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절망을 이기는 인문학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이 말은 아주 거친 표현처럼 느껴지는데, 1950년대 영국에서 절망이 사회를 지배할 때,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한 작사 존 오스번(john james Osbome)이 기성세대의 추악한 모습을 집요하게 파헤친 희곡작품의 제목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사회는 어떤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에 각성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본 사람들은 우리사회 모든 곳이 ‘작은 세월호’가 득실거리는 절망의 지뢰밭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해 7.30에 있은 재보궐 선거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절망의 바이러스는 변태과정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무한히 증식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공동체라는 말은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한국은 외로운 분자들의 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분자는 연대할 줄 모른다. 언론은 앞 다투어 한국의 현대사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분자들은 오히려 망각의 힘으로 고독과 고통을 견뎌냈다.
우리는 이미 세월호를 잊은 것은 아닐까? 망각 이전에 토로한 절망은 가짜 절망이고, 망각이야말로 진짜 절망의 대상이 아닐까? 진짜 절망이든 가짜 절망이든 우리는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이 절망의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도무지 답이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절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은 독일의 철학자‘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을 절망에서 탈출할 계명으로 삼아 결국 살아남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정치적 삶을 사는데 필수적 단계인 ‘성찰적 사고’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누군가 그것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성찰적 사고’에 대해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보다, 오늘보다 내일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희망을 겨냥한 인문학적 ‘성찰적 사고’를 시작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이 책은 예외적이거나 지엽적인 상황을 논하기 전에, 뚜렷해진 절망의 시대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인생 공식’을 찾아보려는 시도에서 기획되었다. 오늘과 같은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처지에 대해 고민하고 소통하고 성찰하려고 했다. 절망을 이기고자 했다. 우리시대의 인문학자 8인의 외침은 절망을 정면으로 대응하고 있다. “사회가 절망을 권하거든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강신주, 강준만, 고미숙, 노명우, 문태준, 이현우, 정병설, 정여울 등 한국대표 인문학자 8인을 대신하여 강준만 교수의 서문 – 요약)
책의 주제는 ‘절망’으로 그것은 어디에서 기인되는가? 를 묻고, 증오, 욕망, 분노, 불안 그런 것에서 찾고 있는데, 첫 번째로 강신주 교수는 「시대의 이름, 절망」이란 주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살한 사람들에게는 세상에 기댈 사람,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우리사회에선 이미 공동체가 사라졌어요. 노골적으로 말해 만약 가족 중에 누군가가 자살을 한다면 그 사람에겐 다른 식구들은 가족이 아니었던 겁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불행해서 죽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내 곁에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죽는 겁니다. 그 상태가 조금도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 자살을 합니다. 절망한 사람들, 자살하는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봐야 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자살을 택합니다. 짐승처럼 살면 자살을 꿈꾸지 않아요. 먹고사는 게 먼저니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을 때 자살을 선택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동물과 달리 두 번 반복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울지요. 첫 번째 반응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똑 같습니다. 개나 돼지도 부모가 죽으면 슬퍼합니다. 어미가 낯선 존재로 느껴지고 불안하고 공포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동물도 웁니다. 그러나 동물은 여기에서 감정이 끝납니다. 하지만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두 번째 찾아오는 감정인 것이죠. 그래서 제사를 지내며, 떠난 사람을 기억합니다.”
“흔히들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더 깊이 안 빠지려고 발버둥 치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못 벗어나요. 제대로 오랜 시간 애도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떠난 사람을 머릿속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상례를 크게 치렀죠.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냈습니다. 그래야 간신히 잊거든요 그전에는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는데, 살 수 있다는 느낌이 들죠. 아내가 죽어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지만 상례를 치른 후에는 뭐라도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깊이에 어떻게 이를 것인지 절망이라는 단어를 놓고 고민해 봐야합니다.‘절망을 피하려 들면 더욱 휘말리게 되니 바닥까지 이르는 경험을 해보자’역설적이지만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누가 자신을 때리려는 시늉을 할 때 쫓아가서 차라리 때리라고 말해야 해요. 이편이 공포에서 벗어나는 빠른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자유가 낳은 괴물, 욕망」이라는 주제인데 한림대 이현우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별다른 구분 없이 쓰이기도 하지만 욕구와 욕망은 차이가 있습니다. 욕구는 영어로 need, 욕망은 desire입니다. 욕구는 유기체의 필요를 충족하려는 긴장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긴장은 욕구가 충족되면 해소됩니다. 간단히 생각해서 식욕이란 허기진 상태에서는 강렬해지지만 허기가 채워지면 해소 되죠. 그런데 욕망은 다릅니다. 한도가 없어요. 아무리 먹어도 성이 차지 않는 것이 욕망입니다. 실컷 먹고 더 먹고 싶을 때는 다 토해내고 다시 먹습니다.
