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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 부도-개성 경선원
보각국사 일연 탑비 - 군위 인각사
무학대사 자초 부도- 양주 회암사지
경주 용장사지 삼층석탑
한용운 동상-홍성 (빌린 사진)
☪ 명승열전(名僧列傳)
도올 김용옥의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를 읽으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생겨 이 책을 빌렸는지 모르겠다. 재야사학자 이이화(李離和)선생의 저술로 지난 3월 ‘불광출판사’에서 펴낸 책이다. 저자는 1937년 대구에서 유학자 이달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와 대둔산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고, 청년기에는 민족문화추진회·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근무하였고, 그 후에 『역사비평』이라는 잡지 편집인으로 일하면서 한국사연구에도 힘썼다.
서원대 석좌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원광대에서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불교신문』과『불광』에 불교관련 글을 쓰면서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평등·평화·인권을 신장하고 ‘중생제도’라는 실천운동도 전개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사 이야기(22권)」,「인물로 읽는 한국사(10권)」,「한권으로 읽는 한국사」,「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전봉준 혁명의 기록」「허균의 생각」,「위대한 봄을 만났다」,「민란의 시대」,「이야기 한국불교사」등이 있다.
「명승열전」이 책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승 17명을 선정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선정기준과 그 이유에 대해 ‘첫째, 불교사상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기본적 사상과 행적을 중심으로, 둘째, 대상자들이 시대정신에 투철했는지 스님으로서 중생제도와 불교 대중화에 헌신했는지, 셋째, 현실에 맞서 개혁을 이루고자 했는지, 참불교를 구현하려 했는지, 모순된 정치에 맞서 개혁을 기치로 내건 인물이었는지를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행각을 벌리면서도 궁극으로는 부처에 귀의한 승려도 있으나 그들 모두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라고 저자 나름의 선정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선정 고승은 ‘민중의 삶 가운데로 파고든 한국불교의 대표 승려 원효(元曉), 화엄세계를 일깨운 귀족 출신 승려 의상(義湘), 풍수지리로 고려 건국을 예언한 신비의 승려 도선(道詵), 천태사상으로 평등관을 구현한 왕자출신 승려 의천(義天), 신채호가 인정한 자주, 진보파 승려 묘청(妙淸), 타락의 길 위에 핀 정혜결사 보조(普照), 민족사의 시원을 밝힌 고려국사 일연(一然), 고려 개혁정치의 선봉장 변조(遍照), 한 톨 티끌도 없는 조선건국의 조력자 무학(無學), 부처에 귀의한 슬픈 충신 설잠(雪岑), 국난에 떨쳐 일어난 선사 서산(西山), 조일전쟁의 일급 공로자 사명(四溟), 조선의 근대화를 꿈꾼 개화승 천호(淺湖),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여여 했던 선풍 경허(鏡虛), 일제 치하의 그늘 아래 피어난 대중불교 백용성(白龍城), 친일 불교에 남긴 할! 송만공(宋滿空), 침묵하지 않았던 님 한용운(韓龍雲)’등으로 모두 한두 번쯤 이름을 들어본 인물들이기에 반갑기도 하고 그들의 행적을 통해 무엇을 배우게 될지 미리 생각해 보게 된다.
(1) 원효(617∼686)는 경산시 자인읍 밤골에서 태어났다. 그곳 제석사 앞 불땅고개에는 그의 탄생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아버지 설담날은 관등이 11위쯤 되는 지방하급 귀족이었고, 어머니가 만삭이 되어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원효를 낳았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도 밤나무 골(栗谷)이라고 부른다. 출가 전 원효의 이름은 서당(誓幢) 혹은 신당(新幢)이었는데 서당은 신라시대 군사조직의 단위를 나타내는 신라 고유용어다. 따라서 그의 아명이 군사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뒷날 화랑도에 든 것과 관계가 있다. 청년시절 김유신을 따라서 고구려 정벌에 나서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보기도 하고, 또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에 대해서도 배웠을 것이다. 원효는 총각 때 출가했다는 설, 29세 때에 출가했다는 설이 있는데 다른 고승들처럼 어린나이에 출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효’라는 법명에 대해 『삼국유사』는 “스스로 원효라 일컬었는데 아마도 처음 불일(佛日-부처의 자비가 모든 중생에 널리 빠짐없이 비친다)이 빛난다는 뜻이다.”라고 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첫새벽을 뜻한다.’고 했고, 지금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원효는 어느 스승에게 수계를 받았는지 분명치 않은데 이는 그가 유명한 스승에게 배우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으로 어느 학자는 “원효의 시대는 교종의 전성기라 할 정도로 불교교학이 꽃을 피웠다. 그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중국에서 대거 수입되고 있던 수많은 불교경전을 섭렵하여 계율과 선정과 지혜에 정통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신라사람들은 그가 만인(萬人)을 대적할 만하다고 여겼다. 그는 요란하지 않게 출가하였지만 어느새 탁월한 능력으로 불교계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송곳은 주머니 속에 넣는다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다.(囊中之錐)” - 남동신의 영원한 새벽 중에서 -
여덟 살이 아래인 도반(道伴)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나섰다가 서해 당항진(黨項津-송고승전에는 당주계)에서 비바람을 피해 하룻밤 토굴에 들어가 자다가 새벽녘에 목이 말라 주위에 있던 바가지 물을 들이켰는데 날이 새고 보니 바가지가 해골이었다는 것과 그 일로 인해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萬物唯心造)’는 것을 깨달고 유학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원효는 신라고승 가운데 유학을 가지 않은 거의 유일한 승려다. 그가 분향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疎」를 찬술했는데 그가 화엄종의 창시자로 꼽히는 이유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는 경전이 들어 왔는데 강설할 승려가 없었다. 처음에 대안(大安)에게 부탁하자 대안은 원효를 추천했다. 어쩔 수 없이 원효는 왕궁으로 불려가게 되었고, 3권의 강설을 완성하고는 다음날 왕과 대중 1천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법회가 열렸다. 그는 “예전에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적에는 비록 그 모임에 참여하지 못했으나 오늘 아침 한 개의 대들보를 놓는 곳에서는 나만이 할 수 있구나.”(천상천하 유아독존?)라고 하고는 “주관적 나와 객관적 사물, 그들은 모두 절대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삼공(三空)의 바다를 진眞이니 속俗이니 하며 대립하고 있다. 이를 모두 원융(圓融)하니 길이 그냥 즐겁다.”고도 말했다. 이런 변설과 함께 주장자를 내려치자 그 자리에 모였던 고승 대덕과 대중들 모두 부끄러워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참회하였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원효를 우러러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송고승전』*「원효전」에 “아마도 삼학(三學)인 계(戒) 정(定) 혜(慧)에 널리 통달해 신라에서 그를 일컬어 ‘뭇 사람의 맞수(萬人之敵)’라고들 말했다. 그래서 정밀한 뜻풀이가 입신의 경지에 들어감이 이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 : 송대 찬녕이 옹희 4년(987)에 완성했다. 혜교의 〈고승전〉, 도선의〈속고승전〉에 이어, 찬집된 것으로〈삼속고승전 三續高僧傳〉이라고도 불린다. 역경·의해·습선·명률·호법·감통·유신·독송·흥복·잡과 등 10과로 분류되어 있으며, 정전 533인과 부록 130인이 실려 있다.
원효가 명성이 높아지자 요석공주와의 파행으로 설총을 낳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듯하나(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한승원의 소설『원효』를 주목한다. 신라사회에서 이름이 높아진 것은 맞지만 원효는 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았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경험하기도 했던 그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이치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에게 고구려와 백제정벌을 공공연히 반대하고 다녔다. 그래서 왕이 그를 불러들여 요즘말로 ‘가택연금’을 시킨 것인데, 이를 가엽게 여긴 김춘추의 딸 요석(搖石은 과부였다)이 원효를 시중들었고 그러다 보니 어찌어찌하여 하룻밤 동침이 이루어져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가설 말이다.
이제 원효에 대해 『삼국유사』의 찬술자 일연의 찬시와 원효를 부처님 같이 받들며, 고려불교를 크게 일으킨 의천이 경주 분향사를 찾아 원효의 영전에 올린 제문을 보도록 하자.
“소뿔타고 앉아 처음 삼매경의 종이 말이 열고
멋대로 춤추는 자리 끝내 온 거리의 바람 나부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 자고 갔고
문 닫혀 있는 분향사에 고개가 돌려 있네.”『삼국유사』「원효불기」
“해동 교주 원효 보살 여러 갈래의 수많은 불교 가르침을 회합했으며 한 시대 지극히 공평한 논의를 터득했다. 제자인 저는 어릴 때부터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려 여러 어진 선지자를 두루 살펴 배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원효 같은 어진 스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태각국사 문집」
(2) 의상(625∼702)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원효가 스스로 유학을 포기하였는데도 혼자 유학길에 올랐다가 돌아와서는 부석사 등 많은 절을 창건하고, 불교를 널리 포교하였다. 원효가 저술과 개인적인 교화활동에 힘쓴데 반해, 의상은 교단조직에 의한 교화와 제자들 교육을 중시했다. 그는 부석사에서 40일간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해 문답하고, 황복사에서〈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으며, 태백산 대로방(大盧房)에서는 〈행경십불(行境十佛)〉을 지었다.
또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90일간 3,000여 명의 제자들과 대중을 상대로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였으며, 제자들 중에 특히 뛰어난 10대 제자가 있었는데,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 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으로 당시 이들은 아성(亞聖)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범체(梵體)·도신(道身)·신림(神琳)·법융(法融)·진수(眞秀) 등도 의상의 법계(法系)를 이은 훌륭한 제자들이다. 제자들을 육성하고 사찰을 새로 건립하는 등 실천수행을 통해 화엄사상을 널리 선양하였음으로 그는 화엄학의 중흥조로 추앙받는다.
선묘낭자와 부석사 창건설화는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대략 살펴보면 “의상이 중국 적산에 머물 때 선묘(善妙)라는 낭자가 그를 흠모했는데 의상이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가려하자 따라나섰다. 그러나 의상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가 버렸다. 이에 선묘는 ‘용이 되어 그를 따라가 불법을 전하겠다.’고 하고는 바다에 빠져 용이 되었다. 의상이 돌아와 태백산 복선(福善)의 자리를 찾아 가람을 지을 때,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큰 돌이 되어 지붕위에서 떨어질 듯 날아다녀 사람들이 놀라 흩어졌다. 그때 의상이 나타나자 큰 돌이 땅바닥에 내려앉았는데 그 돌이 지금의 부석사 조사전 옆의 커다란 돌이다.”
또 부석사에는 선묘와 관련하여 ‘선묘정’이란 우물이 보존되어 있는 등 부석사 창건설화는 의상의 행적과 교묘하게 꿰어 맞춘 것이다. 『송고승전, 삼국유사』 676년 부석사가 창건되자 사람들이 골짜기를 메웠으며 문무왕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했다. 그러자 의상은 “우리 법은 평등하고 높고 낮음이 고루 같고, 귀한 이와 천한 이가 같은 가닥입니다.”고 하고 이어 “빈도는 법계를 집으로 삼아 발우를 가지고 밭갈이 하며 곡식익기를 기다립니다. 지혜로운 생명이 이 몸을 빌려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의상은 직접 밭을 가는 등 울력으로 살았는데 이를 두고 당시 화엄평등을 구현하는 참스승이라고 했다고 한다.
신라 승려들은 중국 종남산과 한국의 태백산을 화엄사상의 상징으로 받들었고, 이에 의상의 스승 지엄과 법장이 화엄학 선양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의상은 이런 뜻에 따라 부석사 외에도 해인사, 범어사, 화엄사, 갑사 등을 화엄십찰로 지정하고 화엄학 전파에 전력했다.
