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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석장리 타제석기
흥수아이
그렇게 지나간 2019 그리고 새해
송내관의 재미있는 「한국사 기행」
내관(內官)이란 벼슬은 백제시대부터 궁중의 일을 관장하던 관직, 고려시대에는 숙직을 하면서 국왕의 시종·호종·경비 및 왕명의 전달, 의장(儀仗)등의 사무를 맡아본 내직이었다. ‘송내관’은 작가 자신을 자칭해 말한 것으로 작가 송용진은 서울예고와 중앙대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영국 그리니치대학과 대학원에서 아트매니지먼트를 공부하기도 했으며, 조선궁궐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사 전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다.
작가는 나름대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책을 기술하려고 했다고 하면서, 1) 역사는 쉽게 읽혀야 하고 또 부끄러운 것이든, 자랑스러운 것이든 제대로 알아야 우리의 미래가 더 밝아질 수 있다. 2) 역사는 스포츠 경기와는 달리 결과보다는 원인이 중요하므로 사건의 흐름을 구슬을 꿰어가듯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해 기술했다. 3) 흔히 역사교훈을 먼 미래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 이 순간도 내일이면 역사가 된다. 근·현대사에서 역사의 교훈을 찾고자 노력했다.”고도 했다.
한국사가 지구의 탄생과 같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지구의 탄생 없이 한국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하면서 지구의 탄생을 살펴보고 나서 한국사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했는데 좀 엉뚱하지만 맞는 말인 듯하다.
“처음에 우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힘에 의해 불덩어리행성인 태양이 생겨났습니다. 태양 속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 있었지요.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지구는 아직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5억 년 쯤 뒤에 태양주변을 돌아다니던 암석덩어리들이 모여서 지구라는 행성이 되었습니다. 지구는 태양처럼 용암 덩어리들이 이글거리는 것이었는데 표면 온도가 1200도가 넘었다고 하니 아직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와중에 지구와 비슷한 위성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바로‘달’이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의 불덩어리에 지나지 않던 지구가 점차 식으면서 생명체가 생기게 된 결정적 원인은 바로 물이었다. 물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우주를 돌아다니던 암석덩어리가 지구에 떨어질 때 암석덩어리들이 물 입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물은 H2O, 즉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운석들이 그것을 날라 온 것이다. 물은 점점 많아져 바다를 이루었는데 지구가 생기고 물이 생성될 때까지 약 5억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구에 바다가 만들어지고 다시 수억 년이 지나고 나서도 지구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는데 이때 지구중심의 핵이 바다를 뚫고 폭발하면서 지구에 화산섬들이 만들어졌다. 이 무렵에는 지구로 날아온 암석들이 물과 결합하여 아미노산, 즉 원시단백질을 만들었고 지구 속에서 터져 나온 용암은 물과 만나 철과 같은 다양한 물질을 만들었다. 35억 년 전의 바다 속은 단백질과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물질들로 가득해졌다. 여기에 햇빛이 내려쬐이면서 바다 미생물들은 광합성으로 진화하여 식물들의 조상인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원시식물을 만들었다.
‘스트로마톨라이트’가 광합성을 일으키며 물속의 산소가 풍부해지자 산소가 물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이로써 지구는 햇빛과 물과 산소까지 풍부해진 행성이 되었다. 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지구중심의 힘은 화산섬들을 움직이게 하였는데, 무려 4억년 동안 서로 밀고 당기고 붙고 하여 지금과 비슷한 대륙이 이때 형성되었다.
지구에서 무려 35억년 동안을 난세포 단백질로 살았던 생명체는 다세포 단백질로 서서히, 아주 천천히 진화했다. 그리고 5억 7천만 년 전, 따뜻한 수온과 풍부한 산소로 인해 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는 최적 환경이 만들어지자 생명체들의 크기 또한 다양해져서 박물관에서 화석으로 볼 수 있는 ‘아노말로카리스’와‘삽엽충’등이 생겨났다.
이 무렵 하루가 다르게 바다 속은 진화를 거듭했으나 육지는 조용했다. 그것은 햇빛이 너무 강하고 빛이 방사능 물질을 함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다 속의 식물들이 광합성으로 산소가 늘어나 산소가 육지에까지 퍼져 올라오고 산소가 햇빛과 결합하는 과정에 오존층이 생겨 방사능을 차단해 줌으로써 바다에 살던 생물들이 육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처음에 육지로 올라온 식물은 이끼였으나 차츰 열대우림으로 변해갔다. 거대한 식물은 석탄과 석유, 가스를 만들었으며 오늘날 우리 인간은 해마다 석탄 50억 톤, 석유 4조 8000리터, 천연가스 3조 세제곱미터를 캐내고 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지구의 탄생과 지구에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하겠다. 후에 공룡의 시대, 쥐와 미어켓 같은 설치류의 시대가 있었고, 공룡이 멸종하고 수천 만 년이 지난 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 만 년 전, 지구의 겉 표면은 안정되어 보였지만 내부는 용암이 요동치면서 서로 마주보고 있던 아시아와 인도대륙이 부딪쳐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 민속놀이 ‘고싸움’처럼 가운데가 솟아올랐는데 그 높이가 무려 8,000m, 그때 만들어진 산맥이 히말라야고 에베레스트 산이다. 이 산은 인더스, 겐지스, 황하 등 여러 갈래 강을 만들고 찬란한 인류문명을 낳고, 지구인구의 절반을 먹여 살리고 있다.