이것이 욕망이라면 욕망은 유기체의 자기보존 욕구와 충돌하는 듯싶어요. 욕구가 유기체의 자기보존을 위한 정상적인 기제라고 하면, 욕망은 정상범위를 초과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통상 우리는 걸신들린 것처럼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다시 먹지는 않습니다. 그런 행동은 생물학적으로 유익하지 않습니다. 비교해보자면 욕구는 위의 만족을 위한 것이고, 욕망은 입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욕망은 생물학적 본성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혹은 그러한 본성의 오작동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앞당겨 의식합니다. 그것은 인간만의 특징으로 보입니다. 인류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의식은 호모에렉투스부터, 직립보행을 하면서 앞뒤가 생기고 공간적 지평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에 적용되면 현재의 시간과는 다른 스펙트림이 생겨나죠. 과거와 미래라는 형식 말입니다. 지나간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구분하게 됩니다. 언어로는 시제라고 하지요. 모든 언어는 공통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현재라는 시제가 없는 언어도 있기는 하지만, 과거와 미래라는 시제는 대부분이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미래라는 지평을 갖게 되면 무언가 계획을 할 수 있습니다. 생존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먹을 것이 풍족하게 되면 그것을 저장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미래를 의식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에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먼 미래를 앞당겨 쓴다는 것입니다. 궁극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개체적 차원에서 보자면 자신의 죽음이죠.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의식이 우리를 가로 막습니다. 미리 당겨진 죽음은 많은 것을 무력화합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올바르게 산다는 게 무슨 대수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런 부작용에 대한 대비책도 진화해 왔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낙관편향의 방화벽이 생긴 것이죠. 하지만 그 방화벽은 잘 작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불안은 그 증상입니다. 불안이란 감정의 형성조건은 두 가지인데, 미래라는 시간지평을 갖게 된 인간의 유한성이 그 하나고, 유한성에 대한 방어기재의 고장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는 평가와 분열 없이 어떻게 불안에 대처할 수 있을까요?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은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더라도 안전과 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세 죽음」이란 게 있습니다. 귀족의 죽음이 처음에 나오는데 매우 고통스럽게 죽습니다. 다음에는 농부의 죽음으로 죽음을 훨씬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고통이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에 나무의 죽음입니다. 나무는 아예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를 우리가 참고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해야 한다고까지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세 번째는 문학박사면서 ‘몸·삶·글’을 키워드로 인문학을 탐구하고 있는 고미숙 선생의 「욕망의 지도, 운명」에 대해서다.
‘열정을 가져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을 수시로 듣다보면 무엇을 하든 미칠 때까지 해야 되나보다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중독이 되어 있죠. 그래서 ‘넌 할 수 있어’이 말처럼 무서운 말은 없습니다. 멈출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열정! 열정이 뭘까요? 심장이 뜨거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낮에도 쉴 수 없고, 밤에도 잠들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합니다. 몸이 뜨거운 분들은 밤에도 안 쉬어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워커홀릭(workaholic)이라고 말하지,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 연애, 소비 그 어떤 것에 미쳐 있든간에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미쳤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욕망의 계보학에서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이전에는 노동과 열정을 찬미한 적이 없습니다. 부귀영화는 덧없도다! 이런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죠. 물론 그때도‘탐진치’(탐냄,분노,우매)는 작동했지만, 지금처럼 무차별적 중독을 조장한 적은 없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동과 화폐가 사람들의 신체 혹은 영혼을 지배하게 된 것이죠. 좋은 직업, 높은 연봉, 다음에는‘스위트 홈’이라는 목적이 우리 삶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연애가 인생의 대업(大業)이 되어 버렸죠. 이전에는 이팔청춘이 되면 자연스럽게 짝 짖기를 했기 때문에 이렇게 힘주어 ‘대업’이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자본이 점점 고도화되다 보니 사랑의 모든 패턴이 화폐의 속성과 닮아버렸습니다.”
