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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3일 일요일(토요무박) 백두대간 35 회차 태백산
자유인 산악회
백두대간 35회차 : 도래기재–구룡산–곰넘이재–신선봉–깃대배기봉–태백산–사길령-화방재
산행거리 : 약 26 km 산행시간 : 약 12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563764
거리 26.5 km
소요 시간 12h 41m 24s
이동 시간 11h 7m 49s
휴식 시간 1h 33m 35s
평균 속도 2.4 km/h
최고점 1,576 m
총 획득고도 1,228 m
난이도 보통
백두대간 (白頭大幹) 35 – 태백산
양산박
산중의 산 태백이라 부르는건
그저 크고 높기 때문만은 아니라오
힘들어 하면 보듬어주고
잘못하면 꾸짖기라도 할 듯한
먼 태곳적 전설이
바위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먼 옛날 할아버지 얘기를
또 먼 장래에 손자에게 들려주는
태백은 그런 산이라오
산 중의 산 태백이라오
다시 돌아온 도래기재
2018년 3월 노치마을에서 백두대간을 시작하고 짜여진 스케쥴에 따라 한 구간 한 구간 걸어온 길이 이제 중간 안부에 올라 서서 마지막 깔딱고개를 남겨두고 있다. 오늘 걷는 태백산을 포함하여 앞으로 총 9회에 걸쳐 무박산행을 하고 나면 정상에 나부끼는 깃발이 보일 터이고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초면 마침내 2년간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게 된다.
오늘은 경상도와 충청도에 속한 소백산 구간을 뒤로 하고 강원도로 넘어간다. 그 출발점이 도래기재다. 지난 4월 아직 잔설이 성성할 즈음에 선달산 오르는 들머리로 삼았던 도래기재를 이번에는 반대 방향인 태백산에 가기 위해 다시 찾았다.
백두대간 산행을 하면서 지명에 관심이 가게 되었는데 한자와 우리 한글 이름이 함께 쓰이다 보니 어떤 때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름은 그게 인명이든 지명이든 아니면 꽃이나 곤충 이름이든 우리 인간이 정해 놓은 약속이며 어쩌면 인류 문명이 발달하게 된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사물에 대한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름은 아무렇게나 불러서는 안된다. 특히 지명은 그 나름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 이름은 ‘쟁이내’라고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 궁금했으나 아직도 그 뜻이나 유래를 알지 못한다. 한자로는 녹천(사슴록鹿 내천川)이라고 쓴다. 일제시대 만든 지도에는 장천(노루장獐 내川)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어느 인터넷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쟁이내’라는 말은 사슴이나 노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며 금강으로 흘러 가는 냇물을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어디를 뒤져봐도 동네 이름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도래기재의 유래에 관해 자료를 찾아 보면 역시 ‘도역리(道驛里)라는 한자지명이 나온다. 그에 대한 설명으로 이 고개 아래 도역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옛날 이 봉화지역에 소나무 벌채가 한창 이뤄지고 있을 때 벌목꾼들과 운송인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 마을에 역(驛)이 생겨난 것이고 그 도역리가 더 쉬운 발음으로 지금의 ‘도래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도래기재 아래 도래기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88번 지방도로를 통해 도래기재를 넘어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우구치리로 연결된다.
예정보다 30분 이른 2시 30분 도래기재에 도착하여 간단한 채비를 갖춘 후 산행을 시작했다. 각자 헤드랜턴과 손전등을 갖추고 있어 주변에는 어둠이 가시고 불빛이 찬란하다. 맑은 하늘에는 별이 총총 달이 휘영청 밝고 바람이 서늘하여 마치 가을날 새벽공기 같다. 한 동안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더니 근래 들어 몇 번 비가 내리고 오늘도 중부 이남에는 비가 올거라는 예보가 있다. 산길은 이슬 한 방울 맺히지 않고 건조하지만 땅은 그리 마르지 않아 먼지가 나지 않는다. 산행 중 비만 맞지 않는다면 정말 산행하기에 최적의 날씨다.
