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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서해의 보물섬 '굴업도'
문학모임 회원들과 1박2일 일정으로 굴업도를 다녀왔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90km,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13km 거리에 있는 굴업도는 섬 조망과 바다풍광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섬의 형태가 사람이 엎드려 일하는 것처럼 생긴 데에서 굴업도(掘業島)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굴업리에 속하며, 면적 1.71㎢, 해안선길이 12km의 아담한 섬이다. 지형은 해발고도 100m 내외의 구릉으로 이루어졌으며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다. 아름다운 해안선과 함께 험한 절벽, 파도와 염분에 침식된 해식와 지형 등 독특한 풍광을 품고 있다.
굴업도를 갈려면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덕적도 행 여객선을 이용한다. 덕적도까지는 쾌속선을 타면 50분-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요금은 성인기준 편도 21.900원. 굴업도를 가기 위해서는 덕적도까지 가서 다시 굴업도 가는 소형 여객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덕적도-굴업도 요금은 편도 5,900원. 배편이 하루 한번 밖에 없기 때문에 만일을 위해 인천연안부두에서 굴업도 까지의 왕복표를 사전에 모두 구입해야 안전하다.
덕적도에서 굴업도가는 배는 ‘해양호’라는 소형 여객선인데 중간에 문갑도-지도-울도-백아도를 경유하며, 홀수날이냐 짝수날이냐에 따라 경유 섬 순서와 소요시간이 다르다. 홀수날의 경우에는 덕적도-문갑도-굴업도-백아도-울도-지도-문갑도-덕적도 순으로 운항하며, 짝수날에는 그 반대로 이동한다. 따라서 홀수날은 덕적도에서 문갑도만 거쳐 굴업도로 가기 때문에 덕적도에서 약 1시간이면 굴업도에 갈 수 있는 반면, 짝수날에는 덕적도-문갑도-지도-울도-백아도를 거쳐 굴업도를 가므로 약 2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이 경우 인천연안부두에서 덕적도 가는 시간 까지 포함하면 약 3시간 40분이 걸리는 셈이다.
필자 일행은 일정상 부득이 짝수날에 출발하는 관계로 위에 열거한 섬들을 모두 경유, 가장 긴 시간인 3시간 40분 정도 걸려 굴업도에 갈 수 있었으며, 다음 날 돌아오는 배편 역시 반대로 홀수날이라 동일한 소요시간, 동일한 코스로 돌아왔다.
*필자가 방문한 당시에는 상기와 같은 교통편이었으나 2012년 1월 이후에는 나래호라는 161명 정원의 중형여객선이 운항하기 때문에 덕적도로부터 소요시간이 홀수날은 1시간, 짝수날은 2시간 정도로 단축되었다.
필자 일행은 인천연안부두에서 오전 9시 30분 출발하는 코리아나호에 탑승했다. 날씨는 흐린 편, 시야가 좋지않았다. 선내는 2층 구조. 1층 객실만도 224명이 탑승할 수 있는 중형 여객선이다. 2층도 아마 100명 이상은 탈 수 있을 것 같은 넓은 규모이다. 필자는 배에 오르자마자 언제나 처럼 갑판으로 나갔다. 인천 앞바다와 주위 섬들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출항한지 몇 분 지나자 인천대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장관이다. 차로 몇 번 인천대교를 건너기는 하였지만 바다에서 여객선을 타고 다리밑을 지나보기는 처음이다. 인천대교를 지나면 바로 무의도가 보인다. 국사봉에서 호룡곡산으로 이어지는 산능선이 마치 낙타 등 처럼 굽어 있다. 우측으로 소무의도로 이어지는 연도교도 보인다. 이 다리는 무의도 광명항과 소무의도를 연결하는 다리로 올해 곧 준공될 예정이다.
무의도를 본 후 자리로 돌아와 잠시 쉰 듯 한데 벌써 덕적도 도우선착장에 접근한다. 약 1시간 10분 걸렸다. 필자의 경우 덕적도는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오래전 대학 재학시절 여름방학을 이용, 덕적도 서포리에 봉사활동을 왔던 적이 있었고 직장 초년 시절 바다낚시하러 온 적도 있다. 얼마 만인가? 반갑다. 덕적도 바로 건너편에는 소야도가 보인다. 도우선착장은 덕적도와 소야도 사이에 있는 어항 모양의 아름다운 선착장이다.