그가 이렇듯 많은 제자를 길르고, 많은 사찰을 창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바라거나 요구하지 않아도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귀족들을 거부했다거나 미워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이는 그에게는 하나의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불교사상가들을 두고 정면으로 반대되는 견해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접근한 사회주의 역사가들은 이들의 이론이 관념에 빠져 사회발전을 외면하고 수탈을 일삼는 지배세력에 영합해 화합과 복종을 강요하는 이념에 빠져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원효와 의상의 이론도 포함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구원과 정신문화에 크게 기여한 종교적 이념체계를 세우고 민족사상과 민족통합이념에 크게 공헌했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서 잠시 신라 고승을 돌아보면, 통도사를 창건하는 등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자장(慈藏)이 빠졌다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3) 도선(827∼898)은 베일 속의 인물이면서,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책에서도 ‘그는 과연 술승(術僧)이었을까? 아니면 혼란했던 신라 말기에 구세를 하려고 한 고승이었을까?’하고 질문하고 있다. 도선 사후 120년 후 최유청이 쓴 비명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도선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 태종무열왕 계통이라 하지만 조상에 대한 내력은 확실치 않다. 신라왕족이라고 해도 신라 말 왕족끼리 다툼이 잦은 혼란기에 득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출가하여 처음에는 지리산 화엄사에서 불법을 익혔다. 그러나 교학의 현학적(衒學的-학식의 두드러짐을 자랑하는 것)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선학(禪學-선종의 교리)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무렵 혜철(惠哲)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곡성 동리산 태안사(泰安寺)에서 개당(開堂)하자 그를 찾아 무설지설(無說之說-말이 없는 말), 무법지법(無法之法-법이 없는 법)에 대한 설법을 듣고 선을 익혔다. 뒤에 전국을 돌며 수행을 거듭하다가 백계산(白鷄山-광양) 옥룡사(玉龍寺)을 일으키고 이곳에서 묵언참선으로 35년을 보냈다. 많은 제자를 기르면서, 헌강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가서 왕을 깨우치기도 하였으나 돌아와 72세로 입적했다. 「선국국사비명병서」
도선의 스승 혜철이 누구인가를 알면 그에 대한 신비가 풀릴 수 있을 것으로 혜철은 당나라에 가서 선을 전수받고 이어 밀교(密敎)에도 깊이 빠졌다. 밀교는 비로자나불을 받들면서 보살과 신선, 무속까지도 융화·포섭하는 통합사상을 기저로 삼는데 원효의 화쟁사상(和爭思想)과 본질적으로 상통한다. 또 밀교는 땅의 정령이 호생(好生-살리기를 좋아함)하는 근본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풍수지리설과 연관이 깊다. 그래서 밀교는 수도하는 장소를 중요시하는데, 장소가 올바르면 수도가 잘 되고 효과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혜철은 당나라에서 스승 지장(智藏)에게 그의 스승 일항(一行)*의 사상을 두루 섭렵했으므로, 도선 또한 혜철로부터 이를 이어받아 공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도선은 선승이면서 밀교를 받들어 비보설(裨補說-도와서 모자람을 체움)을 내세웠던 것이다. 일항-지장-혜철 -도선으로 이어지는 융합사상을 역으로 이용하고 확대 재생산한 자들이 고려건국의 지배세력이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일을 합리화하고 고려건국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끊임없이 조작해 내는데 도선을 좋은 미끼로 삼았던 것이다.
*일항 : 당나라시대 밀교의 개조로, 측천무후가 당나라 조정을 쥐고 흔들면서 정치세력이 분열되고 혼란해지자 한나라 시대에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밀교의 지령(地靈-땅의 정령)에 결부시켰다.
“우리나라의 왕업은 어김없이 여러 부처가 보호해 주는 힘이 있었다. 선종과 교종의 절을 창건해 주지를 가려 보내어 불업(佛業)을 닦게 하라. 뒷세상의 간신들이 중들의 청탁에 따라 절을 경영하려고 다투어 빼앗는 짓을 일체 금지하라. 도선이 터 잡아 지정한 곳 외에 함부로 절을 지으면 지덕을 손상시켜 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다. 후세의 왕공과 후비들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하여 더 짓는다면 크게 근심되는 일이다. 신라 말 다투어 절을 지어 지덕을 손상시켜서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은 왕건이 도선사상에 의지해 도읍을 개경으로 옮긴 것도 모자라, 후백제에 시달린 것을 생각했는지 차령산맥 이남의 지세와 산형이 배역(背逆)하다 하여 이곳 출신을 등용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긴 훈육십조 (訓育十條) 세 번째 조항이다. 도선이 죽은 지 한참 뒤인 1150년 의종은 최유청을 불러 “선각국사는 국가의 공업이 가장 컸으므로 우리 선왕께서 받들었으나 그 행적을 문자로 전하는 게 없으니 그 비명을 지어 후세에 전하라.”고 했고, 최유청은 그의 행적을 비명에 적으면서 뒤에 이렇게 적었다. “아아, 대사의 도가 그 극에 나아감은 불조와 합치되고 행적에 나타난 것은 마치 장량(張良)*이 신神에게서 글을 받은 것과 같고, 보지(寶誌)* 대사가 앞으로 닥칠 일을 예언한 것과 같으며 일항이 술수에 정통한 것과 짝이 되리로다. 대사가 전한 음양설 몇 편은 세상에 많이 나돌고 있어 뒤에 지리를 말하는 자들이 모두 받들고 있다.”
*장량,보지 : 유방이‘나의 장자방’이라고 한 장량은 황석공(黃石公)에게서 비기를 얻어 유방의 창업을 도왔고, 보지는 술법과 예언으로 다가올 일을 맞혔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유학자 민의생, 정인지 등이 찬술한 「태조실록」2년 9월조에 “도선이 말하기를 송도에는 5백년을 도읍하고 또 480년의 터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왕씨가 망한 땅에 지금 토목공사를 일으켜 새로운 도읍지를 조성하기에 앞서 길방(吉方)에 옮겨 거쳐하소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선과 관계된 신기한 이야기는 많이 전한다. ‘옥룡사를 지을 때 그곳 연못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주민을 해코지 하는 등 방해하므로 도선이 타일렀으나 백룡 한 마리가 대항하므로 도선이 지방이로 왼쪽 눈을 멀게 해 쫓아 보냈다.’‘옥룡사는 지기가 낮아 땅 기운을 돋우려고(裨補) 동백나무를 심게 했다.’등 이런 전설을 증명하듯 지금도 이곳은 동백나무가 무성하다. 현재 옥룡사터를 발굴하기는 했으나 복원하지 않고, 우물터를 보존하고 있으며, 도선의 부도와 탑비는 새로 조성한 것이다. 이곳에는 많은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도선이 창건한 월출산 도갑사에는 도선의 화상을 모신 ‘국사전’등 관련 유적이 많다.
(4) 의천(1055∼1101)이 태어날 당시 사찰은 타락의 조짐에 빠져 승려들은 수행보다 재산 모으는 일에 마음을 쏟았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원찰에 불법으로 토지를 기탁하여 국가조세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런 불교타락을 잘 알고 있던 문종(文宗)이 넷째아들 어린 후(煦)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고 이를 바로 잡게 했다. 이렇게 해서 고려불교를 짊어진 의천이 등장하고 그의 출가는 고려불교사의 새로운 전기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의천이 성장해 더 많은 공부를 하겠다며 몰래 송나라로 떠나자, 문종의 뒤를 이은 형 신종과 숙종은 어머니가 아들을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송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의천을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는 역사는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러나 의천은 송나라에서 보고들은 문화를 고려에 접목하려했는데 화폐사용이 그중의 하나다. 의천의 건의를 받은 숙종은 1097년 12월 다음과 같은 분부를 내리기에 이른다.
“예전부터 우리나라는 풍속이 순박했는데 문종시대에 이르러 예악과 문물이 성대했다. 짐이 선왕의 과업을 계승해 앞으로 민간이 크게 이익이 되는 돈 만드는 벼슬아치를 두고서 백성으로 하여금 돈을 통용하게 하겠노라.”「고려사」식화지.
이에 따라 주전도감을 두고 고려지형의 모습을 한 은병(銀甁-활구)를 만든데 이어 ‘해동통보’‘삼한통보’를 찍어 냈다. 의천은 우리나라의 화폐발달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그의 이런 노력은 단순히 승려로서 정치권력에 개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재정과 중생제도를 위한 어떤 방편(方便)이 아닌가 여겨진다.
의천은 몸을 돌보지 않고 공부에 정진해서인지 위장병을 앓았는데 결국 47세 나이에 입적했다. 화장한 뒤에 개성 북쪽 8㎞ 지점, 개풍군 오관산 기슭에 있는 영통사(靈通寺) 부도에 안치했다. 이후 영통사는 의천과 관련하여 명찰로 여겨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 영통사는 919년 왕건의 원력으로 세워진 뒤에 승복원(承福院)이라 하여 조상들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다가, 1027년 절을 짓고 ‘영통사’라고 했다.
우리나라 ‘천태종’의 개산조이기도 한 의천은 이름도 송나라 희종의 이름을 따랐고,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법호도 대웅처럼 부처를 뜻하지만 숙종이 고집해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그가 열반한 뒤에 그가 추구했던 원융사상(圓融思想)은 빛을 바랬고, 불교의 타락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승려와 신도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결사운동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 왕실의 권위를 이용해서라도 조직적인 개혁운동을 만들고 실현해 내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개성의 영통사에는 의천의 부도가 보존되어 있는데 조각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부도 뒤에 의천의 화상을 봉안한 경선원(敬先院)이란 건물이 있고 그 앞에서 보면 영통사 경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고 한다. 폐찰이었던 이 절을 지난 2005년 한국천태종에서 기와 50만장 등 150억 원을 들여 29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언제 가 볼 수가 있을지?
(5) 묘청(?∼1135)에 대하여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전〉이라는 논문에서 ‘묘청은 자주국을 건설하려했다. 대위국 (大爲國) 건설운동은 자주·진보파 묘청과 사대·보수파 김부식 등과의 싸움에서 비롯되었고, 묘청이 실패하여 우리나라가 사대로 전락했다.’고 주장하면서 묘청을 웅대한 민족적 스케일을 지닌 인물로 서술했다.
묘청은 서경(평양)출신으로, 고려가 건국된 지 1백년이 지나자 개경에 뿌리를 박고 있던 특권층인 문벌들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리고 발호했다. 그런 특권 문벌 중에 이자겸(李資謙)이 있었다. 이자겸은 예종의 장인으로 높은 벼슬과 많은 재산을 긁어모았다. 예종이 죽자 외손자(인종)를 왕위에 앉히고, 두 딸을 셋째, 넷째 왕비로 보냈다. 14세에 왕위에 오른 인종은 나이가 들면서 권신의 발호를 제거하고자 했다. 하지만 왕명을 받은 근신들이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이자겸은 오히려 인종을 자기 집에 감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침내 1126년(인종4) 임금은 이자겸의 심복인 탁준경(拓俊京)을 이용해 이자겸을 제거하고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모조리 거두어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서경으로 행차했는데 이때 묘청의 건의로 15조목의 유신정령(維新政令)을 발표했는데, 지방수령의 부정을 고칠 것, 의복 및 수레제도의 간소화, 관리의 축소와 급하지 않은 공사중지, 공물과 조세의 수탈금지, 강요해 곡식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는 짓과 썩은 쌀을 백성에게 주지 말 것 같은 내용이었다. 『고려사절요』
인종은 개혁정책을 서경에서 발표하고는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묘청의 건의에 귀를 기울였고, 서경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정지상의 강론도 들었다. 이에 개경의 기득권 세력인 김부식 등은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한 금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충실히 이행하라면서 묘청 일파와 맞서면서 두 세력 간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즈음 서경세력들은 여러 가지 계책을 내어 인종의 마음을 휘어잡을 방법을 쓰고 또 민심을 모으는 방법으로 더욱더 기세를 올려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는 일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읍을 옮기는 그런 큰일에는 마가 끼인다는 걸 몰랐을까? 1132년(인종10) 묘청이 서경에 궁궐을 지을 때 최홍재, 문공인 등 대신급 벼슬아치 서너 명을 불러 세우고, 장군 4명에게는 갑옷을 입혀 칼을 차게 하여 사방에 세우고, 군사 440명에게는 창과 횃불을 들게 하고는 자신은 한 가운데 서서 흰삼줄을 당기며 술법을 펼치고는 이렇게 외쳤다.
