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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전형적인 카톨릭 국가이다.
그들의 정신을 포함한 생활과 문화의 절대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카톨릭 신앙' 이다. 이는 또한 그네들의 엄청난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런 스페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부할 수 없는 신앙적 영역의 절대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바로 '스페인 카톨릭의 총본산은 톨레도'라는 사실이다. 정치의 중심지는 수도 마드리드이고, 경제의 중심지는 바르셀로나지만, 스페인 사람들의 정신적 영역을 대변하는 '카톨릭 신앙의 중심은 바로 톨레도'라는 사실이다.
서고트족이 북쪽에서 내려와 처음 도시를 건설했고, 바다를 건너온 무어인(이슬람 교도)들에 의해서 수도로 정해져 발전을 거듭해 왔다. 국토회복 운동의 결과로 무어인을 몰아내고 카톨릭 국가로 다시 탄생하면서도 여전히 톨레도는 스페인의 수도이자 '로마 카톨릭의 중심'에서 제 역활을 다해왔다.
1561년 수도가 마드리드로 옮겨가고, 마드리드의 시민들이 새로운 수도에 대성당을 지으려는 계획에서부터 톨레도가 가지고 있던 '종교적 중심'에서 그 권위와 자부심을 빼앗아 오려고 시작했으며, 그 노력의 결과로 왕립 교회당이라 할 수 있는 '알무데나 대성당'을 마침내 건립하였고 총대교구의 권한을 빼앗아오려고 거듭 시도 하였으나.......... 여전히 '스페인 카톨릭의 중심은 톨레도'이다.
이는 일전에 내가 터키를 여행하면서 이미 설명했던 바와 아주 비슷한 경우이다.
터키의 앙카라 사람들은 앙카라가 터키의 수도로서 정치의 중심지이자 터키의 가장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스탄불 사람들은 코웃음을 친다. 이미 역사에 기록된 바처럼 거의 2.000년 이상을 터키의 중심을 넘어 인류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고, 지금도 터키 경제의 절대적 상당 부분을 책임지는 이스탄불이야 말로 터키의 얼굴이자 터키의 자랑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터키 내륙의 부르사 사람이 차분하게 충고한다. '오스만 투르크는 부르사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전부터 터키인들의 가슴속에 깊숙히 전해지고 아로새겨져있는 이슬람 신앙이 최초로 시작되고 터키 전역으로 전파된곳 또한 부르사라고.........' 그러자 아무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여행자에겐 꼭 찾아가볼만한 멋진 여행지이겠으나.........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톨레도는 카톨릭 신앙의 성스러운 영토인 것이다.
지하철을 이용해 마드리드의 플라자 엘리프티카로 간다.
지하 3층에서 내려 올라오면 지하 1층에 매표소가 있다. 이곳에서 톨레도 행 버스표를 왕복권으로 구매한다. 왕복을 구매하면 약간의 할인이 주어진다.
지하 1층의 7번 플랫폼에서 기다리면 톨레도 행 버스가 나타난다.(약 30분 마다) 최고급 버스에 올라 1시간 정도를 달리면 마침내 톨레도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톨레도 버스터미널에서 구도심까지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여행객들도 있으나, 톨레도 자체가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니고 마드리드에서 당일치기 여행이라고 해도 시간적으로도 충분히 여유롭기에 산책을 삼아서 천천히 걷는 방법을 권하겠다.
타호강이 흐르는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버스가 언덕을 내려갈 때 부터 이미 톨레도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거의 톨레도의 전부라 해도 무방할 것 같은 언덕위의 어마어마하게 큰 사각형의 성채가 알카사르이고 그 옆으로 저만치 떨어져 뾰족한 탑을 떠받치고 있는 곳이 대성당이다. 그 언덕을 성벽이 휘감고 있고, 성벽 아래로 타호강이 흐른다.
그게 톨레도의 전부다.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알카사르만 올려다 보면서 대로를 따라 터덜터덜 걷다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우측으로 (비사그라의 문)을 통과해 구도심으로 들어서서 얕은 언덕을 거슬러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이다. 아니면 왼편으로 구도심으로 시내버스가 오가는 언덕길을 거슬러 올라가 톨레도 여행의 중심이자 시작과 종착점인 (소코도베르 광장)에 들렀다가 (산타 쿠르스 미술관)을 지나 (알카사르)와 대성당으로 향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왼쪽 길을 택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로마시대 군대가 머물렀던 진지를 지나 본격적으로 언덕길을 오르려는데 저만치 앞에 시커멓게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터널 같은 것이 보인다.
에스컬레이터 였다. 중간에 한번을 갈아타기만 하면 단숨에 여행자를 구도심 안까지 이동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 길이나 가파르기나 속도가 엄청났다. 세상에 이렇게 감사할데가.......... 거기다가....... 완전 꽁짜다.
터미널을 나오면서는 '언제 저 언덕을 걸어서 오르나' 했었으나...... 우리는 어느새 (소코도베르 광장)에 도착하고 있었다.
'톨레도(Toledo)'.
그리이스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가 오랜 이탈리아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으로 와서 남은 평생동안 톨레도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니,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해 지기 시작한다.
'최후의 매너리즘 회화파 화가이자 최고의 매너리스트 화가'로 일컬어지는 (엘 그레코)를 프라도 미술관에 이어서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되다니..........
'엘 그레코'는 그의 본명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그를 부르고 또 그렇게 그를 기억한다.
'도메니코스 데오토고플로스(Dominikos Theotocopoulos, 1541~1614)'는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그리이스의 크레타에서 출생했다.
없다.
분명 있어야 할 것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심하게 망가졌다.
멀쩡하게 있다가 내가 부르면 쫒아나와야 하는 것들이 아주 심하게 망가져 있다.
헐.
이 모든게 내 실수겠지만......... 속사정을 살피자면 'CANNON 카메라'가 저지른 참극이었다.
나는 몇개의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 명품이라고는 단 한개도 없다. 예전의 필름 카메라 시절에도 그랬다.
가진것 모두가 가장 저렴하거나 최소한의 기본형이다. 별도의 렌즈도 가진것이 전혀 없다.
내게 사진은 그저 기록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 어떤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가적 용도는 결코 아니다.
