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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프리덤’(freedom)이라고 영어로 읽어야 더욱 실감이 난다. 영국인이 이룩한 자유야말로 시민의식에 의한 것으로 인류가 달성한 자유 중 가장 인격적인 자유이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자유는 그들의 전체주의적 충성심 때문에 빛이 흐려진다. 프랑스인의 자유는 그들의 열정으로 인해 종종 혼란을 일으킨다. 미국인의 자유는 아직도 치기(稚氣) 어린 데가 있다. 과연 자유의 올바른 행사야말로 개인과 국가, 민족을 불문하고 저의 인격과 정신의 성장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서양사를 자유의 발전사라고 할 때, 그것은 곧 저들의, 아니 인류의 인격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다.
자유의 본질은 선택에 있다. 선의 자유로운 선택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성경 첫 권은 하나님의 전능과 사람의 자유의지 문제로 시작된다. 성경은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를 침범치 못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자유 없이는 ‘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추호라도 어디엔가 구속되는 것은 선이 아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인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가 이를 데 없이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작년에 있었던 4.19 의거는 물론 그 성격상 정치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자유를 위한 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년간 가까스로 지탱되다가 우리의 자유에 대한 무지와 남용으로 결국 쿠데타를 부르고야 말았다. 이는 자유의 고귀성, 도덕성, 자율성을 침범한 데 대한 하나님의 질책이 아닌가? 선을 위한 자유가 아닌 악을 위한 자유로 전락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내린 질책이 아닌가?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음을 유념할 일이다.
나는 자유를 온갖 죄악과 방종의 온상으로만 알아온 정치인과 국민을 저주하고 싶다. 그리고 자유의 남용, 부패와 악의 시정을 표방하고 등장한 군사 정부가 자유에 대해 통제를 가한다는 것은 피치 못할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모쪼록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 없는 선은 있을 수 없다는 도덕적 원칙을 이해하여, 이 자유를 모르는 철없는 민족이 공포심에서 기계적인 거짓 생활을 하지 않도록, 자유를 살려서 관용과 사랑으로 봉사해주기 바란다. 결국 혁명이란 일종의 수술이다. 수술 시간은 되도록 짧아야 한다. 정부는 자유 수호를 위한 준비와 노력을 최단 시간 내에 끝내 주기를 바란다.
정부는 진정한 자유야말로 공산주의에 대해 총탄 이상의 무기가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자유진영의 승리 역시 깊은 의미에서 서구적인 자유의 승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자유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신념을 깊이 해야 한다. 한국 정치의 최대 과제인 경제 건설에 있어서도, 기업인의 활달한 창의와 노력은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끝으로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태, 어떤 사정에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 상대로 도덕적인 자유, 아니 복음적인 자유를 사는 자이다. 결코 비굴해서는 안 된다.
<성서연구> 제90호 (1961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