“우리는 매년 봄이 찾아오는데도 그냥 온도만 체크하고, 봄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병도, 괴로움도, 희로애락도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거죠.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질 수밖에 없죠. 그렇게 협소해지다보면 결국 최종심급은 돈이 되어버립니다. 노동과 화폐의 쾌락으로 다시 환원되는 거예요. 청춘에 느꼈던 윤리와 가치가 중년에, 환갑에, 칠순에까지 똑같이 반복되는 거죠. 그러니 평생을 살았지만 지혜가 전혀 늘지 않죠. 나이들어 머리는 노쇠해지지만 판단의 기준은 똑 같으니 점점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무엇보다 삶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그게 존재와 우주에 대한 탐구예요.”
“돈과 권력에 부대끼다보니 부자건, 중산층이건, 성공한 사람이건, 실패한 사람이건 다들 불안하잖아요? 그 불안을 벗어나려면 인생을 통째로 보는 힘이 필요합니다. 인생이란 한마디로 생로병사라고 할 수 있죠. 1년이 사계절로 이루어졌듯이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거죠. 그 마디를 자신의 힘으로 넘어갈 수 있어야 지혜가 쌓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돈과 권력에서 벗어나는 순간 확보되는 자유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한, 계절도, 인생도 결코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환의 지혜가 중요한 겁니다. 그 영역까지 볼 수 있게 되면 누구나 자기 운명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니체가 말한 ‘아모르파티(amor fati)’곧‘운명애’라고 할 수 있고, 사로잡힌 욕망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성균관대와 미국 조지아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나온 뒤에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의 「감정독재의 본질, 증오」를 주제로 한 것인데, 지나칠 정도로 우리정치를 비판하고 까발리고 있지만, 한편에서 보면 속이 다 시원하다. 요즘도 끝없이 싸우고 있는 국회를 보는데, 5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은 짜증만 나고, 피곤하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 90% 이상이 몇 개 이상의 연고단체에 가입해 있습니다. 종친회, 향우회, 동문회 같은 곳 말입니다. 시민단체와 정당을 포함해서 공공적 성격의 단체에 가입한 비율은 2% 수준입니다. 정당민주주의를 제법 한다는 나라에서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연고주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들의 삶의 기쁨과 보람이 연고에서 나온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연고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과 한국은 정치토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정당민주주의의 시작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돈을 조금이라도 갖다 주어야 가능한 것이죠. 90%가 넘는 국민이 정당근처에 가는 것을 무슨 전염병 걸린 것처럼 생각하고 그쪽에 얼씬거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왜 정치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서구 정당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걸까요. 우리나라 연고정치를 뒤엎을 만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해야죠. 왜 반쪽만 가져다가 써먹으려고 하는 것인가요. 우리의 현실을 봐야죠.”
‘서울대는 좋은 대학이야’라는 것과 ‘죽어도 서울대는 가야해’라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스스로 인정욕구의 기준을 다원화한다면 의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언론이든, 어디든 이 역할을 하는 곳이 있나요? 너무나 세속적인 기준으로 승패를 나누고 승자를 칭송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인식이 이미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도 그렇잖아요. 우리세대뿐만 아니라 20대 후반만 되어도 그렇죠. 내가 기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인정욕구 문화의 기준을 다원화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증오의 소용돌이도 다극으로 분산되고, 증오의 위력이 조금이나마 사그라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다섯 번째는 서울대 독문학과를 나와 서울대에서 강의하고 있는 정여울 선생의 「끝없는 불안과 싸우는 당신을 위한 노래」라는 제목의 강의다. 여성답게 아주 섬세한 글로 아기자기하고 재미있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끝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이 곱씹어진다.
“분노는 철학의 종착역이 될 수는 없지만, 철학의 시작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오늘도 꿈꿉니다. 우리의 분노가 우리시대의 새로운 집단지성의 출발점이 되어 우리의 일상을 바꾸고, 의식을 바꾸고, 마침내 세상을 바꾸기를.”
‘천국에는 철학자가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고병권의 「철학의 하녀」중)
여섯 번째는 고려대 국문학과를 나오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시인으로 활동 하고 있는 문태준의 「물질적 욕망을 무화시키는 시적 상상력」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그는 이를 요약해 “물질을 이기는 상상력은 관계를 사유하는 것, 유기적으로 사유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불교 이야기랄까 부처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있다.