에베레스트 산이 형성되는 동안에도 살아남은 포유류종인 설치류들은 차츰 진화해 인류의 조상쯤 되는 원승이로 진화하지만 이때까지도 우리가 생각하는 인류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리고 500만 년 전, 네 발을 사용한 원숭이들이 반 직립보행을 하는 동물로 진화한다.
1990년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서 44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으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지금의 인간모습과는 달랐는데 아마 이때 인간은 영화 「혹성탈출」에 나오는 인간 모습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150만 년 동안 원숭이는 진화했고 드디어 25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랄 수 있는 ‘오스트랄로피테구스’라는 원시 인류가 나타났는데 그는 다리의 힘만으로 뛸 수도 있고 또 생각할 수도 있는 지능을 소유한 유인원이었다. ‘오스트랄로피테구스’는 100만 년 뒤에는 불을 발견하고 사용할 줄 아는 ‘호모에릭투스’로 진화했다.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처음 등장해 430만 년이 지난, 70만 년 전 ‘호모에릭투스’는 처음 한반도에 입성하게 되는데 한반도에 입성한 ‘호모에릭투스’는 의도적으로 돌을 깨어서 만든 인류 최고의 발명품 ‘주먹도끼’를 사용했다. 그것은 오늘날 스마트폰 혁명과 맞먹는 것으로 연천 전곡리에서 발견된‘주먹도끼’가 그것이다. 전곡리‘주먹도끼’는 30만 년 전에 만든 것으로 이것은 한반도의 문명이 아프리카나 유럽보다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 겨우 7만 년 전에 만들어진‘주먹도끼’가 발견되었으므로 비교 될 수 없는 유물이다. (사진 참조)
‘호모에릭투스’가 불을 품에 안고 다니면서 감자나 고기를 구워먹고 ‘주먹도끼’를 사용해 무엇을 자르거나 다듬고 있을 무렵 더 진화한 ‘호모사피엔스’는 나뭇가지를 비벼서 불을 피우고, 뾰족한 돌을 다듬어 나뭇가지 끝에 묶어서 ‘슴베찌르게’라고 하는 도구를 사용했는데, 이는 또 다른 혁명이었다. 그렇지만 호모와 사피는 서로 종이 다른 유인원으로 호랑이와 사자처럼 같은 ‘고양이과’지만 자연교배가 불가능한 것처럼 둘은 결합하지 못하고 결국은 ‘호모에릭투스’는 도태되었고 ‘호모사피엔스’가 현세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한반도에 조상들이 산 것은 평양 근교 ‘검은모루 동굴유적’과 전곡리 유적에서 찾을 수 있고, 충남대 박물관에 가면 4만 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흥수아이’를 만날 수 있는데 흥수아이는 당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30여 년 전 김흥수라는 분이 충북 청원의 한 동굴 속에서 어린아이 뼈 화석을 발견했는데 조사결과 유골의 가슴부분에서 국화 꽃가루가 나왔다. 이는 사랑하는 아이가 사고로 죽자 그 부모는 가슴이 아파 시신에 국화꽃을 뿌린 것으로, 이 호모사피엔스 이름을 최초 발견자 이름을 따 ‘흥수아이’라고 부른다.
흥수아이가 죽고 3만 년쯤 지난 7,8천 년 전, 신석기인들도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했는데 어떻게 그 큰 고래를 잡았을까 궁금해진다. 울주‘반구대암각화’는 정교하게 그려진데도 놀라지만 여러 가지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는데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실물을 만져보고 생태를 알기 전에는 그리기 어려운 그림들이다.
