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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기 소시슈(お伽草子集)
이웃나라? 일본을 여행해 보았다면 ‘물어(物語)’라는 말을 알 것이다. ‘모노가타리’라고 읽고 번역하면 ‘이야기’또는 ‘소설’이라고 된다. ‘모노가타리’는 시대를 불문하고 일본 문예의 탯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행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14세기부터 17세기 사이 비교적 평이한 문체로 써진 것을 ‘오토기 소시’라고 하고 ‘오토기 소시’를 다른 말로 ‘무로마치 모노가타리 소시(室町物語草子)’혹은‘중세소설’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오토기 소시’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오토기 소시슈’는 ‘중세 이야기 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기 전에 「제인&씨 출판사」가 책을 소개하면서 이 책을 번역한 이용미*의 후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도록 하자. 그러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 같다. (1.28)
*이용미 :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일본추오(中央)대학에서 국문학 박사, 고려대, 외국어대에서 강의, 현재 명지전문대 부교수로 재직
“오토기 소시는 현재 400여 편이 넘는 작품들이 서적은 물론, 구전이나 그림 두루마리, 예능 등의 형태로 전해 내려온다. 이렇듯 방대한 작품과 다양한 향수 방법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오토기 소시의 주제나 테마는 무척 다양하여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전시대 귀족이나 중세의 무사, 영웅, 승려, 동자승, 서민, 예능인 등을 주인공으로 그네들의 연애나 발심둔세, 그 밖에 여러 형태의 인생유전 등을 그려냄으로써 삶의 희로애락을 담는데,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 곤충 등이 의인화되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현실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공간적 배경 역시 일본을 벗어나 중국, 인도 등의 이국에서부터 지옥과 용궁 등 상상속의 이상향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이런 까닭에 오토기 소시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친근한 표현력으로 동시대의 설화나 민간전승과도 융합하여 남녀노소,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친근감을 느끼는, 이른바 ‘국민문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오토기 소시 연구의 대가인 이치코테지(市古貞次)가 저술한 <중세소설의 연구(1955)〉분류에 따라 본서에 수록된 작품들의 성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단, 하나의 작품이 오직 한 가지 범주에 속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며 시공간적 배경, 등장인물의 성격 등 작품의 조명 시각에 따라 중복된 분류가 가능하다.
한 송이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장미가 있는가 하면 여러 송이가 어우러져 소박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들꽃도 있다. 일본 고전 문학을 꽃에 비유한다면 오토기 소시는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학성이란 비단 문체의 수려함, 심오한 미학의 구현에 한정된 것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친근하고 정겨운 문체, 삶을 꿋꿋하게 견디어내는 서민들의 애환을 때로는 절절함으로, 때로는 해학으로 풀어내는 문학 - 이것이 바로 오토기 소시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분쇼 이야기(文正草子)」로 일본에도 나와 같이‘문(文)’씨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이 분타(文太)다. 그는 교토 동쪽 관동지역의 여덟 개 지방 가운데 하나인 히타치 고을에 ‘가사마 다이묘’라고 하는 영험한 신을 모시는 신사가 있고, 그 신사의 우두머리 신관(神官)을 모시는 천 여 명의 하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관 밑에서 잡역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비록 천한 머슴이기는 하지만 마음씨가 착하고 정직하며 주인의 마음을 잘 헤아려 거역하는 일 없이 성실했기 때문에 신관도 기특하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신관이 그에게 “너는 비록 나를 섬겨왔지만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니 네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거라. 네 잘못을 뉘우쳤다면 다시 돌아와도 좋다.”고 하면서 내쫓았다. 더 열심히 일하겠다며 사정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자 저택을 나와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금 굽는 해변 가에 다다라 그곳 한 오두막집에 들어가 하룻밤 묵게 해 달라고 사정하였다. 오두막집 주인이 불쌍히 여겨 머물게 했지만 딱히 하는 일 없이 빌붙어 지내기가 미안해서 도울 일이 없는지 물었고 소금 구울 때 필요한 나무를 해 오라고 했다. 힘이 장사인 분타는 다른 사람들보다 예닐곱 배 많은 나무를 해오자 주인은 몹시 기뻐하며 일꾼으로 신임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분타는 자신도 소금을 구워 보고 싶은 마음에 주인에게 “그동안의 품삯으로 소금가마를 하나를 주십시오. 생계가 막연하니 소금을 구워 팔아보고자 합니다.”이에 주인은 소금가마 두 개를 그에게 주었다. 분타가 구운 소금은 ‘맛이 좋고 먹으면 피부도 맑아지고 병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입소문이 퍼져 보통 소금의 두 배 가격으로 팔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타는 부자가 되었다.
그는 그곳 ‘쓰노오카’마을 주변에 곳간을 즐비하게 세우고 많은 소와 말을 기르며 고래등 같은 집을 지으니 옛날 석가모니를 위해 기온정사를 지은 수달(須達)장자 부귀영화도 이에 못 미칠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히타치 지방에서는 어느 정도 신분이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 누군지 따지지 말고 주군에게 받는 은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라.’그리고 모두들 아무 거리낌 없이 분쇼(文正-분타의 신분상승으로 부른 이름)의 부하가 되었다.
분쇼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은 옛 주인 신관에게까지 들어갔고 신관이 분쇼를 불러 과연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과연 복되고 운 좋은 사람이구나.”하고 칭찬한 뒤에 “그런데 집안을 이을 자식은 있느냐?”고 물었고 분쇼가 없다고 하자 “아무리 재물을 많이 지녔어도 자식이 없으면 다 남의 것이 되는 법이지. 서둘러서 금은재화를 신불(神佛)에게 바쳐서 자식 하나 점지해 달라고 기원을 올리게”라고 했다. 분쇼 역시 신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온 분타는 다급한 마음에 부인을 불러 슬하에 자식 하나 두지 못한 것이 딱하다며 부인을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이에 부인은 아이라면 당신이 스물 하나, 내가 열세 살 때 만나 살던 젊은 시절에 낳았어야 하는데 아무리 소박이 무섭다고 하지만 마흔이 넘도록 가지지 못한 자식을 어떻게 이 나이에 나을 수 있겠느냐며 정 그렇다면 젊은 마누라를 얻어 아이를 낳으라고 쏘아붙였다. 고생을 같이 한 부인을 내쫓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분쇼는 신관이 신불에게 재물을 바치고 기원을 드리라는 말이 생각나서 부인과 같이 마을 수호신인 ‘가시마 다이묘진’에게 가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원했다.
