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우왕비(禹王碑)의 비문 해석
* 요순시대 9년홍수의 치수기념비는 태자부루 공덕비이기도 하다!
<원비:남악 형산 구루비> <송나라 시대 탁본비:악록산 운록봉 우비>
황제릉과 염제릉과 함께 중국의 3대 보배라 하는 소위 우왕비가 있다. 우왕비는 원래 남악
형산의 구루봉에서 발견되어 구루비라고 하며, 이 구루비는 송나라 때 실종되었다가 약
1,000년이 지나 깨진 채로 사찰의 담장으로 쓰였던 것을 2007년 6월에 발견한 것이라 한다.
남악 형산 72봉의 하나인 악록산의 산정에 있는 우왕비는 송나라 시대 하치(何致)가 탁본
하여 만든 복제품이 되며, 이 비의 머리부분은 1935년 6월에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정자를
세우면서 새긴 것이 된다. 비문의 글자체는 올챙이 모양과 비슷하며 해독하기 어렵다 하는데,
글자수는 9행으로 나뉘어 모두 77자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우의 치수 공적을 적은 것이라
한다.
여기서는 명나라 시대 사람인 양신(楊愼)의 석문(釋文)을 소개하면서, 역사사실적으로 풀이
해 보고자 한다.
양신 우비 석문 (楊愼禹碑釋文)
承帝日咨,翼輔佐卿。洲諸與登,鳥獸之門。參身洪流,而明發爾興。久旅忘家,宿嶽麓庭。
智營形折,心罔弗辰。往求平定,華岳泰衡。宗疏事衰,勞余神?。鬱塞昏徙。南瀆愆亨。
衣制食備,萬國其寧,竄舞永奔。[승제왈자 익보좌경 주제여등 조수지문 참신홍류 이명발
이흥 구려망가 숙악록정 지영형절 심망불신 왕구평정 화악태형 종소사쇠 노여신인 울새혼사
남독건형 의제식비 만국기녕 찬무영분]
위 양신의 우비 석문을 풀이하면,
임금께서 여러 좌우의 대신들에게 말씀한 바대로, 물이 차 섬이 되어버린 모든 곳을 돌아
다니고, 새와 짐승들이 드나드는 곳에 오르기도 하였도다! 온몸으로 직접 홍수를 체험하면서
밝게 펴 일으켰도다!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집을 잊었고, 악록산을 뜰 삼아 잠을 자기도
하였도다! 슬기롭게 수행하며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마음은 심히 새롭게
되지 못하였도다! 마음의 평정을 구하기 위하여 화악태형으로 갔으나, 산마루는 트였으되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쇠퇴하였도다! 신(神)에게 제사 올리기에 힘쓰니, 막힌것과 어두움이
사라지고, 남독의 범람이 걷혀지고, 옷가지가 갖추어지고 먹을 것이 마련되었도다! 온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춤추는 시대여 영원하여라가 될 것이다.
한편, 증선지의 십팔사략 기록 중에서, 하우의 치수와 관련한 내용을 보면, '곤은 요임금
때에 홍수를 막으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순임금은 곤의 아들 우에게 그
를 대신하게 하였다. 우는 노심초사하며 치수에 열중하여 13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었으며,
때로 자기 집을 지나가는 일이 있어도 들어가지 않았다. 평지를 갈 때는 수레를 타고, 강을
건널 때는 배를 타고, 진훍길에는 썰매를 타고, 산을 오를 때는 나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조사
하였다. 그리하여 구주에, 9개의 물길을 열고 9개의 늪에 제방을 샇아 수해를 막고 9개의 산
을 측량했다. 우는 이를 순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라고 적고 있는 바, 위 양신의 우비 석문과
내용을 대조하면 상충하는 부분이 없고 의미상통하고 있다.