도래기재 줄발에 앞서 단체사진
어둠 속에 바로 발 앞 불빛이 닿는 부분만 환하고 주변은 칠흙같이 어둡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 숨소리와 가끔씩 주고받는 농담에 상쾌한 기분으로 짧은 시간에 꽤 긴 거리를 접어 간다. 간간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노라면 아름드리 낙랑장송 소나무가 우뚝 우뚝 서 있다. 절간이나 궁궐 또는 양반집 기와집을 짓는데 사용되었고 또 일제 식민지 시절 수 없이 잘려 나가던 와중에도 용케 버텨낸 덕분에 오늘날 소중한 자원으로 남아 산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그 원산지가 어디냐에 따라 봉화군으로 실려 나가면 춘양목이요 영월을 통해 한강으로 실려나가면 금강송이라 불렀다. 지난 번 옥석산 선달산으로 가는 길에는 이처럼 큰 소나무가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에는 우람한 소나무가 많이 보인다.
하늘엔 별이 총총 달이 휘영청 - 눈을 크게 뜨고 보세요.
등산로에는 가끔씩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 산행에 지친 사람들에게 쉬어가라 한다. 새벽 등산에 그리 힘이 들지는 않지만 첫 번째 만나는 임도에서 구룡산에 대한 유래 등 글도 읽어 가며 물 한 모금 목을 축인다. 한 시간 반 동안 4 km 걸어왔으니 제법 빠른 편이다. 그 만큼 산길이 편하고 잘 관리되어 있다는 뜻도 되겠다.
임도에서 앞 쪽 산을 바라보니 불빛이 움직이는데 우리 선두팀이 벌써 구룡산에 올라간 것이라고 누군가 얘기한다. 아무리 우리보다 빨라도 그렇지 구룡산 정상까지 2 km 정도 남았는데 설마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날까 하고 의구심을 가져본다. 사실 산행을 마치고 나면 보통 선두와 후미사이 30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래도 아직 초반인데다 어두워서 지체하지도 않는 발걸음인데 그렇게 차이가 날 수는 없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또 발걸음을 옮긴다.
구룡산 (九龍山 1,345.7 m)
여전히 오솔길 같이 잘 다듬어진 산길이다. 서서이 오르막이 시작되고 그에 비례하여 발걸음도 조금 느려진다.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니 먼 하늘이 뿌옇게 밝아 온다. 숲에서는 산객의 발소리에 선잠을 깬 새들이 짜증내는 소리가 들린다. 주말만 되면 늦잠을 방해한다고 한 놈이 투덜대면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애들도 덩달아 쫑알댄다. 난 그런 불평을 귓등으로 흘려들어가며 희뿌연 산 안개처럼 밀려오는 여명을 바라보면서 산정을 향해 오른다.
오늘이 년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날이다. 새벽 5시면 해가 뜬다. 모처럼 무박산행인데 기왕이면 해돋이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좀 더 재촉해 본다. 구름에 해가 가려진 탓인지 5시가 좀 지났어도 주변은 어둑 어둑하다. 구룡산 정상 아래 <고광나무>와 <말발도리>꽃과 오늘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다.
<고광나무>
<말발도리>
5시 10분 구룡산(九龍山 1,345.7 m) 정상에 도착해서 맨 먼저 동쪽 하늘을 살펴본다. 희뿌옇던 구름이 산 안개처럼 흩어지면서 엷어지고 강렬한 아침 햇살이 구름을 물들인다. 햇빛에 직접 닿은 부분은 빨갛게 물들고 좀 떨어진 부분은 진한 노랑색이다. 구름이 짙은 곳은 여전히 희색으로 그림자를 비춘다. 바람에 구름이 흩어졌다 모여들고 햇빛과 어우러져 마치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희롱하는 듯하다.
“저기 해가 떠오르는 곳이 신선봉이에요.“ 벌써 백두대간을 두 번째 뛰고 있는 별동대장님이 햇살과 구름이 엉켜 빛나는 산정(山頂)을 가리킨다. 저 봉우리와 여기 사이에는 저렇게 햇살이 훤히 보일 만큼 텅 빈 공간이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갈 산 길은 우측으로 반달 모양으로 빙 둘러서 저 신선봉에 닿을 것이다.
구룡산에서 바라본 일출장면 - 신선봉이 불탄다.
산에 오르기 전 임도 휴식처에 세워져 있는 팻말에는 구룡산 이름의 유래를 설명해 놓았다. 구룡산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단순하고 싱겁다. 옛날 이야기다. 이 산 아래 마을에 한 여인이 우물 물을 길어 가는데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뱀이다”하고 소리 지르며 그 중 한 마리의 꼬리를 잡아당기니 그 용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그만 땅에 떨어져 뱀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에는 그 여인이 누구였는지, 왜 용보고 뱀이라고 했는지 그리고 용을 잡아당길 만큼 힘이 센 여인이었는지 하는 설명은 들어 있지 않다. 원래 하늘로 오르려던 용이 열 마리였는데 그 여인 때문에 결국 아홉 마리만 올라 갈 수 있었다는 것인지, 용을 해코지하여 땅에 떨어트린 그 여인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하는 이야기도 없다.