가장 아끼고 즐겨 사용하고 편리한 것이 바로 캐논이었다. 색감이 부드러운 느낌이 가장 좋았고, 거기에다 가장 튼튼하기 까지 하니 어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서 항상(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서브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는데, 주로 올림포스나 후지를 챙겨 다녔다. 작고 보관이 용이했던 때문이다.
2년 전 조지아를 여행하면서 일본인 (나라 상)과 이틀을 함께 여행했는데, 그의 직업이 일본 니콘카메라 회사 연구실 연구원이었다. 영국 옥스퍼드까지 유학한 인재였다. 그는 최고급 사양의 니콘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만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전문적인 용어나 소통에 한계가 있었다. 그가 말하길 '자기 회사 제품은 사진을 직업적으로 하는 전문가들에게나 적합한 아주 고급의 특수한 전문적인 사양들을 많이 갖추고 있어서, 나 같은 일반인은 사용이 쉽고 튼튼한 캐논을 선택하는 것도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고 했다. 아주 겸손하고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니콘 카메라의 렌즈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전반적인 매카니즘에 대해서 성능을 개선하고 개발하는 것이 자신의 업무라고 했다. 니콘 카메라의 새로운 기능을 나에게 직접 선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직업적인 사진이 아닌 그저 자유 여행자의 기록용으로 니콘 카메라를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사진 기술자는 맞지만 결코 사진작가는 아니라고 겸손해 했다. 아주 인상적인 만남이었다.
그때의 기억으로 얼마 지나서 나는 기어코 중고 니콘 카메라를 하나 구입했다. 그리고 나라상이 시범 보여주었던 흉내들을 연습해 보았다.
그러다가 코카서스 지역을 잊지못해 못내 아쉬워하다가 기어코 두번째 여행을 2년만에 다시 감행했는데 그만 도중에 트빌리시에서 비오는 날 카메라를 계단에서 떨쿠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작동이 안됐다. 부랴부랴 서브카메라로 여행을 마치고 수리를 했는데........
그 후론 니콘 카메라의 재주에 마음이 끌려 니콘을 주로 쓰고 캐논을 써브로 가지고 다니다가..........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이번 톨레도)와 (세고비아) 여행에 캐논을 들고 나갔다. 그런데 아뿔싸....... 가끔씩 속을 썩였다. 그래도 차차 나아지겠지 하면서 이틀을 계속 들고 다녔는데........
분명 찍었는데....... 메모리 카드에 저장되지 않은 사진이 발생했다.
거기다가 촬영 트러블이 너무 심하고 자주 발생했다. 당시엔 어느정도 그려려니 했건만........ 상당 수가 달아났고 상당수가 복구 불능의 상태로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여행에서 모두 마치고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런 결과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 이럴수가..........
(톨레도)와 (세고비아)에서만 망가져 버린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노라고 스스로 위안 삼아야 할까보다.
나머지 여행은 모두 니콘을 사용했으니까 말이다.(이넘의 캐논을 어떻하지?)
소코도베르 광장으로 향하던 언덕길에서 만난 싸이클을 열심히 타고 언덕을 오르는 동상의 주인공은 톨레도가 자랑스러워 하는 스포츠 인사다.
그는 '톨레도의 매(The Eagle of Toledo)'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페데리코 바하몬테스'로 이곳 톨레도 출신의 사이클 선수다. 프랑스나 스의스 등지에서 벌어지는 도로 싸이클(투르 드)에서 여러번 우승한 세계적인 선수다. 사이클 뿐만이 아니라 각종 산악 경기에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으며 겸속하고 품위 있는 언행으로 톨레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산타크루스 미술관)의 사진들이 통째로 날아갔다.
(알카사르)의 사진들이 일부 몇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날라갔다.
헐.
거기에다 (소코도베르 광장) 노천 카페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에 대한 기록들도 모두 날아갔다.
삽시간에 소매치기를 당한 연세 지긋하신 노부부의 모습이 실상황 그대로 담겼었는데........ 없다. 그분들 모습이 이젠 기억이 안난다.
우리가 막 노천 카페에 테이블을 차지하고 메뉴판을 뒤적이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서둘러 한칸 건너 우리 옆테이블로 다가왔다. 사람들로 붐비다보니 빈 테이블이 없었기 때문이다. 겨우 테이블을 점령한 할아버지는 웨이터에게 겨우 맡은 자리를 부탁했고 모자를 벗어 영역을 표시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와 눈이 마주쳤기에 '내가 그 자리를 지켜 드리겠다'고 암시를 주고 받았다. 잠시 뒤 할아버지는 코 앞의 맥도널드에서 감자튀김 봉투를 손에 든 할머니를 모시고 테이블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나에게 고맙다고 눈 인사를 건네주신다.
우린 이미 음식을 주문했고....... 노부부가 메뉴판을 뒤적이다 말고........... '오 마이 갓'이 터져 나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할아버지가 바지주머니를 앞뒤로 탁탁 털듯이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셨고, 이내 어깨에 걸머맨 숄더 백도 뒤져 보시더니 허겁지겁 방금 나온 맥도날드로 뛰어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어떤 당혹감과 함께 어느정도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 와 앉았다.
아주 잠시의 찰라 같은 순간에........ 맥도날드에서 노천카페 테이블까지의 20m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하신 것이다.
두분 모두 아주 인상적이었을만큼 차분하고 이성을 잃지 않는 세련된 분들이었다.
맥도날드와 카페의 매니저들이 달려왔다. 주변에 탐문을 해보았지만 소매치기로 추측되는 장면이나 불량배를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매니저 한사람이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곧 오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자신의 거래 은행과 카드회사에 수첩을 펼쳐들고 전화를 걸고 계시는것으로 보였다.
잠시 뒤에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주변을 돌려다본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일체의 시선들이 자신들에게 쏠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셨다. 자리에서 일어난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독일어와 영어로 아주 짧게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다시 앉아서 웨이터를 부르고 음식을 주문했다.
할머니가 자신의 가방에서 여행용 지갑을 열고 여권 사이에서 비상용 현금과 할머니의 신용카드를 꺼내들고 계셨다.
우리가 주문한 오징어 먹물 빠에야와 피자가 나왔고 노 부부는 쥬스를 마시고 계셨을 때 경찰 패트롤이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여권을 챙겨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셨다. 매니저가 쫓아왔다. 주변에 피해를 주지않으려는 용단으로 할아버지는 카페 모서리 공터로 가셔서 경찰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너무너무 인상적이다 못해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라면 과연........ 저렇게 대처할 수 있을까? 나와는 격이 달라 보였다.
