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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吾山) 이강(李剛)
(1878. 4. 18~1964. 10. 13)
이제 선생님이 안계시매 깜박이는 이 나라 정기의 등불마저 꺼져버렸습니다. 구십 평생을 선생님은 일편단심 이 나라와 이 겨레를 위하여 몸을 바쳤습니다. 꿈 많은 청춘을 풍토가 다른 이역만리 태평양 건너 미주에서, 강풍설한이 휘몰아치는 만주․시베리아․중국 벌판에서 팔베개와 굶주림 속에서도 오직 조국광복 일념으로 악전고투하셨습니다. 독립전선에서 뿌리신 순혈(殉血)과 지성(至誠)과 또한 겨레에 남겨주신 그 유덕(遺德)을 추모하는 감회 한층 더 애절합니다. … 이제 선생님은 비록 가시었으나 선생의 정신은 영원히 한반도 삼천만 겨레 혈맥(血脈血) 속에 길이길이 흐르고 있습니다.
- 한국독립당 대표 조각산(趙覺山)의 이강선생 서거 「애도문」중에서(1964. 10. 19) -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이주
선생은 1878년 4월 18일에 평안남도 용강군 삼남면 의방리(龍岡郡 三南面 義方里)에서 부친 이병훈(李秉勳)과 모친 박성심(朴誠心)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부인은 안혜반(安惠盤)이며 슬하에 장녀 신애(新愛)와 차남 숙(肅)을 두었다. 선생의 본명은 정래(正來)이며 호는 오산(吾山, 鰲山)이다.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농사일을 한 선생은 26세인 1903년 초에 하와이 이민길에 올랐다. 농부인 선생이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를 접할 수 있었음은 기독교에 입교해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에 선교사들의 소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민모집광고에 소개되기를, 하와이는 온난한 기후에 주 60시간 노동에 월급 16불 지급, 무료로 숙소와 의료를 제공받을 수 있고, 신수(薪水 : 땔감과 식수) 지급과 영어무료 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선생은 고향에 부모님을 남겨두고 홀홀 단신 차이나호를 타고 1903년 초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이민 길에 올랐다. 4월 1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선생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근 1년간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1904년 이듬해에 하와이에서 북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북미로 간 첫 이주자는 이재수이며 선생은 2번째 이주자였다. 선생이 이주한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서부 태평양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1896년 미국의 대륙횡단 철도가 개통된 이후 인구가 격증한 곳이며 산업․문화․교육의 중심지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1900년 이후 한국인들도 유학․상업 등의 이유로 샌프란시스코에 몰려들었다.
도산 안창호도 1902년 유학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왔다가 1903년 9월 23일 이곳에서 미주 한인 최초의 단체인 상항한인친목회를 결성하고 한인 노동자들의 노동 주선과 복리 증진과 단합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자리를 찾고 있던 선생과 안창호의 만남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선생은 안창호와 함께 노동소개소에서 한인 노동자들에게 철로공사노동과 오렌지 농장의 노동일을 주선해 주는 일을 하였다.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려 한다는 소식이 미주에 전해지자, 한인친목회 회원들은 단순한 노동주선소의 성격을 넘어 한인들에게 민족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고국의 구국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정치단체를 탄생시키고자 하였다. 1905년 4월 5일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공립협회가 창립되자 선생은 안창호를 도와 공립협회의 조직망 구축에 힘썼다. 이어 을사5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립협회는 더욱 활기를 띠면서 미주 서해안 일대에 9개 지회가 설립되었으며 8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선생은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리버사이드 지방회장으로 복무하며 공립협회 조직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다양한 국권회복방략을 모색하였던 공립협회는 한국을 비롯하여 한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독립운동을 담당할 기관을 설치하고, 이를 다시 하나로 통일한 후 독립전쟁을 수행하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서는 제일 먼저 통일연합기관를 국내에 먼저 설립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대를 맺어야 한다는데 합의하였다. 1907년 1월 초순 리버사이드에서 선생은 안창호․임준기․신달윤․박영순․이재수 등과 함께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발기하고 국내외 모든 한국인은 통일 연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로 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먼저 1907년 2월 안창호가 귀국한 데 이어 선생은 8월 27일 경 국내로 귀국하였다가 공립협회 원동위원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하였다. 귀국 도중에 경유했던 일본 도쿄에서 선생은 신문발간을 위한 주자(鑄字)를 사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초등학교 교과서류를 사모아 들어오는데, 후일 스챤(水靑)에서 한인 사범속성학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이들 교과서를 교재로 사용하였다.