고래잡이는 고래가 혈우병(피가 멈추지 않는)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래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창과 작살로 찌르기를 반복하고 참을성 있게 배 위에서 기다린 것인데 출혈을 계속한 고래는 결국 배를 드러낸 채 죽는다. 고래잡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고래의 모습과 잡는 방법을 바위에 새겼다. 국보 285호 반구대암각화에는 고래뿐 아니라 호랑이, 돼지, 물개, 거북이 같은 다양한 동물들과 배를 탄 사람, 그들이 사용했던 활, 작살, 그물까지..., 신석기 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사 이야기로 들어갈 것인데 아직도 신화에 불과하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는 고조선의 역사부터 전두환, 박근혜까지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을 것 같다. 다 아는 이야기 아니냐며 덮어버리고 가거나, 알아낸들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내가 몰랐던 것은 한번쯤 짚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조선’(조선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고’를 앞에 붙인 것)은 강력한 통치제도와 안정적인 사회시스템이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운 나라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의 「8조 금법」에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도둑질한 자는 50만 전의 돈으로 갚거나 노비가 된다.”라 했다. 이것은 중국측 기록(한서지리지)으로 고조선은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사유재산을 인정했던 나라였고, 막연히 곰의 자손이라고 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다.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에 불과하다며 논문을 발표하고 ‘동북공정’이란이름으로 역사왜곡을 꽤하고 있는 중국에 대하여는 대응방법도 연구해야겠지만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아야 대응방법이 나올 것이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에 가면 장군총을 비롯한 수많은 돌무덤들이 널려 있다시피 하다. 그런데 돌무덤들은 땅을 파서 죽은 사람을 묻는 토광묘가 아니라 돌을 쌓아 올린 적석묘다. 중국에는 적석묘가 거의 없다는 것. 고구려의 성은 모두 치(雉)가 있으나 고구려와 맞섰던 수나라나 당나라의 성에는 치가 없다는 것, 치는 적이 성문으로 달려들면 성 위 세 방향에서 적을 막을 수 있게 만든 성 돌출부를 말한다.
수나라가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했음에도 을지문덕에게 대패하는 등 실패하여 당나라에게 망했는데 당나라 또한 고구려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고구려를 여러 차례 침공했다. 이에 고구려는 연계소문으로 하여금‘천리장성’을 쌓게 하여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만약 고구려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면 국경선으로 장성을 쌓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천리장성’은 압록강 북쪽에 쌓은 성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 그 땅에 세워진 발해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698년 옛 고구려 땅에 떠돌던 유민들을 모아 대조영이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발해다. 발해는 227년 뒤인 925년에 거란에 망했다. 그런데 발해에 대해 《삼국사기》도 《삼국유사》도 일언방구가 없다. 발해가 망하고 900년 뒤인 조선 정조 때 유득공이 《발해고》라는 책을 쓰고는 여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 대조영이 북쪽을 차지하고 발해라 했으니 남쪽의 신라, 북쪽의 발해 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당시 발해와 신라에 역사서들이 있었을 텐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고 했다.
‘발해(渤海)’가 우리역사라고 하는 증거는 수두룩하다. 당나라 역사서 《구당서》에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하고, 발해, 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고 했다. 별종은 한 종족이란 뜻으로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발해는 중국과 달리 온돌을 사용했는데, 《구당서》에도 고구려인들의 특이한 난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겨울철에 구덩이를 길게 파서 그 아래에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한다.”고 했는데 고구려인의 후손들인 발해인도 당연히 온돌을 사용했고 그 흔적은 수없이 많다. 또 발해의 무덤양식은 고구려와 같은 적석묘에서 점차 돌방무덤 형태로 바뀌었고, 또한 대조영의 후손인 태씨(太氏)족보에 “태조 왕건이 발해국 세자 대광현과 유민들을 모두 받아 주고 세자를 족보에 등록시켜 태씨 성을 하사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왕건이 발해가 고구려의 후손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일본의 기록에도 발해가 고구려를 이은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일본서 작성된 문서에 “758년 고구려에 무사히 다녀온 사신을 승진시켰다.”고 했다. 이는 사신이 고구려에 갔다 왔다는 기록으로 이때는 고구려가 망한 뒤라 ‘발해’라고 해야 함에도 익숙했던 대로 고구려하고 한 것이다.
475년간 지속되어 온 고려는 공민왕대에 와서 원나라 간섭을 배격하고 자주독립국가가 되고자 하였으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권문세가들의 저항으로 결국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할 때 길재, 정몽주 같은 충신도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고 이성계를 부추긴 신흥세력인 정도전 등이‘조선’을 탄생시켰다는 것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신하의 나라를 꾀한 정도전에 맞서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 이방원의 철퇴에 정도전의 시대는 얼마 가지 못했다.
조선 중기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할까, 가장 비굴하고 치졸했던 시대는 드라마로도 여러 번 리바이벌 된 문정왕후와 정난정, 일제가 붕당정치라고 비꼬았던 당파싸움, 선조가 이순신을 백의종군시킨 역사적 사실 아닐까 싶은데 그 부분을 함 보자.
「경국대전」을 완성하는 등 나름 치적이 없지는 않지만 우유부단했던 중종은 늦깎이로 세자를 얻었다. 그런데 세자가 태어나자 말자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승하했다. 그러자 중종은 새로 문정왕후를 왕비로 맞았는데 이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을 낳자, 세자는 구박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새엄마가 자기아들인 경원대군만을 총애했던 것이다.
