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해도병마절도사 홍화보 묘소: 경기도 고양시덕양구 대장동 271-10
6代孫 홍승산께서 묘소아래에 기거하며 묘소를 수호하고있다.
조선 후기의 문, 무신 홍화보(洪和輔,1726年~1791年).본관은 풍산(豊山), 字는 경협(景協)이다.
高祖는 남원부사증 의정부좌참찬 홍탁(洪𩆸), 증조는 예산현감증 호조참판 홍주문(洪柱文), 조부는 承政院右副承旨증 이조판서 홍만기(洪萬紀), 부는 同知敦寧府事증 이조판서 홍중후(洪重厚), 모는 司書증 참판 성준(成儁)의 따님이다. 兄은 洪友輔, 洪來輔 洪哲輔, 洪處輔이다. 슬하에 2남2女를 두었는데, 사위는 茶山 丁若鏞이고, 아들은 洪元浩 洪允漢이다.
진사시 합격하고도 무과에 다시 응시하여 문을 겸한 무인으로 크게 된 사람이다.
1771년(영조 47년) 훈련초관이던 홍화보는 국자시에서 1등하고 죽산부사가 청나라 황당선을 막기 위해 장산곶 북쪽에 병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함으로써 곧바로 1771年(英祖47年) 長淵府使에 제수되고, 이후 碧潼郡守, 泳宗, 坡州 防禦使等은 外任이었다.
1775년(영조 51년) 2월에는 영의정 申晦(신회)의 추천으로 동부승지에 除授되었고, 經筵參贊官을 兼하였으니 文職이다. 나아가서 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지네 모양의 진법인 오공진과 북두칠성 모양의 진법인 칠성진을 창안할 정도로 병법에 밝았다.
1776年(英祖52年) 英祖가 昇遐하였는데, 이때 홍국영이 권력을 쥐고 안팎으로 휘둘렀다. 정조가 등극하고 정조의 세손 시절 큰 공을 세운 홍국영의 세도가 극에 달했던 때였다. 홍국영에게 출세를 위해 아부와 뇌물을 바쳐야 했던 시절이었는데, 예외적 인물이 있었으니, 다산의 장인 홍화보이다.
아부를 모르던 대장부 홍화보, 그는 홍국영에게 한 번도 뇌물을 주거나 아부를 하지 않았다.
결국 홍화보는 홍국영의 눈밖에 나 운산으로 귀양을 떠난다. 그때 어떤 사람이 “후일을 위해 뇌물을 바치라”고 권했다. 그러자 홍화보는 비웃으며, "홍국영을 태산처럼 보는데 그는 빙산에 지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실세로 떠오른 홍국영(홍국영, 1748년~1781년)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유배를 가게 되었고, 친구들은 홍국영에게 뇌물을 주라고 충고했지만 "그대들은 덕로를 태산으로 아는가? 내가 보기에는 빙산에 불과하다."고 일축할 만큼 올 곧았는데 다산은 호방한 장인의 기개를 시로 읊어 유배를 떠나는 길을 위로하였다.그리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배된 그는 1780년(정조 4년) 홍국영이 전리에 방축되면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자 다산은 아내를 데리고 진주에 주재하는 장인를 찾아간 적이 있다.
1784년(정조 8년) 9월 강계부사, 부호군을 지냈다.
1787년(정조 11년) 회령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품계가 가선대부에 올라 부총관과 여러 영의 아장을 지냈다. 얼마 안 있어 1788년(정조 12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돌아와서 다시 아장이 되었다.
1791년(정조 15년)에는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4월 황주에서 사망하였으니, 나이 66세 였다.
이렇듯 홍화보는 영조가 내려준 각궁을 가보로 간직하다가 사위 茶山 丁若鏞에게 물려줄 만큼 재기발랄한 젊은 사위를 큰 기대와 사랑으로 무척 아꼈는데 다산이 아방비어고등 병서를 짓게 된 것도 모두 장인의 도움을 받은 덕택이었고, 무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동부승지에 발탁되기도 한 홍화보(洪和輔, 1726년~1791년)를 장인으로 모시는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부친이 복직되자 서울 명례방 소룡동(현재의 '중구 명동)에 집을 세내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