서울 구룡산과 양재천(良才川)에 얽힌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이다. 모티브나 이야기 줄거리는 같은걸 보면 이 구룡산 이야기를 그대로 베낀 느낌이다. 양재천과 구룡산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옛날 구름 위 하늘 나라에 살고 있던 열 마리의 용이 천제의 명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들은 열 개의 계곡이 있는 산 위로 내려와 각 계곡 끝에 우물을 파고 지내면서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열 마리의 용 가운데 맏형이 어느날 동생들을 모아 놓고 이제 우리가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겠다며 그 방법을 의논하였다. 마침내 승천하기로 한 하루 전 맏형은 동생들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우리 용들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이른 새벽에 구름 위로 올라가야 한다. 만일 임신한 여인이 우리를 보면 부정을 타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 모두 일찍 자고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 재빨리 구름 속으로 날아 들어가야 한다”. 동생들은 모두 맏형의 말씀을 가슴 속에 새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막내는 모든 것이 쉬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하늘로 올라갈 일에 흥분되어 제대로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맏형의 인도에 따라 모두 일찍 일어나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늦게 잠이 든 막내 용은 형들이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길 때쯤에야 비로소 몸을 일으켜 날아올랐다. 이미 날이 밝아 여명이 깔려 있는데 그 마을의 한 여인이 아침밥을 지으려 우물에 올라가 물을 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막내 용이 막 구름 속으로 머리를 들이 밀고 몸통과 꼬리만 남았을 때 그 여인은 큰 소리로 “앗, 뱀이 하늘로 올라간다“하고 외쳤다. 그러자 막내 용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려다 여인의 외침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만 지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구름 위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던 형들은 막내에게 외쳤다. “비록 네가 하늘로 오르지는 못했지만 땅 위에서 훌륭한 재목이 되어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강이 되거라“
형의 말을 들은 막내는 마침내 땅위에서 뱀이 되었고 그 뱀은 긴 강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강물을 양재천(良才川)이라 불렀고 아홉마리의 용이 승천한 산을 구룡산이라 불렀다. 이 양재천은 1970년대 직강하천으로 개발되기 전에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사행천(蛇行川)이었다고 한다.
백두대간길에 있는 이 봉화군의 구룡산에 얽힌 이야기는 서울 구룡산의 이야기를 간락하게 요약해 놓은 느낌이 들 뿐이다. 어쩌면 그 두 구룡산 간에 관련된 사연도 있으련만 알 길이 없다.
이제 해가 떠 오르니 사방이 녹음으로 우거진 길이 환상적이다. 구룡산에서 내려선 발길이 끝없이 떨어진다. 구룡산(九龍山 1,345.70m)에서 시작된 숲 길은 고직령(高直嶺 1,231 m)를 거쳐 곰넘이재(1,150 m)까지 3.14 km로 조망이 전혀 없는 오솔길이다. 여유있게 친구와 담소하면서 걸으면 좋을 법한 길이다. 구룡산에서 마주친 다른 산악회 회원 몇 명은 걷기 편한 이 길을 마라톤 하듯이 내달려 우리를 멀찍이 앞질러 가버리고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숲에는 <거제수나무>가 많이 자란다.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거제수나무는 물박달나무와 사스레나무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추운 지방에 많이 자라는 이 나무는 우리가 태백산에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키가 큰 교목 아래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고 그 수풀에 섞여 <왕둥굴레>천지다. 일반적으로 잎 겨드랑이에 꽃이 하나씩 피어 있는 것과 달리 이 둥굴레는 꽃이 쌍으로 피어 있다.
<왕둥굴레>
곰넘이재 (熊峴 1,150 m)
도래기재를 출발한지 거의 3시간 만인 6시 20분 곰넘이재에 닿았다. 조금만 쉬며 서있어도 아침 찬 공기에 서늘함을 느낀다. 하지(夏至)의 날씨가 이렇게 서늘한 적이 있었던가. 날씨에 둔한 성격이라 그런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건 분명 일반적인 여름날씨는 아닌 것 같다.