여기서도 ‘지성감천(至誠感天)’이라는 말이 통했는지 목욕재계하고 기도드린 지 칠 일째 되는 날 밤, 다이묘진이 문을 열고 들어와 “너희의 간절한 기도를 뿌리칠 수 없어 두루 살펴보았으나 너희에게 점지할 자식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지극정성이 기특하여 이것을 준다.”면서 연꽃 두 송이를 주므로 받았는데 꿈이었다. 그날 이후로 부인이 임신을 하니 분쇼가 기뻐하면서 관동의 여덟 고을에서 으뜸가는 아들 하나 낳게 해주십사하고 했고 달이 차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
‘딸’이라는 소리를 들은 분쇼는 치성 드린 보람도 없이 딸을 얻었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에 ‘히타치도노’라는 나이든 시녀가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원래 자식은 딸이 더 복된 법이랍니다.”하고 위로했다. 그제야 아기를 본 분쇼는 남다르게 예쁜 딸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유모와 시중드는 사람들을 모두 용모 단정한 사람들만을 골라 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빛나듯 아름다운 둘째딸이 태어났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두 자매는 하루가 다르게 활짝 피는 꽃처럼 아름다워져 갔다. 틈날 때마다 꽃과 단풍, 달과 구름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시화를 익혔으며, 서체 또한 일찍이 본적이 없을 만큼 훌륭했다. 거문고, 비파 소리는 듣는 이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만큼 뛰어났다. 그러나 자매는 ‘세상은 잠시 머무는 덧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내세를 위해 정진하는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했다.’이쯤 되니 부모도 자식을 함부로 하지 못했지만 여덟 고을의 영주들은 자매 이야기를 듣고 앞 다투어 꽃과 단풍잎을 곁들여 구애의 편지를 보내왔다. ‘연화’와 ‘연꽃’으로 불린 두 자매는 연서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예쁘게 자랐다.
신관이 이 소문을 듣고 분쇼를 불러서 “네가 빛나듯 어여쁜 두 딸을 두었는데 영주나 지체 높은 가문 자제들이 빗발치듯 연서를 보낸다는 게 정말이냐? 그렇다면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지 말고 우리 아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사위로 삼게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분쇼는 신관의 말에 얼씨구나 좋을시고, 역시 딸을 놓고 볼일이구나. 아무리 잘났다 해도 아들은 기껏 출세해 본들 하급무사가 고작이었을 텐데 딸을 두니 신관님과 사돈을 맺게 되었다며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겠냐며 기뻐했다.
집에 돌아온 분쇼는 딸들을 불러 이보다 더 경사스런 일이 어디 있느냐며 웃으며 말했지만 두 딸은 아버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까닭을 물으니 딸들이 대답했다. “아버님은 어찌 그런 결정을 하셨습니까.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저희는 신관님의 자제분이라고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가문의 따님들과 며느님들의 말석에 앉아서 남은 음식만 받아야 될 처지를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차라리 주군으로 섬기라고 분부하시면 모르겠지만 며느리로 갈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분쇼는 딸들이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신관에게 가 그렇게 전했지만 신관은 크게 노하며 분쇼의 자식인 주제에 내 자식을 거절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딸들을 이리 보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군의 명을 거역하는 것임을 명심하라고도 했다. 이에 분쇼는 딸들에게 한탄의 말을 하자, 딸들은 “설령 가신이라고 해도 혼사라는 것은 신분의 고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신관의 며느리가 되느니 출가하여 내세를 기원하겠다며 관동 여덟 고을에 있는 그 누구에게 시집가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벌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딸들의 말을 전해들은 신관은 신불께서 점지해 주신 자식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라며 그 후로는 혼사를 단념했다.
그때 히타치 지방에는 천황(天皇) 다음의 지위인 마쓰도노(松殿) 간파쿠(關伯-헤이안 시대 이래 천황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 보던 최고 중직)의 영지였는데 그분의 가신 중에 ‘미쓰시게’라고 하는 사람이 수령으로 임명되어 내려왔다. 그는 상당한 풍류인으로 산골출신이라도 용모가 뛰어나고 마음씨 고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며 아직 부인을 두지 않았다. 지방영주나 명망 있는 무가들의 딸들과 혼담이 끊이지 않았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가신(家臣)으로부터 “가시마 다이묘진을 모시는 신관의 잡역 가운데 분쇼라는 자가 있는데 눈부실 만큼 아리따운 두 딸을 두었습니다. 지체 높은 이들이 앞 다투어 혼담을 넣었지만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주군인 신관이 며느리 삼겠다고 하였지만 이마저도 응하지 않았답니다. 도무지 분쇼의 자식이라는 게 믿기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다고 합니다. 분쇼의 주군에게 명하여 딸들을 불러들이심이 어떠 실런지요?”
그러자 수령은 마치 눈앞에 분쇼의 딸을 본 것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그 이야기를 진즉에 듣지 못한 것이 한이로구나. 만약 일이 성사되면 이 지방 열 여섯 고을 중, 그 어디라도 달라는 대로 줄 것이다.”고 하고 말을 전한 가신에게도 여러 하사품을 내렸다.
