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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김명인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김명인(金明仁, 1946~ )은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경기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김명인은 1973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출항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1973』 동인을 거친 그는 김창완 · 이동순 · 정호승 등과 함께 『반시』 동인에 참여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인다. 그는 이제까지 『동두천』(1979) · 『머나먼 곳 스와니』(1988) · 『물 건너는 사람』(1992) ·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 · 『바닷가의 장례』(1996) · 『길의 침묵』(1999) 등 여섯 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 김명인의 첫 번째 시집인 『동두천』을 가로질러 흐르는 중요한 의식은 세계에 대한 낯섦과 통로가 차단된 실존의 막막함이다. 그는 고아나 혼혈아의 고통스러운 삶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행복에 대한 열망을 실현시켜주지 않는 우리의 삶의 자리인 현실의 어두운 진상을 보여준다.
김명인, 「안개」,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 『동두천』에 실린 시들에는 고아나 혼혈아처럼 뿌리 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아이들, 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 실존의 궁핍함과 답답함을 표상하는 막막한 어둠이 자주 보인다. “어둠을 휘감고 흐르던 안개”가 짙게 끼여 있는 송천, 그 삶의 미망(迷妄) 속에서 허기와 추위에 시달리며 남루한 삶을 꾸려가는 이들은 그 막막함 속에서 떠돈다. 그들은 막막함 속에서도 “그 세상 속에서도 좋은 일들이 /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으면서 / 믿음이 만드는 부질없는 내일 속으로” 떠난다. 주어진 현실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더 나은 현실을 찾아 떠나지만 이미 그들은 저희의 기대와 믿음이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삶의 본향(本鄕)을 찾아 떠나지만 끝내 거기에 닿을 수 없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 비극성과 암담함은 한결 깊어진다. 송천동의 고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캔터키의 집 · Ⅰ」 · 「캔터키의 집 · Ⅱ」나 보산리의 혼혈아들이 나오는 「동두천」 연작에 숨겨진 시의 모티프도 바로 이런 삶의 어려움과 그 어려운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의 시에서 송천동 또는 동두천은 고유 지명이라기보다 이미 하나의 상징이다. 김명인, 「동두천 · Ⅳ」,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 김명인, 「동두천 · Ⅸ」,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구문으로 이루어진 이 시들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동두천은 우리 민족의 내적 상처와 불행의 다른 이름이며, 혼혈아들은 우리 민족의 상처를 대신 앓고 있는 속죄양이라는 점이다. 동두천은 아메리카에서 태어나지 못한 혼혈아들에게는 외로움과 슬픔과 배고픔과 추위와 어둠이 뒤범벅되어 있는 춥고 시린 삶의 공간이다. 그들의 비극은 아메리카의 피를 받고 이 땅의 동두천에서 태어난 데 있다. 거기서는 “태어나서 죄가 된 고아들과 / 우리들이 악쓰며 매질했던 보산리 포주집 아들들이 / 의자를 던지며 패싸움을 벌이”(「동두천 · Ⅱ」)거나, “우리들이 가르치던 여학생들은 더러 몸을 버려 학교를 / 그만두었고 / 소문이 나자 남학생들도 덩달아 퇴학을 맞아 / 지원병이 되어 군대에”(「동두천 · Ⅲ」) 가거나, 「동두천 · Ⅳ」에서처럼 타지로 흘러가서 “다방 레지”를 하는 삶이 이어진다. 이런 삶은 흔히 「동두천 · Ⅸ」에서처럼 “떠돌 곳은 다 떠돌아서 이곳 또한 정처 없나니”라는 식의 암울한 막장 의식을 거느리게 된다. 무엇이 “등을 밀어 /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일까 하고 자문하는 「동두천 · Ⅰ」은 동두천에서 빚어지는 삶의 특수한 일면을 보여준다. 동두천은 혼혈아들이 나고 자란 곳이면서도 살 빛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혼혈아들은 ‘동두천’이라는 현실과 ‘아메리카’라는 꿈 사이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기 일쑤다. 그들은 막막한 어둠 속에서 다만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라고 절박하게 외치거나, “아버지, 밤이면 아메리카를 꿈꿔도 될까요?”