곰넘이재는 옛날 경상도에서 관리들이 태백산에 제사지내러 갈 때 지나가던 고개라 한다. 1608년 안동 도호부의 권기와 권행가가 유성룡의 지시로 쓴 지방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웅현(熊峴)이라 표현되어있어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이를 풀어서 한글로 곰넘이재라고 부른 것이라는 안내문을 세워 놓았다. 나는 어쩌면 그 반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즉, 원래 <곰넘이재>라고 부르던 것을 영가지에서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熊峴으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예부터 ‘곰’은 ‘검’과 같은 뜻으로 많이 쓰였으며 이는 신(神)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 곰넘이재는 사람들이 신(神)을 만나기 위해 넘어가는 고개였던 것이다.
곰넘이재는 웅현(熊峴)이라고도 한다. 짧은 휴식을 갖는다.
잠깐씩 갖는 휴식은 몸에 원기를 북돋아 준다. 도래기재를 떠나 거의 9 km 를 걸어왔으니 조금씩 지쳐간다. 곰넘이재에서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왠만한 트럭도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널찍한 임도(林道)다. 1980년대까지 구룡산에서 곰넘이재를 지나 신선봉 아래까지 산불저지선(防火線)을 유지해왔다고 한다. 그 산불 저지선은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급경사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이어진다. 넓은 길이 끝나면 길가에 수풀이 우거지고 폭이 좁은 산길이 이어지고 곧이어 왼쪽으로 꽤 커다란 무덤이 보인다.
이 곳에서 신선봉(神仙峯 1,280 m)까지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조릿대>에 꽃이 피어 있다. 작년 이맘때 빼재에서 출발하여 백암봉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그 조릿대 꽃이다. 벼(禾)과에 속하는 조릿대는 꽃이 피고 나면 말라서 죽는다는 얘기가 있으나 사실여부는 모르겠다. 다만, 산행을 하다 보면 큰 조릿대 군락이 하얗게 말라서 죽어 있는 것을 가끔 만나게 된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일생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 조릿대의 숭고한 정신은 어쩌면 대부분의 동식물들이 그 삶의 저변에 간직하고 있는 원초적 본능일지 모른다.
넓은 임도가 끝나고 오르막과 함께 <조릿대> 수풀길이 시작된다.
신선봉(神仙峯 1,280 m)
안양에서 왔다는 다른 산악회 후미팀마저 신선봉으로 오르는 길에서 우리를 추월한다. 도래기재에서 우리보다 한 시간쯤 늦게 출발했다는데 선두팀은 구룡산을 지난 지점에서 그리고 후미팀은 신선봉 오르는 길목에서 우리를 앞지른다. 참 부지런한 걸음이다.
아침을 어디에서 먹을 것인지 모른 채 정신없이 한참 산을 오르다 보니 앞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신선봉 정상이다. 앞서 올라온 산님들은 벌써 아침식사를 다 마치고 떠날 채비를 갖추고 서성거린다. 나보다 조금 일찍 올라 온 별동대는 산 정상에 있는 경주 손씨 무덤 앞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 서늘한 날씨에 모두 긴팔 옷에 점퍼까지 입었는데도 오래 앉아 있기가 불편하다며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썰물 빠지듯 산정에서 내려간다. 뒤에 남은 별동대원들은 모처럼 맞은 장날처럼 이것 저것 챙겨 아침을 먹고 뒷 편 구석에 세워진 정상석 앞에서 개인 인증사진을 찍어가며 여유를 부려본다. (정상석에는 산의 높이가 1,185 미터라고 써 있으나 잘못 기재한 것 같다. 저 아래 곰넘이재의 높이가 1,150 미터이니 이 산은 1,280 미터가 맞는 것 같다.)
새벽공기를 마시고 아침을 먹는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
그 산을 우리도 다녀간다.
신선봉에서 백두대간길은 우측으로 꺽인다. 그리고 급격한 내리막이다. 길에 깔려 있는 잔돌에 미그러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한없이 떨어진다. 산행을 하다 보면 오르막에는 숨이 차고 내리막길은 걷기에 편하지만 이렇게 끝없이 떨어지는 내리막길을 만나면 무조건 좋아할 일이 아니다. 외상으로 내주는 내리막은 없어 곧 이어 반드시 오르막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리막이 끝나고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에 작은 휴식처가 있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평평하게 땅이 다듬어져 있고 커다란 벤치가 세워져 있다. 차돌배기다. 이 곳은 조선 6대 단종이 영월 철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경상도 양반들이 태백산을 넘어 남몰래 단종을 만나러 갈 때 택했던 가장 짧으면서 은밀한 통로였다고 한다. 차돌이 많아 차돌배기라고 불렀다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차돌은 보이지 않는다.