며칠 후 수령은 신관을 불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소문에 듣자하니 자네가 부리는 하인 중에 어여쁜 딸을 둔 사람이 있다던데 자네가 한번 주선해 주게나. 보답을 원한다면 수령자리라도 물려줌세.”하고 수작을 걸었다. 신관은 분부를 받들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딸들은 “이런 혼담을 계속 가져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강요하신다면 저희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닐 것입니다.”하면서 울었다. 이에 분쇼는 자식들이 이슬을 받아 고개 숙인 가을 마타리(다년생 초본으로 어린 순은 나물로 먹기도) 같은 모습이 되어 있는 걸 보니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설령 자식으로 인해 어떤 고초를 겪더라도 저토록 싫어하는 일을 강요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관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딸에게 나리의 분부를 알렸지만 싫다고 합니다. 시집갈 마음이었다면 나리께서 며느리 삼겠다고 말씀 하실 때 따랐을 것이며, 차라리 덧없는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겠다고 하니 어떤 말로도 고집을 꺾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수령께 잘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애걸했다. 신관도 애석하게 여기며 수령을 찾아가 사정을 전했다. 수령은 분쇼의 딸들에 대한 고집을 익히 소문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을 받아줄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무척 아쉬웠으나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 낙이 없어 졌으므로 서울(京都)로 상경해 버렸다.
수령이 상경하여 마쓰도노 간파쿠 저택에 들러니 마침 여러 수령들이 모여앉아 각자 고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에 마쓰시게가 여러 고을 중에 히타치만큼 특이한 곳도 없을 것이라며 자신이 격은 이야기를 했다. 곁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마쓰도노 간파쿠의 아들이자 근위부 차관인 추조(中將-천황을 경호하는 측근)가 까닭을 물었다. “제가 청혼을 했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자매는 부모의 말도 듣지 않고 오로지 덧없는 세상을 떠날 궁리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속세에 살 바에는 후궁이나 황후가 아니면 거들 떠 보지 않겠다며 혼담을 거절합니다. 저 하나만 물리친 것이라면 죄를 물을 수도 있겠지만, 원래부터 이렇듯 특이하기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을 두고 몰인정하게 굴 수도 없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야기를 들은 추조는 그날 이후 마음이 설레고 들떠서 밤낮으로 누워있는 일이 많아졌다. 내로라하는 공경(公卿)이나 당상관들 가운데 딸 가진 벼슬아치들이 너도나도 추조를 사위 삼고 싶어 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고 관심조차 없는 듯 했다. 전생의 인연이었던지 추조는 마쓰시게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분쇼의 딸을 깊이 사모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시름시름 앓자 어머니는 영산(靈山)의 절을 찾아다니며 치성을 드렸다. 가을 달밤에 추조를 위로하러온 친구들이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정취를 돋우어 주기도 했고 이에 추조는 일어나 달을 보며 시를 읊었다.
‘달을 보니 애달픔 마음 나눌 길 없거늘, 사연을 묻는 이 하나 없네.’
이때 추조를 따르며 대궐수비를 맡은 호에노스케(兵衛佐)와 궁중의식을 담당하는 시카부다유(式部太夫), 군마 훈련을 맡은 도마노스케(藤右馬助) 세 사람이 추조를 찾아와 말했다. “요즘 전과 달리 근심스러운 모습이시라는 걸 듣고 무슨 일이실까 걱정은 했지만 무언가 남다른 사정이 계심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도련님께서 특별한 것으로 고민하고 계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이든 저희에게 거리낌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면 마무리 먼 중국이라도 가서 구해오겠습니다.”
이에 추조는 용기를 내 자신의 상사병을 이야기했고 세 사람은 추조를 모시고 히타치로 내려갈 방도를 찾게 되었는데 서울에서도 눈에 띨 만큼 외모 준수한 귀공자가 시골에 가서 활보할 수도 없고, 또 탁발하고 수행자처럼 꾸민다면 사람들 곁에 다가가기 어려울 것이고, 좋은 방도가 없을까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시골사람들이 보부상(褓負商) 만큼은 경계하지 않는 다는 것에 착안해 방물을 등짐 고리짝에 짊어진 방물장수로 위장해 내려가기로 했다.
추조는 부모님 몰래 집을 떠난다는 것이 걱정되어 붓을 들어 문기둥에,
‘세월이 가도 잊지 않고 기다려다오. 노송나무 기둥이여! 변함없는 얼굴로 돌아오리니’라고 적고, 떠날 시간이 되자 옷을 벗어 소맷자락에다가 ‘돌아올 때까지 정표로 벗어두고 가니 출가하였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부모님’이렇게 적어두고 떠났다.
우리의 ‘품바’가사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히타치로 내려간 일행은 방물장수로 위장해 분쇼의 집에 들어가 방물을 팔았는데 그들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든 분쇼는 자신의 집에 오래 머물라고 하고 안채에 제법 반반한 시녀들이 많으니 여자가 생각나면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시중들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에 문틈으로 딸들을 본 도련님은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손궤에 방물을 넣어서 벼루와 함께 큰 아씨에게 보냈다. ‘연화’가 귀한 물건들을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본적이 없다며 신귀하게 들여다보다가 벼루 밑에 살짝 끼워진 종이쪽지를 보았는데 거기에 ‘당신으로 인하여 사랑 길에 헤매어 길가 풀포기에 물든 내 심정을 어찌 전하오리까.’라고 적혔다. 물 흐르듯 고운 필체는 그토록 빗발치던 연서들 가운데에도 이만큼 훌륭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전번에 물건 팔 때도 예사 사람 아닌 듯 하였는데 정말 그럴까 하고 큰 아씨 마음이 설레었다.
