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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30일 일요일(토요무박) 백두대간 36 회차 두타산 청옥산
자유인 산악회
백두대간 36회차 : 댓재 – 햇댓등 – 통골재 – 두타산 – 박달재 – 청옥산 – 연칠성령 – 망군대 -고적대 – 갈미봉 – 이기령 – 상월산 – 원방재 – 백복령
산행거리 : 약 30 km 산행시간 : 약 14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572528
거리 30.9 km
소요 시간 14h 07m 56s
이동 시간 12h 52m 22s
휴식 시간 1h 15m 34s
평균 속도 2.4 km/h
최고점 1,372 m
총 획득고도 1,452 m
난이도 보통
백두대간 (白頭大幹) 36 – 두타산 청옥산
양산박
댓재에서 두타 청옥 긴 산줄기
옛날 스님 수련하던 그 마음으로
구비구비 산길따라 걸어 보았네
타는 목과 고픈 배는 중생의 고통인데
과일 한 쪽 물 한 방울 부처님의 자비로써
상월산 백복령도 무사종주 감읍일세
댓재
지난 주 태백산을 다녀오고 긴 구간을 훌쩍 뛰어 강원도 삼척으로 넘어왔다. 여름철 해가 긴 동안에 걷기에 적당한 구간을 정하여 9번 연속 무박(無泊)으로 진행하는데 오늘이 그 두 번째다.
들머리는 ‘댓재’다. 강원도 삼척시에 속하며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고개다. 주변에 산죽(山竹)이 많아 댓재라 부른다는 유래가 흥미롭다. 소백산을 넘는 죽령(竹嶺)의 유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벼과에 속하는 대나무가 빨리 자라면서 속이 비어 가벼운데다 곧고 길어서 옛날부터 쓰임새가 많았던 만큼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중의 인기가 높았을 것이다. 따뜻한 기온에서만 자라는 대나무가 소백산을 넘어 태백산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염원에서 지어진 이름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양재역을 11시 20분에 서울을 출발한 지 3시간 30분 만인 오전 2시 50분 산행들머리인 댓재에 도착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자는 둥 마는 둥 설익은 잠에서 깨어 차에서 내리니 서늘한 기운이 다가온다. 제주도와 남부지방 그리고 지리산 일대에는 많은 장맛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으나 우리가 산행하는 강원도에는 비소식이 없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하늘에는 별이 반짝인다.
댓재 이름돌 앞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고 한대장님의 지휘에 따라 두 팀으로 나누었다. 이제까지 걸었던 대간길 중에서도 가장 길고 힘든 구간이라는 말에 지난 주부터 어느 정도 걱정을 했었는데 한대장님도 버스 안에서부터 고심하는 표정이 엿보였다. 내게 백두대간을 추천해주었던 수색대 박민기 씨도 힘든 산행이 될거라며 물을 많이 준비하라고 당부한다. 헤드랜턴에 가려진 대원들의 표정은 웃고 있지만 그 표정 뒤에는 오늘 산행에 대한 걱정이 조금씩 묻어 있다.
햇대는 새로 싹이 튼 대나무라는 뜻이다.
한대장님의 인솔하에 일부 회원님들이 산행거리를 조금 단축하는 코스로 따라 나서고 나머지 회원들은 김용호 선두대장을 따라 정규코스로 출발했다. 정규코스팀은 햇댓등을 거쳐 왼쪽으로 75도 꺽인 등로를 따라 그다지 높지 않은 고개를 두 개 넘어서 통골재를 지나 두타산으로 가고 다른 팀은 통골재에서 대간길에 합류하여 두타산을 오른다. 어둠 속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이라 이렇게 단축코스를 가는 것도 괜챦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힘든 산행을 앞두고 체력 안배를 염두에 둔 한대장님의 고심의 흔적이다.