국내로 귀국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신민회가 창건되어 표면적인 교육․실업진흥 등 갖가지 국권회복운동이 시작되고, 나아가 비밀리에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며 독립전쟁에 대비한다는 방략을 추진하여 갔다.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거점이 될 원동지역의 공립협회 지회 건설은 미주에서 파견된 원동위원 정재관․김성무와 선생이 함께 수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재러 한인들의 도움이 없이는 수행될 수 없었다. 때문에 선생은 한인사회를 조직화하기 이전 재러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1908년 2월 26일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활약하며 민족의식의 함양에 노력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같은 해 9월 29일 연해주 스챤에 공립협회 수청지방회를 조직하고 《공립신보》 지사도 설치하였다. 그리고 미주 동포자본을 이용하여 1908년 10월 21일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발기하고 재러 한인 유지들을 공립협회 회원으로 적극 포섭하였다. 또한 선생은 1908년 11월 18일에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창간하고 기자 겸 편집책임을 맡아 활발한 항일 언론투쟁을 펼쳐갔다. 그러나 1909년 10월 안중근 의거가 일어나자 일제는 대동공보사를 반일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로 보고 탄압하였다.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수립과 조직의 발전
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1910년 4월 신민회의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이종호 등이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한국을 탈출하여 1910년 8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왔다. 국내에서는 1910년 12월 일제가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과 8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사건' 등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함에 따라 국내의 신민회 조직은 무너졌다. 당시 러시아에서 선생의 활동도 원활하지는 못하였다. 우선 러시아당국이 국민회를 친미세력으로 인식하고 러시아 침투를 경계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인들이 대량으로 연해주 지역에 이주해 오자 러시아당국은 러시아에 귀화하는 한인들에게만 토지 개척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귀화의 선행 조건으로 러시아정교로의 개종을 요구하였다. 이에 선생도 러시아당국의 경계를 피하기 위하여 러시아정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총회 자치규정을 만들 때 ‘교육’과 ‘실업’을 강조하며 독립운동기지건설의 의도를 감추었다. 그러나 회원들만이 참석하는 시베리아 지방총회 석상에서는 시베리아 지방총회의 당면 목표는 독립전쟁임을 천명하였고, 독립전쟁을 위해 전술과 전투하는 법 등을 배울 것을 회원들에게 주장하였다. 미주 한인들이 투자한 북만주 밀산(密山)의 봉밀산 기지개척운동에도 힘을 썼다. 그러나 1910년 7월 4일 제2차 러․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탄할 수 있도록 묵인하였다. 나아가 미국의 만주진출에 대하여 러․일 양국은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러․일간에 더한층 공조관계를 강화하였다. 1910년 병탄 소식과 함께 8월 30일에 십삼도의군과 성명회 지도자 20여 명이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한편 청도회담을 끝낸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때는 1910년 8월 24일 경이었다. 거류민회의 자치권을 확보하여 동포사회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고자 했던 선생을 비롯한 국민회 세력의 현실적인 방략은 이전 재러 한인 거류민회를 장악하고 있었던 함경도 세력과 주도권쟁탈로 번졌다. 더욱이 신국가 건설의 정체(政體)를 공화주의로 표방한 국민회 세력은 러시아 관헌들의 요시찰 대상이었으며 근왕주의자인 의병계와 기호세력과도 노선 차이를 보임으로써 점차 지역 및 노선간의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의병계와 귀화한 함북출신 한인들은 신민회의 자금원인 이종호를 거두(巨頭)로 내세워 재러 한인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한편 대한인국민회 단체규정에서 공식적으로 어떠한 ‘훈령’도 없었지만 러시아 관헌은 대한인국민회가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일하고 있는 종교단체이며 미국 선교회의 지원과 보호를 받고 있으며 그 지도부를 이용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를 경계한 러시아정교회 위원회에서는 한국어로 러시아정교의 교리를 번역하여 한인들에게 교리를 보급하는 등 