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들은 저희의 의지와 상관없이,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동두천 · Ⅰ」)라는 구절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첩첩 수렁” 안쪽의 세상으로 떼밀리곤 한다. “첩첩 수렁”의 안쪽이 고통스러운 삶으로 차 있는 동두천이라면, 그 너머는 혼혈아들이 “함께 울음이 되어 넘기던 책장이여 꿈꾸던 / 아메리카”(「동두천 · 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첩첩 수렁”의 어두운 땅, 동두천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떠나려고 하면서도 그 불행한 삶, 행복이 유보된 그 남루한 삶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다. 시인은 그 불행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밝히는 일 자체가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비관주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김명인은 동두천이라는 특수한 현실 공간 속에서 고아와 혼혈아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또 ‘얼마나’ 힘들게 저희에게 주어진 불행과 싸우며 살고 있는지를, 면밀한 관찰을 통해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은 동두천이라는 그 무질서와 혼돈의 총화를 머금은 공간 속에 던져진 존재들이 겪는 불행의 양태를 확인하고, ‘무엇이’, ‘어떻게’, ‘왜’, ‘얼마나’ 인간의 인간답게 살고 싶어하는 삶의 원천적인 욕망의 성취를 가로막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아울러 시인은 불행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가 하는, 삶과 관련된 보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김명인의 시에서 세계는 자주 어둠에 파묻힌다. 어둠의 이미지는 그의 시집 곳곳에 깔려 있다. 때때로 어둠의 이미지는 안개의 이미지로 대체되기도 한다. 흔히 그의 시에서 두 이미지는 같은 상징적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김명인, 「안개 바다」,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 이 시는 바다가 안개에 가려지는 어떤 순간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시인은 “지독한 안개야. / 사방이 끊어지고”라는 표현으로 안개에 의해 소통이 차단된 비극의 세계 속에 놓여 있음을 첫 연에서 제시하고, 마지막 연에서 다시 안개가 걷히자 몸을 버려 머무는 사람들과 안개를 쫓아 바다를 등지고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이 시에서 ‘안개’는 어떤 음산하고 부정적인 것의 알레고리로 쓰이고 있다. 세계는 자주 ‘어둠’과 ‘안개’에 의해 그 본질적인 실체가 은폐되곤 한다. 이런 세계 안에서의 삶은 “묶여” 있는 삶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시에서 ‘안개’는 어떤 정경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덫으로 작용하는 현실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차용된 이미지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에워싸고 있는, 명료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막막한 어둠과 같은 이미지다. “첩첩 수렁”이 가로놓여 있고, 안개와 막막한 어둠에 싸여 있는 ‘동두천’은 곧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동두천’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은 근원적인 귀소 의식을 자극한다. 그러나 ‘삶의 본향(本鄕)’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는 ‘아메리카’는 너무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동두천’을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거나, 떠나도 끝내 ‘아메리카’에는 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헤매고 있다. 이런 양상을 「고산행(高山行)」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풍경으로 보여준다.열차는 평산을 지나쳤다 한다. / 산역(山驛)에서는 낡은 의자에 기댄 남자들 두엇, / 불을 끄고 통과할 어느 역에도 / 어쩌면 정거하지도 않을 기차를 우리들은 기다렸다. / 밤은 깊고 자정 가까이 / 달은 떠올라 헌 거적대기 같은 빛이 / 세상을 덮어 주기도 하였지만 / 오늘 가지 못하면 내일 / 갈 수도 없고 / 마침내 영영 가지 못할 그곳에 가기 위하여 / 저쪽 어느 역에서도 우리들처럼 / 정든 마을에서 빠져나와 어둠 속에 / 서성대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 발 밑에서는 버리고 가는 낙엽 또한 떨어져 뒹구는 / 적은 노자 몇 닢.
