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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난해 구절
1,십일조에 대하여 (신명기 12:6-19; 14:22-29; 26:12-15)
십일조에 대한 모세 율법의 규정은 레위기 27:30-33과 민수기 18장, 그리고 신명기 12, 14, 26장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이 기록들은 서로 어긋나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종류의 십일조를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의견도 많고 오해도 많다. 그러면 이 기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십일조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선 레위기 27:30-33에 십일조에 대하여 짤막하게 언급된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자. 레위기의 부록인 27장은 전체적으로 서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서원물로서는 사람 (1-8절) 자신을 비롯, 생축 (9-13절), 집 (14-15절), 밭 (16-25절) 등을 들고 있다. 27장 26절 이하 33절까지에서는 세 가지 특별한 조항을 들고 있다. 첫째, 생축의 첫새끼인데, 그것은 이미 여호와의 것이므로 서원물로 쓰일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26-27절). 둘째로, ‘아주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거룩하기 때문에, 사람, 물건 할 것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아주 바친 것’이란 표현은 히브리어 ‘헤렘 (םרח)’을 번역한 것으로서, 그 존재를 죽이거나 불에 살라서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치기 직전에 그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헤렘’으로 선언한다 (여호수아 6:17-19). 셋째가 십일조에 대한 규정이다. 본문에서는 ‘땅의 소산과 가축중 그 십분일이 여호와의 성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농사와 목축을 주업으로 하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땅의 소산과 가축이 그 전체 소득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이들의 전체 소득 십분일이 자기 것임을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신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 27장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사람이 서원하여 바친 것들과 더불어, 첫 태생, 헤렘, 십일조는 하나님께 거룩한 것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건드릴 수 없음을 배우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천지의 ‘주재’ (=소유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14:19 참조) 이처럼 우리에게 주신 것의 일부만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심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에 대한 자신의 최소한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행위라고 간주할 수 있다.
선지자 말라기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라기 3:8-9)고 외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주장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십일조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대한 좋은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일조가 자신의 것인만큼 그것을 자신의 의사대로 쓰실 권리가 있다. 민수기 18장은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자신의 소유인 십일조를 어떻게 쓰셨는지에 대하여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바치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라고 명령하셨다 (18:21). 레위인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하나님의 회막에서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특별히 성막에서의 봉사를 위하여 구별된 지파이다. 그들에게는 특정한 기업이 분배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위한 생업 활동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수기 18장에서는 전체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돌아갈 댓가 (=응식, 應食)를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성물 (聖物)이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반면, 십일조만은 레위인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레위인은 그 십일조중의 십일조를 다시 제사장에게 드려야 한다.
민수기 18장에서는 백성에게 십일조를 내라는 명령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바친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문제를 다룰 뿐이다. 따라서 민수기 18장에 언급된 십일조가 자원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법적 명령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거제 (擧祭)로 드리는 십일조’ (24절)라는 표현을 통하여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는 자원에 의하여 바쳐졌을 기능성이 크다 (‘거제’는 히브리어로 ‘트루마’인데, 문자적으로 ‘들어 올린 것’이란 뜻이며, 본문에서는 ‘헌물’의 뜻으로 쓰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십일조를 강요하지 아니하시고, 자원하여 헌물로 바치는 것을 원하심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모아진 십일조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성막에서 수종드는 레위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하나님의 이러한 뜻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아니하자, 뜻있는 지도자들은 강권력을 발동하여 이를 실천에 옮긴다. 히스기야왕은 대대적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칭찬을 들은 왕이다.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를 재정비하고, 그들의 봉사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성에게 명을 내려, 그들의 댓가를 주도록 하였다 (역대하 31:4-19). 포로 이후 시대의 느헤미야 역시 이 일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아니 함으로써 종교상 문제가 발생하자, 백성과 언약을 세우고 십일조를 거두어 레위인에게 주도록 하였다 (느헤미야 10:37-38; 12:44-47).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예배의 중심지가 설정된 후에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광야에서와는 달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 (12:5, 11, 14, 18, 21, 26; 14:23, 24, 25 등 신명기 여러 곳에 이 표현이 나옴)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며,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또 그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즐길 것 등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제사장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거룩하다고 확산하여 가르쳐 주며,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을 일반 백성도 먹을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 준다.