“이는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다. 이를 선사 도선이 강정화에게 전했고 강정화가 나에게 전했다. 내가 늙으면 백수한에게 전하겠지만 여러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려사』열전-묘청
‘태일옥장보법’의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보법은 곧 ‘걸음 걷는 법’이라 하여 축지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묘청의 술법을 믿었던 인종이 어느 봄날 묘청의 권유에 따라 밖으로 행차했다가 모진 비바람을 만나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생겼는데 난처해진 묘청은 “내가 일찍이 이날 비바람이 불 걸 알고서 우사와 풍백을 달래며 임금께서 행차하실 것이니 비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는데 이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매우 가증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우연한 일로 인해 인종은 묘청의 술수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때 서경의 원로와 벼슬아치들은 임금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황제로 칭하고 나라의 연호를 정함)과 금나라 정벌을 건의 하면서 완전한 서경천도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위기를 느낀 사대파들은 서경파의 이런 요구를 집요하게 반박하고 나섰고, 심지어 묘청을 죽이라고까지 했다. 임금은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난 뒤로 계속 재앙이 따르고 묘청 등이 이적을 말하나 속임수가 있음을 간파해 서경천도를 미루기에 이르렀다. 묘청은 절박한 처지에 놓이자 대동강 물에 떡 기름을 흘려 찬란한 빛을 내어‘신룡(神龍)이 흘린 침’이라고 떠들면서 서경이 상서로운 곳이라고 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의심을 품은 인종은 문공인 등을 보내 알아보게 했으며 마침내 기름칠을 한 일꾼이 ‘기름이 물에 뜨면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하는 자백을 받아내고 일꾼을 시켜 물속에 들어가 기름칠한 떡을 찾아내게 했다. 이는 반대파들이 묘청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묘청, 백수한 등은 모두 요사스런 사람입니다. 그들의 말이 괴이하고 허망해 믿을게 못 됩니다. 근신인 김안, 정지상, 이중부, 환관 유개를 복심으로 삼아 여러 번 서로 천거해서 성인이라고 가리켰습니다. 또 대신도 따라 믿는 자가 있습니다. 이래도 주상께서는 의심하지 않고 바른 사람과 곧은 선비를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 바라옵건데 빨리 쫓아내소서.” 『고려사』열전-묘청
그럼에도 인종은 묘청에 대한 신임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묘청을 삼중대통(三重大統)으로 삼아 큰일을 맡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묘청이 서경으로 순행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미루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면서 ‘칭원건원’의 실행만은 깔아뭉개고 있었다. 인종이 묘청에 대한 신임이 뜨악해지자 개경파들은 묘청을 비난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다. 일이 잘 못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묘청은 결단을 내려야했다.
마침내 묘청은 1135년 1월, 추운 날 유감, 조광 등과 함께 자신이 길러두었던 서경 군대를 동원하여 개경에서 파견된 관리와 양반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고 개성으로 가는 길을 봉쇄한 뒤 개경으로 쳐 올라가려 했다. 묘청은 평양성 안에 있는 관풍전에 모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휘하 군대를 천견충의(天譴忠義)라 하여 국가 체계를 갖추고 근처 수령을 새로 임명했다. 제도와 체계는 황제국임을 나타냈으나 묘청 자신이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다만 서경을 독립구역으로 만든 것인데 시쳇말로 ‘서경 해방구’인 셈이다.
별 준비 없던 조정에 이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자 김부식 등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개경파는 시세가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했다. 인종은 반란군을 회유하고자 사자를 서경으로 보냈다. 사자가 관풍전에 도착하자 묘청 등은 내려와 절을 하고 임금의 안부를 묻고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봉서 하나를 주었는데 거기에는 “원하옵건데 주상께서는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소서. 그리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고 쓰여 있었다. 이어 묘청은 임금에게 사자를 보내 거듭 ‘서경으로 오면 민심이 진정된다.’고 했다. 개경의 신하들은 사자를 목 베라고 했지만 인종은 사자에게 술과 음식, 폐백을 하사하고 벼슬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그러나 인종은 어쩔 수 없이 김부식을 원수로 임명해 반군을 토벌하게 하면서 ‘서경의 백성들은 모두 나의 적자이니 수괴만 처단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김부식은 진상도 알아보지 않고, 개경에 와 있던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을 잡아다 목 쳐 죽였다. 이런 처사는 임금의 당부를 거스런 것이었을 뿐 아니라 전술적으로도 반란세력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김부식이 정지상보다 시작 솜씨가 달리는데 대한 앙갚음이라고 비난했다. 아무튼 토벌군은 1만의 육군 말고도 수군 4,600여명, 전함 140여척을 동원해 대동강을 압박하고 항복을 권유했다. 반란군들은 겁을 먹고 항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때 서경의 토호들이 묘청과 유암의 목을 배어 윤첨을 시켜 바치게 했다. 목을 받은 김부식은 이들의 목을 저자거리에 내걸고 목을 가져온 윤첨을 가두고는 항복을 권유했다. 하지만 남은 반란세력은 그 일을 후회하고 다시 맞서 가을까지 버텼고, 급기야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부식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분위기까지 일었다. 반란군은 이듬해 2월까지 장장 1년2개월간을 버티다가 평정되었다.
이야기처럼 너무 길었다 싶다. 그 일로 김부식은 개경으로 돌아와 후한 상을 받았고, 이일로 서경에는 벼슬아치를 줄이고 제2의 수도라는 규정은 철폐되었으며 서북 사람들은 차별정책에 시달려야 했다. 묘청은 동지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나 민중은 그를 잊지 않았다. 장애물을 제거한 개경 세력들은 이제 걸릴 것이 없었다. 더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리고 호화사치를 일삼았으며 문신들의 발호는 이자겸 못지않았다. 철저한 사대적 태도를 취했으며 민족자주의식을 깔아뭉개고 현실 안존에 급급했다. 이런 폐단으로 급기야 무신정권에 의해 그들은 몰락했다.
(6) 지눌(1158∼1210)은 근기의 동물 ‘소를 기른다.’는 의미로 스스로 지어 부른 호인 목우자(牧牛子)와 ‘온 누리에 고루 불법을 비추었다’고 고려국왕이 붙여준 보조국사(普照國師)로 더 잘 알려진 이다. 그는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몸이 약해 건강하기를 빌어주던 부모들이 ‘건강해지면 출가시키겠다고 부처님께 발원하였다.’그래서 여덟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출가했는데 그것은 그의 운명이었을까?
그의 시대는 불교가 신라 말부터 이어온 교종·선종의 마찰음이 끊이지 않았다. 불립문자와 견성성불(不立文字 見性成佛 - 글 없이 자기 본성의 깨달음으로 부처가 된다)을 표방하던 선종은 교종을 아주 낮게 보았고, 부처의 말씀을 토대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외치던 교종은 ‘선종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매도했다. 더욱이 당시는 무신정권시대로 왕과 왕실은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이런 척박한 사회를 지눌은 관심 가졌는데, 그가 승과에 합격하던 해 개경의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한 도반들에게 “법회가 끝난 뒤 마땅히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해서 뜻을 같이하는 결사(結社)를 만들자. 산 속에서 늘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닦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고, 예불과 정(定)공부를 하면서 직접 노동으로 운력(運力)하여 각각 맡은 바 소임을 이룩해 가자.”고 했고 그리고 33세 되던 해(1190) 「권수정혜결사문」을 만들어 전국 사찰로 보냈는데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삼가 들으니 땅에서 엎어진 자는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땅을 떠나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은 옳음이 있을 수 없다.”그리고 “참선과 지혜를 다 같이 공부하여 만행을 같이 닦으면 곧 어찌 헛되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어리석은 선객(禪客)과 글만을 찾아 가르치는 미친 혜자(慧子)에 비하리오.”『보조법어』
그는 참선만 일삼거나 불경만 가르치면서 각기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폐단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혜쌍수를 주장했지만 참선을 윗자리에 두어야 함을 가르쳤고, 선배인 의천은 교관겸수를 주장하면서도 교를 우선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다소 상반된 시각이다. 어쨌든 지금의 송광사인 길상사에 그가 머물 적의 분위기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사방의 승려들이 풍문을 듣고 밀려와 길상사에 꽉 들어찼다. 심지어 높은 벼슬과 처자를 버리고 누더기 옷에 얼굴을 그을리며 동료와 함께 오는 자도 있었다. 명망 있는 귀인과 선비, 서민 수백 명이 몰려왔다.”고 전한다. 「보조국사 비명」
지눌은 늘 ‘부처가 곧 마음이다.’고 설파하면서
“고통과 윤회를 면하고자 할진대 부처를 구하는 것만 같음이 없나니 만일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는 곧 이 마음이라.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겠는가? 마음은 몸속을 떠나지 않느니라. 색신은 거짓이고 삶이 있고 없어짐이 있거니와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음이라.”하였고 또한
“지금 사람이 오래 미혹되어 있어서 자신의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는다. 이렇게 되면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꺼내고 몸을 찔러 피를 내어서 경을 베끼며, 밤을 지새우고 밥을 굶으면서 그 많은 대장경을 읽거나 여러 가지 공행을 한다 해도 이는 모래알을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 헛된 수고일 뿐이다.”고도 했다. 『보조법어』「수심결」
보조가 머물면서 선교일치의 새바람을 일으킨 길상사는 그 후에 수선사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불교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본산이 되었다. 지눌은 쉰세 살 법랍(法臘) 46년 만에 수선사에서 입적했다. 죽은 뒤 그의 공적을 기려 희종은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를 내렸다. 당시 예부상서 김근수는 왕명을 받아 그의 비명을 썼는데 ‘선종의 기풍이 쇠 하다고 다시 떨치게 하고, 빛이 어두웠다가 다시 밝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가섭의 후손이며 달마의 종통을 잘 계승하고 전수한 우리 국사 바로 그분이다.’고 한 뒤에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킴이어, 달이 손가락에 있지 않네.
말씀으로 법을 설파함이어, 법이 말에 있지 않도다 …
마음으로 마음을 전함이어, 둘이 아니요.
법으로 법을 줌이어, 이치가 가지런하도다 …
대사의 몸은 둥우리에서 나온 학이요.
대사의 마음은 티끌 없는 거울이로다.”고 썼다.
길상사, 즉 수선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계산 송광사’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조선은 유교 국가를 지향해 불교가 압제를 받았음에도 선교의 대립은 예전과 달리 첨예하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흔히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는 의천과 지눌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지눌 이후 조계종은 16국사를 배출하고 조선시대에도 가장 큰 교단으로 유지되었다. 조일전쟁 때 구국의 선봉에 섰던 서산과 사명도 모두 조계종 계통이다.
