 24 동아일보
새로 선정된 국립공원 순람이라는 제목으로 설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왕폭 가는 길목 산막 가게 주인 이씨는 이 눈을 바께스로 퍼다가 머루술, 콜라를 채워두고 지나는 등산객의 땀을 식혀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토왕폭 길목이라고 한다면, 비룡폭 아래에 있는 그 산장휴게소 자리쯤 될 것 같은데요.,
역시 막걸리가 아니라 머루술을 대표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설악산 하면 머루술인데..이미 60년대부터 그러했네요.
더 조사해보면...다래술도 아니고 오미자주도 아니고 하필이면 머루술일까도 조금은 밝혀질 것 같습니다.
출처:1967 07 12
양주동 박사의 글입니다.
몇해전 가을 H사의 문예인 탐승 일행으로 비선대를 처음 찾았다는데, 그때 비선대에서의 추억입니디.
'그 넓으나 넓은 반석에 앉아 냉막걸리 여러잔을 거푸 들며,........'
그는 막걸리를 마셨군요.
시즌 중에는 당연히 막걸리를 담았을 거고, 역시 비선대 산장에서 파는 것이겠죠.
출처: 1977 04 20
비선대 휴게소는 이때까지는 있었나 봅니다.
자그마치 18개소에 신흥사와 속초시가 허가, 지정한 곳이 있었습니다.
한편, 울산암의 암석 여인상은 - 비너스 상을 말하는 것 같은데, - 1977년 발견되었군요....~
그렇다면 언제 비선대 휴게소가 사라진 건 바로 77년과 78년 연간으로 짐작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11월 11일 설악을 찾습니다.
그때의 이야기입니다.
1978 11 16 매일경제.
밑줄 친 곳에서 의아한 것은 왜 돗자리를 폈을까라는 겁니다.
구미 시골 출신의 그가 까다로운 인물이 아님은 누구나 압니다. 모심기 자리에서 꺼리낌없이 막걸리를 마시죠..
그 이유는 다른 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설악동의 마무리가 채 덜 끝난 78.11.11 고 박정희대통령 각하와 가족일행이 갑자기 내방하셨다.
그때까지 신축하고 있던 뉴설악 호텔이 완공되지 않아 3박4일동안 기존 설악산 관광호텔에 머무시면서
틈을 내어설악동 구석구석과 속초시내까지 두루 살피셨다.
새로 지은 신단지 상가에서는 주민과 대화하시면서 기념으로 단장을 하나 사시고,
새벽에는 아직 공사중인 소공원을 산책하시며,
또한 등산길 비선대에서는 헐어버린 산장의 잔해 위에 자리를 깔고 점심도 드시면서 아름다운 설악의 품에서 떠나시기 싫으신 듯이 나흘을 지나시고 상경하셨다.
박정희는 헐어버린 산장의 잔해 위에 자리를 깔았던 겁니다.
계곡의 암반이 아니라 굳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아무래도 장군봉을 조망하기 좋아서이겠죠...
중요한 건, '헐어버린 산장'이라는 표현입니다.
77년과 78년 즈음은 청와대가 나서서 '외설악 종합개발을 할 때입니다.
아마 그 일환으로 헐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데요....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유가 사실 제일 궁금하긴 한데~~~
출처 1981 02 05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라이버러리의 기사 흐름에 보자면,
비선대 휴게소(산장)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1980년대 초에는 없다는 느낌입니다.
있었다면, 비선대 휴게소에서 통제를 했겠죠.
출처: 1982 07 09 동아일보
음....8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비선대 산장의 준공일자가 1982년 7월 5일이군요.
민간자본 3억을 들여 7개월만에 준공된 이 휴게소는 휴게실을 비롯, 매점 스넥 코너와 조난객을 위한 간호실까지 갖추어져 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제목에서도 '비선대에 휴게소'이듯이,
80년대 초, 정상을 수월하게 오르내릴 수 있던 시절에도,
비선대 산장은 (등산객을 위한) 산장이라기보다는 (천불동 계곡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휴게소 매점에 방점이 찍힙니다.
저 시절 설악을 찾은 이들은 그래서 '점심 도시락'이나 '간식'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당연히 비선대까지 올라서 매점에서 막걸리와 파전 등을 사서 요기와 술자리를 가졌죠.
산장지기와 언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저 시절은 '트럭으로 음식을 실어온 양만큼, 자루포대에 지폐를 싣고 내려갔다고 회상하더군요.
사실 비선대 휴게소는 그 이후에도 전문 등반가에게는 산장의 역할이었지만,
탐방객에게는 매점에 가까운 역할을 했습니다.
그곳이 사라졌다니..설악의 한 켠에 사라진 것 같아 많이 아쉽습니다.
사람으로 붐벼서 북적이는 비선대 휴게소도 점잖은(?) 사람들이 보기엔 눈쌀을 찌푸릴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설악의 한 풍경이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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