밤새 비가 조금 내렸는지 나뭇잎에 물기가 흥건하다. 수풀을 헤치고 가는 옷자락에 물기가 번지지만 오히려 시원해서 좋다. 지난 주 태백산 산행 때는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었는데 오늘 산행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절한 기온에서 시작한다.
통골재 (木桶嶺 980 m)를 지나 두타산으로 오르는 비탈길을 걷는데 여명이 밝아 오더니 나무숲 사이로 뻘건 기운이 비쳐진다. 무박산행의 묘미 중 하나는 아침 일출을 보는 것이다. 날이 좋으면 겹겹이 펼쳐진 산마루금 위로 또 흐린 날에는 구름을 뚫고 올라오는 해를 보는 것은 평소에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니 이처럼 무박산행을 할 때 볼 수 있기를 소망하나 오늘은 시간이 맞지 않아 나무사이로 비치는 일출에 아쉬움을 달랜다.
통골재를 지나 두타산에 오르는 길에 일출을 맞았다.
두타산에 오르기 전 조망처가 있어 바위에 올라서니 청옥산을 포함한 한 쪽면이 시원하게 트였는데 안개가 산을 휩싸고 있어 산의 면면을 볼 수는 없었다.
5시 30분 두타산(頭陀山 1,352 m)에 도착했다. 댓재를 출발한지 6.2 km 를 2시간 40분만에 걸었으니 제법 힘 좀 쓴 느낌이다. 하지가 지난지 1주일 밖에 안되었으니 아직 날이 길다. 새벽 시간인데도 날이 훤하다. 정상 한 가운데 오래된 무덤이 있고 그 주변으로 정상석이 2 개 세워져 있다. 밤에 누군가 야영을 했는지 넓은 공터에 텐트가 쳐져 있다. 이 두타산 정상에서 무릉계곡으로 하산하는 코스도 있다.
우리는 농담삼아 골때리는 산(頭打山)이라며 오늘 산행의 고난을 빗대어 말한다. 두타(頭陀)는 원래 불교의 수행자세 또는 수행방법을 말하는데 이 두타산은 삼척의 주민들에게 정신적인 의지가 되는 산이라 한다.
두타산 정상석 앞에서 단체 인증샷
열 두 가지 수행방법(十二頭陀)을 보면
1 . 재아란약처(在阿蘭若處) 마을과 떨어진 산림에서 산다. – 우리나라도 절은 깊은 산중에 있다.
2 . 상행걸식(常行乞食) 언제나 탁발걸식에 의해서 생활한다. – 옛날에는 탁발 다니는 중들이 많았는데….
3 . 차제걸식(次第乞食) 걸식을 하는데 있어서 집의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 복 받을 기회를 균등하게…
4 . 수일식법(受一食法) 하루 한 끼만 먹는다. – 요즘 스님들과는 좀 거리가 있는듯
5 . 절량식(節量食) 많이 먹지 않도록 양을 절약한다. –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6 . 중후부득음장(中後不得飮漿) 중식 이후에는 음료(국물)를 마시지 않는다. – 어쩌면 저녁에 술마시지 말라는 뜻인가 ?
7 . 착폐납의(着弊納依) 폐물인 누더기로 만든 옷을 입는다. – 이것도 옛말이다. 요즘 스님들 누더기 안입는다.
8 . 단삼의(但三依) 세 개 옷밖에는 갖지 않는다.
9 . 총간주(塚間住) 무덤 사이에서 산다. – 처음엔 머리가 쭈뼛거리겠지만…
10. 수하지(樹下止) 나무 아래에서 산다. – 집을 짓지 말고 풍찬노숙하라는 말씀?
11. 노지좌(露地坐) 한 곳에 앉아 지낸다. – 어디 짱박혀서 게으름부리지 말라는 뜻인가
12. 단좌불와( 但坐不臥) 언제나 앉아 있고 드러눕지 않는다. – 이건 80년대 경찰이 고문하던 방법 같다. 잠 안재우기…
이를 오래 실천한 고승들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온다.