그렇다면 현대는 어떤가? 비구와 대처가 갈등해 많은 싸움을 벌였고, 외래종교로 인해 불교의 교세가 위축되어 왔으나 지눌의 도맥은 불교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지눌이 살던 시대처럼 실천적 중생제도의 보살행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일신의 안락과 명리만을 추구하는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 또 선교일치나 화합정신은 볼 수 없고 싸움질하는 모습을 본다. 지눌의 ‘정혜쌍수’정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지금이다 싶다.
(7) 일연(1206∼1289)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것은 『삼국유사』뿐이다. 그러나 이 책 하나만으로도 민족문화에 큰 빛을 주고 있다. ‘단군신화, 삼국의 건국설화, 선덕왕의 일화, 에밀레종 전설, 요석공주와 원효, 선화공주와 서동, 아사달과 아사녀 그리고 무영탑 전설, 김수로와 허황옥 설화가 담긴 가락국 이야기’등등 실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원효와 같은 경산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했는데 22살 때에 승과에 수석 합격했다. 이후 전국을 돌며 수도 정진하다가 1261년 56세의 나이에 원종의 부름을 받고 거처를 강화도 선월사(禪月寺)로 옮겼다. 이때는 무신정권 후기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쥐고 있었는데 승려들은 무신정권에 저항하고 있었으나 몽골의 침략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무신정권은 고종과 왕실, 벼슬아치들을 이끌고 몽골 침략에 대한 장기전 태세를 갖추고자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고(1232년), 몽골에 의해 1236년 호국의 의지를 담아 만든 대장경이 불타버리자 다시 새기는 일에 착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장경 불사가 16만에 완성되었는데 1268년 왕명에 따라 일연은 대장경 완성을 기념하는 ‘낙성회’를 주제했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고려는 40년 동안 강화도에서 버티다가 개경으로 돌아왔다. 결사항전을 주장한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뒤에 고종이 단행한 조치였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타도된 뒤에도 최씨정권의 사병들은 ‘삼별초’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진도, 제주도로 옮겨가며 항전을 계속하다 최후를 마쳤다. 전쟁이 끝난 뒤인 1277년 일연은 72살의 나이로 운문사로 거초를 옮겼으며 많은 제자를 기르고 선풍을 일으켰다.
이 무렵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승려의 신분으로 불교에서는 외전(外傳)에도 들지 못하는 설화가 담긴 역사서를 쓴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1282년 충렬왕은 일연을 개경으로 불러 직접 궁궐에서 설법을 들었다. 이후 개경 광명사에 머물게 하고는 때때로 원나라 출신 공주를 데리고 4차례나 찾아가기도 하고, 내전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다음해 3월 충렬왕은 조정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왕들은 모두 석문(釋門) 중에 덕이 높은 스님은 왕사로 모시고 더 큰 스님은 국사로 모셨거늘 나만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운문화상은 도가 높고 덕이 커서 모든 백성들이 함께 숭앙하거늘 과인이 어찌 스님의 자애로운 은택을 크게 입지 않았으랴. 마땅히 백성들과 함께 높이 모시리라.” 「보각국사비명」
일연은 국사로 추대된 뒤에, 늙은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왕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산으로 내려갔다. 96살의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으나 작고하자 군위 인각사(麟角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조정에서 전답 100경을 내려주어 인각사를 수리하여 말년을 보내도록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술한 것을 정리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고려가 몽골에게 고난을 당한 뒤 쓴 민족서사시 2편이 전하는데 하나는,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으로 고구려 건국신화를 시 형식에 담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로 우리나라 역사를 시로 읊은 것인데, 여기에는 단군, 삼국, 발해의 역사가 들어있다. 일연은 이 두 편의 서사시를 읽었을 것이고 또 그가 태어나기 60년 전에 집필된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이 중국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단군, 발해의 역사를 빼먹고 또한 우리 고유의 민속과 불교이야기를 뺀 편파적인 기술을 보고는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한 일연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그는 지난 역사를 다시 쓰려는 의도보다는 「삼국사기」에서 빠진 사실을 새로 담고 싶어 했을지 모른다. 고기(古記-현재 전하지 않음)와 금석문을 인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향가와 견문을 수집해 넣기도 했다. ‘유사란 남겨진 이야기’라는 뜻인데 이는 정사 기술체인 기사본말체나 기전체, 편년체를 따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후세에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담으려한 노력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기술된 이야기들은 때로 합리적이지 않고 과학적 사실과도 어긋나지만 거기에는 우리민족의 정서가 담겨있다 할 것이다.
인각사에 있고 일연의 사적비에는 「삼국유사」를 저술한 사실이 빠져있다. 그만큼 당시 승려들과 조정에서도 이 책에 가치를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다만 그의 제자 혼구(混丘)가 「삼국유사」마지막 권에 ‘국존조계종가지산하인각사주지원경충조대선사일연찬(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沖照大禪師一然撰)’이라고 기록했으므로 이 책이 일연의 저술임을 알게 한다.
(8) 변조( ?∼1371)는 법명보다 속명인 ‘신돈(辛旽)’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고향사람(영산 신씨고, 신돈의 출생지인 옥천사가 있던 그곳이 나의 안태고향이기 때문에)인 그를 좋아하지만 그에 대해 너무나 객관성을 잃고 또 왜곡된 이야기가 넘치고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공민왕 5년(1356), 왕이 보우(普愚 - 호 太古)를 불렀다. 보우는 원나라에서 불법을 익힌 뒤 중국의 남쪽지방을 두루 여행하고 돌아온 승려로서 그는 곧바로 왕사로 추대되었고 그 뒤 선종, 교종의 가릴 것 없이 주지 임명권을 쥐고 흔들었다. 그는 이제 고승이라기보다 불교 행정권을 거머쥔 사판승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국가정책에도 관여하게 되었는데 ‘남경(한양)에 천도하면 36국이 조회를 올 것’이라하며 천도를 건의했다. 공민왕도 건의를 받아들여 남경에 궁궐을 지어라고 했다. 남경천도는 숙종 때도 추진하다가 중단된 것으로 처음 시도는 아니었지만, 이는 개경세력들의 뿌리를 흔드는 조치였다. 결국 이때도 중단되었고 뒤에 이성계에 의해 실현되었다.
공민왕은 그 뒤에 혜근(惠勤 - 호 懶翁)을 왕사로 받들었는데 혜근도 보우와 마찬가지로 회암사에서 수도하다가 원나라에 가서 15년 동안 인도 승려인 지공의 가르침을 받고, 중국 남방불교를 익힌 고승으로 둘 다 ‘회암사파’였다. 공민왕은 혜근을 왕사로 받들고 송광사를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 지정하며 선풍과 교풍을 크게 일으키라고 했다. 그러나 혜근은 57세 나이로 입적하고 말았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 되던 해(1365년 5월) 변조를 조정으로 불렀다. 변조는 변조광명(遍照光明)에서 따온 말로 ‘시방세계에 두루 비치어 이르지 않는 데가 없는 아미타불의 광명’을 뜻한다. 기록에는 변조가 “영산사람으로 어머니는 계성현 옥천사의 계집종이다. 어려서 이름이 변조, 자는 요공인데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라고 해서 무리들과 어울리지 못해 늘 산방에서 지냈다.”『고려사-열전』고 했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그곳 창녕의 토호로 첩인 계집종이 변조를 낳자 절간에 내팽개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니 어린 변조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넉넉히 짐작이 되는데 변조는 어린 나이에 출가했으나 다른 승려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늘 외롭게 지냈다고 한다. 장년이 되었을 때 그는 무슨 청운의 꿈을 품었다고 개경으로 올라왔고 그때까지 그 화려한 개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 줄은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능란한 변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는데, 그 중에 ‘김원명’이라는 벼슬아치도 있었다.
김원명은 변조를 ‘큰 인물’이라며 공민왕에게 추천했고, 시골의 천한 승려는 마침내 왕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문자는 몰랐으나 장부다운 기상이 있었고 남을 설득시키는 변설이 좋았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널 헤진 납의(衲衣)를 입고 다녔으며 공민왕은 그를 사부로 삼고 정사를 맡기고는 애지중지했다. 그런 뒤 그를 속명인 신돈으로 불렀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정사를 맡긴 것은 왕의 정책에 반대만하는 세력을 제거하려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후세사람인 안정복은 “왕이 신돈을 보고나서 ‘그는 도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한 출신인데다가 일가친척이 없으므로 일을 맡기면 마음 내키는 대로하여 눈치를 살피거나 거리낄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동사강목」고 보았다.
개혁에 대한 왕의 지지약조를 받아낸 신돈은 먼저 조정인사를 단행했는데 가장 먼저 최영을 조정에서 쫓아낸 일이었다. 그해 가뭄이 들고 지진이 일어났는데도 사냥을 다녔다는 신돈의 말을 듣고는 공민왕이 최영을 계림윤(鷄林尹-경주수령)으로 쫓아냈다. 신돈은 임금과 함께 여러 행사에 참석했는데 왕릉에 참배할 때, 절에서 벌이는 행사에, 격구를 구경할 때, 궁중 잔치를 벌일 때도 임금과 나란히 앉았다, 그가 나들이 할 때는 기마 100기가 따랐는데 이를 두고 벼슬아치들은 임금과 같은 행세를 한다고 지탄하고 군신의 예가 없어졌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고려는 국사·왕사에게 임금이 절을 하고 상좌에 모셨던 것으로 결코 지나친 일은 아니었다.
원로대신인 이제현이 신돈을 향해 “흉측한 사람으로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나무라자, 신돈이 받아쳤다. “유학자들은 좌주 문생이라 일컬으며 조정 안팎에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준다. 그래서 멋대로 자기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제현의 문생들은 세력을 넓혀 드디어 온 나라에 가득한 도둑이 되었다. 유학자의 해독이 이와 같다.”『고려사』열전 이제현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신돈을 헐뜯고 아래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일사불란한 일처리에 찬사를 보냈는데 석 달 만에 공민왕이 늘 불안해하던 대신들을 거의 파면 축출하고 최영과 함께 무신들마저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는 자신의 집을 갖지 않고 남의 집에 거처하며 조정에 나갈 때는 관복을 입고 머리를 길렀다. 유생출신인 이존오가 용감하게 왕에게 아뢰었다.
“전하께서 이 사람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재앙이 없게 하려면 그의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힌 뒤 관직을 빼앗아 절로 보내야 합니다.”『고려사』열전 이존오
공민왕은 곧바로 이존오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시골로 쫓아 버렸는데, 공민왕의 의지는 이처럼 단호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는 누구도 함부로 신돈을 헐뜯고 나서지 않았다. 신돈이 조정에 나온 지 1년이 지난 1366년 5월 신돈은 마침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자신이 판사로 앉아 토지와 여기에 딸린 노비제도를 바로 잡기에 이른다.
신돈의 인기가 개성의 송악산 보다 높게 치솟고 있을 무렵, 연복사에서 문수회가 열렸다. 신돈이 설법을 하다가 보니 비가 오는데도 전(殿)밖에 여자들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공민왕에게 “선남선녀들이 윗자리로 올라와 문수보살과 인연 맺기를 원합니다. 부녀자들로 하여금 전 안으로 들어와 설법을 듣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당시 부녀자들은 전 바깥에 있는 것이 의례였다. 이때 처음으로 부녀자들이 전 안으로 들어와 설법을 듣는 관례를 만들었다. 설법이 끝난 뒤 신돈이 부녀자들에게 떡과 과일을 나누어 주자 기뻐하며 “첨의(僉議-신돈의 직책)께서는 문수보살의 후신이십니다.”라며 감격해 했다. 이에 대해
“신돈이 겉으로는 공의를 빙자하고 있으나 실상은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며 무릇 천한 노비들이 양민이 되겠다고 호소한 자는 한결 같이 이를 양민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고려사절요』공민왕 14년
『고려사』는 국왕 중심으로 역사를 적었는데 「세가」에는 이 사실을 한 줄도 다루지 않고 신돈을 반역자로 다룬 열전에서만 소개했다. 신돈이 한 일은 모두 반역질로 다룬 것이다.