십일조에 관한 신명기의 기록은 12:6-19; 14:22-27; 14:28-29; 26:12-15에 산재하여 있다. 레위기 27장에서 모든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어서 거룩하다고 규정한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다른 여러 제물과 더불어 십일조 역시 각자가 좋은 뜻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민수기 18장에서 헌물로 바쳐진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일한 댓가로 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신명기에서는 십일조를 떼는 사람들더러 레위인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최소한의 소유권인 십일조를 특정인에게만 돌리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백성이 그 혜택을 누리고 즐길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과 상치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일한 댓가로 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취소된 것도 아니다.
신명기에서는 소득의 십분일을 떼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두 가지 경우로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로 각 사람이 매년 자기 소득의 십분일을 떼어 가지고,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으로 가서 거기서 그 십일조를 가족과 더불어 먹으며,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면서 이를 즐기는 것이다. 이때 자기 동네의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레위인에게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이 먹고 누릴 수 있는 십일조에 대한 사항은 신명기 14:22-27과 12:6-19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 개역 성경의 번역상 오류를 하나 지적하고 넘어 가고자 한다. 14:22에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는 “십일조를 떼어”라고 수정하여야 한다. 여기서 필자가 ‘떼어’라고 번역한 낱말은 ‘열’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를 동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동사는 십분일을 ‘떼다’ 또는 ’갈라내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십분일을 드린다는 의미는 결코 내포되어 있지 않다.
둘째로 14:28-29과 26:12-15의 기록에 의하면, 매 3년 째의 십일조는 각자가 이를 떼어 성문에 내놓고,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을 위하여 이처럼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이렇게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신다.
첫 번 째의 경우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이를 시행하여야 한다. 자기 동네나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조건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 다시 말해서 성전이 서는 곳으로 십일조를 가져와 거기서 이를 먹고 즐기라 함은 다분히 예배적 요소를 의미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27:30). 그래서 “십일조를 먹으며.....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명기 14:23)고 말할 수 있기도 하다.
현대 우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상황은 신명기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과 가장 비슷하다고 하겠다. 비록 그것이 예루살렘의 성전이라는 특정의 장소 개념에 있지는 않지만,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 복음 2:20-22 참조)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창세기 14장과 28장, 그리고 레위기 27장에서 가르치는 원리 원칙을 근거로 하고, 신명기에서 가르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을 토대로 하여 현대 교회의 십일조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주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되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통하여 자신의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늘은 과거와는 달리 산업의 형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경제 유통 구조가 돈이라고 하는 하나의 상징에 의존하기 때문에, 성경의 원칙에 근거를 두되 기술적으로 약간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농업 사회에서 한 해에 한 차례 십일조를 뗀 데 반하여, 우리는 모든 소득에 대하여 매월 또는 매주 단위로 십일조를 뗄 수 있으며, 그리고 물품이 아닌 돈으로 십일조를 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예배할 때에 미리 준비한 십일조를 거두어, 그 돈으로 교회가 다 같이 즐기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며, 자기 생업을 갖지 아니하고 하나님 일에 전념하는 이들을 보살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교회가 다 같이 즐기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함은, 교회의 제반 예배 및 전도 활동 및 애찬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운용될 십일조는 매 3년 중 2년으로 하기 보다는, 현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모든 십일조 중 삼분이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매 3년 째의 십일조를 다 떼어 가난한 이와 외로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으니, 다시 오늘의 실정에 맞게, 모든 십일조 중 삼분일을 구제 사업과 교회 일꾼들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구제 사업에 있어서 믿는 이웃이 첫 번 째 대상이 됨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한 가지 덧붙여서, 오늘 교회의 일꾼 (소위 말하는 교역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레위인이 객과 고아 및 과부와 더불어 보살핌의 대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많은 수가 구제 사업의 명목은 있되 실제 운용면에 있어서 매우 빈약하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십일조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쓰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가난한 자와 외로운 자들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참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십일조를 떼어 이 일을 행하였사오니, 원컨대 하늘에서 저희를 보시고 한국 교회에 복을 주옵소서” (신명기 26:13-15 참조).