이에 세자의 외삼촌 윤임은 세자를 끝까지 보호해 다음 왕으로 만들려 하고, 경원대군의 외삼촌 윤원형은 세자를 쫓아내고 조카인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고 싶어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둘을 ‘대윤’과‘소윤’으로 불렀다. 둘의 싸움이 가관이고, 와중에 중종이 승하하면서 옥새를 세자에게 넘기니 그가 12대 인종이다.
인종이 즉위하자 아버지 중종 대에 쫓겨난 사람파를 다시 부르고 외척들은 궁궐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등 바른 정치를 하고, 늘 검소하게 생활하고 여자들을 멀리했다. 그런데 젊은 인종이 후사 없이 승하했다. 항간에는 계모인 문정왕후가 독살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증거는 없었다.
인종의 승하로 배다른 동생 경원대군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13대 명종이다. 그러자 문정왕후는 때를 만난 듯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벼슬아치들은 부정부패로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임꺽정이 의적으로 불리며 활개 치던 때가 바로 이때이다. 임금노릇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명종도 역시 후사 없이 어린나이에 죽으면서 조카 하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명종의 아버지이던 중종은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와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외에도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이중 창빈안씨의 아들 덕흥대군의 아들이 ‘하성군’이었다. 그가 14대 선조다.
조선왕조 개국 후 최초로 후궁의 손자가 왕이 된 선조는 어릴 때는 꽤 똑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는 가지고 있었으며 나름대로 학문과 토론에 남다른 견해를 갖고 배움을 사랑했는데 그러자 지난 100년 동안 훈구파에게 시달림을 당해 기묘, 을사 등 사화를 입었던 사림파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선비들이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계파가 형성되었고, 사상이 서로 달라 ‘사물을 볼 때 외면을 중시하는 율곡 이이의 주기론’을 추종한 사람들은 주로 궁궐의 서쪽에 살았으므로 ‘서인’이라 불렀고, ‘외면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본 퇴계 이황의 주리론’을 추종한 선비들은 주로 궁궐 동쪽에 살았으므로 ‘동인’이라 불렀다. 이를 ‘붕당(朋黨)이라 하기도 하는데 요즘 보는 정당정치의 시작이었다.
1392년 조선개국 이래 꼭 200년만인 1592년 일본에 의해 거들 날 뻔한 ‘임진왜란’에 대해 우리는 이순신의 해전승리, 백의종군, 권율의 행주산성 싸움,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을 기록하고 또 기억하고 있지만 일반 백성들의 처참했던 모습은 제대로 기록하지도, 기억하지도 않는 것 같다. 몇 년 전에 동래구 수안동 동래경찰서 개축과 부산지하철 4호선 공사로 땅을 파자 나온 시신들..,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살해된 현장은 다 발굴하기조차 버거워 그냥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요즘의 홍콩 사태나 우리의 지난시절을 뒤돌아보면 지도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나라를 잘못 다스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 것 같다. 다가오는 선거 하나 하나가 그만큼 중요해 지는 시점이다. 역사를 똑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눈 바로 떠야할 때다.
여기에서 100년 전의 역사 하나를 짚어봐야 할 것이 있는데 학교에서 배우기도 하는 ‘백두산정계비’다. 백두산정계비는 영토의 경계를 나타낸 것으로 숙종 때 세워졌다. 190년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큰 문제없이 서로 경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으나 지금의 독도처럼 그곳 간도는 우리 조선이 실제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남만주의 철도 부설권과 탄광개발권 등을 가지는 대신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간도 영유권을 대한제국의 허락 없이 청나라에 넘긴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 국제사법재판소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탄이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렇다면 일본이 청나라에 넘긴 영토역시 불법으로 무효가 되어야 한다. 더구나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과 체결한 조약에서 1941년 이전에 중국과 일본이 체결한 모든 조약은 무효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중국은 100년 전으로 돌아가 간도문제를 다시 협의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이 쉽게 간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꼭 따져봐야 할 과제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부터 현대사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 송내관은 8,9,10편을 현대사에 할애했는데 여기에는 임시정부와 독립투사들의 귀국 그리고 한국전쟁의 비극과 5.16 쿠데타, 새마을 운동과 조국근대화, 월남파병, 전태일 사건과 YH사건, 부마항쟁으로 인한 박정희 정권의 비극, 마지막은 12.12사태와 전두환 정권의 시작, 88올림픽과 6.10항쟁, 전국민이 하나 된 2002월드컵,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까지 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도 여기 내용에 사족을 다는데 부담이 없지 않다.
그저‘역사는 역사가 말해주리라’고 생각하고 이만 줄일까 한다. 나름 ‘한국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싶다. - 2020.1.1 오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