큰 아씨 연화는 벼루 밑 편지를 남몰래 간직하고 있었지만 먼저 마음을 전할 방도가 없었고 또 답장을 하고 싶어도 전번에 수령의 청혼도 거절하였는데 고작 서울상인에게 마음을 허락한다는 것도 부담이 되어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연화는 어머니에게 “서울 상인들이 거문고와 비파 연주가 훌륭하다고들 하니 한번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불당에서 서울상인들의 연주를 듣는데 상인 차림새를 하고 있어도 보통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주렴 안에 앉아 있는 아씨들 눈매도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연주를 하던 추조가 어디서 바람이라도 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때마침 바람이 불어 주렴을 살짝 걷어 올려 두 사람 눈이 마주쳤다. 큰 아씨는 듣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워 마치 이 세상 사람 아닌 듯, 한 무제(漢武帝)의 이부인(李夫人)이나 당나라 양귀비도 이보다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연주를 듣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아씨들도 비할 데 없이 감동하였다. 다음날에도 분쇼는 이들을 다시 불러 연주를 청했고 휘영청 달 밝은 밤, 밤늦게 추조는 큰아씨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 정분을 맺었다. 그리고 동틀 무렵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 ‘사모한 끝에 임 만난 밤이 왜 이리 짧은지 다시 오겠다는 말도 미처 못 했네.’하고 시를 읊었다. 이에 큰 아씨도 자못 부끄러워하면서 ‘부질없는 이 몸은 밤이 이리 짧은지 미처 몰랐는데 동녘 하늘이 밝아오네.’하고 화답했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추조는 해가 지기만을 기다려 다시 몰래 찾아가 밀회를 가졌다.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져서 하늘에 있다면 비익조(比翼鳥-암수 한 몸인 상상의 새), 땅에 있다면 연리지(連理枝-두 가지가 하나 된 나무)의 정을 쌓았다. 하지만 아무리 숨기려 해도 보는 눈이 많으니 두 사람 사이를 쑥덕거리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소문을 들은 분쇼 부인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토록 여러 사람의 청혼도 거절하더니 하필이면 서울상인을 사위 삼게 되었구나. 억울하고 분하네.’하며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서울상인에게 딸려 보내 내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남편과 상의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분쇼는 부인을 말을 듣지 않고 설마 우리 딸이 그럴 리가 없다며 부인을 위로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어서 분쇼가 자신의 집에 서울상인을 머무르게 하고 연주까지 하게 했다는 소문이 신관의 귀에도 들렸다. 신관은 분쇼를 불러 ‘그 일이 사실이냐고 묻고 오늘밤 자네 집에서 연주하도록 하게나 내가 가서 들어봄세.’하고 말했고 분쇼는 서울상인에게 부탁했다. 이에 추조는 오늘이야말로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서울서 하던 대로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다른 세 사람도 격식을 갖춰 옷을 차려입게 했다.
분쇼의 집안사람들은 이런 일행을 보고는 이게 누구인가? 마치 신불이 내려왔다며 저마다 놀라고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추조의 모습을 바라본 분쇼는 속으로 ‘저 서울상인이 어떤 사람이라도 좋다. 누구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리라. 신관님만 아니라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저 상인을 사위 삼으리라’고 결심했다.
이윽고 신관이 다섯 아들을 데리고 가마를 타고 분쇼의 집에 당도했다. 그런데 가마에서 구르듯 내려와 “아이고! 아이고 간파쿠님의 아드님이신 이위 추조님이 아니십니까? 추조님께서 사라지셨다고 전국방방곡곡을 샅샅이 찾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사옵니다. 여기 계시는 것을 미처 몰랐으니 황송하기 그지없나이다.”고 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이를 지켜보던 분쇼는 부들부들 떨며 ‘아이구, 기막혀라. 천하에 상대 못할 인간이 서울상인이구나. 무엄하게도 우리 주군님을 업신여기고 건방을 떠는 모습이 가관이로구나.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나.’면서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다녔다. 이때 하녀 하나가 ‘추조님이 상인이오? 상인이 귀공자라오. 사위님이 추조님이오.’라고 말했고, 신관은 분쇼를 불러 “자네는 정녕 모르고 있단 말인가. 이 분은 서울에서도 이름 높은 마쓰도노 간파쿠 나으리의 아드님이신 이위 추조님이시네.”라며 자세히 알려주었다.
다음에 연결되는 이야기는 생략해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추조와 혼인한 큰 아씨에 이어 작은 아씨도, 간파쿠로 부터 자신의 아들인 추조가 어찌어찌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천황이 그러면 둘째 딸은 황후로 맞이하겠다며 궁으로 불렀다. 분쇼는 둘째 딸마저 떠나보내게 되자 몹시 슬퍼하였는데 이를 전해들은 천황이 칙서를 내려 분쇼 부부가 작은 아씨를 데리고 같이 상경할 것을 명하였고 작은 아씨가 황후가 되어 입궁할 때는 큰 아씨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 구경하였다고 한다.
이 한편의 이야기 요지를 적는데도 상당한 공력?이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한 이야기 같았지만 막상 적다보니 길어진 것 같기도 하고 또 이야기는 간단할지 몰라도 수려한 문장이 길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음 편 이야기에 대한 독후감은 줄이거나 생략하더라도 「분쇼 이야기」만으로 ‘오토기 소시슈’라는 책을 조금은 이해한 것 같다.