포교에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정교 교회 산하에 한인들로 이루어진 교리 문답교사의 직을 만들고 재러 한인들에게 전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가면서 미국계의 장로교의 선교를 견제하였던 것이 당시 러시아의 정세였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강은 국민회 조직관리에 힘을 기울여 1909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가 조직된 이래 신영학교와 계동학교 등지에서 활발한 구국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후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된 뒤인 1911년에는 러시아내에 16개의 지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조직이 빨리 성장해 나가자 러시아 당국은 귀화한인들의 대한인국민회를 과격 항일조직으로 파악하고 경계하였다. 연해주 일대에서 대한인국민회의 이름을 띠고 활동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그러자 대한인국민회 세력들은 치타․이르쿠츠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자바이칼․동시베리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한인사회를 운동권역으로 개척하고자 하였다. 1911년 9월 11일에 선생은 정재관과 함께 치타로 이동하여 10월에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를 설립하였다.
치타는 자바이칼지역의 중심지로 한국인 100여 명이 주로 광산 노동자로서 일하고 있었다. 일찍이 1909년 당시부터 국민회 조직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총회 설립이 가능하였다. 창립 당시 시베리아총회에서 선생은 극동전권위원, 원동위원의 직함으로 활동하면서 시베리아 지방총회의 자치규정을 제정하는 등 실질적으로 시베리아 지방총회를 관장하였다. 시베리아 지방총회는 9개 지방회를 관할하였는데, 이후 1913년 무렵에는 16개 지방회로 확장되었다. 1914년 6월에 개최된 시베리아 지방총회 제2차 대의회 시기에는 21개 지방회로 그 세력이 더욱 불어났다.
선생은 치타 정교회의 부주교인 에프렘의 전도로 개종하여 전도사가 되어 한인 정교 선교사단 산하의 시낭송신부 및 교리문답인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정교 교단의 인정을 받아 신문 간행을 추진하여 1912년 1월에 『대한인정교보』를 간행하였다. 정교보의 간행조건은 순수한 종교적 목적으로 간행될 것과 검열국의 검열을 받은 후 발매한다는 것이다. 정교보는 각 방면에서 일제의 학정과 탄압을 강도 있게 비판하였다. 한편 1912년 일본 외무대신 카스라(桂太郞)가 치타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베리아지방총회 회원들은 이 기회를 안중근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의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암살정보를 입수한 일본 총영사관측은 한인들의 동태를 철저히 감시해 줄 것을 러시아당국에 요구함에 따라 자바이칼 헌병대는 1912년 7월 22일에 선생을 체포하여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 시베리아 지방총회 대의원회의를 주관했던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회표, 안중근 기념배지를 제작하여 그 판매수익으로 운동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후 제작된 안중근 기념배지는 대의원총회 당시 국민회원의 상징 기념배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선생의 행적
1914년 8월 러시아는 제1차대전에 참전하였고 일본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러․일 양국은 아예 동맹국이 되었다. 이들의 정치적 밀월관계는 러일전쟁 패전 10주년째 되는 갑인년(甲寅年, 1914)을 계기로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한인들에게는 큰 변고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러시아와 일본은 도쿄에서 ‘반정부 분자 소탕선언에 관한 비밀협정’을 체결하여 반일한인 탄압에 대한 공조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한인국민회가 종교모임으로 변신하는 등의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블라고웨스첸스크 지회가 해체되었으며 러시아에 계엄령이 발효된 후에는 일체의 결사 및 집회가 금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4년 11월 23일에 치타 한인학교에서 열린 시베리아 지방총회의 모임이 러시아 관헌의 습격을 받았다. 당초 이 모임은 러시아당국에 복음서의 연구와 교리대담, 대한인정교보 문제를 심의하고, 러시아정교 성직자인 인노켄티의 이름으로 교도 단체 설립 문제를 토의하는 모임으로 신고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경찰의 정보를 받은 헌병대가 습격하여 선생을 비롯한 28명의 참석자를 구금하고 증거자료를 수색하였다. 이 때 선생의 집에서는 대한인국민회 회원목록과 미주 중앙총회 주소가 압수되었고 선생을 비롯한 15명의 회원들은 의연금을 강요했다는 죄목으로 치타 경비대에 구류 당하였다. 