그날 참으로 많은것을 배웠고 깨달았다.
식사를 마치고 정중하게 작별 인사까지 나누었는데........... 두분 모두 안녕하신지 갑자기 안부가 궁금해 진다.
사진마저 모두 날라간 마당에.......... 그저 마음으로 '두 분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라' 기도 드려본다.
살아남은 (알카사르) 사진 몇장을 귀하디 귀하게 추스려 보고........
그 상황에서도 달랑 오징어 먹물 빠에야와 피자 사진만은 살아남았다......... ㅎㅎㅎㅎ
헐.
'자나 깨나, 길을 걷거나 음식을 먹을때도........ 여행 중에는 소매치기 조심!!!'
(알카사르)는 스페인어로 '성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 전역에 퍼져있는 수많은 알카사르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세르반테스 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오랜 역사속에서 중개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었다. 중개축을 위하여 지반공사를 하던 현장에는 땅속 깊은 곳에는 지금도 고대 로마 내지 그 이전의 건축 유적들까지 고스란히 파뭍혀서 남아있다. 한마디로 고고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최초 로마는 이곳에 군사 기지를 세웠고 이는 점차 도시로 변해갔다.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남쪽 리베리아 반도로 내려온 서고트 족은 도시의 면면을 완전하게 갖춘 톨레도를 서고트 왕국의 수도로 삼고 통치와 지배를 하였다. 7세기 말 바다를 건너온 무어인들은 코르도바에 거점을 두고 이곳 톨레도를 이슬람군대의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12세기에 들어서 카톨릭에 의한 국토 회복운동 중에는 가장 먼저 톨레도를 스페인인 점령하고 무어인들과의 전쟁 거점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활용하였다. 국토회복 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스페인이 다시 기독교 국가로 재탄생한 후에 톨레도는 또 다시 스페인의 중심 수도로서 그 역활을 오랫동안 수행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수도가 하루아침에 마드리드로 천도되면서 톨레도는 다시 걷잡을 수 없을만큼 정치 경제적으로 급격하게 몰락하고 세상의 관심으로 부터 멀어져 갔는데....... 이것이 오히려 톨레도의 건축과 도로와 문화가 고스란히 남게되는 결과를 낳게되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할 수 없겠다. 하여 톨레도는 하나의 거대한 중세시대 박물관이 되었다.
그 중심에 서있는 알카사르는 대단히 웅장할 뿐더러 대단히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증축과 개축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직사각형인듯 보이지만 정사각형의 평면바닥 위에 네 귀퉁에 흉벽의 높고 뾰족한 탑을 설치한 최초의 건축물인 것이다. 독특하고 참으로 인상적이다.
톨레도 알카사르의 파사드(Facade. 건축물의 정면을 장식하는 별도의 건축물)는 중개축을 거치는 동안 파사드가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양식이 달라진다. 일례로 서쪽 파사드는 르네상스 양식이고, 동쪽은 중세양식, 그리고 북쪽은 플라테레스크 양식, 남쪽은 추리게라 양식이라고 굳이 따져 구분하기도 한다.
이 웅장한 건물 위층에는 놀랍게도 코린트식 머리기둥을 이고 있는 2층으로 된 파티오(건물 안쪽에 설치된 정원으로 이슬람 문화 특징)가 놓여 있다. 실로 압권이다. 밖에서 보자면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건축이 실내에 은밀하게 들어서 있는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압권이다.
파티오의 중앙에는 아프리카 튀니지를 점령한 카를로스 5세의 기념 동상이 서 있다.
흔히 파티오 하면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실내정원을 뜻한다. 그런데 알카사르의 파티오는 그저 정막하고 썰렁한 텅 빈 건축물일 뿐이라 말해야겠다.
대형 화재와 나폴레옹 침공으로 파괴되었었고, 스페인 내전 당시는 독재자의 사관학교로 사용하다보니 반군의 집중 공세로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현재는 완벽하게 복원되어 일부는 군대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대부분은 군사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각기 다른 양식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뿜어내는 장엄함은 또다른 건축의 한 묘미를 고스란히 여행자에게 전해져 온다.
이는 무데하르 양식이라고 일컬어 지는데........ 중세 시대 이곳에 함께 거주하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과 슬기롭게 접촉하고 공존하면서 탄생시킨 새로운 건축양식이 된다.
이슬람 시대의 이베리아 반도는 700년 가까이 지극히 평온했다.
당시의 이슬람은 그 어느 종교나 그 어느 민족보다 개방적이었고 모든 문물과 경제면에 있어서도 여타의 유럽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선진적이었다. 수많은 학문과 경제. 의학. 천문. 선박. 과학적 발명들이 이슬람에 의해 이루어 졌고 발전되어 왔다. 그것들이 이곳을 통해 리베리아 반도는 물론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유럽 문명이 도약할 수 있는 토대이자 대변혁의 시발점이 바다를 건너온 이슬람인 들에 의해서 씨앗이 뿌려졌고 이곳에서부터 싹이 트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보다 선진적인 열린사회를 지향했다.
기독교인(카톨릭)과 유대인과 이슬람교도가 같은 토대 위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나갔다.
카톨릭에 의한 스페인 국토회복 운동이 성공리에 마무리 되면서 모든 이슬람 교도들은 아프리카 모로코나 튀니지 지역으로 쫓겨갔다. 이슬람을 리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낸 스페인의 카톨릭이 저지른 다음 행동은 바로 유대인을 향한 칼날 이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유대교를 버리고 카톨릭으로 개종 할 것을 강요했다. 이에 불응하면 가차없이 추방하거나 종교재판을 통해 참혹하게 처형했다.
이 또한 역사의 이질적인 단면이며 스페인 역사의 어두운 한 측면이다.
'톨레도 대성당(Catedral)'.
스페인 카톨릭의 심장인만큼 그 위용과 화려함에서 단연 돋보이며 대성당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길이 120m, 폭 60m, 높이 33m의 웅장한 건물에 88개의 대리석 기둥이 들어섰고 22개의 예배실이 들어앉아 있다. 장엄함이란 바로 이런것이구나.
톨레도 대성당의 역사는 곧 톨레도의 역사이다.