두 번째 이야기인 「요쓰시네 섬 순례기」는 마치 ‘로빈슨 크루소’* 같이 주인공 요쓰시네가 거인국과 소인국을 돌아다니면서 모험을 즐기는 이야기다. 또 세 번째 「사루겐지 이야기」는 일본 천황가 조상신을 모신 이세신궁(伊勢神宮-2011년 여행시 답사)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세 아코기(阿漕) 포구에 정어리 장수가 살고 있었다.’로 시작되어,
*로빈슨 크루소 : 1719년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가 발표한 가상 모험소설
“그는 원래 관동 무사였다. 부인이 먼저 죽고 딸 하나가 있었는데 평소 부리던 사루겐지(猿源氏) 라고 하는 하인을 사위로 삼아 정어리 장사를 물려주고 본인은 서울로 올라와 머리를 깎고 ‘에비나노나 아미타불’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하였다. 출가한 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스님이 되어 다이묘나 권세가의 출입도 잦았다.”고 주인공 사루겐지를 소개한 뒤에
한편, 사루겐지는 정어리를 잡아서 서울로 가져와 ‘이세 아코기 해안에서 잡은 정어리 사아려!’하면서 장사를 했는데 장사가 잘 되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조(五条)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드리운 가마 한 대와 마주치게 되었고 마침 강바람이 불어 가마의 발이 획 올라갔고 그 잠깐 동안에 가마 속 여인을 본 사루겐지는 첫눈에 반하여 그날 이후 밤낮 상사병을 앓게 되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장사는 뒷전이고 해가 떠도 고조 다리, 해가 져도 고조 다리 위에 자리 잡고 누워서 ‘이녁만큼 시름 많은 사람 또 있을까 싶어 고개 숙여보니 물속에도 또 하나 있네.’라는 시를 떠올리며 애를 달구었다. 그러면서 한편 ‘살아만 있다면 또 만날 날이 있으리 인연의 신이 계시는 한’이런 시를 지으면서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행동했다.
장인 스님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단 한번 보고 사랑하게 된다는 건 믿을 수가 없는 걸’하면서 자상하게 위로했으나 사루겐지는 단 한번 보고 연모하게 된 예는 저 하나만이 아니라며 장황하게 그런 사례를 들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장인은 ‘자네는 어디서 얻어들은 건 있어서 잘도 이야기 하는구먼. 하지만 지금 한 이야기는 다 상대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알고 난 이후의 사랑이야기가 아닌가? 자네는 정체도 모르고 집도 절도 모른 채 단지 고조다리를 지나다 언뜻 발 사이로 본 사람을 막연히 사모하고 있지 않은가?’하고 나무랐다.
그러자 사루겐지는 ‘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고조의 하가시 노도인(東洞院)에 있는 ‘반딧불이’라는 아씨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고 대답했고 장인은 “어허, 그 여자야말로 장안에 유명한 유녀(遊女)인데 해가 지면 빛나기에 반딧불이라는 이름이 붙은 걸세. 차라리 조정에 출입하는 여관(女官)이나 출가한 귀족가문의 딸이라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으련만 반딧불이는 유녀 중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사람으로 다이묘나 뼈대 있는 무사양반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참으로 어려운 상대를 골랐네. 자네는 정어리나 파는 생선장수이니 무슨 수로 만날 수 있겠는가? 천상 다이묘로 위장 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 같네.”라고 했고, 사루겐지는 공손하게 “저 역시도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고 대답한다.
이후 사루겐지는 무사로 위장하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하가시노도인에 들어가 반딧불이를 만나서 동침까지 해 자신의 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사루겐지가 평소 나아미에게 노래 지식을 익혀둔 덕으로 그 자리에서 창피함을 면한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과분한 사랑도 이루었으니 이 모두 지식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공자님께서도 ‘곳간 속의 재물은 썩을망정 몸에 쌓아 둔 재물은 썩는 법이 없다’고 하신 것도 다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고 했고, ‘그 이후 사루겐지는 반딧불이에게 자기가 정어리 장수임을 털어놓았지만 귀천을 막론하고 남녀가 한번 정들면 떨어지기 힘든 법, 반딧불이는 내세에까지도 이어지는 인연이라고 믿고 아코기 해변으로 따라가 부귀영화와 자손번창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다.
다음의 「게으름뱅이 타로」는 “타로라는 인물은 먹다가 굴러 떨어진 떡도 일어나 주울 생각을 않고 지나가는 원님에게 청이 하나 있다면서 ‘그 떡을 좀 주워 달라.’고 하는 게으름뱅이였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선행을 쌓음으로써 결국은 ‘스루마’라는 고을에 큰 저택을 짓고 권문일족을 이루고 수많은 하인을 두었으며 어진 정치로 고을을 다스렸다. 그 덕에 신불삼보의 가호를 입어 백이십년 나이까지 장수하고 자손다복하고 금은보화 넘쳐나는 복을 누리다가 죽은 후에는 오다카다이묘진(大明神)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 다음 「하시다테 본지(橋立の本地)」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준마(純和) 천황시절, 고조(五條)에 사다이진(佐大臣) 다카후지(橋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다카후지는 용모가 수려하고 학식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재물도 많아 사방에 곳간이 즐비할 정도로 무엇 하나 아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지라 단 한 가지, 쉰 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는 것을 늘 한탄하며 지냈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자식 하나가 없는 것일까. 백 살을 산다 해도 결국은 죽고 마는 것을, 누가 있어 나를 위해 극락왕생을 빌어 줄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신불에게 치성을 드려서 자식을 얻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나도 한번 신불에게 매달려 보리라.’ 이렇게 마음먹은 다가후지는 기요미즈테라(淸水寺)에 칠일동안 머물면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삼천 배를 올리며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만 점지해 주십사하고 간절히 빌었고, 한편으론 부처님께 여러 가지 공양을 약속하기도 했는데, 부처님께서 만약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꽃잎처럼 여러 겹으로 된 거울을 금은으로 장식하여 매달 서른 세 개씩 삼년 동안 바치겠습니다. 또 매달...”
이렇게 해서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고 그 아들이 커서 출세하여 천황을 모시는 장군이 되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으로는 갈 수 없는 범천국과 나찰국에도 가게 되고 범천국에서 범천왕의 딸을 아내로 맞은 뒤 내려와 행복하게 살았고, 이들 부부가 나이 여든 살에 이승을 하직하니 부인은 나리아이지(成相寺-교토 미야즈시(宮津市)에 있는 절) 관음보살이 되고, 남편은 구세노토(久世戶- 교토 남쪽에 있는 지은사(知恩寺)를 말함) 문수보살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나리아이지 관음보살과 구세노토 문수보살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니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사랑이야기 아니면 불교이야기가 전부인 것 같은데, 다음의 「이즈미시키부(和泉式部)」는 어떤 이야길까? 이즈미시키부는 우리 역사로 보면 왕조시대 궁중의 상궁쯤 되는 여자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노보(女房)라고 했다. 이 여자가 어린 나이에 왕궁에 들어와 일하다가 열세 살 때 늠름한 대궐무사를 만나 정을 통하고 그만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배냇저고리채로 칼집 없는 단도와 함께 강보에 싸 다리 밑에 버렸다.