경비대에 구류당한 국민회원들은 치타관구의 검찰예심조사에서 자신들은 대한인국민회 회원이 아니며 자신들은 정교회 신자로써 한인들이 종종 모여 학교운영문제와 잡지 정교보에 관한 문제를 협의하였다고 극구 변명하였다. 이로 인해 치타관구 검찰에서는 기소중지조치를 내리고 100루불의 보석금 석방 조치를 하여 1915년 1월 9일에 선생과 회원들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소동 후『대한인정교보』는 발행 금지되고 이후 완전히 폐간되었다.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해외 각 지역의 동포사회에 지방총회와 지방회를 구축하고 이를 거점으로 교육과 언론으로 정신통일을 하고, 농업을 비롯한 실업을 장려하여 안정된 동포사회를 구축하고자 했던 선생을 비롯한 국민회 지도자들의 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일 양국이 동맹국이 되는 바람에 수포에 돌아갔다. 1910년대 해외 동포사회와 상호 연대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고자 했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1916년 후 침체상태에 빠진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계는 거의 활동을 중단하였다. 선생은 한 때 치타 한인정교회 선교사단 산하에서 교리문답을 담당하는 등 종교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한인사회의 애국 투쟁의 정신이 사라져간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스티븐스처단과 이토오처단의 전통을 이어 의열투쟁을 감행함으로써 다시 재러 한인사회에 독립투쟁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의 기운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16년 하야시(林權助) 공사 암살계획을 세웠다. ‘한국민족의 원수, 하야시공사의 죄상’이라는 문건을 만든 선생은 자신을 희생으로 삼아 다시금 독립운동의 기운이 드높아지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거사 직전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 헌병사령부와 일본의 합작으로 선생은 1916년 6월 22일 하야시공사암살음모 가담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다시 독립운동의 일선으로 나가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의 여파가 시베리아까지 미치자 재러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은 부흥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선생은 발 빠르게 혁명의 정세를 이용하여 대한인국민회의 단체허가를 받고 신문발간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1917년 6월 4일에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 등 각지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귀화자들 중심의 전국한족대표자회가 개최되었을 때 치타 시베리아총회의 명의를 갖고 선생도 대표원으로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귀화한 지 1년밖에 안되었고, 또 대회에서 항일적 주장을 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어 주최측은 선생의 대회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는 대한인국민회는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들에게는 여전히 위험한 외부세력으로 인식되었고, 또 혁명 후 그들의 주된 관심은 권리획득에 있었고 항일문제는 그 다음의 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의 연락관계가 단절되었지만 1918년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자 선생은 아예 치타에서 니콜리스크로 이주하고 전로한족회에 적극 가담하며 자신의 위치를 굳혀나갔다. 선생은 일본의 시베리아침략를 방해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국내로 진입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로서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다가 철수하는 체코군과 결탁하여 아이훈(愛琿) 지방에 무기를 감추어두고 있다가 이를 만주의 독립군에게 제공하였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과 광무황제가 갑자기 붕어(崩御)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재러 한인들은 다시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2월 25일부터 3월초까지 러시아지역, 서간도․북간도지역, 심지어 국내로부터 운집한 주요단체의 대표 등 8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노․중령 독립운동단체대표회(일명 전로국내조선인회의, 全露國內朝鮮人會議)에서 종래의 전로한족중앙총회를 확대․개편하여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었다. 