두타산 정상의 비박팀
오늘은 산행을 서둘러야 한다. 버스에서 한문희 총대장님이 아주 심각한 어조로 한 말씀이 있어서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당부말씀 드리겠습니다. 산행 구간이 길기 때문에 자칫하면 서울 귀가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대중교통이 끊긴 시간에 도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부득이 이기령에서 컷오프를 시행하겠습니다. 오후 1시 이후에 이기령에 도착하는 사람은……” 처음 걷는 코스라서 지도만 봐서는 이기령이 얼마나 먼 곳인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최대한 속도를 내서 걷자고 서로 다짐한다.
6시 30분 박달재에 도착했다. 두타산에서 약 2 km 거리를 50분 걸려서 걸었으니 과히 늦은 편은 아니다. 눈에 띄는 꽃도 많지 않은데다 아주 간헐적으로 조망이 터지니 걸음이 지체되지 않는다. 산길 오른쪽은 무릉계곡이다. 간간이 열리는 조망처에서 바라보면 멀리 아름다운 산군들이 운해를 덮어쓰고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큰 형님이 쉬어가자며 배낭에서 시원하게 냉장보관된 살구를 한 봉지 꺼내 놓는다. 살구를 먹고 씨를 주변에 던지며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래본다. 이 박달재에서도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 계곡의 지세가 아름다워 중국의 전설적인 무릉계곡 이름을 붙였다는데 언젠가 꼭 찾아보고 싶은 곳 중 하나다.
간간이 터지는 아름다운 조망을 보며
그늘진 숲길을 걸어
박달재에 도착하여 쉬고 있는데
뒤쳐졌던 선두팀이 어느 새 우리를 따라와 앞지른다. 선두만 달리는 장군님 오랜만이세요.
두타산 아래에서 뒤에 쳐져 있던 선두팀이 뒤 늦게 따라오고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청옥산 아래까지 동행한다. 대간길은 능선을 타지 않고 오른쪽으로 산 허리를 타고 달린다. 편안한 흙길이라 걸음이 제법 빨라지더니 길이 오른쪽으로 비탈길을 만나자 조금씩 느려진다. 날씨는 선선한데다 가끔씩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니 최상의 조건이다. 빡세게 오르던 산길이 학등(鶴嶝)에서 잠시 수그러들고 오른쪽으로 완만한 오르막이 청옥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숙은노루오줌> - 노루오줌과 달리 옆으로 수그리고 있다.
<꿩의다리>
<터리풀> - 꽃모양이 털이개처럼 생겼다 해서
학의 등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그래도 꽃구경을 하면서 가다 보면 - <꽃쥐손이> 꽃이 다 지고 씨앗이 익어간다.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 <고광나무> 꽃 이제 마지막일게다.
마침내 학등에 올라 타니 청옥산이 코앞이다.
아침을 먹기로 한 청옥산(靑玉山 1,403.7 m)에 이르기 전부터 배에서 신호가 온다. 무박산행을 할 때는 전날 밤 늦게 저녁을 먹는데도 아침 먹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배가 고파오는 걸 보면 생활 습관이라는 것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7시 20분 마침내 청옥산 정상에 도착하니 먼저 올라온 회원님들 헬기장에 자리를 잡고 식사 삼매경에 빠져 있다. 마치 식사도 전투인양 빨리 먹고 또 움직여야 하는게 백두대간 산행이다.
청옥산(靑玉山
1,403.7 m) 정상에서 아침을 먹고
늦게 남은 별동대 대원들 인증사진을 남긴다.
정상 주변 경관은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고 풀밭에 <미역줄나무>가 무성하다.
올라올 때 힘들었던 만큼 내리막에 보상받는다. 한없이 내라간다. 곧 이어 연칠성령(連七星嶺 1,184 m ) 라 쓰인 이정표가 나온다. 이 곳에서도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 코스가 있다. 빼어난 여러 봉우리(七星)가 이어져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 하는데 예전에는 고개가 험하여 난출령(難出嶺)이라 불렀다 한다.