로마에 이어서 톨레도를 차지한 서고트족은 바로 이 대성당 자리에 자신들의 신앙성소(?)를 만들었다. 뒤이어 이슬람 사라센족(무어인)들이 쳐들어 와서 서고트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모스크를 지었다. 서고트 시대에 톨레도는 수도였으나, 이슬람 지배시대에는 코르도바에 거점을 둔 이슬람 세력의 전진기지였을 뿐이다. 국토회복운동으로 알폰소 6세에 의해서 탈환되었을 때, 성 안의 백성들의 안전과 아름다운 도시를 보존하기 위하여 이슬람의 왕이 그라나라로 물러날때 알폰소와의 분명한 협약이 이루어 졌다. 이슬람 백성들의 안전보장과 모스크를 비롯한 아름다운 이슬람 건축물들을 부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모스크는 헐어졌거나 카톨릭 성당으로 재건축 되었다.
톨레도 대성당이 가장 좋은 예이다. 스페인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스크를 철저하게 기독교 성당으로 개축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있다. 전쟁에서 승자가 꼭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의무는 애초부터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류 역사는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무용지물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배교와 개종을 요구받았으며, 거절할 경우 추방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승리자인 스페인의 카톨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슬람 교도에게만 그같은 만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곧 이어서 경제권을 바탕으로 상류층의 생활을 영위하던 유대인에게도 배교와 개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들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리베리아 반도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 땅 쉐프샤우엔으로 이주했다. 그들의 유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이 모두 떠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은 한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된다.
왜 카톨릭은 유대교를 그렇게 핍박하였을까? 그것은 이미 '십자군 전쟁사'에서 다룬 바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스페인의 카톨릭은 대단히 심했다. 지나쳤다.
스페인의 카톨릭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잠시 뒤에........
정문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며 하늘을 찌를듯한 두개의 탑이 놓였고, 그 사이로 화감암을 정교하게 자르고 다듬어서 만든 세개의 커다란 문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압도한다. 가운데 문을 '용서의 문'이라 하고 오른쪽 문은 '심판의 문' 그리고 왼쪽의 문을 '지옥의 문'이라 부른다.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날 벌어질 '대 심판'을 기다리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열리지 않고 있는 문들이다. 대성당은 다른쪽에 설치된 두개의 문을 이용해서 드나들게 되어 있다.
내부는 내진(성직자실), 성가대석, 회의실, 보물 보관실,성구실, 예배당, 회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가대석 뒤쪽의 내진을 보노라면 우선 예수의 일생을 묘사한 거대한 장식벽에 온통 시선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성직자석 아래로는 그라나다를 정복으로 카톨릭 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54점의 그림들이 늘어서 있다. 스페인 카톨릭의 자존심이 엿보인다.
트란스파란테(투명하다는 의미)에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그곳에 그려져 있는 성모상이나 천사상을 비추는데 참으로 감동적이다.
톨레도 대성당에서 여행자의 발길과 시선을 잡아 끄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성물실' 이다.
둥근 천장에 어마어마한 대형 천장화가 우선 시선을 온통 잡아 끌어들이는데, 이태리 화가 '루카 지오르디노'가 그린 름다운 청장화가 바로 그것이다.
성물실 안쪽 정면에는 대리석 제단이 있고, 그 위에 톨레도 대성당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엘 엑스폴 리오)가 걸려 있다.
'의복을 빼앗기는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엘 그레코'의 (엘 엑스폴 리오)는 그러니까 대성당의 제단화로 그려진........ 엘 그레코가 이곳 톨레도에 와서 처음으로 그린 그림인 셈이다.
그뿐이 아니다. 옆으로 (유다의 입맞춤)과 (베드로의 눈물) 등 주옥같은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반 다이크. 벨라스케스. 리베라. 루벤스의 대작들도 이곳 톨레도 대성당에서 말나 볼 수 있다.
이들 화가들은 마드리드의 (파라도 미술관)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에 톨레도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톨레도의 화가'인 (엘 그페코)만은 톨레도를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겠기에 다음 방문하는 곳에서 또 다른 그의 대표 작품을 통해 다시 좀 더 세세하게 살펴 보기로 한다.
아주아주 아쉽지만......... 이제 대성당을 나갈 시간이 된것 같다.
다른곳에서 엘 그레코를 만나야 히기때문이다.
- 엘 그레코 作 (의복을 빼앗기는 그리스도)
-- 엘 그레코 作 (유다의 입맞춤)
대성당 밖에서 나는 참으로 멋진 풍경을 우연처럼, 또는 톨레도 여행이 주는 귀한 선물처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래피티'.
도시의 모든것을 배경으로 펼치는 거리예술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 벽화도시나 벽화마을을 제법 좇아다녔고, 그네들이 직접 실사하는 것을 몇번 보기는 하였지만........ 여기 톨레도에서 만난 이들이 단연 최고였다.
멋졌다.
절로 감탄이 터져나왔다.
나는 이번 톨레도 여행에서 새로운 얼굴의 '엘 크레코 후예들'을 만났다.
나에겐 이런것이 진정한 여행의 멋이요.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흔하게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를 간단하게 표현하는 말로 '유럽의 카톨릭과 동방의 이슬람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 낸 아주 특별한 문화'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세비야 메스키타) (톨레도 대성당) 들을 늘어 놓는다.
과연 자연스럽고 절묘하게 하모니를 이룬 아릅답고 독창적인 문화일까?
아니다.
never no!!!!!!!
적어도 나는 그것들이 창조적인 긍정적 행위나 노력의 결과가 결코 아니라, 참혹한 파괴행위의 결과에서 우연하게 생겨난 참으로 웃지못할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어떤 건축물에서도 상호간의 노력과 공동 작업에 의해서 생겨난 새로운 복합적이고 창조적인 결과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
시나고그 위에 덧붙여진 엉성한 카톨릭 교회스타일이 스페인의 성당으로 거듭나고, 모스크를 부수다 부수다 다못해서 그냥 그 위에 교회를 지은것이 카테드랄이 되었다. 창조적인 복합문화가 아니라........ 뿌리채 궤멸을 시키려다 도저히 안되겠기에 그 기반위에 대충 얼기설기 엮어서 쌓아 올린것들이 복합문화니 동서문화의 교류이자 하모니니 어쩌구 저쩌구 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도 저것도 안되니까 그냥 쉽게 만들어 본 '짬뽕'이 명품이 된것이다.