차돌배기는 경상도 양반들이 올라왔다는 석문동(石門洞)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이다. 정감록에 나오는 조선 10승지 중 하나인 봉화 춘양면이 있는 곳으로 가상적인 이상향으로 불린다.
깃대배기봉 ( 1,370 m)
등로는 차돌배기에서 계속 오르막이다. 급격한 오르막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오르는 길이 은근히 진을 빼게 한다.
여전히 나무그늘이 우거진 길 가 습한 낙엽속에 <나도수정초>가 눈에 띈다. 마치 버섯처럼 녹색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풀이다. 스스로 탄소동화작용을 해서 에너지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썩은 낙엽에 들어있는 양분을 흡수하여 성장하는 노루발과 나도수정초속 다년생 부생식물이다.
<나도수정초>
<속단(續斷)>군락이 여기저기 이어진다. 어린 잎의 모양이 참배암차즈기와 비슷하였으나 나중에 확인해 보니 속단이다. 검단산 등 서울 근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지만 여느 꽃과 마찬가지로 시기를 잘 맞춰야 만날 수 있다. 7월에 분홍빛이 도는 흰색의 꽃을 피우는데 작년에는 만복대에서 하산하는 길에 다 져버린 꽃을 몇 송이 보았다. 달리 접골초(接骨草)라고도 부르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뿌리를 한약재로 쓰는데 근육과 부러진 뼈를 이어주고 요통과 하지동통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참배암차즈기로 착각했던 <속단(續斷)>
<우산나물>도 넓은 잎 사이로 안테나처럼 긴 꽃대를 세우고 그 끝에 연분홍 빛 꽃망울이 맺혀 있다.
<우산나물>꽃대
<조록싸리>는 이제 바야흐로 꽃이 필 준비를 마쳤다. 다음주 산행때는 산 중턱까지 조록싸리 붉은 꽃이 만발해 있을 것 같다.
<조록싸리> 꽃 봉오리
<노루발>꽃도 이제 피기 시작한다. 겨울 눈 속에서도 푸른 잎을 유지하는 노루발은 녹수초(鹿壽草)라 하여 관절통 류머티즘, 신장염 등에 효과가 있다.
<노루발>꽃봉오리
얼마전까지 흰꽃을 나부끼던 <눈개승마>도 이제 꽃이 지고 이삭이 익어간다. 꽃은 일단 피고나서 열매를 맺으면 반은 성공한 셈이다. 열매가 잘 익어서 땅에 안착할 때까지 또 정성을 쏱아야 한다. 마치 뱃속에 잉태한 아기가 무사히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만사 조심하는 산모처럼 말이다.
<눈개승마>
오전 10시 25분 오르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깃대배기봉( 1,370 m) 정상석이 서 있었다. 옛날 일제시대 토지일제조사 때 측량표시를 위해 이곳에 깃대를 꽂아 놓아 깃대배기봉이라 부르던 것이 산봉우리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 곳은 태백산 부쇠봉으로 가는 백두대간길과 그 반대쪽으로는 두리봉으로 이어지는 삼거리이다. 여기서부터 산길은 제법 편평하게 이어지지만 일반적으로 봉우리라 불리는 것처럼 내리막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깃대배기봉에서 이어지는 약 10리 정도는 평원을 이루는데 이를 천령의 평원이라 불렀으며 이 곳에서는 오랫동안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며 살았다 한다.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아 곡식으로는 조와 보리 농사만 지을 수 있었다. 이 구간에는 큰 나무는 눈에 띄지 않고 물푸레나무와 거제수나무 신갈나무 등 그리 크지 않은 교목이 숲 그늘을 만들어 준다.
깃대배기봉 표지석이 또 하나 있다. 이번에는 산림청에서 세운 것인데 비슷한 크기로 앞서 있던 표지석에서 약 1 km 쯤 떨어져 있다.
깃대배기봉에서 부쇠봉에 이르는 약 4 km 중 초반은 그야말로 평원처럼 평탄한 길이다. 산림청에서 만든건지 오래 전에 설치한 나무데크도 보인다. 낙엽이 쌓인 길가에 <범꼬리>, <감자난초>, <냉초>, <큰뱀무> 그리고 <꽃쥐손이> 등 여름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범꼬리>
<냉초>
<감자난초>
<큰뱀무>
<꽃쥐손이>
이미 지고 있는 <물참대>와 아직 전성기에 있는 듯 활짝 핀 꽃대에 봉오리도 맺혀 있는 <말발도리>꽃도 보인다.
