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泰勳기자
입력 2002.08.1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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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종로구 계동 자택에서 아내 류명순씨와 함께 가족 투병기 ‘잃어버린 20년 ’을 펴보고 있는 김재홍(왼쪽)씨.<a href=mailto:leedh@chosun.com>/이덕훈기자 <
"하루아침에 눈이 멀었을 땐 '짐이 되느니 차라리 죽자'고 생각했죠.
되찾은 눈은 내 것이 아니라 20년간 포기하지 않은 아내와 딸들의
것입니다."
오는 22일 환갑이 되는 김재홍(金宰弘·60·서울 계동)씨는 감회가
남다르다. 20년 실명의 세월을 가족의 힘으로 딛고 일어나 맞는 환갑이기
때문이다.
82년 감기약 부작용에 의한 약화(藥禍)사고와 갑작스런 실명(失明),
12차례나 수술을 받는 고통스런 투병생활, 효진(28·회사원)과
윤진(26·미국유학) 두 딸을 혼자 힘으로 길러낸 아내
류명순(柳明順·54)씨를 무기력하게 지켜본 세월…. 99년 8월 인공각막을
이식받고 오른눈 시력을 0.3까지 회복한 김씨는 "수술 후 안대를 떼내자
아내의 눈가에 팬 주름살이 가장 먼저 보였다"고 말했다.
김씨 가족들은 환갑 잔치 때 그동안 도와준 동네이웃, 의사 등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가족 투병기 '잃어버린 20년'도 자비
출판했다. 아내 류씨는 이 책에서 "지금껏 살아 세상을 본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했고, 김씨는 "아내의 흰머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빛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82년 1월 김씨가 가벼운 감기기운을 느껴 동네 약국에서 지어먹은
감기약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날 저녁 열이 40도 이상 올라가고 몸
곳곳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특이체질에 의한 약물 부작용에 따른
'스티븐존슨씨 병'으로 치사율이 높고, 치료 후에도 실명 가능성이
높은 병이었다. 아내 류씨는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1년여 뒤 결국 빛을 잃었다. 하지만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아
보상도 제대로 못받았다. 약국에선 보상금조로 겨우 100만원을 내놨다.
집을 팔았고, "세끼 밥만 겨우 먹는" 생활이 시작됐다. 김씨는
"유통회사에 나가 월급 10만원을 받아온 아내가 깊은 한숨을 내쉴 때면
가슴을 칼날로 헤집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83년 초 실명 직전에는 자살을 결심하고 아내에게 겨울용 빨간장갑과
함께 "아이들 데리고 굳세게 살아달라"고 쓴 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앞을 못 보는 아빠를 불평하던 딸, 자신보다 더 힘든 아내가 그날 밤
통곡을 하며 김씨를 붙잡았다.
오랜 기다림은 99년 8월 결실을 맺었다. 서울대 의대
이진학(李鎭學·안과) 교수가 개발한 인공각막을 이식받아 한쪽 눈이나마
시력을 되찾은 것이다. 이 교수는 "20년간 희망을 잃지 않는 김씨
부부가 오히려 의료진에 힘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