참고적으로 십일조에 대한 성경 최초의 기록은 창세기 14장에 담겨 있다.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으로 개명)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를 영접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된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다운 말투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이 축복의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노략품 중 좋은 것을 골라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는 제1호 선민 (選民)인 것이다. 그리고 왕 겸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시편 110편; 히브리서 7장 참조).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분이다. 그러나 그는 선택 이상의 자격을 갖추신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하신 제사장,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또 그에게 자기 모든 이득의 십분의 일을 감사함으로 드린다. 이것은 모세 율법 이전의 사건으로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는 율법의 요구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감사의 표현인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주재’라고 번역된 낱말은 히브리어로 ‘코네’인데, ‘얻다’ 또는 ‘구입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나’에서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명사 ‘코네’의 일반적인 뜻은 ‘사는 이’, ‘구입자’, ‘소유주’가 된다. 그래서 ‘천지의 코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다 소유하신 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소유한다고 할 때,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멜기세덱은 이 진리를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아브라함은 그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렸을 것이다. 그의 깨달음과 깨달은 진리의 실천은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물품은 네가 취하라’는 소돔왕의 제의를 깨끗이 거절한다. 불의한 인간을 통하여 부자가 되기보다는,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천지의 코네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불의한 자의 재물을 결코 취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었다.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진정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올바른 재물관이 세워질 것이다. 그는 모든 소득에 대하여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감사의 표시를 할 줄 아는 사람이요, 재물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는 일을 멀리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십일조를 통하여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선포하는 것이다.
2. 성경 기자의 설명문구 (신명기 13장)
본래 히브리어 성경 사본이나 인쇄본에는 인용을 나타내는 어떠한 부호도 없고, 또 간단한 추가 설명이나 덧붙이는 말등을 위하여 필요한 괄호 같은 부호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번역자이나 주석가들에게 혼동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실이 대부분의 경우 별 큰 문제를 초래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그릇된 번역이나 해석을 통하여 번역본만으로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더 큰 혼란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 예를 신명기 13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명기 13장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라고 꾀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 (1-5절), ‘가족이나 친구’ (6-11절), ‘성읍’ (12-18절)이 있으면 그들을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신명기 13장중 2, 6-7, 13절에 대한 우리말 개역 성경 본문을 아래에 옮겨보기로 하자. 잘 알다시피 개역 성경에는 문장 부호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2절)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 (6-7절)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 (13절)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직접 인용문과 간접 인용문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설명 문구가 아무런 표시없이 삽입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위의 개역 본문에 직접 인용문 부호를 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독자들 중에는 ‘이르기를’ 다음부터가 꾀는 자들의 말에 해당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표준 새번역도 2절에서는 이런 견해를 반영하였으나, 6-7절과 13절에서는 약간 변화를 가미하여 번역을 시도하였다. 사실 이러한 난점은 성경 기자가 설명하고자 덧붙인 말에 해당하는 문구만을 괄호 안에 묶어두면 쉽게 해결된다. 2절에서는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을, 6-7절에서는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과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을, 그리고 13절에서는 ‘너희가 알지 못하던’을 괄호로 묶어두면 이 본문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3. 가나안 땅에서의 유월절 (신명기 16:1-8)
유월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특별히 이집트 땅에서 지킨 최초의 유월절에 대한 설명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설교자를 위한 성경 연구」 1996년 9월호에 실린 필자의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24-36쪽을 참조할 것). 출애굽기 12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회중은 정월 10일에 각 사람이 양이나 염소 중에서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을 취하여, 그달 14일까지 간직하였다가 그날 해질 때에 그 양을 잡는다. 그 피는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못하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한다. 그 고기 중에서 남은 것은 아침까지 남겨 두지 못하고 만일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태워버려야 한다. 이것이 이집트에서 지킨 최초의 유월절이다.