스페인 사람이 들으면 좀 서운할지 몰라도....... 중세 이후 근대까지 그들의 조상님들이 행한 행위는 그렇게 바람직하지도 그렇게 의미있는 창조적 행위도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그들만의 마음속에서는 '지극히 신성한 신앙활동의 일부'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점은 나도 인정을 하면서 하는 말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 톨레도. 그라나다. 세비야. 코르도바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여전히 남아있는 '시나고그'를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이는 터키 이스탄불이나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있는 '시나고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시나고그(Synagogue)'는 '유대인 예배당'을 말한다.
그런가 하면 '모스크(Mosque)'는 '이슬람 사원"을 뜻한다.
우리가 '교회(Chuch)'라 부르는 기독교 예배당을 스페인에서는 '카데드랄(Catedral)'이라 부르는 '대성당'과 '이글레시아(Iglesia)'라고 부르는 '일반 성당'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그렇다면 스페인에 기독교가 전파된것은 언제부터이며 언제부터 교회(성당)이 들어섰을까?
아마도 나는 그 시초가 (톨레도 대성당)이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리베리아 반도에 처음으로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나타난 사람들을 추측컨데서 나온 이유이다.
그들이 과연 누구였을까?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보면 초기 도입부문에서 로마가 갈리아를 원정하는 스펙타클한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 영화에 묘사된 대로 당시 세계를 주름잡았던 로마군은 세련된 최첨단 문명의 산물이었으나, 숲속에서 짐승의 가죽을 걸치고 온갖 조악한 무기를가지고 뛰쳐나온 로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은 그런 야만적인 부족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갈리아는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지역에서 독일 지역에 이르는 울창한 산림과 습지와 산악지역이 대부분이었다. 동유럽이나 서쪽 리베리아 반도나 로마가 차지않은 영토는 모두 거의 야만에 가까운 시대였다.
이들 보다 훨씬 북쪽에 살던, 비록 야만적이기는 하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호전적이며 단합이 잘되는 부족에게 위험이 닥쳤다. 꿈속에서도 보지 못했던 저승사자 같은 철제무기로 무장된 어마무시하고 잔인한 무리가 느닷없이 딴 세상에서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훈족의 등장이었다.
세계사는 이 사건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훈족의 등장에 게르만 민족은 부랴부랴 남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뿔뿔히 흩어졌다. 고트족은 바로 그 게르만 민족의 한 부족이었다.
로마의 경계에 도착한 고트족은 동과 서로 나뉘었다.
하여 로마의 허락하에 독일 지역에 정착한 부족이 바로 서고트 족이다. 오랜 세월동안 로마에 괴롭힘을 받던 서고트는 동서로 분할하여 쇠락해져 가는 서로마를 침공하여 마침내 멸망 시키고 만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에 유수타니우스라는 훌륭한 왕이 즉위하여 '옛 로마영토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돌격해 오니........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눈덮인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망을 쳤다.
이들은 포에니 전쟁 이후로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로마의 잔존 세력을 물리치고 서기 410년 경에 서고트 왕국을 세우고 톨레도를 수도로 삼았다..
오랜 세월동안 로마제국과 교류하며 살아온 서고트는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그리 오래지나지 않은 서기 360년 경에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 마침내 톨레도에서 왕국을 건설하고 지금의 대성당 자리에 서고트 족의 신앙성소를 차렸다면....... 이는 당연히 교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기 410년 경에 톨레도에 첫 교회가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스페인의 역사는 모든 부분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서고트가 동서로 분리된 로마제국과의 틈바구니에서 기독교를 받아 들였을 때, 지금의 스페인 종교인 (로마 카톨릭)은 힘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서로마는 이미 멸망하였고,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이전한 동로마의 교권은 모두 (로마 카톨릭)과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던 (그리스 정교회)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고트 족이 받아들인 기독교는 바로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 정교회적인 신앙)이었다. 아울러 이 당시에는 종교적 교리 타툼이 역사상 가장 치열하여 (성 삼위일체 교리)를 놓고 '아나타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가 극렬하게 다투었는데........ 서고트족이 받아들인 기독교는 그리스 정교회 였을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아리우스파 교리'를 따랐던 것이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결과로 아나타시우스파가 승리하였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쫓겨나고 처형되었다.(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논리로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다) 스페인의 토착민들 사이에는 서서히 로마 카톨릭 신앙이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서고트 족은 꿋꿋하게 아리우스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 기간은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이어졌다.
100년이 훨씬 지난 587년에서야 비로소 서고트의 왕인 (레카레드)가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이후 기독교 신앙의 통일을 위해서 헌신하였다.
이제부터는 톨레도 대성당이 제대로 로마 카톨릭 교회였다고 해도 무방하지 싶다.
서기 711년 지중해를 건너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이슬람군(무어족)이 과달레테 전투에서 서고트의 왕 로데릭이 이끄는 군대를 물리쳤고, 이후 약 7년 만에 리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간다. 이는 1492년까지 이어진다.
이제 서고트 족의 교회는 이슬람의 모스크로 개축되었다.
이사벨 여왕이 주도한 (레콩키스타) 운동의 결과로 마침내 1492년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을 점령함으로써 오랜 기간동안 벌였던 '카톨릭에 의한 국토 회복운동'은 승리의 결실을 맞이했다.
톨레도의 모스크는 또다시 수리를 시작했다. 이번엔 '톨레도의 대성당'으로 옷을 바꾸어 입게 된 것이다.
이것을 과연 이슬람과 카톨릭의 아름다운 융합으로 탄생한 아름다운 새로운 문화라 할 수 있을까?
레콩키스타가 성공하자마자 이사벨 여왕은 인류 최초로 '종교 재판소'를 개설했다.
이 아름다운 문화의 전당인 (톨레도 대성당)에서 종교 재판을 열었고, 숱한 고문과 탄압과 처형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다.
이슬람 왕조들이 약 750년간 리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루투갈)를 다스리는 동안 유럽 본토는 비록 혼란스러웠지만 멀리 떨어진 리베리아 반도만은 지극히 평온했다. 역사는 이런 시기를 태평성대라고 기록한다.
이슬람 왕조는 '리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는 사람이 이슬람인 자신들이라는 것'과 '정해진 규율에 의해서 정당하게 세금만 납부하면' 그들의 민족이 누구이며, 그들의 종교가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등에 관해서 전혀 간섭하지를 않았다. 오늘날의 민주 자본주의 같은 통치 스타일이었다.