지고 있는 <물참대>
피고 있는 <말발도리>꽃
부쇠봉 ( 1,546.5 m)
평원이 끝나고 또 다시 은근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산길을 걷다 보면 마치 인생의 여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게 오르다 보면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주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한참 가다 보면 어느새 지나온 길을 뒤돌아볼 수 있는 조망처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된다. 평탄한 길에서는 걸음을 빨리하고 오르막에서는 더욱 힘을 내어 걷는 것은 쉼없이 달려온 우리 세대의 여정과 닮았다. 우리는 아직도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마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멈추면 넘어질까 걱정하면서 한없이 달려간다.
천제단 1.1 km 부쇠봉 0.4 km 남은 갈림길이다. 시간에 쫒기고 산행에 지친 큰 형님이 부쇠봉을 우회하여 천제단으로 가겠다고 하신다. 어쩌면 남은 평생 이 곳에 다시 못 올지도 모른다며 부쇠봉쪽으로 가시자고 하니 겨우 따라오신다. 평지나 내리막에서는 번개처럼 빠른 준족(駿足)이신데 오르막에서는 조금 힘이 부치시나 보다.
조금 오르다 보니 앞서 간 별동대원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앞이 확 트인 조망처다. 새벽 2시 30분 도래기재를 출발하여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조망이 트이지 않더니 이 곳에서야 비로소 모든 산줄기가 발 아래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문수봉을 거쳐 소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다. “저~기 저 쪽에 보이는게 다음주에 갈 청옥산이에요 “ 전에 21기를 따라 두타 청옥을 다녀왔던 김종진 님이 아스라이 먼 곳 산줄기들을 가리킨다. 오르내림이 심하고 산행거리가 만만치 않다는 말 속에 은근히 무게가 실려 있다.
조망처에 선 별동대원들
문수봉 방향
청옥산이 보이나요?
부쇠봉(1,546.5 m)은 태백산 장군봉으로 가는 길과 문수봉 방향으로 가는 길의 갈림길에 있다. 그러나 도래기재에서 오는 길이거나 아니면 장군봉에서 문수봉으로 가는 길이거나 이 부쇠봉을 지나치기 쉽상이다. 나도 몇 년 전 겨울 화방재에서 장군봉을 거쳐 문수봉으로 가는 길에 부쇠봉을 보고 가려고 일부러 찾아 들어왔으나 눈길에 자세한 길 안내가 없어 그 입구에서 되돌아간적이 있다.
부쇠봉(1,546.5 m) 정상
환단고기에 의하면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 이름이 부소(扶疏)로서 응가(鷹加 – 지금으로 치면 국방장관)벼슬을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단군신을 모시는 천제단이 있는 산 아래에 있는 이 봉우리 이름을 부소봉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부쇠봉 주변을 비롯하여 문수봉으로 가는 갈림길 주변에는 햇볕을 받아 자라는 야생화가 가득하다. <백당나무>꽃이 활짝 피었다. <누른종덩굴>, <냉초>, 해당화를 닮은 <인가목> 그리고 진한 향기를 풍겨주는 <정향나무>꽃이 산길을 아름답게 수 놓는다. <붓꽃>은 아직 덜 핀건지 꽃대가 빵빵하게 부풀어 있으나 아직 꽃은 보이지 않는다. 산길은 헬기장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천제단으로 향한다.
<백당나무>
<누른종덩굴>
<냉초>
<붓꽃>
<인가목>
<함박꽃나무>
<정향나무>
민족의 영산 태백산(太白山 1,567 m )
마음은 급한데 볼 것이 많아 발걸음이 지체된다. 태백산의 상징이 되어버린 주목(朱木)이 여기저기서 주목(注目)을 끈다. 나무의 색이 붉어서 주목이라 부르는데 단단하여 쉽게 썩지 않고 벌레가 끼지 않으며 향(香)이 있는 나무라 예전부터 고관대작의 관(棺)을 짜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수명이 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목은 강원도 정선군 두위봉에 있는데 이 나무는 삼국시대에 태어나 현재 1400 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한다고 한다. 태백산에는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언뜻 보아도 산신령만큼이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무들이 무척 많이 보인다. 그 나무의 나이에 비하면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한 인간들이 그 앞을 지나다니며 끌어안고 올라서고 또 비스듬이 기댄 채 친한 척하고 물러간다. 주목은 수 백 년 그 자리에 서 있던 그 자세 그대로 또 다시 수 백 년을 오고 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이다.