코리아나호가 빠져나가자 곧 굴업도 행 해양호가 들어온다. 해양호는 승선인원 80명 정도의 조그만 배다. 이곳에서 굴업도 출항시간은 11시 정각. 이제부터 2시간 40분 정도 느긋한 바다여행을 해야 한다. 아직도 날씨는 흐리다. 덕적도가 서서히 멀어져 간다. 배위에서 바라보니 덕적도가 마치 소가 누워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좌측 봉우리는 국수봉. 해발 314m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우측 비조봉에서 국수봉에 이르는 산 능선은 3-4시간 정도의 산행코스로 훌륭하다.
덕적도를 벗어나면 곧 문갑도 선착장에 이르고 지도-울도-백아도로 이어진다. 바다가 잔잔하다. 누가 일부러 다림질해 놓은 것 같다. 문갑도 뒤로 좌측에 제법 큰 섬 하나가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날씨가 흐리니 더욱 환상적이다. 바다가 아니라 구름 위에 떠 있는 섬 같다. 자욱한 물안개에 쌓여 신비로운 자태를 보여준다. 저 섬 이름은 선갑도. 무인도라고 한다. 덕적군도에서는 덕적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산이 높아 섬 모양이 특히 아름답게 보인다.
덕적도 인근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많다. 마치 섬들을 여기저기 뿌려놓은 것 같이 흩어져 있다. 여객선이 섬과 섬 사이를 헤염치듯 빠져나간다. 승객 중 섬 주민 한 분이 일일이 섬 이름을 가르쳐준다. 지도 선착장을 지나면 바로 옆에 기묘한 바위섬인 토끼섬이 있고, 정면에는 부도, 납도, 벌섬, 멍애섬, 각흘도 등이 눈에 들어온다. 바둑판 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섬들의 모습이 오밀조밀하고 기기묘묘하기도 하다.
지도 다음은 울도와 백아도. 너무 멀어서 울며 들어왔다가 떠나기 싫어 또 울며 떠난다는 섬인 울도를 지나면 해안경관이 아름답고 기암절벽이 많은 백아도에 접근한다. 백아도를 지나면 굴업도 권역. 서서히 굴업도의 자태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백아도와 굴업도 중간에는 ‘선단여’라고 부르는 바위섬 세 개가 특히 유명하다. 아주 옛날 서로 피붙이인줄도 모르고 사랑하게 된 남매의 슬픈 전설이 담겨있는 바위섬이다. 이 섬은 보는 각도에 따라 한 개 또는 두 개로 보이기도 하고 세 개의 돌기둥으로 보이기도 한다.
“옛날 백야도에 부모와 두 남매가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 부모님이 죽게되자 외딴 섬에 살던 마귀할멈이 여동생을 납치했다. 혼자 남게 된 오빠는 장성한 후 어부가 되어 생계를 꾸려갔다. 하루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배를 타고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이름 모를 섬으로 표류했다. 섬에 가까스로 도착한 오빠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오래전에 헤여졌던 남매 사이인 줄도 모르고 둘은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하늘은 선녀를 내려보내 둘은 맺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둘은 도무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사랑의 결실을 맺지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게 낮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에 진노한 하늘은 두 남매와 마귀할멈에게 벼락을 내려 죽게 했고 그들이 죽은 후에 세개의 바위가 절벽처럼 솟아나게 되었다. 이 광경을 본 선녀는 승천하면서 붉은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선녀가 붉은 눈물을 쏟았던 곳에 생긴 바위라고 해서 ‘선단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3시 55분, 드디어 굴업도에 도착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굴업도까지 오는 데 덕적도에서의 환승을 위한 대기시간 포함, 거의 4시간 반이 걸렸다. 예정시간보다 조금 더 걸린 셈이다.
선착작 좌측으로는 토끼섬이 보이고 정면에는 목기미해변과 덕물산, 연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첫눈에 정말 아름다운 섬이구나 하는 인상이 든다. 우리 일행의 숙소는 장할머니댁. 굴업리 부녀회장 최정숙씨 집이다. 굴업리 마을은 선착장에서 좌측 고개를 넘어야 한다. 고갯길 초입 좌측에는 대나무숲이 보이고 고갯마루에는 굴업도를 소개하는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굴업도는 화산섬으로 섬 전체가 십자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선착장에서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중심으로 선착장과 SK기지국 철탑이 수직 축을 이루고, 좌로는 개머리능선, 우로는 덕물산과 연평산이 수평 축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수직 축 언덕 좌우로 각각 큰말해수욕장과 목기미해수욕장이 자리하고 있다.