신돈의 과감한 개혁을 추진한 지 6년 뒤, 공민왕은 여느 통치자나 흔히 써 먹던 방식대로 어떤 신하에게 일을 맡겨 진행하다가 그 세력이 커지면 제거하는 수법을 썼다. 왕은 나이가 들면서 친히 정사를 이끌려는 욕심이 생겼고, 신돈을 역적으로 몰아 죽일 때 공민왕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늘 부녀자를 가까이함은 기운을 기르려는 것이지 감히 사통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것이 맹세한 글에 있는 것이냐? 또 성안에 화려한 집을 일곱 채나 갖고 있는데 이 역시 맹세한 글에 있는 것이냐?” 『고려사』열전 신돈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이 흐려지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또 끊임없는 모략으로 궁지에 몰렸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반역을 도모했다. 에라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반역의 음모를 꾸몄다는 것은 반대파가 꾸민 음모이다. 정황이 구체성이 없고 사리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로 ‘공민왕의 능으로 행차하는 길에 신돈이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했고, 다시 모의를 하다가 고발자에 의해 탄로나 수원으로 유배되었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공민왕이 진짜 신돈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신돈의 개혁정책으로 권력과 경제기반을 잃은 권문세가와 군사권을 쥔 무장 세력의 빗발치는 반대를 더 이상 막아낼 수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왕권의 기반마저 흔들릴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모조리 신돈에게 덮어씌웠다. 2) 신돈이 키운 신진 유학자들이 성장하여 공민왕에게 친정체제를 요구한데도 원인이 있다. 신돈은 어디까지나 불교 세력이었다. 3) 신돈은 불교개혁을 이룩하려 했으나 선종세력이 반대했다. 명망을 높던 보우를 반대파로 만든 것이 패착이었다. 4) 새롭게 등장한 명나라와의 관계도 문제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은 원·명과 양면노선을 견지한데 반해 신돈은 이에 대해 관심이 적었으므로 왕은 신진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돈은 역사에 막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키운 신진사대부들은 그가 단순한 불승이라는 이유로, 불교세력들은 선종을 견제하는 승려로 치부해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토지개혁과 과거제도 등은 조선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중생을 구도하고 실천도덕을 접목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더욱이 정치 중심인물이 되어 강력한 개혁을 이루고, 민중의 고통을 풀려고 한 실천적 승려는 우리역사에서는 다른 이를 찾을 수 없다.
특히, 신돈에 대해서는 조선을 세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인세력과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조선의 이미지 조작에 나서면서 그들이 쓴 『고려사』에서 공민왕과 신돈이 추진한 모든 정책을 왜곡하고 공민왕의 후임자 우왕(모니노)을 쫓아내고, 아홉 살짜리 창왕을 올린 뒤 핍박하다가 1년 만에 다시 쫓아낸 일을 그럴 듯하게 꾸며냈는데 구실은 우왕과 창왕이 모두 공민왕 계통이 아니라 신돈의 혈통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방법이 너무 치졸하다 싶은데, 훗날 정도전도 이런 조작의 희생물이 된 것이 역사다.
(9) 무학(1327∼1405)은 호號이고, 불명은 자초自招, 성은 박씨다. 삼기군(三岐郡-합천 삼가)에서 태어났다.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을 것으로 보이고, 여덟 살 때 출가하여 용문산 혜명에게 불법을 배웠다. 그가 참선하고 있을 때 마침 불이 났는데도 허구아비처럼 꼼작도 하지 않고 정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여느 중들과는 다름을 알았다고 한다. 이후 진주 길상사,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 정진했다.
1353년 북경에 갔을 때 그곳에 있던 인도승려 지공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먼저 원나라에 와 있던 나옹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남쪽 절강성을 돌아 3년 만에 귀국했다. 송광사에 머물던 나옹을 공민왕이 불러 왕사로 임명하고 나옹이 양주 회암사를 창건한 후 낙성회를 열면서 무학을 불러 수좌로 삼고 의발을 전수하려 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나옹이 회암사에서 죽자, 공민왕이 무학을 불러서 왕사로 삼고자 했으나 그는 영리를 끊고 응하지 않았다. 이런 행적 때문에 뒷날 이성계의 왕사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무학과 이성계의 만남은 변계량이 쓴 탑비에 “임신년 만남이 있었으니 스님의 거취가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를 건국하던 해 이성계와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이전이라고 한다. “어느 날 이성계가 꿈을 꾸었는데 곁에 있던 노파에게 꿈을 풀이해 달라고 하자 ‘장부의 일은 이 노파가 알바 아니오. 설봉산 굴 안에 신승이 있으니 가서 물어 보시오.’라고 했는데 이성계가 찾아간 승려가 무학으로 그에게 해몽을 들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성계와 무학의 만남은 사실이고, 이성계는 무학을 왕사로 모셨다. 이에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 출신 벼슬아치들은 쉴 새 없이 불교를 이단으로 몰아 그를 헐뜯고 비난을 퍼부었지만 이성계의 속내는 달랐다. 유자들의 눈치에 아랑곳 않고 자기 생일날 무학을 초청하고 전국의 불자들을 모아 설법을 펴도록 했다. 무학은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이 한 길이라고 설법했으며, 이성계에게 죄수들을 풀어 주도록 타일러 많은 죄수들이 풀려났다고도 한다.
조선왕조 개국 이듬해 이성계는 도읍을 옮길 계획으로 무학에게 터를 보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계룡산에 올라보기도 하고 남경에 가보기도 했다. 마침내 남경, 즉 한양으로 정할 때 무학의 결정적 조언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무학이 한양천도를 주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야사는 정도전과 얽힌 정치적 분란과 풍수설, 비기 등을 빌려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 이방원이 왕이 된 뒤에 정도전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면서 그의 공적을 모두 없애려는 음모에 무학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한양천도는 이성계의 강력한 추진력과 정도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결실을 본 것이다. 무학은 이 과정에 조언을 한 정도였다. “즉위 다음해 성석린 등 신하들과 계룡산으로 떠나면서 회암사에 있던 무학을 불러 동행했다. 계룡산에 올라 도읍지로 어떻겠느냐?”고 묻자, 무학은 잘 알지 못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때 하륜이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있어서 도읍지로 마땅치 않다.”며“모악산 남쪽(지금의 신촌)이 좋겠다.”고 건의했으나, 권중화는 그곳 지형이 좁다며 반대했다.”
후에 이성계가 고려의 이궁이 있던 한양을 둘러보고는 확신에 차 무학에게 의견을 물으니 무학은 “이곳은 주변의 산이 높으며 가운데가 평평하고 넓어서 도읍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무학의 말대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서 한양으로 도읍지를 정한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전설처럼 다른 이야기가 전하는데 그것은 1)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 온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한 곳의 지세를 보니 도읍지로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밭 갈던 농부가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 같구나.”하는 소리를 듣고 무학이 공손히 농부에게 물으니 여기서 10리쯤 더 가야 명당이라고 하여 농부의 말대로 10리를 더 가니 과연 명당자리였다. 그곳이 경복궁 터이고, 밭 갈던 곳이 왕십리로 농부는 도선의 화신이었다.
2) 무학이 도봉산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서 가다가 비봉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돌비 하나가 서 있었다. 비에는 ‘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를 것이다.’고 쓰여 있었다. 무학은 그것을 보고 발길을 돌려 세 산이 한곳에 모이는 곳에 궁궐터를 잡았다. 그 돌비는 진흥왕순수비로, 이를 빌려 만든 말이다.
3) 무학이 이성계, 정도전과 같이 한양에 와서 인왕산이 진산, 백악이 좌청룡, 남산이 우백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옆에 섰던 정도전이 “임금이 남쪽을 바라보고 나라를 다스리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반대의견으로 말했다. 그러자 무학이 태조에게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에 걸쳐 거듭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의명(義明)대사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걸면 5대를 지나지 못하고 왕위를 빼앗기는 화가 일어날 것이고 200년 만에 온 나라에 분탕질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라고 하며 강력하게 말했다.『용제총화』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지어낸 것이다. 그러나 무학과 정도전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무학재는 인왕산 사이에 있는 고개인데 어린 아이를 업고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모악(母岳)이라 불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무학제’라고 불렸다. 그것은 한양도성을 쌓을 때 무학은 성곽을 북악 밖으로, 정도전은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 고개를 ‘무학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유학자인 정도전과 불승인 무학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일 듯 보인다. 조선이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진흥시킨 점, 서울의 진산을 북악산으로 하고 경복궁 등 궁궐이름을 정도전이 모두 지은 점 등이 무학이 정도전에게 밀렸다는 증거다.
한양으로 도읍이 정해진 뒤, 이성계는 회암사에 무학의 스승인 지공과 나옹의 탑을 세우게 하고 무학을 왕사로 극진히 대접했다. 또 연곡사에 불사를 내려 그곳에 머물도록 했으나, 5년 후 무학은 나이를 핑계로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처음 출가한 용문산으로 들어갔다. 이해에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피살되고, 정종이 즉위한 해다.
(10) 설잠(1435∼1493)은 김시습(金時習)의 법명이다.‘눈 내리는 등성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었다고한다. 그를 승려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견이 있을 수도 있으나, 여러 절을 옮겨 다니면서 밥 얻어먹고, 끝내 무량사 절에서 입적했다. 방외(方外-세속을 벗어남)에 노닐던 승려라고 봐도 될 것 같은데 아닐까? 사람들은 방랑의 삶을 살다간 ‘천재시인’, 혹은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사람, 선비출신으로 승려가 되어 기행을 일삼은 기인으로 보기도 하는 것 같은데 율곡 이이는 그의 전기를 쓴 최초의 사람인데 “그가 부처의 행적을 보았다.”고 했다. 또 김시습의 시문집을 수집하여 문집을 쓴 윤춘년은 그를 흠모해 공자에 비길 정도로 극찬했다.
그는 강릉김씨 김일성(金日省)의 첫째아들로 서울 성균관 북쪽 반궁리에서 태어났다. 신라 김알지의 후손으로 선조가 고려 때는 시중을 지내기도 했고, 증조부 윤주는 안주목사, 아버지는 음직을 돌며 벼슬 했으나 집안이 넉넉하지는 못했다. 그가 살던 옆집에 최치운이라는 학자가 살았는데 그는 세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그가 시습의 재주를 보고 그의 외할아버지에게 ‘시습’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논어』의 첫 구절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것이다.
1455년(단종3) 여름 그는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고 있을 때 서울 나들이를 갔다 온 사람이 말했다.
“수양대군이 금상이 되었다 하오. 금상은 상왕으로 모셔지고…”
김시습은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책을 덮고 문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갑자기 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책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는 미친척하면서 중흥사를 빠져나갔다.
그 후 행적은 ‘파란만장’이라고 할까? 전국을 방랑인지, 떠돌았는지 모를 정도로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던 성삼문 등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었다는 것은 그의 절개를 엿보게 하고, 권신 한명회가 서울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현판에다 “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菁春扶社稷 白首臥江湖-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라는 싯귀가 써진 것을 보고 “靑春危社稷 白首汚江湖(청춘에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오염시켰네)”라고 고쳐 썼다는 것은 한시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통쾌하기까지 하다.
여러 번 찾은 적 있는 경주 금오산과 용장사지(茸長寺址) 그리고 남산자체를 기단으로 하고 있는 ‘용장사 3층석탑’은 김시습과 관련이 있는 유적이다. 또 여기 계곡에서 옮겨간 돌로 지었다는 내원리 5층탑은 천년세월에도 흰 돌이 그대로라는 이야기까지 생각난다. 만약에 다시 간다면 김시습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답사의 열정도 예전만 못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싶기도 하다.