짙은 숲속길로 연칠성령에서 조금 더 진행하니 풀섶에 <초롱꽃>이 예쁘게 피어 있다. 원예종인 <섬초롱>꽃보다 꽃이 길고 점이 없는 것이 청순해 보인다. <큰뱀무>꽃도 여러 개가 보인다.
앞서 가던 별동대원들이 산길에서 벗어나 오른쪽 바위로 오른다. 커다란 바위 전망대다. 바위에는 누군가가 쌓아 놓은 작은 돌탑이 서 있고 바위틈에는 <돌양지>와 <바위채송화>가 조화롭게 자라고 있다. 날이 흐린탓에 바위채송화는 꽃잎을 꼭 다물고 있다.
연칠성령을 지나
길가에 난 꽃을 보면서 - < 기린초 >
망군대(望君臺)에 오른다. 안개로 인해 조망은 트이지 않으나 이 또한 비경(秘境)이다.
<돌양지꽃>도 야무지게 피어 있고
<바위채송화>도 많이 자란다.
망군대 돌탑을 뒤로 하고 고적대로 향한다.
이 바위 전망대를 망군대(望君臺)라고 부른다. 광해군 때 재상을 지냈던 택상 이식(李植)이 은퇴하여 중봉산 단교암에 머물고 있을 때 한양땅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가 그리워했던 임금은 아직 권좌에 오르지 않은 인조일 터이다. 이식은 인조에게 경제 등 개인교습을 시킨 적이 있어 어린 인조에 대한 정이 남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식은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다시 정계복귀하여 중요한 직책을 두루 맡기도 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김상헌과 함게 척화파로서 끝까지 청에 맞설 것을 주장했다가 청나라로 잡혀갔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한다.
망군대에서는 사방이 트여 멋진 조망을 개대했으나 짙게 흐르는 안개로 인해 제대로 된 풍광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멋진 조망은 망군대에 이어 고적대(高積臺 1,353.9 m)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곳은 댓재에서 백복령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길에서 가장 멋진 조망처일 것이다.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암봉을 오르는 스릴도 느끼면서 바람 앞에 선다. 검푸른 산 위로 하얀 안개가 바람에 흘러간다. 무릉계곡 쪽 산줄기가 부챗살 모양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지나온 청옥산과 두타산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시원한 바람과 조망에 눈이 팔려 탄성을 지르며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데 큰 형님이 배낭을 뒤지더니 수박을 한 통 꺼낸다. 세상에 빈 배낭을 메고 와도 쉽지 않은 산길인데 마실 물하며 아침밥과 이렇게 수박까지 짊어지고 오시다니. 큼지막한 깍두기 모양으로 잘라서 락&락에 담아온 수박은 아직도 이가 시릴 만큼 차갑다. 어쩌면 고적대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맛난 수박은 평생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각자 인증사진을 찍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남녀 한쌍이 올라오길래 부탁하여 별동대 단체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우리와 같이 새벽 3시에 백복령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우리와 비슷한 속도로 달려왔나보다. 서울에서 온 자유인 산악회라고 소개하니 전에 낙동정맥 팀을 만난 인연이 있다면서 반가와 한다.
<초롱꽃>
빨간불 신호에 모두 뒤를 돌아본다.
<바위떡풀>이 자라고
야생 <오미자>도 열려 있는 암봉을 오른다.
고마운 산객에게 부탁하여 전체 인증사진도 남긴다.
수박 한 통을 둘레 메고 고적대에 오르신 큰 형님
웃고 즐기는 것은 잠깐이다. 다시 컷오프를 상기하며 서둘러 고적대를 떠난다. 오전 9시 15분이고 이기령까지는 계속 내리막이니 오후 1시까지 도착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남은 여정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으니 가급적 빨리 걸어야 한다. 고적대에서 또 다시 거꾸러지듯 내리막 길이 이어진다.