김명인, 「고산행」,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 이 시에서 언급된 “정든 마을”과 “영영 가지 못할 그곳”은 ‘동두천’과 ‘아메리카’가 상징하던 현실 공간과 이상적 세계 공간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든 마을에서 빠져나와 영영 가지 못할 그 곳에 가기 위해, 멈추지도 않을 기차를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 서성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시인의 고백처럼 『동두천』은 “유년 시절의 추위와 주림, 동두천에서의 쓰라렸던 경험 그리고 월남전의 체험”이 투사된 공간이며, “시의 바탕이 진정성으로 이해될수록 더욱 불가해한 고통의 뿌리에 나는 닿아갔고, 스스로를 확인하는 괴로움”을 겪게 한다. 남루한 삶을 깊고 넓게 감싸 안으려는 따뜻한 마음과 도덕적 열정으로 획득한 삶과 세계에 대한 뜻 깊은 통찰이 배어 있는 까닭에 「동두천」 시편들은 적지 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인이 그 막막한 세계의 바깥에 있는 관찰자에 지나지 않아 「동두천」 시편들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제자들인 고아나 혼혈아들의 삶의 실체에 부딪칠 때마다 부끄러움이나 무력감을 토로하는 데서 입증된다. 아울러 그가 현실의 어려움을 뚫고 나아가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다만 세계는 우리의 힘으로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인 한계 상황이라는 비관 또는 체념에 물든 현실 인식에 머문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좋은 시는 우리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위안과 삶의 빛을 준다. 김명인의 『물 건너는 사람』에 실린 시들, 이를테면 「유타 시편(詩篇) V」 · 「물 나르기」 · 「소금」 · 「등, 슬픈 빙하(氷河)」 등은 우리 영혼의 눈길을 어둡고 어지러운 근경(近景)의 세상으로부터 저 멀고 낯선 곳으로 이끈다. 특히 「유타 시편 V」는 이국 여행길에 마주친 험준한 산들의 능선, 호수에서 첨벙거리는 물새들, 침엽수림 군단, 구릉 사이로 쏟아지는 만년 빙하(萬年氷河), 눈 녹은 호수에 쉬는 구름 등으로 우리를 이끈다. 나날의 익숙한 삶, “인연에 기댄 삶”은 볼 수 없는 산 등성이 너머 저쪽에 있고, 낯선 세계의 저녁 어스름 속에 잠시 멈춰 선 시적 자아는 말할 수 없는 고립감을 맛본다. 그 고립은 “까닭없이 막막하고 아득”하지만, “내일이면 나도 여기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낳는다. 왜냐하면 모든 삶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문 뒤 스쳐 지나온 고단한 삶의 역정(歷程)을 응시하면서 시인이 “우리는 전인미답의 길을 밟고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삶의 미혹과 무명(無明)으로부터 깨어난다. 우리가 스치듯이 걸어온 길은 이미 누가 걸어간 길이며, 다시 누가 걸어갈 길인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전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이미 지혜로운 이의 목소리다. 그리고 시인이 “끊길 듯 세로(細路)를 이어 별들과 별들 사이로 벋어 있는” “겹겹이 적시고 건너야 할” 눈에 보이지 않는 길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어둡고 고단한 이승의 길을 마저 간 뒤 우리가 가야 할 저 너머에 있는 길고 긴 또다른 삶의 길에 대한 사유로 벌써 이끌린다. 그 길은 편안한 안식과 영원으로 이어진 길이리라. 우리의 삶이란 “욕망의 십이지장을 건너는 느린 구름”을 보는 일이며, “미풍의 멀미에 내내 시달”리는 일이고, “잠깐의 광휘”이며, 고작해야 “바람의 공중돌기에 얹혔던 노역이 끝나면 / 잎들은 다시 처음의 물안개로 흩어”(「물 나르기」)지고 마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말할 때 김명인의 시적 어조 속에는 허무주의에 침윤된 이의 비탄과 슬픔이 묻어난다. 바람의 공중돌기에 얹혀 있는 노역!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내 물안개로 흩어지고 만다. 자취도 없이 왔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영원이라는 잣대로 보면 찰나 속에 명멸하는 안개는 또 얼마나 덧없는 것이냐! 이승에서의 그 노역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소멸의 안개 바다 속에 덧없는 몸뚱이를 던져야 하리라. 그것이 우리의 여로다. 그것은 또 나만이 가야 하는 “전인미답의 길”도 아니다. 그 뒤를 또다른 삶의 길이 있어 우리의 고단한 삶을 받는다 한들 “얽히고 설킨 길들”을 오래 걸어온 우리 슬픈 영혼은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김명인의 이런 시편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길, 즉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길에 대해 사유토록 한다. ------------------------------------------------------------------------------ 돈 / 김명인 [출처] 김명인 시인의 시 '돈'|작성자 juu ---------------------------------------------- 겨울의 빛 김명인 시인 |