다행히 아이는 어느 선한 사람에게 발견되어서 자라게 되고 커가면서 총명하고 불법에 능통한 승려가 되었는데, 대궐에서 그를 불러 여러 노보들을 상대로 법화경을 설법하게 되고 설법도중에 바람이 불어 노보들이 앉아 있는 방의 발이 걷히게 되고, 그 짧은 순간에 노보와 눈이 마주친 이 젊은이 그만 노보에게 필이 꽂히고 말았다. 그래서 승려신분을 접고 밀감장수로 변장하여 대궐을 맴돌면서 노래로 노보의 환심을 사려고 했고 한번이라도 만나기를 축수했다. 젊은이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알아본 노보가 시중드는 아이에게 청년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오게 하였고 결국 밤에 청년을 찾아가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게 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밤이 깊었는데도 청년이 호신용 칼을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으려는 것을 본 노보가 사연을 물었고, 어릴 때 다리 밑에 버려져 양부모에게 자랐으며 이 칼은 나아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늘 지니고 있다고 대답한다. 노보인 이즈미시키부 역시 아이를 버릴 때 칼집만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었기에 칼집을 꺼내 맞춰보니 틀림없는 한 자루였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부모 자식 간인 줄 모르고 정을 통하다니 이 모든 것도 미망된 속세에 몸을 두었기에 일어난 일. 불도(佛道)로 이끄는 가르침으로 생각한 이즈미시키부는 그 길로 도성을 떠나 오노에(尾上) 포구를 지나고, 시카마가타(飾磨潟-식마석)를 거쳐서 안개와 구름을 헤치며 걷고 또 걸어 하리마(播磨)에 도착하여 소샤산(畵寫山)에 입산하여 쇼쿠(性空)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극락왕생할 때 쇼사산 수호신을 모시는 배례전(拜禮殿) 기둥에 시 한수를 남겼다.
‘어둡고 어두운 길로 접어드는 중생을 위해
산등성이 달님이시여, 멀리서 환히 비추소서.’
다음은 ‘엄지동자(一寸法師)’라는 이야기다. 역시 같은 이야기 같은데 “옛날 셋쓰지방 나니와(難波) 마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마흔이 될 때까지 자식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스미요시다이묘진(住吉大明神)에게 자식 하나 점지해 달라고 치성을 드렸다.” 이렇게 시작된다. 다음 ‘우라시마 타로(浦島の太郞)’라는 이야기는 ‘그는 어부로 어느 날 거북이를 한 마리 낚았다. 그런데 만년을 산다는데 불쌍하구나 하며 거북이를 살려 보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 풍랑을 만난 배 한척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가 보더니 젊은 여인 혼자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해주었다.’그러자 그녀는 “저는 사정이 있어서 마침 어떤 배를 얻어 탔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태풍이 심하여 뱃사람들이 소란을 피우고 ‘배에다 여자를 태운 탓‘이라며 저만 따로 쪽배에 태워 버렸습니다.”고 하면서 부디 저를 가고자 하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간곡히 사정하므로 타로는 여인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는데 어떤 곳에 이르러 보니 황금빛 나는 해변에서 타로를 궁궐 같은 곳으로 안내하고는 실은 자신은 어제 놓아주었던 거북이라며 목숨을 살려준 고마움에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서 보잘 것 없지만 저를 아내로 맞아 주십사 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온갖 부귀영화와 황홀함 속에 눈 깜짝 할 새에 3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나 곧 돌아오리라고 약속하고 부인께 한 달만 시간을 달라고 하여 고향에 돌아와 보니 옛 집터에 무덤 하나가 있어서 지나는 노인에게 물으니 ‘혹시 칠백년 전에 살았던 ‘우라시마 타로’를 말하는 거냐?’고 하여 한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간신히 조상의 위패를 모셔둔 사당을 찾아 애달피 울고는 이곳이 옛날 내가 살던 곳이란 말인가 하며 슬픔에 겨워 노래 한수를 읊었다.
‘애달프라! 옛집 뜰 어린 소나무 노목이 되었구나.’
그리고 나서 거북의 화신인 용궁부인이 떠날 때 건네준 상자를 열자, 상자에서 연기가 흘러나왔고 그 연기가 얼굴에 닿자 타로는 곧바로 백 발 노인이 되어버렸다.
다음에는 ‘슈덴동자(酒傳童子繪)이야기’로 마치 송강호 주연의 영화 「괴물」에서처럼 황당하게도 마을의 처녀들을 훔쳐가는 괴물과 싸우는 이야기인데 재미도 없고 지루해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음 편은 ‘이소자키(磯崎)’라는 무사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시모쓰케(下野)에 살았는데 요리모토(頼朝) 막부시절(1192∼1199)자신의 영지에 대한 소송으로 막부가 있는 가마쿠라(鎌倉)에 올라가 있었다. 이때 부인은 혼자 온갖 궂은일을 마다않고 가족을 돌보고 남편이 소송에서 이기기를 치성으로 빌었다. 이런 부인의 정성이 통했던지 남편은 영지를 되찾아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야속한 것이 남자의 마음인가, 남편은 새 부인을 얻어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는 성 밖에 새집을 지어주고 수시로 드나들었다.