길가에는 꽃이 져버린 <눈개승마>가 푸짐하게 자라고 있고 앞서 가던 정구진 님이 <박새>꽃을 발견하여 사진에 담아 본다. 지난 봄 설악산에서 갓 피어난 꽃을 보았던 <나도옥잠화>가 신기한 모습으로 열매를 맺고 있다. 진한 녹색 잎이 넓다랗게 땅에 붙어 있고 그 잎 사이로 길게 꽃대가 올라왔는데 그 끝에 안테나처럼 벌어진 가지에 열매가 달려 있다. 나도옥잠화 군락은 이 길로 한참 이어지는 것이 이른 봄 꽃이 필 때 오면 멋지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눈개승마> 이삭이 익어가고
<박새꽃>이 피고
<나도옥잠화> 열매도 여름과 함께 익어간다.
시루떡 바위에서 조금 내려가는데 앞서가던 사람들이 탄성을 지른다. 다가 가 보니 계곡 너머 우람한 바위 봉우리가 계곡쪽으로 절벽을 만들고 펼쳐져 있다. 그 암봉 뒤로도 비슷한 암릉이 이어지는데 전체적으로 빼어난 절경(絶境)이다. 발 아래 목책 너머는 천길 낭떨어지다. 언뜻 생각에 대간길이 저 암릉으로 이어질 것이라 여기고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를 떴으나 아쉽게도 백두대간은 그 암릉을 살짝 왼쪽으로 빗겨간다.
무릉계곡 사원터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 산길은 능선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빗겨간다. 아마도 능선길은 너무 위험해서 안전한 아랫쪽으로 산길이 난 모양이다. 두어번 오른쪽 낭떨어지에 가까이 길이 어어지는데 그 때마다 우리는 짜릿한 맛에 피로를 씻어낸다. 발밑은 말 그대로 천길 깍아지른 절벽이고 건너편 암봉은 날카롭게 위로 솟아 있는데 그 사이 사이 <분비나무>가 자라나는 풍경은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기분이다. 게다가 아스라이 산 안개가 여백을 만들어준다. 멀리 우리가 지나온 청옥산과 두타산이 이어지는 큰 능선길이 조망된다.
눈에 담고 남는 것은 부지런히 사진기에 담아야 한다. 하나라도 흘릴까 염려하며 눈으로 보이는 느낌 그대로 담아가려 애를 써 보지만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일어나고 또 다른 그리움으로 싹이 튼다. 저 잿빛 바위를 덮고 있는 초록빛 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은 신의 손으로 빚어낸 작품이다.
갈미봉으로 가는 능선길
바위절벽 뒤로 청옥산이 보인다.
사원터로 내려갈 수 있는 삼거리를 지나고
아름다운 풍광이 이어진다.
지나온 두타산과 청옥산
갈미봉(葛尾峰 1,280 m)은 완만한 오르막 끝에 서 있다. 볏가리, 노적가리에서 ‘가리’는 꼭지가 뭉툭하게 생긴 모양이다. ‘가리’가 ‘갈’로 바뀌고 그 가리의 끝이라는 의미로 ‘갈미’라 부르는데 그 뜻은 산 봉우리 꼭대기가 뭉툭하게 올라와 있다는 것이라 한다. 똑 같은 산 이름이 작년 덕유산 산행 때 신풍령에서 대재가는 길에 처음으로 만나는 봉우리다. 갈미는 옛날 종이우산의 끄트머리를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라고도 한다. 갈미봉 정상은 산의 꼭대기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마 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다 오르내림이 가파르지 않은 탓이리라 생각된다. 나무 굵은 가지에 “현오와 함께 걷는 백두대간”에 대한 소개자료가 걸려 있어 눈에 띈다. 올 해 초 지리산에서 만난 이 책의 저자 권태화 님을 만난 것 같아 반가웠다.