그는 여기 용장사에서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썼다.‘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최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 5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앞의 3작품은 자유연애를, 뒤 2작품은 자신의 정치관과 이상화한 위한 것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고 결혼을 했으나 아내마저 본의 아니게 버렸던 그가 세상을 떠돌면서 오붓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유교의 철저한 속박에 빗대어 자유연애를 구가했던 것인데 이것은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소설이기도 하다.
김시습은 말년에 설악산에서 거처하다가 생각이 바뀌어 홍산 무량사로 옮겼다. 거기서 어느 날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키도 작고 못생긴 자신의 얼굴을 무엇 때문에 그렸을까? 자화상을 그린 뒤에 거기다가 “너의 모양은 조그마하고, 너의 말은 크게 분별이 없구나. 너는 구덩이 속에 처박아 두어야 마땅하다.”고 쓰고는 글 밑에다 ‘청한(淸寒)’이라는 자기 호가 새겨진 도장을 찍었다. 쉰아홉 되던 해 3월 그는 조용히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하장을 하지 말고 임시로 관을 절 옆에 두어라.”제자들은 관을 절 옆에 두었다가 3년 뒤 장사 지내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 모두 깜짝 놀랐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살아있던 그 모습이었다. 모두 성불했다고 칭송했다하며 불교 의식대로 다비를 했더니 사리가 나와 부도를 만들어 안치했다. 「김시습전」
‘무량사’에는 사리를 모신 그의 부도와 시비, 그리고 초상화를 모신 ‘청한당’이 있다. 백성을 사랑했고 몸소 일을 해서 먹었던 지식인이요 사상가였던 그는 음풍농월이나 일삼는 시인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보고 지낸 지기인 홍유손은 제문에서 “색은행괴(索隱行怪-궁벽한 것을 캐고 괴상한 행동을 함)하지 않았다”고 하고 “저자에서 함께 술 마시던 무리들도 모두 통곡해 마지않았다. 공을 우리들이 가장 잘 안다”고 했다. 어쨌든 그는 조선전기의 현실모순에 철저히 저항했다. 하지만 현실 속에 뛰어들어 개혁을 실현시키지는 못한 아쉬움은 남는다.
(12) 서산(1520∼1604)는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평안도 안주에서 최세창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음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집안 살림은 거들 나고 형제들은 의지할 때가 없었다. 이에 안주목사 이사종이 어린 여신(汝信-아명)의 재주를 아껴 양자로 삼았는데 후에 이사종이 여신을 데리고 서울로 왔고, 경상도 수사로 가면서는 성균관에 맡겨 학업을 도왔다.
열다섯 살 때 전사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같은 또래들은 자신보다 학업이 뒤쳐졌는데도 합격했는데 낙방하자 그는 현실에 눈을 떴다. 집안의 배경이 없으면 쉽사리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는 것과 서북출신에 대한 차별까지. 그는 학업에 염증을 느꼈다. 이때 친구들과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났는데 시골풍경을 보고는 어릴 적에 뛰놀던 고향생각이 나서 시 한수를 읊었다.
인간의 일 우습구나.
높은 재주도 집을 일으키지 못하도다.
차가운 강가의 늙은 선비,
이를 잡으며 생애를 말하는구나.
‘늙은 선비’는 자신의 앞날을 예견한 것이다. 그는 지리산 화엄사를 거쳐 영원사에 이르러 불경을 뒤적이다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구절을 발견하고는 영원사 ‘승인스님’에게 청하여 머리를 깎았다. 나이 18세로 이때 휴정(休靜) 이란 법명을 받았다. 그리고 21살 때 정식 수계를 받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549년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불교중흥을 위해 승과를 부활하자 휴정은 서른 살 나이에 응시해 수석 합격했다. 이후에 그는 선·교종을 총괄하는 양종판사가 되고 보우의 후임으로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유교국인 조선 궁중에서 불교가 횡횡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물 끓듯 일어나 승려들을 비난했다. 물론 문정왕후의 신임이 두터웠던 보우에 대한 것이었지만 휴정은 3년 뒤 명리는 자기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조일전쟁이 발발하고 20일도 채 안 돼 서울이 점령됐다. 선조는 의주로 피난했고, 선조는 아무준비도 없었지만 보현사에 있는 휴정을 생각하고는 그를 불렀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으로 삼아 승병의 지휘권을 주고 ‘도총섭이 어느 지방에 가든 관원들은 재상과 같이 대우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에 휴정은 순안의 법흥사로 가 전국의 승려들에게 ‘모두 떨쳐 일어나라’는 격문을 띄웠다. 이 격문은 금강산 유점사에 있던 유정에게도, 공주 영은사에 있던 영규에게도 전해졌다.
처음 영규(靈圭)가 떨쳐 일어났는데 그는 1천 여 명의 승병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금산에서 전투를 벌이다 같이 전사했다. 다음 유정과 처영이 5000여 명의 승병을 이끌고 법흥사로 왔고 다음해 정초에 명군과 연합하여 평양과 서울을 탈환했다. 선조가 서울로 귀환할 때 휴정은 임금과 말을 나란히 타고 들어왔다. 승려의 도성출입은 금지되어 왔는데 임금이 이를 허용한 것이었다. 난이 잠잠해진 1594년 휴정은 묘향산으로 들어가 원적암에서 85살까지 살고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그는 묘향산의 별칭인 ‘서산’으로 호를 삼았는데 묘향산을 영원한 안식처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13) 사명대사(1544∼1610)로 잘 알려진 그의 법명은 유정(惟政), 송운대사로도 불렸다. 민중에서는 그를 생불이라고 받들며 수많은 일화와 설화를 만들어내었으며 또한 그는 많은 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밀양무안에서 태어난 그의 증조부 임호근은 대구에서 수령을, 할아버지 임종원은 유학자로, 아버지 임수생은 교생이었고, 어머니는 달성서씨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할아버지는 몰락한 양반이었지만 손자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황희의 5대손 황여현에게 보내 서당교육을 시킨 것이다.
13살적에 ‘세속의 학문은 비천하고 누추한 데다 세상 인연에 얽매여 번거로우니, 어찌 무루(無漏)의 학문을 배우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탄식하고는 김천 황학산 직지사로 가서 ‘신묵’에게 승려가 되겠다고 하여 머리를 깎았다. 그는 스스로 출가한 것이다.
1561년 문정왕후와 지원으로 새로 부활된 승과에 응시해서 당당히 급제했는데 그의 나이18세 때다. 승과에 급제하면 어사화를 꽂고 가유(街遊)를 하진 않지만 시회(詩會)를 열어주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로서 그는 당대 시인묵객들과 어울렸다. 나중에 영의정을 지낸 박순, 이산해,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고경명, 시인 이달과 최경창, 허봉, 임제 등이 그들이었다. 허봉은 허균의 형으로 당대를 휩쓴 문사이고, 이달은 허봉의 친구로 그의 동생인 허난설헌과 허균에게 당시(唐詩)를 가르친 인물이다.
유정의 나이 서른 살 때 묘향산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있던 휴정을 떠올리고는 곧장 묘향산으로 달려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곳 산방에서 3년 동안 고행정진 한 뒤, 묘향산을 떠나 옥천산 상동암에 이르렀는데 간밤에 소나기가 쏟아져 뜰에 피어있던 꽃들이 모두 떨어졌다. 이를 보고 세삼 무상의 이치를 깨닫고는 “어제는 꽃이 피었는데 오늘 빈 가지만 남았다. 인간 세상이 변화하여 없어지는 것도 이와 같다. 뜬 인생이 하루살이 같은데 광음을 헛되어 보낸다면 실로 가련한 일이다. 모두가 각기 영성을 갖추고 있는데 어찌하여 반조(返照-빛이 반사되어 되비침)하여 큰일을 끝마치려고 하지 않는가? 여래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인데, 어찌 꼭 밖으로 내달아 구하면서 세월을 허송한단 말인가?”「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명」
그리고는 선실에 들어 열흘 동안 밖에 나오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묵언수행한 뒤, 오대산을 거쳐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갔다. 유점사에서 보물을 내 놓으라는 왜군과 조우하였으나 그의 당당함과 정연한 논리에 왜장은 ‘이 절에는 도를 아는 고승이 있는 곳이니 여러 군사들은 다시 이절에 들어오지 말라.’고 널빤지에 써두고 갔다고 한다. 후에 휴정의 통문을 보고 승병을 모아 법흥사로 갔다.
1592년10월16일 명군의 동정군(東征軍)도독 이여송은 조선군과 평양성 탈환을 위한 총공세를 전개했다. 이때 휴정과 유정이 이끌던 승병도 2,200명이 참여했는데 이 평양성 전투에서 죽은 왜군이 1만 여명이었다고 하고, 이중 칼과 창에 찔려 죽은 자 1,300여명은 승병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 노획한 말이 3천 여필, 왜군에 협조한 조선인 포로 1천여 명도 구출했다고 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심유경과의 강화협상은 1) 천자와 혼인할 것, 2) 조선을 할양하여 일본에 붙일 것, 3) 일본과 예전처럼 교린할 것, 4) 왕자 1명을 일본에 보내 영주시킬 것, 5) 조선의 높은 벼슬아치를 일본에 볼모로 들여보낼 것 등을 일본이 요구해 진전이 없었다. 이때 유정은 따로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정이 서생왜성에 찾아가 1차 강화회의를 끝내고 조정에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성을 쌓은 것이 견고하고 호령은 나날이 새로웠으며 군수품은 풍족하고 생활형편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혹은 몇 층의 누각을 짓기도 하고 혹은 큰 가옥을 짓기도 했으며, 가등청정이 거쳐하는 곳은 마루 전체에 돗자리가 화려하게 깔렸고 금병풍을 둘러치고서 좋은 음식을 만끽했습니다. 한번 호령하면 모두 그대로 행해지면서 위엄 있는 명령이 바람일 듯 했습니다. 오래 머물러 있을 계책을 크게 세우고 바다를 건너 갈 기세는 조금도 없었으며 사치스럽고 참람하기가 왕후(王侯)의 생활보다도 더했으므로 통분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조정을 대신해 적진에 들어가 강화회담을 열고 재침의 우려가 있다고 하는 등 적군의 형편을 상세히 조정에 알리고 전쟁을 끝낼 방법을 여러 차례 건의 하였음에도 조정은 무엇을 했을까? 원균이 참패를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을까? 이순신의 명랑해전과 노량해전에서 승전함으로써 일본군은 돌아갔다. 하나 뒷수습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604년 2월, 조정에서 끝내 송운을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휴정이 열반해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통신사가 아닌 강화사(講和使)라는 이름으로(강화사는 두 나라가 화해를 맺고자 보내는 사절이다)그를 보냈다. 그런데 이때 실록의 기록은 어처구니가 없을 뿐 아니라 비분강개하기까지 하다.
“불공대천의 원수와 화호 하는 것도 수치이거니와 게다가 일개 중을 시켜 그 일을 이루고자 했으니 맛있는 음식을 얻으려는 꾀가 비루하도다.” 『선조실록』35년
아무튼 송운은 일본에 간지 1년도 더 지난, 1605년 5월 송환된 포로 1,391명을 48척의 배에 싣고 절영도에 도착해 조선수근에 인계했다. 이해 여름 선조는 그를 불러 노고를 치하하고 가의대부(嘉義大夫)라는 품계를 더해주고 말과 모시옷을 하사했다. 이후 송운의 일본에서의 활약에 대해 많은 일화가 만들어졌는데 저자 미상의 「박씨부인전」에는 아주 과장된 이적을 소개하기도 했다.