‘어찌 이럴 수 있느냐?’는 부인의 푸념에 남편은 ‘예로부터 남자가 두 부인을 두는 일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나 하나만이 아니라며 저 사람은 내가 가마쿠라에 있을 때 인정을 베풀었기에 차마 버릴 수 없어 데리고 온 것으로 아쉬울 때 받기만 하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사내대장부의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 가난할 때 함께한 친구를 잊어서는 안 되며 조강지처를 내쫓으면 안 된다는 말도 있고 또 곤궁할 때 같이 한 부인과 장인을 버리지 말라는 말도 있다’면서 부인에게 그저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도 부인은 용서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출타한 틈에 몰래 귀신 가면과 붉은 가발을 구해 밤에 지팡이를 짚고 새 부인의 집으로 찾아가 동태를 엿보다가 새 부인이 남편인 서방님을 기다리며 ‘산새가 산등성이 구름을 가르며 멀리 날아갈지라도 내 마음은 님 곁을 떠날 때 없어라’이런 시를 지어 부르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혀져서 어디 한번 혼 좀 나바라며 장지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니 새 아씨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라 했다. 말로만 들던 귀신을 보고 놀라 정신이 아득한데, 어린 처자를 마구 때리기까지 하니 두려움과 고통으로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때 유모는 이미 귀신을 피해 달아나고 없었다.
이를 두고 부처님께서는 ‘여자의 얼굴은 아름답기가 보살을 닮았으되 마음은 귀신보다도 더 추악하다’고 비유한 바 있고, 또한 ‘사리고(西行)법사’는 여자의 비뚤어진 심성을 노래로 읊었다.
‘이 세상에 마음 곧은 아녀자가 있다면
올곧은 나무처럼 생긴 암소 뿔도 있을 것이다.’
한바탕 분풀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부인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으려 하였으나 벗겨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마치 쇠줄로 감아놓은 듯, 못으로 박은 듯 얼굴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고, 지팡이마저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밤새도록 울면서 지낸 부인은 날이 새자 그 모습을 남에게 보일 수도 없어서 뒷산으로 올라가 큰 나무 등걸에 숨었다.
모습이 요괴가 되니 마음도 요괴가 되는 것일까.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잡아먹어 배를 채우고 싶은 생각이외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워 눈물로 지난날을 후회도 했다. 귀신의 가면은 벗겨지지 않고 지팡이도 놓을 수 없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잡아먹어서 배고픔이라도 달래보련만...
한편, 부인에게는 동자승이 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총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집에서 나간 뒤에 소식이 없다는 말을 듣고 한달음에 산에서 내려와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던 중 뒷산에 무서운 괴물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산 속을 헤맨 끝에 나무 등걸 아래 앉아서, 귀신 형상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동자승이 물었다.
게 누구요? 귀신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창피합니다. 풀잎의 이슬처럼 사라지지도 못한 채 이런 모습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혹시 어머님이 아니신가요? 어찌된 일이십니까? 아들의 말에 귀신은 전후 사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들은 이 모든 일이 어머님의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므로 신불께서도 도와주실 수 없는 일입니다. 오로지 어머님의 마음가짐으로 가면과 지팡이를 벗어내야만 합니다. 남에 대한 미움도 잊으시고, 나의 슬픔도 잊으시고 모두 떨쳐내시고 묵묵히 앉아 계십시오. 세상의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무상한 것이라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때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면 살아있으면서 귀신도 되고 뱀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보리심을 일으킨다면 성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의 좌선으로 억겁의 죄가 소멸된다고도 합니다. 어머니께서 스스로를 잊으시면 미운 사람도 없어질 것이고 그러면 가면도 자연히 떨어질 것입니다.
이런 아들의 간곡한 설득에 부인도 그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없이 나무 등걸로 돌아가 묵묵히 좌선해 앉았다. 이윽고 밤도 기울어 새벽바람이 몸에 스며드는 데에 놀라 퍼뜩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신기하게도 가면과 지팡이가 떨어져 나갔다. 아, 영험하여라 그 가르침이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구나. 달빛이 연못의 바닥까지 훤히 비추듯 마음의 어둠도 활짝 개었네. 마음을 가다듬어 노래를 했다.
‘조용한 마음에 사는 달은 연못 물결도 뚫는 한줄기 빛이 되어라’
그 후에 부인은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려 일본의 예순여섯 곳을 순례하면서, 어느 때는 좌선하고 어느 때는 노래를 짓고, 염불을 외우며 오로지 죽은 사람의 추선공양(追善供養-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공양)에 힘썼다고 한다.
“덧없이 지나는 세상에 선도 악도 또한 부질없는 꿈인 것을… 삼천갑자 동방삭이 구천 살을 살았다하나 이름만 전해 들었을 뿐 실제로 본적 없고 북구로주(北拘盧洲-수미산 북쪽에 있다는 땅)*의 사람들도 천 년을 산다지만 결국은 끝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사람 사는 세계는 노소부정(老小不定)이라 죽는 데에는 젊고 늙음의 순서가 없으니, 마치 화장터인 아다시노(化野) 들녘의 풀잎에 맺힌 이슬과도 같아서 아침을 맞이하지만 저녁은 기약이 없다. 사람은 늘 젊어 있지만은 않다. 마침내 늙은이가 되니 젊은이와 늙은이 그 누가 남아 있을 소냐? 그러니 젊을 때는 술도 마시고 꽃놀이도 즐기되 부디 악한 마음만은 품지 말아야 한다.”
‘마음은 젊은 바람 불지만 몸은 어느덧 흰 파도가 일어 백발과 주름만 몰려오네.’이것이 ‘아소다미’이야기의 결론이다.
*북구로주(北俱盧洲) : 고대 인도인들은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이라는 큰 산이 솟아 있고 주변은 큰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동서남북 네 곳에 동승신주(東勝身洲), 서우화주(西牛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북구로주 네 대륙이 있으며, 그 가운데 남섬부주가 가장 뛰어난 곳으로 인간 세계를 말하고 그 밑에 지옥이 있다고 믿었다.