골목 안 국밥집에는 두 사내가 마주앉아 허름한 저녁을 들고 있다,
뚝배기 속으로 달그락거리던 숟갈질이 빈 반찬그릇에서 멎자
한 사내는 아쉬운 듯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붙여 물고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마주앉은 사내는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은 닦아 낼
겨를도 없이 남은 국물을 들이마시고
마지막 깍두기를 씹고 있다, 언제 왔는지 어둠이
깊은 심연처럼 그릇 바닥에 고여
어둑히 내다보면 구겨지는 골목으로 벗어나며
저 사내에게도 갈 곳이 있다는 것일까
어느새 웃자란 수염이 차지한 뽀쪽턱을 비껴
추위에 움츠린 겨울의 가등(街燈)들이 무심한 듯
길바닥에 일렁거리지만
불빛이 감추는 망막 때문에 유리창 안쪽으로
따뜻한 것들이 기웃거리는지
아까부터 군청색 작업복의 사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대책 없는 허술한 앞날일 뿐
잿빛 잠바도 모르는 사내들의 길 위로 어디서나
흔해빠진 길들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은
저렇게 바쁘게 오고 간다
요점 정리
작가 : 김명인
갈래 : 현대시, 자유시
성격 : 비극적,
어조 : 쓸쓸함이 담긴 목소리
구성 :
골목 안 ~ 씹고 있다 - 국밥집에서 저녁을 먹는 초라한 두 사내의 모습
언제 왔는지 ~ 오고 간다 - 희망 없이 사람들이 오고가는 거리의 모습
주제 : 서민들의 희망 없는 삶
특징 : 일정한 '서사적 사건'을 압축한 이야기 형식으로 담고 있음. 산문적 진술
내용 연구
골목 안 국밥집[초라하고 허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곳, 도시 노동자들의 어렵고 힘든 삶을 드러내 주는 배경]에는 두 사내가 마주앉아
허름한 저녁을 들고 있다, 뚝배기 속으로
달그락거리던 숟갈질이 빈 반찬그릇에서 멎자
한 사내[익명으로 표현함으로써 힘든 상황이 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드러냄]는 아쉬운 듯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붙여 물고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마주앉은 사내는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은 닦아 낼
겨를도 없이 남은 국물을 들이마시고
마지막 깍두기를 씹고 있다[국밥집에서 저녁을 먹는 두 사내의 모습], 언제 왔는지 어둠이
깊은 심연[깊은 연못]처럼 그릇 바닥에 고여
어둑히[제법 어둡게] 내다보면 구겨지는 골목으로 벗어나며
저 사내에게도 갈 곳이 있다는 것일까
어느새 웃자란 수염이 차지한 뽀쪽턱[허름하고 초라한 모습]을 비껴
추위에 움츠린 겨울의 가등(街燈)
[희망적이지 못한 풍경 / 두 사내의 심리적 정황과 어울림]들이 무심한 듯
길바닥에 일렁거리지만
불빛이 감추는 망막 때문에 유리창 안쪽으로
따뜻한 것[유리창 밖의 풍경과는 대조되는 것]들이 기웃거리는지
아까부터 군청색 작업복[노동자임을 암시]의 사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대책 없는 허술한 앞날일 뿐[희망 없는 미래]
잿빛 잠바도 모르는 사내들의 길 위로 어디서나
흔해빠진 길[대책 없는 앞날]들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은
저렇게 바쁘게 오고 간다[언제 왔는지~바쁘게 오고 간다 : 사람들이 희망 없이 오고 가는 거리의 모습]
이해와 감상
도회지의 초라한 두 사내가 국밥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시상이 전개된다. 시인은 두 사내의 행색을 차분하게 묘사하면서, 그들이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암시한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또한 그리 희망적이지 않음을 '가로등'을 통해 나타난다. 대책 없는 앞날을 위해 분주히 오고 가는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서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더 낮게 가라앉아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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