1) 송운이 일본에 갔을 때 도쿠가와가 항복하는 절을 하라고 요구하자 “내 무릎은 너희를 위해 꿇지 않는다.”했다.
2) 숯불을 벌겋게 피워 놓고 불 가운데로 들어가라고 하니 아무렇지 않게 숯불 가까이 다가가자 마른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저절로 불이 꺼졌다.
3)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잠을 자게 했더니 설雪자 부적을 써 도리어 춥게 만들었고, 아침에 방문을 열어보니 “왜 방이 이다지 추우냐.”고 호통을 치더란다.
그가 죽은 뒤에 200여 년 동안 통신사를 교환하며 두 나라가 평화를 유지한 것은 그가 열어 놓은 길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는 67살이 되던 해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했다. 그가 말년에 거쳐했던 홍제암 앞에 허균의 글씨로 ‘사명대사석장비’가 세워져 있는데, 일제식민통치시절 그 비가 세워진지 300년 뒤, 비에 일본을 굴복시킨 내용이 적혀 있고, 민족정신의 표상이 된다고 염려한 일본인 합천경찰서장이 네 동강을 내어 땅에 묻게 했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후 조정에서는 밀양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우고 그를 기리게 했다.(지금 表忠寺 안에 있다) 표충사에는 송운의 유물과 유품을 모아 보존하고 있으며 근래에 동상도 건립했으며, 또 그가 가토와 교섭을 벌인 내용을 모아서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이라는 책도 펴냈다.
(14) 천호라는 승려에 대하여는 조금 생소하다. 그의 이름은 이동인이고, 개화파인 김옥균, 김홍집과 함께 근대화에 앞장선 선각자라고 본다. 흔히 ‘개화승’이라 부르는데 그는 양산출신으로 통도사로 출가했으나 부산의 범어사에 오래 머물렀고, 부모의 내력은 물론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요구로 조선의 3개항을 개항한 1876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공작을 벌이면서 부산의 광복동에 ‘대각사’라는 절을 지었고, 1877년에는 교토에 있는 동본원사(東本願寺)별원을 부산에 두었다. 처음에는 부산항 부두에 천막을 치고 불상을 모셨던 별원을 거금을 들여서 큰 절로 짓고 일본인 관리자를 두었는데 어느 날 30살쯤 되는 이가 관리인을 찾아와 “일본을 시찰하고 문물을 연구하여 조선의 문화개혁에 공헌하고 싶다.”고 말하고 도와 달라고 했다. 이 이가 이동인으로, 이후 이 절에는 김옥균, 박영효 등 개혁파들이 드나들면서 일본과의 통로로 이용했다고 하는데 이동인이 이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공사관에도 드나들며 일본어를 배우고 김옥균과 박영효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그들이 일본으로 밀항 할 수 있도록 여비로 2촌 짜리 금덩이 4개를 주었다고 한다. 동인은 동본원사 부산별원에 다시 찾아가 관리자이던 오쿠무라의 동의을 얻어 1879년 6월 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교토를 거쳐, 1880년 3월 도쿄로 갔으며 여기 동본원사 아사쿠사(淺草)별원에 기숙했다. 이 별원은 조선통신사들이 도쿄에 오면 머물던 곳으로 여기서 일본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영국 등 서양 외교관들을 만나기도 했다. 또한 김옥균이 보낸 탁정식이란 승려를 만나, 그동안 모아둔 책과 자료를 옥균에게 보냈다. 자료는 만국사기(萬國史記)라는 세계사와 세계 각국의 풍물을 담은 만화경(萬華鏡)등과 물리, 화학, 생물 등 과학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해 7월 2차, 수신사로 김홍집 일행이 도쿄에 와서는 천호가 머물던 별원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이때 일본측이 인천개항을 요구하자 김홍집은 자기가 관여할 바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천호를 보내 그를 설득하게 했다. 천호는 일본 옷을 입고 본원사 승려로 행세하면서 시와 문장을 논하고, 세계정세와 조선의 장래를 토론했다. 김홍집은 천호가 조선말을 잘하고 조선의 사정에 정통한 것을 알고 조선 사람이 아닌가하고 의심했다. 그러자 천호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실토한 후 밀항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자 김홍집은 그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감격했다고 한다.
조선으로 귀국한 김홍집은 일본주재 중국공사관 참사관 황준현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와 조정에 알렸는데 여기에는 조선의 외교노선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 방안으로 친중국(親中國-중국과 친함), 결일본(結日本-일본과 맺음), 연미국(聯美國-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기조로 되어 있었다. 이때 민씨 정권은 개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제도개혁을 서둘렀다. 이에 김홍집은 개화정책을 추진할 인물로 천호를 추천했고, 김홍집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천호는 부랴부랴 귀국하여 조정에 뛰어 들었는데 이것이 천호의 궁극적 목표였던 것이다.
고종은 그를 몇 번 만난 뒤에, 별선군관(別選軍官-특별 채용한 임시직)으로 채용해 어학사(語學司-외국어 관련 일을 보는 곳)참모관을 주었다. 조선시대 역사를 통틀어 승려의 신분으로 실직(實職)의 벼슬을 받은 경우는 그가 처음이었다. 이때부터 승려 천호는 속인 이동인으로 알려졌다. 1880년 9월 이동인은 고종의 명으로 원산 일본영사관에서 여권을 얻어 10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동인은 도쿄 영국공사관을 찾아 공사관 2등 서기관인 ‘어니스트 사토’를 만나 국제법에 따라 조선을 보호해 달라고 했다.
1980년 영국 외무성에서 공개한 외교문서인 ‘사토페이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오늘 아침 아사노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아사노라는 이름이 조선야인이라는 뜻이라고 재치 있게 설명하면서 세계를 돌아보고 자기나라 사람들을 개화시키기 위해서 비밀리에 일본에 왔노라고 말했다. 그의 일본말은 서툰 편이었지만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외국의 문물이 엄청나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돌아가서 자신의 동포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유럽의 건물이나 그 밖의 흥미 있는 것을 찍은 사진을 구입하고자 했다. 또한 영국을 방문하기를 열망했다. 그는 금, 석탄, 철 및 연해의 고래 등 풍부한 조선의 자원을 개발하는 일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좋은 인삼과 나쁜 인삼을 나에게 주었는데, 유럽의 의사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인삼이 조선의 주요 수출품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외교뿐 아니라 유럽 나라들과 교역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유럽나라들의 자료를 수집해 조선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의지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청나라 공사 ‘하여장’에게 밀서를 건네주고 1개월 만에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도움을 줄만한 위치나 능력이 되지 않았고, 청나라는 오히려 이를 계기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일본보다 앞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 후에 그는 시찰기와 견문기뿐만 아니라 염초 제조법, 성냥 제조법, 병기 제조법 등을 함께 기록해 왕에게 올렸는데 그 량이 100여 책에 이르렀으며, 당시에는 이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졌다. 이동인과 개화파들의 왕성한 신문물 탐구욕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모든 게 이동인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참모관 임명을 두고 숱한 논란이 벌어져 척사파들은 이동인을 참모관으로 발탁 한것은 두고 ‘중을 장관의 자리에 임명케 하였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동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의문에 싸여 있는데, 그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갈 때는 늘 문기수(門旗手-문지기)가 데리고 들어갔다 한다. 행방불명되기 직전에도 문기수가 민영익의 집으로 와서 그를 데리고 나간 뒤에 소식이 끊겼다. 이를 두고 그가 도망쳤다거나 혹은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죽였을 것으로 의심했고, 김옥균은 그가 급진적인 개화정책을 추구한 탓으로 온건파인 김홍집이 제거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또 한편에선 김홍집이 그를 정적으로 여겨 제거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김옥균은 그가 민씨에게 의지하여 급하게 공로를 탐낸다고 하여 자주 충고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승려신분으로 많은 일을 벌인 그의 짧은 생애는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분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제약을 받았던 것이었고 그가 죽게 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지만 그 근본을 따진다면 당시 사회에서 천시 받던 승려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이광린의 개화승 이동인)
천호 이동인에 대한 관련이력을 읽다가 생각해보니 오래전에 신봉승이 저술한 「이동인의 나라」라는 3권짜리?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15) 경허(1849∼1912)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읽은 도올 선생의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해야겠다. 다만 거기에 없었던 이야기 하나를 살펴본다. ‘어느 날 제자 송만공과 함께 탁발에 나섰다. 젊은 만공은 탁발로 얻은 곡식을 가득 넣은 바랑을 지고 걸으면서 힘에 겨워했다. 이를 본 경허가 갑자기 동네 우물가에서 물 긷는 여인을 보고 달려가 뽀뽀를 해댔다. 여인이 비명을 지르자 동네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와 두 승려를 쫓아왔다. 둘은 냅다 뛰었다. 한참을 뛰다 청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경허가 만공에게 “힘이 부친다더니 무거운 짐을 지고도 어찌 그리 잘 뛰느냐.”고 했다. 이에 만공은 스승의 가르침을 알아차렸다. 마음이라는 화두를...
경허는 만년에 함경도 갑산에서 64세의 나이로 쓸쓸히 죽어갔다. 뒷날 한용운이 그의 시문과 어록 등을 모아 1942년 간행했다. 이로 인해 그의 행적과 사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경허의 제자 만공은 수덕사와 마곡사에 주석하며 친일불교와 맞섰고, 방한임은 오대산에 은거하면서 선승으로 평생을 보냈다. 또 수월은 국경지대인 만주일대에서 포교와 독립운동을 벌였다.
(15) 백용성(1864∼1940)은 승려로서보다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무진장의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상규(相奎),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계모 밑에서 자랐다. 그의 나이 14살 때 남원 교룡산성에 있는 덕일암을 찾아 가 혜월에게서 용성(龍城)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용성은 남원의 옛 지명이다.
청년기와 장년기에는 전국의 사찰을 떠돌며 정진과 수행을 거듭하거나 제자들을 지도했다. 그의 문도들은 그가 40살 때에 이미 고승으로 받들었는데 그는 젊은 시절부터 송만공과 한용운을 만나 형제처럼 지냈다, 만공은 그보다 일곱 살, 한용운은 열다섯 살이나 아래였으니 스승과 제자사이 혹은 사형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마흔 두 살 때인 1905년 서울에 올라와 포교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두해 뒤 북경 통주사에 갔을 때 그곳 승려가 ‘조선의 승려는 사미계만 받고 대계를 받지 않고서 승려가 된다’는 말을 들었다며 깔보는 듯 한 말을 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공중에 있는 해와 달이 그대 나라만의 해와 달인가? 무릇 불법은 천하의 공도(公道)니라. 천하의 공도가 어찌 중국에만 국한 될 것인가? 나라는 대국인데 사람은 소인이로구나. 중(中)이라는 것도 정한 바가 없는데 그대의 나라 남쪽에서 보면 북쪽이 있고, 북쪽에서 보면 남쪽이라! 동서도 역시 같은 이치이니 중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고정되어 서 있겠는가? (김광식의 ‘용성’)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놓인 조선은 마침내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이 강제로 맺어져 조선총독부가 들어서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러자 친일불교를 이끌던 원종(圓宗)의 총무원장인 이희광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서로 협약하자는 맹약을 맺고 돌아왔다. 이것은 조선불교를 조동종에 팔아넘긴 것이나 마찬가지로 총독부는 이듬해인 1911년 6월 ‘조선사찰령’을 발동하여 한국불교를 예속시키고 지배하려 했다.