“부처가 사왓티의 동쪽 마가라 마뚜 강당에서 저녁 명상을 마치고 석양아래 앉아있는데 제자 아난다가 다가와 손과 발을 문질러 주면서 말했다. “놀라운 일입니다. 안색이 맑지 않고, 빛나지 않으며 사지는 주름지고 물렁해졌습니다. 등도 앞으로 굽고 감각기관의 변화가 둔해 보입니다.” 이에 부처가 대답했다. “그렇다. 아난다여! 젊은 사람은 늙게 마련이고 건강한 사람은 병들게 마련이고, 살아 있는 사람은 죽게 마련이다. 안색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맑지 않고, 빛나지 않는다. 나의 사지는 주름지고, 물렁해지고 등은 굽고 감각기관의 변화가 눈에 보인다.”
늙어가는 부처의 이 말은 참으로 솔직하고 구체적이다. 부처(싯달타)가 열반할 때 많은 수행자들은 “세존께서 너무나 빨리 열반에 드시는구나. 지혜의 눈이 너무 빨리 세상에서 사라지는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부처가 열반했을 때 수행자들이 충격 받고, 슬픔에 압도되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하고, 울고 뒹굴면서 슬퍼했다고 하는데, 이때 부처의 마지막 말은 “모든 형상된 것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부지런히 정진하라.”였다고 한다. 느낌과 지각과 형상과 의식은 모두 무상하다는 것이다. 죽음은 실로 모든 것을 부수어버리고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부처는 스스로에 대해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소멸하는 것임을 현재의 삶 속에서 폭넓게 꿰뚫어 아는 자”라고 했고, 또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직면하는 고뇌는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객관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고, 내면적으로 망상에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독화살과 같은 번뇌를 없애버렸으니 생과 사의 문제에서 초래되는 갈등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 나를 부처라고 하는가 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부처는 자신을 코끼리에도, 백련화에도 비유했는데 놀라거나 요동이 없고, 번뇌에 물들지 않으며 그윽한 향기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자신했기에 가능했던 말이다.
또 부처는 계율을 잘 지키고, 계율을 보호하라고도 했는데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은 청정하게 살라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우리 모두는 생명을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남이 주지 않는 것을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간음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을 금해야 한다. 자비심을 쌓고 보시를 행하며, 길을 닦고 연못을 파고, 길손을 위한 객사를 지어야 한다.”고도 했다. 또한 선정을 닦고 베풀라고도 했는데 고요히 사유할 것, 여러 사람과 모여 이야기하지 말 것, 바깥의 대상에 탐하는 마음을 내지 말 것, 몸과 마음에서 화려한 것을 버릴 것, 음식에 욕심내지 말 것, 집착하지 말 것, 말과 글의 수식을 즐기지 않을 것 등을 조목조목 가르쳤다.
인과(因果)에 대해 바로 알라고도 했는데,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소멸한다는 것을 알라고 했다. 결국 인간이 갖게 되는 욕망을 억제하는 수행적 방편으로 삼으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에 문태준 시인은 ‘이전에는 문명에 대한 비판시가 자본주의 사회에 인간이 물화되고 속화되는 것을 비판했으나, 요즘 들어서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사유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물질을 이기는 시적 상상력에 주목해, 유기적 상상력으로 관계성을 사유하고, 우주적 상상력과 무위에 대한 사유로 욕망을 이기는 시적 상상력을 길러야 한다.’고 하면서 현대시 여러 편을 소개하고 있다.
다음은 박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이라는 시입니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황새, 말, 거북이, 굼벵이는 각각 이동하는 공간도, 보폭도, 속도도 다 다르다. 그런데 이들 존재는 존엄에 있어서 높고 낮음이 없고, 낫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고르고 가지런하며, 동일선상에 있다. 심지어 묵중한 바위도 이들과 어깨를 같이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수평적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시에서 우리는 물화를 이기는 상상력을 발견하게 된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정병설 교수의 「환상으로 절망 넘기」라는 독특한 제목의 글이다. 그는 ‘환상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삶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라고 했다. 세월호 참사 때, 유족은 물론 우리 모두를 절망에 빠뜨린 상황에서, 환상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물은 후, 그는 아무리 큰 절망이라도 천년만년 지속될 수 없고, 매순간을 절망과 고통으로 살수만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의해 학살당한 유태인은 600만 명 이상이고, 그 가운데 150만 명이 이곳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그런 막대한 숫자의 인간이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어서 아우슈비츠의 참혹했던 현실을 알 수 있다면서, ‘프리모 레비’,‘장 아메리’가 대표적 인물이라고 했다.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온 그해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남겼는데, 응당 그의 글은 분노로 들끓고 있어야 할 것인데도 그저 담담히 그곳에서 살려고 했던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너무나 참혹해서 분노를 표시할 여력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레비는 독일군에게 처음 구타를 당하면서 어떻게 인간이 아무런 분노도 없이 다른 사람을 마구 때릴 수 있는지 ‘경이’를 느꼈다고 했다. 분노는 그나마 일말의 개선가능성이 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당시는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노여움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의 경험을 쓴 책이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것인데, 책 속에는 수북이 쌓인 피해자들의 가방, 신발, 가발 그리고 의족들, 가스실에서 멀지 않은 수용소장의 집, 한 번에 천명 이상이 불과 21분 내에 죽어 나가는 가스실, 그곳에서 1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살았던 수용소장 부인이 고향 친구에게 ‘이곳은 천국이다’라고 쓴 편지내용까지...