주목(朱木)
태백산은 우리나라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누가 꼭 지적해서 영산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높고 큰 이 산에서 마치 어머니 품처럼 아늑함을 느끼고 할아버지처럼 엄한 모습을 보면서 그 감정을 공유해왔다는 뜻일게다. 이미 신라 7대 일성왕 5년 ( 138년) 10월에 태백산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도 태백산은 신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제사를 모셨다 한다.
부쇠봉에서 얼마 안가서 오르막을 잠시 치고 올라가면 첫 번째 제단(祭壇)을 만난다. 세 기의 천제단 중 가장 규모도 작고 완성도도 떨어지는 하단(下壇)이다.
하단(下壇)
또 얼마쯤 올라가니 이번에는 한자로 태백산(太白山)이라 쓴 이름돌이 나타난다. 산 봉우리가 넓고 밋밋하여 무척 커보이는지라 거석으로 세운 이름돌이 아담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름돌 바로 위에 천제단(天祭壇)이 있다. 아주 거대한 돌 제단이다. 언제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규모의 돌탑을 쌓으려면 한 개인의 수고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다. 둘레가 27.5 미터 높이가 2.4 좌우폭이 7.36 그리고 전후 폭이 8.26 미터로 약간의 타원형태를 띠고 있다. 제단의 윗쪽은 둥그런 원 형태로 하늘을 의미하며 아래쪽은 장방형으로 땅을 뜻하는 원천지방(圓天地方)의 형태로 세워졌다 한다. 제단에는 붉은 색으로 “한배검”이라 쓰인 신주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크고 밝은 임검” 즉 단군왕검을 의미한다고 한다.
태백산(太白山) 영봉의 천제단(天祭壇)
시간에 쫒기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는데 소흘함이 없다. 하얀 뭉게구름이 산그리메 위로 평화롭게 떠 있다. 바람은 시원하고 기분은 청량하다. 태백산 최고봉인 장군봉 ( 1,567 미터) 앞에서 별동대 단체 사진을 찍고 그 위에 세워진 마지막 제단에 올라 맥주와 콜라를 차려놓고 제를 올렸다. 모두 마음속으로 자신의 소원을 빌었으니 무엇을 해달라고 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소원이 다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큰 형님이 제를 지내고 난 맥주를 음복하라 하여 무알콜 맥주인줄 알고 받아서 벌컥 마셨다. 작은 갈증이 있었던지 차가운 맥주가 지나간 목줄기가 시원진다. 또 한 모금을 마셔버린다. 또 시원한 기운이 뱃속까지 전해진다.
하얀 뭉게구름이 산그리메 위로 평화롭게 떠 있다.
태백산 최고봉인 장군봉 ( 1,567 미터) 앞에 선 별동대
사길령을 거쳐 화방재로
앞서 내려간 사람들은 벌써 날머리에 가까이 간 모양이다. 별동대장이 전화를 받고 나서 갑자기 바빠졌다. 이제 볼 것 다 보았으니 더 이상 사진도 찍지 말고 서둘러 하산하기로 다짐한다. 약 4 km 남았다. 오르막 없는 내리막이니 빠르면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산길은 돌계단과 잔돌이 깔린 흙길이다. 가는 중간에도 고목이 된 주목 군락이 펼쳐지지만 우리는 한 눈 팔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늙어서 속이 비어 있는 나무에 시멘트 같은 물질로 채워 넣은 것이 좀 흉해보인다.
바쁜 발길에도 꽃들이 눈길에 채인다. 샛노란 <큰뱀무>꽃이 높은 산에 피어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노랑빛이 아주 진하다. 다른데는 벌써 다 져버리고 없는 <층층나무>꽃이 아직도 피어 있다. 큰 산의 식생은 저 낮은 곳에 비해 한 템포 느리게 살아간다.
<층층나무>꽃
<뽕잎피나무>
<참기생풀>
<두루미풀> 열매
<나비나물>
당집
<괴불주머니>
유일사(唯一寺) 갈림길을 지나고 왼쪽에 <참기생꽃>과 <두루미풀>군락이 보인다. 참기생꽃은 꽃이 지고 씨앗이 익어갈 참이고 두루미풀은 열매가 보석처럼 달려 있다. 아직 제대로 크지 않아 아직 쌀알만 하지만 더운 여름 동안 팥알만큼 커질 것이다.