지배자이자 세금 징수자는 이슬람 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피지배자이긴 했으나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종교적 자유와 사회활동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 받았다.
그러자 이들 사이로 많은 자본을 가진 유대인들이 대거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시나고그(유대인 예배당)을 여기저기에 세우고 시장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갈등이나 타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슬람 지배세력이 세급 징수 외에는 종교와 생활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달라진 레콩키스타 운동 이후의 스페인.........
어떤것이 더 좋은 인간중심의 세상일까?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그분이 허락하시고 바라시는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슬람 왕조 시대의 리베리아 반도일까?
아니면, 이사벨 여왕이 집권한 후의 종교재판이 난립하던 시기의 스페인일까?
나는 안다.
적어도 나는 확실하게 자신한다.
어떤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성당을 나와서 산 살바도르 거리를 지나 콘테 광장을 만나는 곳에 '토메 교회(Iglesia de Santo Tome)'가 있다.
무데하르 양식의 멋진 탑이 있는 이 교회를 찾아가는 여행자들의 목적은 대부분이 오로지 한가지 뿐이다. 엘 그레코를 또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교회지만 톨레도를 찾는 여행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토메 교회에는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란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엘 그레코'를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프라도에서 만날 미술가가 너무도 많아서 '톨레도의 엘 그레코'라고 불리워 지는만큼, 이곳에서 엘그레코의 대표작을 통해서 잠시 만나보는 기회를 가져보아야만 하겠지 싶다.
'엘 그레코(El Greco)'를 말할 때 '최후의 매너리즘 화가이자 최고의 매너리스트' 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된다.
하지만 미술사 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일상생활 속에서도 '매너리즘'이란 단어는 그리 예뻐보이지만은 않은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오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엘 그레코를 비롯한 이들 매너리즘 미술가들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매너리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대단히 활발하게 벌어진 이후에 이들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이미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여행에서 '파르미지아니노'의 (목이 긴 성모)라는 작품을 통해 살짝이나마 매너리즘에 대해 이야기 한 바가 있다.
너무도 유명한 화가들에 의해서 정점을 찍은 '르네상스 미술'은 이미 스스로도 너무나 고정화된 어떤 틀'을 고착시켜 버렸고, 이 틀에서 벗어난 사조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도 수집가에게 팔려가지도 않게 되었으며, 이는 르네상스 시대가 급격하게 쇠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르네상스란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완성도' 보다는 '어떤 메시지'나 '정제된 표현' 내지는 '과감한 혁신'을 앞세운 '반 기교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부터 '매너리즘'이란 단어에 조금은 긍정적인 의미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미술 사조의 출발이었다. 엘 크레코가 지적받은 스케치의 부족함 처럼, 어떤 기교가 부족하거나 완성도 면에선 조금 이상해 보이더라도, 끊임엇이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는 것이, 이미 정해진 틀이나 기교를 반복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이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사조였다.
폰토르모. 파르미지아니노. 피오렌티노. 브론치노 등이 여기에 속하였으며, 후기의 미켈란젤로. 틴토레토. 주세페 아르침볼로. 바사리 등도 매너리즘 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바로 '엘 그레코가' 서 있는 것이다.
베네치아의 통치하에 있던 그리이스 크레타에서 출생한 엘 그레코는 성장하면서 당연히 만연해 있던 비잔틴의 전통 아래서 르네상스풍의 공부를 했었을 것이다. 나이 스므살에 베네치아로 건너 온 그레코는 타치아노. 틴토레토를 비롯한 이미 정평이 나있는 베네치아 미술파 화가들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10년 후에는 로마로 가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들을 만나게 된다.
서른 중반에 나름의 미술적성취를 얻은 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들른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톨레도에 반해서 그만 죽을 때 까지 이곳에 머무르면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그가 톨레도에 정착하였을 당시 스페인은 르네상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적이나 미술사적 입장에서 너무나 변방이었다. 그런 그가 왜 베네치아를 떠나 톨레도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우선은 종교적 이유에서 였을것이다.
다음으로 안달루시아의 빼어난 풍광과 톨레도 특유의 전통 보수적인 분위기 아니었을까?
르네상스와 함께 온 유럽에는 '종교 개혁'의 광풍이 몰아닥쳤다. 30년 전쟁은 온 유럽을 깊은 재앙의 수준으로 끌어들였다. 베네치아는 당시 종교개혁의 열풍이 휩쓸고 있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크레타인 처럼 지고지순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레코에게 '종교 개혁'의 광풍은 여러모로 그를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하여 그는 베네치아를 떠나 귀향길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은 전혀 달랐다.
온 유럽을 뜨겁게 달구는 '종교 개혁'의 열기가 스페인 에서만은 어디에서도 눈을 뜨고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스페인 특유의 정서적 풍토는 '반종교개혁'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오늘날에도 같은 카톨릭 국가이면서도 여타의 다른 유럽 국가들과 어딘지 다르게 느껴지고 다가오는 '스페인의 카톨릭 신앙'의 모습이다.
그레코는 스페인에서 정신적 안정과 평안을 되찾았다. 그래서 그는 톨레도에 정착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이런 스페인에서 받은 특이한 정서는 원숙미를 더해만 간다.
하지만 그가 스페인에서 행복하기만 한것은 결코 아니었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낯선 타향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개에는 '엘 그레코는 영원한 크레타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도 그런 사실을 알았다. 하여 그는 죽는 날까지 톨레도에서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였음에도 끝내 자신의 작품에 그리이스어로 서명을 남겼다.
또한 그는 평생을 통해 그림때문에 송사를 많이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나 영국이나........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후원자나 발주자의 요청에 따라 작품의 내용에 따라 먼저 금액을 정하고, 작품값의 전액이나 일부 선금을 받고 그림을 그린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에게 아예 다섯작품, 열작품씩 선매도후 작품 제작에 착수하기도 했다.