러시아 동부전선의 추위와 굶주림에 직면한 독일군의 처지와도 비교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이럴 수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 곳, 그곳에 보내진 유대인의 운명은 아무 가치도 없는, 삶과 아무 의미도 없는 죽음뿐이었던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환상은 어김없이 찾아온다고 한다. 수용소에서의 유대인에게 환상은 달콤한 것이 아니라 악몽의 형태로 다가왔다. 매일 밤 음식을 먹지만 그것이 입에 닿기 전에 방해받는 악몽, 가족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딴청을 피우며 듣지 않는 꿈 등.
아우슈비츠에서는 환상조차 좌절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환상이 있는 한 아직 삶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인간에게 환상은 최후의 순간까지 찾아오는 것임을 아우슈비츠를 경함한 사람들은 말해주고 있다. 환상이 비록 현실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종종 환상 여행을 망각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김만중의 《구운몽》은 고전이며 한문으로 된 ‘환상소설’이다.
《구운몽》은 환상적 공간에서 선녀와 용왕, 스님들과 교류하는 곳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시험에도 잘 나오는 《구운몽》은 ‘인생을 일장춘몽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으로, 어쩌면 인생은 일장춘몽이니 대충 살라는 것으로 들린다.’하지만 이 메시지가 필요한 사람도 있겠지만 중고생들에게 해줄 말은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 양소유가 2처 6첩을 얻어 살아가는 내용만 기억하기 십상인데 모두가 깊이 있게 실제로 읽었다기보다 줄거리만 대충 읽거나 들은 것에 불과하다.
《춘향전》처럼 고전이면서도 잘 읽히지 않고 이해가 어렵다고 느끼는 데는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고전의 시대와 현대의 시대는 정치경제적인 제도는 물론 생활환경까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독자가 이에 빠져들기는 쉽지 않다. 고전을 실감나면서 군더더기 없는 현대어로 번역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구운몽》의 주인공 양소유가 여덟 명의 여인들과 맺는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물론 1:8의 남녀관계가 지금의 눈으로 보면 결함이나 모순으로 보이지만, 고전에서는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때문에 결함을 들추기보다 배울 점을 찾는 것이 고전을 읽는 자세다. 선입견을 버리고 찬찬히 읽다보면 일장춘몽이 아니라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인 것을 알게 되고, 환상적·낭만적 사랑이야기에 그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환상성 이면에는 다른 시대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구운몽》은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해 독창적으로 저술한 것으로, 그는 요즘말로 하면 상위 0.1%에 속하는 귀족집안(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작은 아버지) 출신인데다 우리역사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15세 때 진사초시에 합격한 천재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평가는 극명하게 달랐다. 숙종이 죽은 후, 경종 때 쓰진 《숙종실록》은 소론이 주도했기에 여기에는 “전 판서 김만중이 남해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김만중은 글을 잘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며 어미를 잘 섬긴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전연 식견이 없으며, 요직에 있을 때 논의가 매우 준엄했고, 권력자에게 붙어 맑은 의견들을 힘써 공격했다.”「김만중 졸기《숙종실록보궐정오》1692.4.30.」고 기록되어 있으나,
경종이 일찍 죽은 바람에 《숙종실록》에 대한 편찬 작업은 영조대로 넘어갔는데, 이때는 김만중이 속했던 노론이 정권을 잡고 《숙종실록》을 완성하게 된다. 여기에는 “전 판서 김만중이 남해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나이 56세다. 김만중의 자는 중숙이고 김만기의 아우다. 사람됨이 청렴하게 행동하고 마음이 온화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 벼슬을 하면서는 논의가 강직하여 선이 위축되고, 악이 신장하게 될 때마다 더욱 정직이 드러났다. 유배지에서 어머니의 상사를 만나 분상(奔喪)할 수 없자 애통해 하며 울부짖다가 병이 되어 죽었기에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김만중 졸기《숙종실록》1692.4.30.」
정병설 교수는 강의 끝에 “절대적인 절망에는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다만 김만중과 윤씨 부인(김만중의 모) 그리고 영조와 많은 조선시대 독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환상은 절망을 이기고자 하는 사람에게 약간의 도움은 될 수는 있습니다. 환상은 늘 현실과 함께하면서 현실의 대안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환상의 가치는 충분합니다.”라고 했다.