굴업리는 큰말해수욕장에 인접한 조그만 마을이다. 굴업도의 총주민은 18명, 10가구에 불과하다. 전에는 목기미해변 뒤 연평산과 덕물산 오르는 언덕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 데 현재는 폐가만 남아 있으며,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큰말해변 마을이 유일하다.
민박집에서 마중나온 트럭을 타고 숙소에 도착,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한 후 곧 개머리능선 산책에 나섰다. 개머리능선은 큰말해변을 거쳐 올라야 한다. 마을 끝 해변 옆에는 태양광발전소가 보이고 헬기장도 만들어져 있다. 마을에서 해변 쪽으로 내려가면 좌측으로 토끼섬이 보이고 우측으로 개머리능선이 펼쳐져 있다. 해변 정면에는 멀리 선단여 바위섬도 보인다.
모래가 참으로 곱다. 마치 떡고물을 깔아놓은 것 같다. 파도가 다림질하여 매끈하게 만들어놓은 해변, 물 빠진 후 아직 아무도 들어가보지 않은 처녀지에 처음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다.
개머리능선 언덕을 오른다. 처음에는 약간 가파르다. 우측 계곡에는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사구(砂丘)가 형성되어 있다. 언덕 초입에 하얀 색 팻말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출입금지 경고문이다. 개머리능선 일대는 법인 사유재산으로 출입을 금하며 불가피하게 출입하고자 할 경우에는 사전에 승인을 받으라는 문구이다. 경고문은 씨앤아이레저산업 명의로 되어 있다. 아름다운 섬 굴업도, 그리고 굴업도 내에서도 트레킹 하일라인트 중 하나인 ‘개머리능선’을 오를 수 없다니 처음에는 불쾌감마져 느껴진다. 그런데 굴업도가 처해있는 현실을 알고나면 어쩔 수 없이 이해하고 체념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이니 자기 땅에 들어오지말라는데 어쩌랴.
굴업도는 현재 개발해야 하느냐 자연생태를 보존해야 하느냐로 큰 몸살을 알고 있다. 굴업도의 주인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니고 특정기업이다. CJ그룹에서 이미 굴업도 전체부지의 98.5%를 매입한 상태라고 한다. 굴업도는 1994년 핵폐기물 처리장 후보지로 선정됐다가 활성단층 발견으로 계획이 백지화된 바 있다. 그런데 근년들어 CJ그룹에서 이곳에 골프장과 해양리조트, 호텔 설립 등 대규모 관광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골프장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곳은 바로 개머리능선 지역으로 이곳은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인 황조롱이, 먹구렁이, 매, 왕은점표범나비, 말똥가리, 검은머리물떼새, 애기뿔소똥구리 등 희귀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해안파식대 등 지형적으로도 보존가치가 높은 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굴업도 인근은 우리나라에서 조차가 가장 심한 곳이라 한다. 게다가 핵폐기장 후보지가 될 정도로 부근엔 수심이 깊다. 단단한 응회암(凝灰岩)으로 이뤄진 섬이지만 파도에너지가 강해 침식현상이 극심한 곳이기도 하다. 응회암은 화산분출시에 나온 재나 모래가 엉겨 된 암석이다. 큰말 해변 좌측의 토끼섬은 굴업도 본섬과 연결된 육지가 파도에 잘려 섬이 된 것이라 한다. 토끼섬 해안에는 파도와 염분에 의해 깎여지고 파인 해식절벽이 장관이다. 화산재와 암석조각이 굳어 생긴 약 20m 높이의 절벽을 3~5m 깊이로 우묵하게 파낸 ‘터널’이 약 120m 길이로 펼쳐져 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굴업도의 침식지형은 세계적이며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환경단체의 반대가 극심한 것은 말할 나위 없다. 환경단체 뿐이 아니다. 문화예술인들까지 일어섰다. 2009년 5월 12일에는 건축가 김원 씨를 대표로 소설가 이호철, 연출가 표재순, 사진작가 배병우,사진작가 김중만 등 각계각층의 문화예술인 150여명이 모여 ‘굴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출범시키고, 굴업도를 문화예술의 섬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불과 10가구 밖에 안되는 주민들도 개발찬성측과 반대측으로 나뉘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개발 찬성 현수막과 개발반대 현수막이 나란이 걸려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자체와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개발로 인한 소득수준 향상이라는 당근에 솔깃할 수 밖에 없겠지만 보다 장기적으로 보면 생태계 보존 및 문화재적 보물섬을 보호해야 한다는 면도 절대로 소흘히 다룰 수 없는 사안이다. ‘생태계를 최대한 보존하는 선에서의 자연친화적 개발’이라는 중간접점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과제일 것 같다.