그런데 스페인만은 작품 주문이 주어지면 일단 작품을 완성한 후에 주문자와 작가가 마주앉아서 가격을 흥정했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주문자는 터무니 없는 싼 가격에 작품을 거져 가져가려고 했다. 미술가의 이름이나 자부심 값은 어디에도 없고....... 원가에도 못미치는 가격을 제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엘 그레코가 톨레도에서 처음으로 그린 톨레도 대성당의 (의복을 빼앗기는 그리스도) 그림도 같은 예였다. 주문시에 보상 가격을 암시했던 교회는 완성된 작품을 놓고 1/4 가격을 제시했다.(우리나라에서는 장례때 물품이나 제사상에 오르는 물품 가격은 한푼도 깍지않는 전통이 있것만) 교회가 예배당의 제단에 걸려고 주문한 성화의 가격을 후려쳤다는 사실에 실소가 터져나온다.
막말로........ '그게 어디 제 돈인가?'
결국 이 사태는 송사로 까지 번진다. 크레타 출신의 이방인 화가가 스페인 총대교구 성당과 재판을 벌인 것이다. 판결의 결과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사태로 (의복을 빼앗기는 그리스도)는 유명세를 탔고, 그레코의 몸값은 치솟았고 사방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또 그 결과로 죽을때까지 그림때문에 툭하면 재판이 벌어졌다.
그랬으니 그레코의 톨레도 생활이 남들이야기처럼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
엘 그레코가 그린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그 크기가 매우 큰 대작이다.
이 그림의 중세의 어느 기증자의 높은 덕과 깊은 신앙심을 찬양한 것으로, 장례에 성 스테파노와 성 아우쿠스티누스가 하늘에서 내려와 직접 그들의 손으로 유해를 묻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것이다.
둘러싼 여러 지방 귀족들과 승려들의 표정 묘사가 너무도 생생하다. 죽은 자가 입고 있는 값옷과 장례를 치루는 두 사람의 황금빛 법의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채외 질감은 바라보고 있는 나의 고개를 저절로 절래절래 흔들게만들기에 충분했다.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상반부의 그림에선 마치 별도의 또 다른 그림인양, 죽은 망자의 영혼은 이미 한 천사에 의해서 천국으로 옮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엘 그레코의 놀라운 점은 그림속이 아니라 전혀 다른 부분에서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가 있다.
가만히 시선을 접고 서너걸음 뒤로 물러선 후에야 확연하게 어떤 느낌을 깨닭을 수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말이 옳았다.
순간 나의 뇌리 속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있는 '마사치오'의 (성 삼위일체) 그림이 떠올랐다.
이 그림들은 모두 커다란 하나의 창과 같이 예배당의 한쪽 벽면을 완전히 찾이하고 있다.
그리의 밑은 지면에서 내 키만큼(180cm) 위에 있기 때문에 그림의 상반부를 볼려면 예배당 천장을 올려다보듯이 고개를 쳐들어야만 한다.
이는 마치 상반부의 공간이 천국을 올려다 보는것처럼 무한한 착각을 무의식중에 불러일으키게 하고, 하반부의 장례를 치루는 인물들은 마치 어떤 무대 위에 올려져 있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들의 발이 모두 그림의 액자에 의해 끊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단의 검은 돌 안내판은 마치 그림속의 성인들이 죽은 자를 넣고 있는 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나의 공간에서 하나의 그림을 보면서, 마치 세개의 각기 다른 그림이나 차원을 목격하고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마치 르네상스의 시작을 있게한 산타 미라아 노벨라 성당에 있는 '마사치오'의 (성 삼위일체)를 보고 있는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산토 도메 성당을 나와서 우리는 톨레도를 감싸고 있는 성벽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다라 걸으면서 성벽 밖으로 펼쳐진 톨레도의 외곽 풍경을 감상하면서 걷다가 대성당만큼이나 웅장해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과 마주쳤다.
이슬람과 카톨릭 건축의 아름다움이 융합되었다고는 하나, 톨레도의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고딕 양식과 무데하르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되어 있으면서도 단연 고딕 색채가 강한것이 특징이었는데, 유독 이 건물만은 무데하르 양식이 외부적으로 단연 돋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산 후안 데 로스 레예스 수도원(Monasterio San Juan de Ios Reyes)'.
스페인과 포루투갈 간의 토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제까지의 톨레도 건축물과는 다르게 고딕 양식에 르네상스 양식과 무데하르 양식을 골고루 사용하였는데, 그 독특한 모양이 매우 아름다워서 이를 전쟁을 주도하여 승리로 이끈 여왕의 이름을 따서 '이사벨 여왕양식'이라고 명명했다.
1층과 2층을 긴 회랑으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에 '파티오(실내 정원)'를 아름답게 꾸며 놓았는데 짙푸른 오렌지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싱싱한 오렌지들이 아주아주 인상적인 아름다운 파티오 였다. 설계하고 건축하고 이제가지 관리하는 사람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나의 느낌으로는 '톨레도 대성당' 보다도 오히려 마음에 담아가고픈 명소였다.
입구쪽 회랑의 벤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육중한 나무문 안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수도원 관람을 마친 우리는 마을길을 돌아서 수도원 옆의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 수도원에 속한 교회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고, 그 앞에 팜플렛을 들고 안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교회당은 현재에도 현지 주민들의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중이었고 지금은 미사 시간이었다. 우리는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여행자 차림으로 불쑥 나타난 이방인에게 잠시 시선이 쏠렸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뒷쪽의 자리에 앉아서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비록 카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같은 신을 믿고 있는 같은 신앙인이기 때문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대부분 쏟아져 나간 다음에 우리가 성당을 둘러보고자 했을 때, 서너명의 신도들이 다가와 악수로 인사를 나누고 어디서 왔느냐는 등의 인사를 나누었다. 고마운 환대였다. 그들이 저마다 스페인어로 성당 안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해주었고, 스페인어를 모르는 나는 그저 환한 미소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뿐이었다.
교회는 웅장했지만 생각보담 간촐했다. 모처럼 유럽식 교회에서 동양적인 여백의 미를 느껴볼 수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웅장함을 강요하는 교회들 보다, 저절로 엄숙해 지는 이런 교회 분위기가 나는 너무도 좋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평온이 우리를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었다.
'엘 그레코의 집'을 지나치면서 잠시 망설였지만, 산타 크루스 미술관과 대성당과 산토 토메 성당에서 만났던 엘 그레코의 대표작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갈증은 이미 말끔하게 치유가 된 후이기 때문이었다. (톨레도의 풍경과 지도)라는 대표작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의 작품을 모두 쫓아다니면서 관람하기엔........ 심지어 (톨레도의 전경)이라는 또 하나의 대표작은 미국에 가 있다.