그런 와중에 남산아래에는 명동성당이 들어서고, 이어 감리교가 설립한 정동교회, 장로회에서 세운 새문안교회, 성공회에서 세운 정동성공회성당 등이 우뚝우뚝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를 바라본 백용성은 승려의 도성출입과 도성 안 사찰건립이 풀렸음에도 불교계는 포교당 하나 지을 여력이 없는데다 일제의 민족불교탄압은 그에게 새로운 각오를 하게 만들었다. 1911년 또는 1914년 건립설이 있는 ‘대각사’는 봉익동 1번지에 열었다. 어떻게 조선왕조의 상징인 종묘 옆에, 어떻게 돈을 마련하여 절을 열었는지, 어떻게 궁녀들을 신도로 끌어들여 설법을 했는지, 어떻게 청소년을 모아 법회를 열었는지 그 과정은 확실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는 한옥을 다듬어 법당을 꾸미고 선방을 만들었다.
이는 도성 안에 사찰건립이 허용된 뒤, 첫 번째인 우정국 옆 각황사에 이어 두 번째로 사찰건물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건물에 부처만 모셨을 뿐이지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상궁 또는 젊은 궁녀들이 자금을 댔다고 하기도 하고, 고종의 지원이 있었다고도 한다.
1919년 3월, 일제의 강압통치가 10년 가까이 자행되었고,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풍문이 나돌자 민족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민족독립운동 선언은 천도교의 손병희와 최린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천도교는 민족대표를 선정하면서 비밀을 유지하려고 우선 종교지도자를 포섭했다. 그리하여 천도교를 중심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끌어들였고 유교와 천주교, 대종교는 뺏다. 한용운은 안면이 있던 최린의 연락을 받고 불교계 대표를 선정하려고 범어사 등을 찾아 민족대표로 참여해 달라고 설득했으나 이런 저런 핑계로 호응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대각사에 머물던 박용성을 찾아 설득하자 그는 서명에 사용할 도장을 맡기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거사 하루 전에 한용운이 용성을 찾아와 다음날 오후 2시에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고 전했다. 이튿날 용성이 태화관에 도착하자 선언식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때 경찰이 들어 닥쳐서 참석한 29인을 모두 연행해갔다. 물론 박용성도 끼어있었다.
그전에 만세시위를 할 때에 한용운은 흰바탕에 푸른색으로 그린 한반도기를 들고 나가자고 제의했으나 박용성은 태극기를 들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로 “열반의 경지인 무극(無極)은 체(體)가 되고 태극은 상(相)이 되며 음양은 용(用)이 됩니다. 천도교의 인내천은 한울이 태극인 것이며, 기독교의 천국이 곧 태극입니다. 그러므로 태극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반도기를 사용하면 고구려와 발해 옛 땅을 포기하는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고 했다. (김종록의 「근대를 산책하다」에서)
태화관 사건으로 용성은 58살의 나이에 2년간 고초를 당하다가 1921년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이 주관한 3.1만세운동은 전국각지는 물론 만주의 용정, 훈춘 등으로, 연해주의 연추와 블라디보스톡으로, 미주의 화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으로 번져나갔는데 당시 1년 동안 200만 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피살자만 7,700여명, 부상자는 46,000여명, 체포된 자가 5만 여 명이었다. 또 교회방화 59건, 민가방화 724건, 학교방화 3건 등도 있었는데 이는 총독부 통계이고 산골마을이나 작은 규모의 통계는 집계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2천만 명 정도로 1/10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이들은 총칼에 맞섰던 것이며,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전면적 민중봉기였고 평화시위였다. 이 시위는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고, 미국 등에서 온 선교사들의 헌신적 도움과 일본의 양심적 변호사들의 지원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앞장서고, 3.1운동을 숨죽이며 지켜보았을 이완용, 박영효, 김윤식, 윤치호 등 친일세력들은 독립 후에라도 그 죄 값을 달게 받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용성은 감옥에 있으면서 기독교 목사들이 한글로 된 성경을 읽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는 출옥하면 동지들을 모아 불교경전 번역사업에 진력하여 진리의 나침판을 지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출옥한 뒤에 그 사업을 벌이려고 하자 한문에 익숙한 승려들이 호응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군분투하여 그는 직접 많은 경전을 번역했는데 번역한 경전은 『능엄경』『팔상록』『금강경』『원각경』『선문촬소』『다라니경』등이고, 일반 불교서적으로는 『불교 창가』『대각교 의식절차』 그리고 ‘아동 교과서’ 등이었다. 그의 저술과 변역서는 인쇄되기도 하였으나 돈이 모자라 인쇄되지 못한 것도 많았는데 근래에 『백용성대종사총서』(2016)라는 이름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해방 후에 임시정부 인사들은 뒤늦게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주석인 김구와 원로 이시영, 유림대표 김창숙 등 30여명은 1945년12월12일 서울 대각사에서 조촐한 귀국환영식을 열었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스님들도 보이는데 이는 백용성과의 인연 때문에 거기서 환영모임을 가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용성이 용정에 있을 때 윤봉길이 그를 찾아와 계를 받았다고 하고 또 독립자금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는 77세에 입적했는데 시봉인 이동헌에게 유훈을 주고 49재 때에 열어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전법륜(처음 전래된 불교)을 가꾸고 번역한 불경과 어록을 백만 권 넘도록 발간 할 것, 신도를 백만이 넘도록 늘릴 것, 철저한 수행과 교화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마지막에는 ‘온 겨레와 모든 인류에게 수행을 지도하되 잘난 이나 못난 이나 선한이나 악한 이를 가리지 말고 인연 따라 출가한 승려를 만들고 재가한 신도를 삼아 성불인연 지어 나아가는 분상(分相)이니 많은 부작용 따르겠지만 찬양과 비방을 함께 수용하여 성불인연으로 알고 묘법연화경 보살품을 본받아 일체중생과 성불인연을 지어 나가자.’라고 썼다.
백용성은 근·현대 시대 민족지도자로 송만공, 방한암, 박한영, 한용운과 함께 5대 불교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고 초지일관 철저한 삶을 살았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로 그 운동과 임시정부가 민주주의 헌법정신을 잉태한 혁명이자, 자주정부로 평가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변절자도 있지만 백용성의 존재는 분명히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5) 만공(1871∼1946)의 속명은 ‘바우’고 법명은 ‘월면(月面)’전라도 태인 출신으로 그가 열한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러자 홀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도 없었다. 그해 어머니를 따라 금산사에 갔다가 미륵부처를 보고 감동해 어머니 몰래 출가했다. 처음에는 계룡산 동학사에서 행자 노릇을 하다가 얼마 뒤 서산 천장암으로 갔으며 경허의 제자가 되었다. 가난해 떼거리도 없는 천장암에서 탁발을 하며 경허로부터 한문수업을 비롯한 많은 지식을 익혔고 참선도 했다. 경허는 총명한 만공을 끔찍이 귀여워했다.
그러던 중 스승의 귀여움만 받고 세월을 보내다가는 도를 깨치지 못할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의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스승을 만난 지 9년 만에 야밤에 아무 말도 없이 천진암을 떠나 탁발하면서 방황하다가 온양 봉곡사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고 이후 8년을 운수행각을 벌이다가 다시 천장암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경허를 본받았는지 마을에 내려가 선비들과 어울리고 술도 고기도 먹었다.
월면의 나이 34세 때인 1914년 경허는 그를 불러 전법계를 내리고 만공이란 법호를 주었다. 경허는 그런 다음에 삼수갑산 깊은 산골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만공은 경허가 북쪽에서 머리를 기르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살다가 뒤늦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유품도 전달받았다. 그는 유품을 안고 흐느끼며 추모시를 지었다.
“착하기는 부처님, 사납기는 호랑이보다 더했던 경허 선사시어, 신선이 되어 어느 곳으로 가셨나이까? 술에 취해 꽃 속에 누워계시겠지.”
만공이 한 일 중에는 사기꾼에 걸려 산판을 팔아먹는 등 분쟁에 휩싸여 있던 마곡사 주지를 맡기도 하고, 스승 경허의 문집 『경허집』을 내기고 하고 또 예산의 수덕사 언저리에다 ‘견성암’을 지어 많은 비구니들을 가르쳤다는 것과 1937년 조선총독부 미나미 총독은 전국의 31개 본산 주지들을 모아놓고 국민정신 종교부흥 운동을 적극 펴나가겠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난 만공이 장내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내말을 잘 들어라.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청정 비구 하나를 파계시키는 것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셨거늘 조선승려 7천명을 파계시킨 데라우치 전임총독은 과연 지금 어디에 가 있겠는가? 무간아비지옥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을 어찌 모르는가?”라고 하고는 주장자를 세 번 내려쳤다.
미나미는 분기탱천했고 참석한 주지들은 놀라 어찌할 줄을 몰라 했지만 교활한 미나미는 만공을 감옥에 보내기보다 회유작전을 써서 일본유람을 시키려 했으나 만공은 한마디로 거절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견성암은한국 최초의 비구니 수도처인데 신여성이자 시인이던 김일엽은 그의 수제자가 되었는데 대중가요인 ‘수덕사의 여승’은 이 일엽을 모델로 만든 가요라고 하지만 사실에 어긋나는 점이 많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김일엽은 세상이 싫어 비구니가 되어 견성암에서 수도했으며 수덕사는 비구니가 아닌 비구들이 거처하는 곳이므로 가사와 다르고 또 ‘속세에 두고 온 님’이라 한 것도 엉뚱하다. 김일엽은 평생 만공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에 정진했을 뿐 결혼하지 않았다. 수덕사 쪽에서 보면 김일엽 보다는 만공의 흔적이 더 많이 널린 절이다.
(17) 한용운(1879∼1944)은 “님의 침묵”과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지 모르겠다. 그는 지금의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용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6년 그가 18세 되던 해 부모가 시키는 대로 혼인을 했으나 이듬해 바로 출가했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와 강원도 산골로 찾아들었는데 그의 출가는 아버지가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선 일을 두고 반성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스스로에게 큰 결단이었고 가정을 버렸다는 비정함이란 비난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배고픔과 추위와 인생의 쓴맛을 보면서 오세암에 닿았는데 오세암은 김시습이 머물러 있던 암자로 이곳에서 불목하니로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다가 거기서 나와 러시아, 만주일대를 여행하고 온 뒤, 출가 8년만인 1905년 백담사에서 연곡을 은사로 정식으로 수계를 받았다.
여기서 만해가 태어나고 5년 동안 불경과 참선으로 승려로서 갖추어야 할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현실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후에 일본에 가서 교토 등지를 6개월 동안 다니면서 일본이 무슨 힘으로 우리나라를 삼키려 하는지를 알아보려 했고, 이때 도쿄 유학생이던 최린을 만났고 그것이 3.1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세운동으로 구속되어서도 한용운은 일제에 맞서 자기 의사를 밝혔다. 어떤 사람은 자기변명을 늘어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주동자가 아니라고 발뺌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뜻이 아니었다고 떠벌리기도 했으나 그는 한 점 끌림이 없이 조선독립을 주장했다. 주범으로 인정된 손병희, 이종일, 최린, 이승훈 등과 같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다.
3.1운동 이후 그는 누구보다도 이미지가 강한 민족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학교에는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으므로 현대문학을 배울 기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토속어를 구사해 주옥같은 현대시를 많이 지었고 한시를 지을 줄도 알았지만 한시는 많이 짓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민족시인’이라는 또 하나의 호칭이 붙었다.
우리가 잘 아는 “님의 침묵”그 시집의 앞에 이런 서문을 썼는데 시는 생략하드라도 그것을 한번 보자.
“군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너냐. 너희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지난 며칠 동안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원효에서 한용운까지 17명의 고승을 만난 것이 그것인데 그들 중에는 비운의 시대를 산 사람도 있고, 어떤 고난이나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민중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행동한 사람도 있다. 그들의 행동과 지조와 언행이 오늘날 우리가 있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오늘 한 세월 속의 한 페이지를 접는다. 2019.11.29. 말고 화창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