여덟 번째, 마지막 강의는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노명우 선생의 「그래도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라는 리얼해 보이는 제목의 글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책임능력이다.’라고하며 “불안은 주관적입니다.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어떤 이는 불안을 느끼는데 다른 이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홀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새파랗게 겁에 질려버릴 상황에서 무덤덤한 사람도 있는 거지요. 이러한 맥락의 불안을 주관적 느낌(Feeling)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평창시기에 상승기를 경험했던 나라들이 빚어놓은 국제질서에 강제로 편입되었던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늦었지만 1960∼1970년대를 거치고,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는 경제적 고도성장기로 1997년 12월 3일 IMF 관리체계가 이행되기 전까지 한국 사회의 경험은 유례없는 압축적 상승기의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압축적 상승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현재는 어제보다 나았음을 알게 되고, 그랬기에 미래는 지금보다도 당연히 좋아지리라는 것을 삶의 철학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과거 상승기에 만들어졌던 통념들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있고, 과거보다 현재가 좋고, 미래는 현재보다 더 좋아지리라는 믿음은 상승기 이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간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포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 중단해서는 안 되는 힘, 목적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공포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커녕 우리를 주저앉게 만드는 힘,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고 스스로를 낮추고 포기하도록 만드는 무기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상승기의 종말을 고한지 오래된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노명우 교수는 말한다. “상승기를 경험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현재의 공백? 기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목적지’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 추구해야 하는 목표자체가 희미해지거나 사라졌기 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 그것은 ‘무기력’이라는 또 다른 시대정서와 결합한 것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덫에 걸렸다는 느낌’,‘과거의 가치체계가 사라져 버린 싱크홀 속에서 역류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그 싱크홀에서 역류하는 물결이 공백 기간을 살고 있는 우리를 덮치게 되면,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에서 표현한 대로 ‘망망대해에 홀로 있는 느낌’을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
공백 기간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덫에 걸렸다는 느낌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그 덫이 어디 있는지, 누가 설치했는지, 대체 몇 개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기에 막막할 수밖에 없다. 마치 안개처럼 막연한 추상적인 체계의 덫에 갇힌 사람은 상승기의 인간과는 다른 정서체계로 상황에 대응하게 되는데 대응방식이 자신이 아닌 타인, 그리고 사회를 향할 때는 냉소주의가 팽배해지고, 자신을 겨냥할 때는 이른바 ‘잉여론’이 등장하기도 한다.
공백기에 살아남기 위한 가장 적절한 충고는 ‘강한 자아를 키우라’는 것이다. ‘자아론’은 때로 자기계발 형태로 등장하지만 인문학적 성찰과 담론 형태를 지니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아를 강하게 만드는 전략이 과연 공백 기간에 살아남는 효과적인 선택일까에 대하여는 의문도 있다. 공백 기간에 느끼는 공포는 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확실성에서 개인이 공포를 느낀다면 그 공포에 대한 적절한 처방은 개인이 갖고 있지 않고, 사회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만드는 것은 공포에 대한 처방조차도 마치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공백기의 유동적 질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비인간화의 길로 들어서도록 강요한다. 공감과 책임에 대하여 묻지 않은 채, 강한 자아를 구성하라고 요구하고, 사회문제를 개인화하도록 내모는 것은 사실상 비인간의 길을 걸으라는 명령과 다르지 않다. 공백 기간의 인간으로 제대로 산다는 것은 비인간화의 유혹을 제거하는 것이다. 비인간화의 물결을 거스르는 것, 즉 그래도 인간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은 공백 기간에 처한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일지 모른다. 우리는 몸부림을 그만두는 순간 언제든 비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백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을 기억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을 있겠는가? 그래도 인간으로 살고자 고민하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사는 지혜이고 방법인 것이다.
2019.12.19.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