엘 그레코가 생전에 워낙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라, 스페인의 미술관이나 박물관 치고 그레코의 작품 한둘을 소장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부족한 나머지를 충족 시켜 보기로 하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아직은 톨레도에서 꼭 보아야만 할 명소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골목 투어를 계속하면서 유대인 지구에서 지금은 비록 카톨릭 교회로 변모했지만, 여전히 유대교 예배당인 '시나고그'의 흔적과 나름의 멋을 간직하고 있는 '트란시토 교회와' '산타 마리아 라블랑카 교회'를 둘러 보았다. 그런데 이곳의 사진들도 모두 통째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오호 통재라!)
우리는 톨레도 성의 서쪽 문에 해당하는 '캄브론 문'을 통해서 성 밖으로 나왔다.
자동차들이 계속 오가는 언덕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걸어내려갔다.
마침내 연한 적갈색의 색채를 은은하게 발하고 있는 육중한 골격을 가진 거대한 성문이 앞을 가로 막았다.
성 안에서 보이는 두개의 무거운 뾰족탑을 가진 성문이 바로 원조 '비사그라 문(Nueva de Bisagra)' 이다. 그리고 안쪽으로 약간의 공간을 두고 양쪽으로 마주본듯한 두개의 타원형 망루를 가진 육중한 볼륨으로 여행자의 시선을 압도하는 것이 바로 새로지어진 '뉴 비사그라 문'이다. 대충 보자면 그냥 하나로 합쳐진 하나의 성채로 보일 뿐이다.
톨레도의 성채 언덕에서 밖을 내다보면 사방으로 온통 붉은 황토의 대평원을 만날 수 있다. 이슬람 사람들은 이 평원을 '사그라'라고 불렀고, 그 의미는 '붉은색'을 뜻한다. 톨레도 에서 바라다 보이는 카톨릭 세계인 본유럽은 모두 북쪽에 있있다. 이 문은 톨레도 성의 북쪽에 있는 북문이다. 성채와 평원을 갈라놓는 붉은 빛을 띤 성문이라 해서 (비사그라)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던 성문을 카를 5세(카알 대제)가 자신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로운 비사그라 문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스페인 왕가를 상징하는 쌍두독수리 문양이 성문 위로 한껏 위엄을 뽐내면서 내걸려있다.
이 쌍두 독수리가 스페인 왕가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카알 5세는 스페인의 왕이면서 동시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직함을 가진 사람이 바로 카알 대제였기 때문이다. 그의 영토와 그가 봉직한 직함을 나열하려면 아마도 A4지 한장은 가득 채워야 하지 않을까?
비사그라 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왔다.
톨레도의 구시가....... 톨레도 성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에서 겨우 빠져나온 느낌이 든다.
성채 밖의 풍경은 이제까지와 너무도 다르다.
오후의 시간이 한참이나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스페인의 오후는 역시나 뜨겁고 무덥다. 5월 중순의 날씨기에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여행기를 쓰고 있던 6월 하순의 어느날 뉴스에서....... '스페인의 날씨가 43도를 넘어서 거의 여행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아직 톨레도에서 가보아야 할 곳이 두 군데 남아 있었다.
타호강 위로 톨레도 성채의 역사와 함께한 가장 오래된 다리인 (알칸타라 다리)를 보고 싶었다. 그런가 하면 후에 고딕양식으로 아주 멋지게 새로 놓여진 (산 마르틴 다리)도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더운 날씨가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고 있고 반대편에 떨어진 두 곳을 모두 걸어서 찾아가기에는 시간이 넉넉치 않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결국 우리는 (알칸타라 다리)를 향해서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대식 다리를 건너 아란후에스 방향의 철도역 인근 마을을 거슬러 올라가는 노선을 택했던 것이다.
강을 건너면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알칸타라 다리는 이미 너무도 멋진 풍광을 지친 여행자에게 청량음료처럼 선사해 준다. 그래도 무더위는 무더위다.
철도역 근처의 마을을 지나면서 생수를 살 수 있는 가계를 찾는데 어디에도 없다. 모두 문을 굳게 닫았다. 마침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흐르는 땀을 손으로 씻으면서 마침내 알칸타라 다리에 도착했다.
톨레도 여행 최고의 뷰 포인트로 여행자들의 사랑을 듬쁙 받고있는 명소이다.
'알칸타라 다리(Puente de Alcantara)'는 아랍어로 '교량'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 역사적인 다리의 기원은 로마시대로 까지 올라간다.
로마가 톨레도에 병영기지를 건설했을 때부터 톨레도로 접근하는 동쪽의 유일한 통로 구실을 해왔던것이다.
이곳에서 바라다보는 톨레도는 천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런데 문제는 더위와 갈증이었다.
주변을 오고가는 수많은 여행자의 손에 생수병을 든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그럳다 마침 뒷쪽 언덕의 뷰 포인트를 올라가는 길에 어느 독지가가 수백년 전에 기증한 '나그네를 위한 샘' 이라는 이름의 수돗가가 눈에 띄었다. 살펴보니 깨끗하고 말끔이 정리되어 있는것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가서 수도 꼭지를 틀어보니........ 맑고 시원한 수돗물이 콸콸콸 쏟아져 나왔다. 나그네나 여행자를 위해서 이 샘물을 기증하게 된 사연이 표지판으로 새겨져 있었다.
기꺼이 마셔주어야 겠다는 확신이 섰다. 가뜩이나 목말라 하던 중에 달콤한 단비 같은 생명수라 하겠다. 우리는 실컷 마셨다.
그리고 톨레도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함께 마음껏 즐겼다.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의 숙소로 돌아왔다.
톨레도 여행은 충분히 매혹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만큼 아름답고 즐거운 나들이였다.
그런데........
아뿔싸.
밤이 시작되면서 우리 두사람 모두 설사가 시작되었다.
챠밍여사는 낮에 소코도베르 광장에서 오징어 먹물 빠에야를 먹었을때 해산물에서 약간의 냄새가 났었다고 했다.
나는 알칸타라 다리에서 마신 샘물을 의심했다. 여행에서 물을 갈아 마신다는것은 항상 약간의 위험을 각오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태는.........
우리의 여행을 깊은 수렁으로 빠트리고 말았다.
오.마.이.갓.
--- 다음 여행기에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