내가 꽃에 눈이 팔려 있는 동안 앞서거니 뒷서거니 동행하던 별동대원들이 어느새 시야에서 벗어나고 난 또 부지런히 그들을 쫒는다. 졸립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게 눈꺼풀이라고 하더니 정말 걸어가면서도 눈이 감긴다. 산정에서 복을 받을 요량으로 음복한 맥주가 지금 눈꺼풀에 쌓이는 모양이다. 스틱을 단단히 잡고 앞으로 나갈라 치면 두 발이 허공을 밟는다.
이 길은 삼 년 전 겨울에 한 번 걸었던 길이다. 2016년 마지막 날 의미있는 산행을 해보겠다고 찾은 곳이 이 태백산이었다. 그 때는 화방재에서 출발해 장군봉과 영봉을 거쳐 문수봉과 소문수봉을 지나 당골로 하산했었다. 눈이 하얗게 쌓인 길을 걸어 오를 때는 힘들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눈에 힘을 주어본다.
<꿩의다리>꽃이 하얀 솜털처럼 보풀어 올라온다. 이미 다 져버리고 없을 줄 알았던 <나비나물>도 연자주색 꽃이 피어 있다. 재빨리 눈길을 주고 다시 거두어버린다. 정말 졸립다. 주변의 숲을 둘러본다. 피로에 지친 눈은 녹색 숲을 보면 좋아진다는데 술에 취한 눈에는 소용이 없는가보다.
이제나 저제나 나타나길 고대하던 당집이 보인다. 옛날 경상도와 강원도를 오가던 보부상들이 안전한 행선을 위해 제사를 모셨다는 당집이다. 요즘도 매년 4월 15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당집을 지났으니 날머리까지는 금방이다. 잔 모래가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걷는다.
그리고 사길령 백두대간 표지석이 나타난다. 내 기억속에 사길령은 화방재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있다. 먼저 내려간 큰 형님이 걱정되는지 어디냐며 전화한다. 오르막 길에는 힘들어 하더니 계속 이어지는 내리막길에서는 축지법을 쓰듯 번개처럼 빠르다.
사길령 백두대간 표지석
사길령은 고려시대 새로 개척한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교통로이다. 새로 낸 길이라 하여 ‘새길’이라 불렀으며 그 길이 지나는 고개라 하여 새길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새길령’이 되었고 그것이 변하여 오늘날 이름인 사길령으로 부른다고 한다.
오후 3시 똬약볕이 내리쬐는 화방재 고개마루에 내려섰다. 천제단을 출발한지 1시간 50분 지났다. 일찍 내려온 회원들은 벌써 가까운데 잡아 놓은 식당으로 이동했고 뒤이어 나보다 조금 일찍 하산한 회원님들은 버스에 탄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술 때문이다. 맥주 한 잔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주취(酒臭)를 핑계삼아 면죄부를 청한다는데 나도 술핑게를 대 본다.
산장식당 산나물 비빔밥
새벽 2시 30분에 시작하여 오후 3시까지 걸었으니 12시간 30분 걸린 셈이다. 자유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10시간도 걸리지 않을 산행거리를 참 오래도 걸었다. 힘은 들지 않지만 잠이 쏱아질 것 같다. 가까운 산장 식당으로 가는 동안 잠시 눈을 붙여 본다.
식당 앞에 있는 수도에서 웃통을 벗고 등목을 해 본다.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든다. 식당의 텃밭에서 가꾼 취나물과 곰취와 너무 흡사한 곤달비 등 나물을 넣어 만든 비빔밥이 빈 뱃속에 쏜살같이 들어간다. 공기밥 하나 추가하여 우거지 된장국과 곤달비 나물로 뚝딱 먹어 치우고 커피 한 잔 디저트로 마시고 나니 비로소 산행 일정이 끝난 기분이다.
오후 4시에 식당을 출발하여 3시간 만인 오후 7시 양재역에 도착했다. 고속도로 상에서 소나기를 만났으나 오늘 하루 산행중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으니 참 복받은 산행이었다. 낮의 길이가 일년중 제일 길다는 하짓날 햇살이 아직도 서울 하늘에 가득하다.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 주말 연속극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딸’을 시청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