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굼벵이의 고백
정 규 준
나는 굼벵이야.
내가 사는 곳은 톱밥과 기름진 퇴비가 섞인 상자 속이야. 이곳에서 우리는 먹고 자고 심심하면 팬터마임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 그래서인지 통통한 몸매와 윤택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 우리의 조상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았다고 해. 그러나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 아무도 믿지는 않아.
우리 굼벵이들은 해마다 우량충蟲 선발대회를 해. 그곳에서 우승하면 출셋길이 열리지. 그들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인정받고 잘 짜인 영양식단 아래 특별 관리되지. 내 친구중 하나는 대회에 나가 우승을 해서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어.
그런데 나는 그런 일상이 행복하지가 않은 거야. 친구들처럼 먹고 자고 노는 것이 무료하기만 하였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건지,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건지 알고 싶었어. 그런 생각을 왜 하느냐고 친구들은 말하는데,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의문을 어찌 하겠어? 묻고 또 물었지. 그러나 제대로 말해주는 자가 없었어. 나는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어느덧 이해할 수 없는 굼벵이로 낙인찍혀 무리에서 잊혀 가고 있었지.
어느 날이었어. 우리의 보금자리가 파헤쳐지면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어.
"굼벵이들이 잘 자랐네. 무게도 실하게 나가고 값도 제대로 받겠어."
친구들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박스에 담겨졌어.
"이 녀석은 아주 형편없네. 상품가치가 엉망이야."
누군가가 마당 한 구석에 나를 던져버렸어.
부르릉, 굉음이 들리면서 동무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갔어.
홀로 버려진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 빈사상태로 누워 있었어. 친구들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지. 굼벵이에게도 영혼이 있는 것일까. 내 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말하는 듯했어.
"잃지 않고는 찾을 수 없고, 버리지 않고는 취할 수 없다."
그때 어디선가 한낮의 적요를 깨는 소리가 들려왔어.
"맴맴맴맴 맴―."
그 소리는 가슴을 뛰게 만들고 나를 흥분시켰어. 내 속에서 본능처럼 꿈틀대는 무언가를 느꼈지. 나의 유전자는 고속영사기처럼 기억의 필름을 돌려 그것이 전설 속의 조상 ‘매미’라는 것과, 되어야 할 나의 실체임을 알아냈어. 그래 매미가 되자.
나무 위에서 구성지게 울어대는 매미는 바늘 같은 긴 입을 나무에 꽂고 있었어. 어쩌면 우리 식량은 나무 수액일지도 몰라. 사람들이 좋은 먹이를 주니 본래의 먹이를 잊어버렸던 거야. 동무들이 간 곳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 좋은 환경 속에서 우리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약용으로 사육되고 있었던 거지. 내 속에서는 본래 모습을 찾아야겠다는 강한 욕망이 솟구쳐 올라왔어.
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려 있는 힘을 다했어. 그러나 올라갈 수가 없더군. 그곳에 오르기 위한 준비가 안 된 듯했어. 말벌과 사마귀가 공격해 왔어. 안간힘을 다해 도망쳤지. 땅 위는 내가 살기에 아직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매미가 되기 위하여 좀 더 성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야.
나는 땅을 파기 시작했어. 내가 자랄 은신처가 땅속 어둠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파악했다고나 할까. 다행이 끝이 뾰족하고 곡괭이 같은 앞다리 덕분에,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 그렇게 꽤 깊이까지 파고들어 간 것 같아. 이 정도면 안전하고 추위도 이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땅굴 속에는 나무뿌리가 있었어. 나는 수액을 빨아먹기 시작했어. 즙이 몸으로 들어가자 세포들이 환성을 지르는 것 같았어. 조상들이 태곳적부터 먹던 바로 그 맛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지. 난 생 처음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꼈어.
주변에서 다른 굼벵이들도 수액을 빨고 있는 걸 발견했어. 나는 반가워서 소리를 질렀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어. 그들도 나처럼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였던 거야. 나는 동료들과 더불어 힘을 내며 땅속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어.
지하 생활은 편안하지만은 않았어. 천적이 숨어서 우리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지. 한번은 땅 위로 나가도 될 만큼 컸다는 생각에 표면 가까이 올라갔다가 두더지에 쫓겨 기겁을 하고 도망쳐 왔어. 교만하여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이었지. 개미들은 땅속 깊숙이까지 구멍을 파고 들어와 달려들기도 하였어. 밑바닥까지 꼼꼼히 살피지 않고서는 온전한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동료들 사이에는 누가 더 잘났는지 다툼이 있기도 했어. 모두 주관적 잣대를 가지고 있어 우열을 가릴 수가 없더군. 우리는 겉모양보다는 서로를 이해해가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배우게 되었어.
우리는 어둠에 적응해 갔어. 어둠은 품어주고 씻어주고 새롭게 채워주는 재생의 바다였지. 가없는 잠김 속에 생명을 보듬고 유영하는 모성의 기운이랄까. 빛이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어둠 속에서 성장한 빛은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는 사랑이 되었노라고. 사랑은 봉합하고 치유하고 살려내는 생명이라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우리의 몸에 발자국을 내며 지나고 또 지났어.
그렇게 일곱 해 정도가 지났을까. 우리는 지하에 있었지만 빛을 느낄 수 있었어. 그것은 우리 몸 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지. 빛이 차오르는 보름달처럼 가득하여 갈 때, 땅 위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강렬하게 느꼈어. 매미가 된다는 것은 빛으로 가득 차 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지.
겨드랑이가 가려워. 아, 나의 계절이 오고 있음을 느껴. 비록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이제 세상에 나가 맘껏 울어볼 거야.
<2015 에세이문학 봄호>
첫댓글 한 여름 울어대는 매미들, 그 울음소리가 왜 그렇게 절절해서 시끄러운지 알겠습니다.
너무나 긴 어둠속에서의 웅크림, 그럼에도 빛 가운데서 살아내는 시간은 너무도 짧으니
나라도 그리 울 것 같습니다. ㅎㅎㅎ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