신명기 16:1-8 역시 유월절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유월절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지킨 최초의 유월절 행사와는 내용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이집트에서는 각 사람의 집에서 지켰으나,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서는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2, 5-7절)으로 제한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진 이후, 그곳이 바로 유일한 유월절 행사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절에 ‘양과 소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라’고 한 구절에 대하여 ‘양이나 염소’만을 잡도록 한 출애굽기의 유월절과의 차이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이는 하나의 오해로 보인다. 여기 ‘양’ (ןא, 쬰)과 ‘소’ (רקב, 바카르)는 각기 ‘양이나 염소’ 그리고 ‘모든 소떼’에 대한 통칭이다 (「그 말씀」 1995년 10월호에 실린 필자의 “신약성경 번역상의 몇 가지 문제점”과 「그 말씀」 1996년 10월호에 실린 필자의 “레위기 난해 구절”을 참조할 것). 3절에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것’에 해당하는 2절의 ‘양과 소’는 1월 14일 밤에 먹는 유월절 어린 양의 고기 외에도 무교절 기간 1주일 내내 먹는 고기를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다. 1월 14일 밤에 먹는 ‘유월절 희생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지시 (4절; 출애굽기 12:10; 23:18; 34:25 참조) 또한 이 사실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신명기 16장에서는 유월절 희생물로서 양이나 염소 외에 소를 추가시킨 것이 아니다. 2절의 ‘양과 소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라’는 문구 중에서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만이 아니라, 한 주간 계속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유월절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민수기 28:16-25에서 언급한 바 번제와 속죄제 등이 아니라, 역대하 30:22-24; 35:7-8에 언급한 바 화목제물을 가리키는 듯하다.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몫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도, 바치는 사람에게도 각기 몫이 있어서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제사이다. 이에 반하여 4절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과 5-7절 (“유월절 제사를.....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드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에서는 특별히 1월 14일 밤에 먹는 고기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 때 지킨 유월절 행사는 신명기 16:2-3의 기록을 반영해준다고 하겠다: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통달한 모든 레위 사람에게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일천과 양 칠천을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일천과 양 일만을 회중에게 주었으며 성결케 한 제사장도 많았는지라” (역대하 30:22-24). “요시야가 그 모인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과 수소 삼천을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 방백들도 즐거이 희생을 드려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었고 하나님의 전을 주장하는 자 힐기야와 스가랴와 여히엘은 제사장들에게 양 이천 육백과 수소 삼백을 유월절 제물로 주었고” (역대하 35:7-8). 더욱이 역대하 35:7과 35:8에서 ‘유월절 제물’에 해당하는 낱말이 단수형 חספ (‘페쌐’)이 아닌 복수형 םיחספ (‘페쌐힘’)으로 기록된 사실도 신명기 16:2의 ‘유월절’을 1월 14일 저녁만이 아니라, 한 주간 계속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유월절로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신명기 16:1-8의 기록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다음 문제로는 7절의 וּ (‘우비샬타’)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 나오는 동사 לשׁב (‘바샬’)은 출애굽기 12:9에서 ‘삶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개역과 표준 새번역). 만약 신명기 16:7에서도 이 피엘형 동사를 ‘삶다’는 뜻으로 이해할 경우 출애굽기 12:9에 기록된 지시와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신명기 16:7에 기록된 지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삶아 먹고.....”) 의견 충돌을 보이게 된다.
히브리어 동사 לשׁב (‘바샬’)은 ‘익다’는 뜻을 가진다. 과일이나 곡식이 ‘익는’ (또는, ‘익은’) 것을 가리킬 때도 이 동사가 쓰이지만 (창세기 40:10; 요엘 3:13), 보통은 음식이 ‘익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따라서 이 동사의 피엘형 ל (‘비셸’)은 일반적으로 ‘(음식을) 익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출애굽기 12:9의 경우 ‘물에 익히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물에 삶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역대하 35:13에서는 이 동사가 ‘불에’라는 문구와 결합되어 있어서 (שׁאב חספה ולשׁביו, ‘와예바슐루 하페쌐 바에쉬’) 자연히 ‘불에 삶다’로는 번역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개역과 표준 새번역 모두 이를 “유월절 양을 불에 굽고”로 번역하였다. 이처럼 역대하 35:13은 출애굽기 12:9와 신명기 16:7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음을 잘 입증해준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유월절과 관련하여 신명기 16:7과 출애굽기 12:9에 다 같이 등장하는 히브리어 동사 לשׁב (‘바샬’)을 ‘익히다’라는 뜻으로 번역할 때 어떠한 문제의 소지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명기 16:7에서 이 동사를 개역과 표준 새번역 다같이 ‘(고기를) 구워(서)’로 번역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이유도 없다.
김경래 교수/“그 말씀” 199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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