갈미봉만 지나고 나면 이기령까지 힘든 구간은 다 지나간 셈이다. 편안한 흙길이다. 신갈나무 등 울창한 숲속에는 <처녀치마> 군락이 이어진다. 이미 꽃이 지고 열매가 벌어져 씨앗이 다 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큰 박달나무 등 낙엽활엽수가 많이 보이는 짧은 너덜길을 지난다. 나무 표면이 하얀 <자작나무>가 식재되어 있고 나무 아래에는 키 작은 싸리나무가 사람 키만큼 커 버려 잔 가지가 어깨와 팔에 감긴다. 대체적으로 완만한 내리막이다.
이기령(耳基嶺)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또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보여주는 이정표는 없다. 키 큰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간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나라 어딜 가나 소나무가 많이 있지만 이처럼 구부러지지 않고 중간에 가지도 많지 않아 재목으로 쓸만한 소나무가 넓게 분포되어 있는 곳은 드문 편이다. 그렇게 호젓한 소나무숲길을 빠져나오자 사람들 얘기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널찍한 공터에 들마루가 서너 개 놓여 있는 쉼터가 나타난다.
갈미봉 나무에 백두대간 지침서 안내문이 걸려있다. -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
갈미봉에서 인증사진을 남기고
짧은 너덜길도 지나고
<자작나무> 조림숲도 지나
고도가 낮아진 솔숲을 지난다.
이기령(耳基嶺 810 m)에 12시에 도착했다. 총대장님이 예고한 컷오프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대장님 표정을 보니 입꼬리가 아래로 쳐져 있고 눈은 먼 데를 향한다. 선두팀이 30분 전에 출발했다면서 별동대는 여기서 중간탈출해야 한단다. 여기서 백봉령까지 10 km 남았으니 평균 속도 시속 2 km 를 잡으면 오후 5시쯤 하산하고 식당으로 이동하여 식사하고 서울로 가면 대중교통이 끊겨서 어려움이 초래된다는 설명이다. 난감했다. 그럼 컷오프 시간을 1시로 공표한 데 대한 근거는 없는 것인가. 전체적으로 별동대 행선이 느린 것은 맞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하려고 무진 애를 써서 예고한 시간보다 한 시간쯤 일찍 왔는데도 중간탈출하라고 하니 납득이 안간다.
만일 오늘 이 구간을 스킵한다면 언제 또 땜빵하러 와야 하는데 그 보다는 무리해서라도 완주를 해야겠다는 판단이 선다. 최대한 지체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걷겠다고 양해를 대장님께 구했다. 중간에 식수를 보충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면서도 급한 마음에 아직 남은 물 한 병을 가지고 백봉령으로 출발했다. 큰 형님과 현구 대장은 남아서 다른 회원님들과 중간탈출 하기로 했고 나를 포함한 네 명이 재빨리 나무 숲 속으로 난 산길로 뛰어 들었다.
이기령은 이별의 기로인가.
이기령(耳基嶺)이란 이름은 이 고개 아래 삼척시에 있는 귀터골에서 유래한다. 귀터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예전에 이 곳에 구리(銅)광산이 있어서 구리터라고 부르던 것이 ‘ㄹ’음이 탈락하여 ‘구이’가 되었고 다시 ‘귀’로 바뀌어 지금처럼 ‘귀터’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귀이(耳) 터기(基) 즉 이기(耳基)로 쓴 것이라고 한다. 구리터 -> 구이터 -> 귀터 – 이기 이런 변천과정을 겪었다고 하는데 사실관계를 고증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 동해시 쪽은 석회암지대로 유명한데 이처럼 지명이 될 만큼 구리광산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더구나 구리 -> 구이 변화는 다른 예를 찾기 어렵다.
이기령은 작은 습지를 형성하고 있어 야생화가 풍부하다. <엉겅퀴>
<흰꿀풀>과
<꿀풀>이 함께 섞여 피어 있다.
- 사진 수가 제한되어 2편으로 이어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