어쨌든 필자 일행은 CJ측 현지관리인으로부터 출입일지에 서명하는 형식으로 승인을 득하고 개머리능선에 올랐다. 개머리능선은 말이 언덕이지 실제로는 광활한 평원이다. 길게 뻗은 주능선에는 마른 억새밭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능선오르는 도중 뒤를 돌아본다. 우리가 조금전 지나온 큰말해변과 토끼섬이 눈앞에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능선 우측 허릿길로 해안선을 따라가 본다. 바다를 끼고 풀밭길을 걷는 맛이 그만이다. 해안선 우측 건너에는 멀리 덕적도도 보인다.
능선 정상부근에 접어들면 한마당 소사나무 숲이 막아선다. 굴업도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소사나무숲이다. 섬 전체가 소사나무숲으로 둘러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자기 숲 사이로 움직이는 물체가 보인다. 꽃사슴 떼다. 꽃사슴 몇 마리가 놀라 달아난다. 굴업도에는 꽃사슴이 자연번식하고 있다. 주민들 말에 의하면 100-200마리 정도는 될 것이라 한다. 꽃사슴이 노는 언덕과 억새군락 평원. 그리고 흑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해안비탈. 얼마나 목가적인 풍경인가.
해안비탈길을 계속 돌아본다. 개머리능선 끝머리는 마치 ‘바람의 언덕’같은 지형이 뿌리를 내린다. 능선모양이 개머리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면 끝머리는 개의 주둥이 부분이 되지않을런지. 아니면 꼬리에 해당할까?
해안비탈에는 깎아지른 절벽도 있고 두꺼비짝짓기바위, 손가락바위 같은 기암괴석들도 보인다.
‘바람의 언덕’에 서면 멀리 우리 일행이 배로 지나온 백아도와 선단여 등 인근 섬들이 파노라마 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본다. 나도 한포기 풀이 되고 억새가 된다. 파란 하늘이 내려와 내몸을 덮는다. 그대로 잠들고 싶다. 하늘을 덮고 자연 속에 파묻히고 싶다.
개머리언덕 정상에 올라 길게 뻗어나간 능선을 내려다 본다. 길이 바다를 향해 굽이치며 흐른다. 능선 위 사람들 모습이 노오란 화폭 위에 길을 열어가는 한 무리의 순례자들 같다. 잔잔하다. 저 길을 따라가면 수평선에 다다를까? 아니면 동화 속 용궁으로 향할까?
새아침이다. 오늘 일정은 연평산과 덕물산 등산. 그리고 붉은 해안과 코키리바위 해안 산책이다.
굴업도에서의 배 출항시간이 12시 30분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일찍 아침식사를 마치고 7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언덕을 넘어 목기미해변을 따라간다. 해변에서 첫 번째 만나는 언덕 좌측으로 접어든다. 목기미해변에는 전신주가 쓸쓸하게 아침바람을 맞고 있다.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구차한 신세. 목기미해변 동쪽 섬에 사람이 살 때 연결됐던 흔적이다.
해변 좌측 언덕을 조금 오르면 폐가를 만난다. 폐가 옆에서 쉬고 있던 꽃사슴 몇 마리가 놀라 달아난다. 달아나다 능선에서 다시 멈추고 우리 일행을 내려다 본다. 이방인들의 움직임을 신기한 듯 주시한다.
폐가를 지나 작은 언덕을 오르면 연평도와 덕물산 중간에 다시 해안이 펼쳐진다. 이곳이 굴업도의 또 하나의 명물인 ‘붉은 해안’이다. 해변 모래가 온통 붉은 색깔이다. ‘살아있는 지형학 교과서’라고도 불리워지는 이곳 해안은 침식의 강도에 따라 반월형 해안의 절벽에는 파도가 때려 동굴이 만들어지고 무너져 내린 적색바위가 붉은 모래로 바뀌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남해 홍도나 인천 장봉도 해안처럼 붉은 암벽은 종종 본 적이 있지만 해변 모래 자체가 온통 색깔을 칠해놓은 듯 붉게 물들어 있는 경우는 처음 봤다. 모래 자체도 너무 곱다. 이름 그대로 '레드 카펫'이다.