간도와 상하이, 시베리아의 한인들이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과 장차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던 중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재러 한인들은 1919년 3월 17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면서 대한국민의회 성립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소비에트체제를 채택하여 행정․입법․사법의 세 기능을 모두 갖고 있었다. 러시아 각 지역의 한족회는 국민의회의 지방조직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서북간도와 국내에도 지부를 결성하면서 대한국민의회는 상설의회 의원수를 당초의 15명에서 30명으로 증원하고, 지역안배 차원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서파(西派)에서 5명, 기호파(畿湖派, 서울파, 경파)에서 5명을 보강하였다. 이 때 선생은 서파의 대표로서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인노인동맹단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대한인노인동맹단은 1919년 9월에 강우규(姜宇奎)의사를 국내로 파견하여 3․1운동 이후 새로이 임명된 조선총독 사이토(齋藤)에게 폭탄을 투척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0년 8월 경 재러 한인 기독교 독립운동가와 재만 북간도지역 한인 등 모두 60여명과 함께 무장독립군 단체인 신민단(新民團)을 조직하였을 때, 단장 김규면(金奎冕)과 함께 선생은 기독교청년회 총무로 활약하면서 부단장으로서 항일무장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선생의 기대와는 달리 소비에트 노농정부는 연해주 지역까지 소비에트화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이면서 러시아영내에서 일체의 독립운동은 물론 민족운동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소비에트 체제의 전파와 공산주의 사상의 전파만을 허용하였다. 더구나 일제는 일본군의 시베리아철병 조건으로 러시아당국에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무장 해제와 러시아영내에서의 추방을 볼셰비키정권에 강력히 요구하였다.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후원세력이었던 러시아의 혁명세력은 이제 더 이상 한국인의 보호막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선생은 러시아영내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45세 되던 해인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한국노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군의 양성과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1924년 11월 15일에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에 입단하였다. 그 후 선생은 흥사단의 임무를 띠고 이상촌기지를 돌아보고자 남중국 방면을 여행 중 1928년에 하문(廈文)에서 강연을 하다가 일제경찰에 납치되어 부산을 거쳐 평양으로 호송되었다. 선생은 평양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1930년 9월 2일 만기 출옥한 선생은 고향인 용강에 침거하고 있다가 기회를 엿보다가 다시 탈출하여 중국 푸지엔성(福建城)으로 망명하였다. 1932년 이후 임시정부는 윤봉길의거가 일어나자 상하이에서 중국 남중부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항저우(杭州)에서 진장(鎭江)으로 이동하면서 선생은 임시의정원에 복귀하여 12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가 다시 장사(長沙, 1937), 광저우(廣州, 1938) 등지로 이동할 때 선생은 1938년 이후 장시성 진강사립초급농업직업학교 영문 교사, 숭문(崇文)중학교 강서분교의 교원으로 복무하면서 교육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편 1941년 임시정부내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이 결성되어 중국 각지에서 특무활동을 할 때 선생은 산시성(山西省) 연산(鉛山)에 주둔한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의 징모임무를 띠고 영안(永安), 남평(南平), 건양(建陽) 등지에서 모병활동을 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중국 외교부 주대만 특파원에 임명된 선생은 1946년 11월 28일부터 1947년 3월 28일까지 타이완에 있는 한국 동포들의 무사귀환을 위한 선무단(宣撫團) 단장으로 활약하다가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한국독립당 고문으로 참여하면서 육영사업에 투신하여 서울 남산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도산 안창호 서거 9주기를 맞이하여 설립된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흥사단운동과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의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선생은 1964년 10월 13일 86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