그런데, 한단고기 단군세기에는, 단군왕검 67년 갑술년인 서기전2267년에, 태자부루를 파견
하여 도산에서 순임금의 신하 사공 우을 만나 오행치수법을 전하였다 한다. 또 번한세가에
서는, 태자부루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하였으며, 번한을 통하여 우사공에게, '나는
북극수정자이니라' 하는 말로 시작하여 천부왕인(天符王印), 신침(神針), 황구종(皇矩宗)이
라는 치수에 필요한 3가지 보물을 주면서, '천제자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하였고,
이에 우가 '천제자의 명을 게으름없이 행하겠다'.하면서 태자부루로부터 금간옥첩을 받으니
치수의 요결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한단고기 고구려국기에는 사공 우가
치수의 비결을 얻어 공을 세웠고, 이에 우는 돌을 벌채하여 부루태자의 공을 산의 높은 곳에
새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중국기록인 송미자세가 홍범구주편에는, 우가 치수를 맡으니 하늘(天)이 우에게 홍범
구주등을 내리어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또 오월춘추 월왕 무여 외전에는,
우(禹)가 꿈에 붉게 수놓은 옷을 입은 남자를 보았는데, 그 남자가 '나는 현이의 창수사자
이니라'.하였으며, 이후 우는 3달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산에 올라 금간옥서를 얻었으니 이
책은 치수법을 적은 요결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의 내용을 보면, 우비의 노여신인의 신(神)과 번한세가의 천제자와 북극수정자,
홍범구주의 천내석우의 천(天), 오월춘추의 창수사자(蒼水使者)라는 말은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되는 바, 결과적으로 신과 천은 곧 단군왕검을 가리키며 창수사자와 북극수정자는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를 지칭하는 것이 되는데, 한편 사자는 곧 대리인이자 사자를 파견한
주인공과 동격이라 할 수 있으므로 창수사자, 북극수정자는 곧 신, 천과 통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가 제사를 올린 신과 우에게 치수법을 하사한 천은 천제(天帝)가 되며, 우가 꿈에
본 창수사자는 천제의 사자로서 천제자(天帝子)인 태자부루가 되는데, 천제자 태자부루의
아버지가 되는 천제(天帝)는 곧 천신(天神)과 동격으로서 단군왕검이신 것이다.
즉 단군왕검과 태자부루가 신격화되어 우비에서 노여신인의 신으로 표현된 것이 된다.
우는 서기전2224년에 하나라를 세워 하왕조의 시조가 되었는데, 서기전2267년 치수 당시
우는 하나라 왕이 아니라 순임금의 신하로서 사공의 벼슬에 있었으므로, 우의 치수기념비는
치수에 성공한 후 기념비를 새긴 것으로서, 소위 우왕비라는 말은 잘못 된 것이며, 사공 우비
또는 그냥 우비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우가 치수를 하였다는 대홍수는 요순시대에 일어났으며, 연대기적으로는 요임금 시대인
서기전2288년에 발생하였고, 곤이 8년동안 치수를 맡았다가 결국 실패하자 순임금 시대인
서기전2280년에 처형당하였으며, 이후 곤의 아들 우가 치수를 맡았던 것이고, 우도 13년간
치수에 힘을 쏟았으나 성공치 못하다가, 서기전2267년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이 사자로 파견
한 태자부루에게서 치수법을 전수받아, 홍수가 발생한 때부터 22년이 지나서 치수에 성공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가 치수기념으로 세웠다는 소위 우비에서는, 치수에 성공한
것은 신에게 제(祭) 올리기에 힘써 완성되었다는 취지로 적고 있는 바, 이는 우비가 우의
치수기념비이자 특히 신(神)으로 대입된 태자부루의 공덕을 칭송한 비가 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와 순임금 그리고 단군왕검과 태자부루의 역사와 관련시켜 소위 우비의 비문을
다시 역사사실적으로 풀이하면,
서기전2280년경 우리 순(舜)임금께서 여러 좌우의 대신들에게 말씀한 바대로, 이 사공
(司空) 우(禹)는 물이 차 섬이 되어버린 모든 곳을 돌아다니고, 새와 짐승들이 드나드는 곳에
오르기도 하였도다! 온몸으로 직접 홍수를 체험하면서 밝게 펴 일으켰도다! 오랫동안 돌아
다니며 집을 잊었고, 악록산을 뜰 삼아 잠을 자기도 하였도다! 슬기롭게 수행하며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마음은 심히 새롭게 되지 못하였도다! 이리하여 마음의
평정을 구하기 위하여 동서남북의 화악태형의 산으로 갔으나, 산마루는 트였으되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쇠퇴하였도다! 이에 신(神)께 목욕재계하며 3달동안을 넘게 제(祭) 올리기에
힘쓰니, 이에 응하여 서기전2267년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천제자 태자부루를 파견하시어
도산회의를 주관하게 하시고 치수법을 전수해 주셨으며, 이에 사공 우가 그 가르침을 따라
어긋남이 없이 행하였더니, 드디어 막힌것과 어두움이 사라지고, 양자강의 범람이 걷혀지고,
옷가지가 갖추어지고 먹을 것이 모두 마련되었도다! 아, 온 나라가 평안하고 모든 일이
바르게 되어, 백성들이 춤추는 시대는 영원할 것이로다!'가 될 것이다.
(천산역사연구원 天山歷史硏究院 (Cheonsan History R. I.)) - 한(桓)문화재단 (Han Culture Foundation) 부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