붉은 해안 좌측 비탈을 따라 연평산 능선을 오른다. 연평산은 겨우 100m 남짓 높이로 낮은 산이지만 바다에서 바로 솟아올라 있어 눈으로는 제법 높은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특히 정상은 깎아지른 암벽능선이라 감히 오를 엄두가 나지않는다.
연평산 능선 역시 오르는 길 내내 소사나무숲이다. 막상 올라보니 생각보다 별로 가파르지않다. 산행 초보자들도 별 어려움없이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수준이다. 중간 쯤 올라 잠시 쉬면서 정상을 바라본다. 연평산 정상에 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올라온 터라 과연 정상 암봉까지 길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정표도 없다. 다만 필자의 산행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 길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뿐이다.
일행 중 산행경력이 비교적 많은 몇명이 선발대로 나섰다. 만약 오르다 너무 위험하다면 중간에 내려올 심산이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바위절벽 중간에 능선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루트가 보인다. 거대한 암벽 사이로 계곡이 열려 있는 것이다. 가파르기는 하지만 충분히 오를 만한 루트이다.
드디어 정상 도착. 높지않은 산이다 보니 시간도 별로 걸리지않았다. 붉은 해안에서 약 40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아래에서 볼 때는 까마득한 절벽인데 막상 올라보니 정상은 편안한 바위능선이다. 정상에는 돌무더기만 있을 뿐 표지석도 보이지않는다. 정상에 서서 굴업도를 내려다 본다. 멀리 백아도와 선단여 등 인근 섬들이 연꽃처럼 흩어져 있고 굴업도가 십자가를 그리듯 성스럽게 앉아 있다. 우측 코키리바위해안도 내려다 보인다. 세 개의 모래해변과 굽이치는 해안선. 역시 절경이다. 환호성이 터진다. '서해의 보물섬'이라는 별칭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물론 보물섬이라는 별칭은 경관이 아름답기 때문 만은 아니다. 굴업도는 중생대 백악기(1억 3,600만년-7,100만년 전)에 만들어진 섬이다. 당시의 화산폭발과 지진활동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오랜 세월 바닷물에 깎이고 녹아 빚어진 침식지형은 가히 국보급이다. 독특한 지형은 굴업도 만의 특이한 기후현상을 일으켜 남방계 식물과 북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변화무쌍한 침식지형과 끊임없이 생성되는 사구에 다양한 곤충과 양서, 파충류가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
굴업도에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 먹구렁이, 왕은점표범나비 등 현재 15종 이상의 멸종위기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섬은 또 중국으로 이동하는 거의 모든 종류 철새들의 마지막 휴식처이기도 하다. 토끼섬의 해식애는 해식지형의 보물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굴업도는 한국의 갈라파고스,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 서해의 진주 등으로 불리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연평산 정상을 오른 후 ‘코키리바위’ 해안으로 내려간다. 코키리바위에 가기 위해서는 물때를 맞춰야 한다. 연평산 오를 때는 코키리바위 해안에 물이 차 있었는데 8시 반 경에는 물이 빠져 있다. 사람 키 수십 배 높이의 암봉인 이 바위는 바위 아래가 대문처럼 뚫려 있어 마치 코키리가 코를 땅에 박고 있는 모습과 흡사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후지형학자의 분석자료에 의하면 굴업도는 중생대 말 대규모 화산이 폭발해 날아온 암석과 화산재가 굳어 섬을 형성했다고 하며, 코키리바위는 파도와 소금기가 깎아낸 작품이라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연평산 정상과 코키리바위를 둘러본 후 시간여유가 있어 내친 김에 덕물산으로 건너간다. 덕물산은 암벽은 별로 없는 대신 원시림에 들어가듯 소사나무 숲을 헤치면서 가파른 숲을 올라야 한다. 덕물산 높이는 해발 138.5m. 높이만 보면 동네 야산 정도이겠지만 섬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만하게만 볼 것은 아니다.
덕물산 정상에는 ‘덕물산’이라고 표시된 표지판이 걸려있고 역시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덕물산 정상 조망 역시 환상적이다. 우측으로는 붉은 해안과 연평산이 보이고, 정면으로는 선단여 바위섬, 목기미해변과 개머리능선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행을 마친 후 마을로 돌아와 다시 큰말해변을 걸어본다.
밀려오는 파도, 그 포말이 하얗게 부서진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 아름답고 보배로운 섬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니...갑자기 유치환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바다를 향해 목청껏 외쳐본다. 굴업도 역시 그렇게 외치는 것 같다. (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