이제 ‘구마노본지 에마키(熊野本地繪卷)’,‘추조히메 본지(中將姬本地)’,‘초호지 회생이야기(長室寺よみがへりの草紙)’등 세편이 남았는데 모두 비슷한 이야기들인 것 같다. ‘구마노본지 에마키’는 중생을 구도한다는 큰 뜻을 품은 일본제일의 큰 스승으로 그를 한번 보거나 참배한 사람은 삼도팔란(三塗八難-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세 지옥에 떨어져 정법을 듣지 못하는 여덟 가지 어려움) 에서 벗어나고, 십악오역(十惡五逆)*의 큰 죄라도 그 자리에서 소멸되며 현세와 내세의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십악오역 : 십악은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欲), 진에(瞋恚), 사견(邪見)을 말하고, 오역은 살부(殺父), 살모(殺母), 살아라한(殺阿羅漢-성자를 죽이는 일), 파화합승(破和合僧-교단의 화합을 깨는 일), 출불신혈(出佛身血-부처님의 신체를 훼손하는 일)
그리고 ‘추조히메 본지’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손에 자란 어린 히메가 커면서 어머니의 극락왕생과 아버지의 성불을 기원한 불심으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이 그녀를 서방정토로 데려고 갈 때 꽃비가 내리고 자운(紫雲)이 사방을 감싼 가운데 눈 깜작할 사이에 그곳에 도착하여 그곳의 주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일본에 전래된 ‘다이마 만다라’이야기라고 한다. 마지막의 ‘초호지 회생이야기’는 사람이 죽어 저승에 이르는 과정을 ‘지장시왕경(地藏十王經)’*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장시왕경 : 저승에서 죽은 사람을 생전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대왕을 말하는 것으로, 초칠일에 진광대왕(秦廣大王), 이칠일에 초강대왕(初江大王), 삼칠일에 송제대왕(宋帝大王), 사칠일에 오관대왕(五官大王), 오칠일에 염라대왕(閻羅大王), 육칠일에 변성대왕(變成大王), 칠칠일에 태산대왕(太山大王), 백 일째 평등대왕(平等大王), 일주기 도시대왕(都市大王), 삼주기에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으로 이어진다고 한 경전.
시왕 중에서 염라대왕이 가장 무섭다고 하는데 염라대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한참을 지나 넓은 강가에 당도하니 커다란 대문이 있었다. 안에 들어가 흰 모레가 깔린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니 안쪽에 으리으리한 저택과 누각이 즐비한 대궐이 보였다, 대궐 안에는 시왕이 나란히 앉아 계셨는데 그 중에서도 염라대왕이 특히 무서워 보였다. 염라대왕 얼굴은 삼척정도 되어 보였는데, 뜰아래에 무릎 꿇고 앉으니 염라대왕의 소리는 뇌성벽력 같아 혼비백산하였다.
염라대왕 앞에는 구생신(俱生神-사람이 태어나면 양어깨에 앉아 선업과 악업을 기록하는 신) 이라고 하는, 선악 두 가지를 기록하는 신이 있었다. 선업(善業)은 황금으로 된 팻말에 적는데 왼쪽에서 황금 팻말을 들고 들어온 구생신은 인자하고 온화한 얼굴이었고, 오른쪽에서 들어온 구생신은 괴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철로 된 팻말에 악업(惡業)을 적었다. 대청 앞에는 사람의 모습을 한 수많은 요괴들이 모여 있고 서로 먼저 말하려고 악다구니를 하는 통에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가 살펴보니 죽은 사람의 혼이 염라대왕 앞에서 사바세계에서 지은 죄를 낱낱이 고하는 것이었는데 그 절규하는 소리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옥졸이 사람의 머리를 밟고 눈에 구리 못을 박는 형벌도 있었다. 염라대왕께서 설명하셨다. ‘이 자는 생전에 거울을 볼 때마다 못생긴 것을 한탄하고 원래 있지도 않은 모양새를 만드느라 몸치장을 하고 내세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무릇 거울이라 함은 볼 때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걱정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은 하지 않고 죄 지을 궁리만 하고 염불을 외우지 않으니 한심할 뿐이다. 덧붙여 남의 눈을 속여 물건을 훔치고 남의 결점만을 들추어내려 하며 부처님을 멀리 하고 가사장삼을 걸친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며 눈으로 온갖 죄를 지은 사람이 이 형벌을 받는다.’
옥졸은 그 사람의 머리를 밟고 구리로 된 가위로 눈알을 도려내었다. 또 입으로 없는 일을 꾸며내고 부처님과 경전을 비방하고 비구를 욕하는 등 세 치 혀로 만든 죄를 지은 사람은 옥졸이 혀를 길게 뽑아내어 있는 대로 펼친 다음 가장자리에 못을 박고 그 위를 소와 말이 쟁기질하게 하였다. 벌레들이 달려들어 물어뜯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비정하였다.”
그런데 이 ‘초호지 회생이야기’는 초호지의 승려 ‘세이제(政惠)’가 필사한 것으로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게신 스님이 죽었다 살아난 후 저승에서 보고 들은 일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인데, 원본이 전란으로 소실되어 평소 게신 스님에게 전해들은 사람이 다시 필사한 것이다. 이 책이 불완전하여 다시 필사하여 현상하려하므로 이 책은 이곳 초호지(長宝寺)에 보관하여 둔다. 에쇼 십년(1513) 팔월 이십사일. 텐노지(天王寺) 동쪽 승방의 가운데 방에서 필사를 마쳤다. 이를 읽는 사람은 회향할 것이다. 승려 세이제”
이렇게 「오토기 소시슈」의 요지라 할까? 독후감을 마칠까 한다. 너무 많은 양이라 독후감으로 읽기도 조금 버거워 보인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불교에 대한 의식과 관점을 보게 된 계기가 되고, 사람이 살면서 선업을 쌓아야 한다는 것에는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2020.2.5.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