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유로 변주한 감성 시편들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시는 일상이다. 그런 일상은 누구나 갖는 삶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개별적 경험이나 사건들은 또 다른 시의 세계를 보여준다, 금번 문예감성 21호에 수록된 시들은 그런 의미에서 시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김봄서·박미림·박봉철·박위훈·이윤희·임승현·정재식·채동선 시인의 시들을 통해 풍부한 시의성과 다양한 시적 세계의 비의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단언하여 좋은 시에는 경계가 없다. 경계가 없다는 것은 개방되어 있다는 뜻이다. 김봄서 시인의 <달빛 감옥>에는 누구도 갇히지 않는 열린 감옥을 보여준다. 그곳은 인간의 꿈이 오롯하게 수억 년을 간직하고 있던 곳이다. 김봄서 시인의 시 속에는 잊어버린 인간의 꿈을 되찾아보려는 숨은 의지가 내재해 있다. 달이 뜨는 곳은 애당초부터 특정한 곳을 한정하질 않는다. 시인은 하늘에 뜬 달을 보려고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고 했다. 그러자 사람에 대한 “그리움” 이 스며들었다고 했다. 김봄서의 시는 어둠을 밝히는 달빛처럼 은은하게 사람의 가슴을 비추고 있다. 단순하게 호미를 농기구로 단정할 수 없는 의미 그 이상을 함의하고 있다. 호미곶으로 이야기되는 ‘호미’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호미 끝 봄”이라는 의미는 그래서 시적으로 더 극대화된다. 세상의 동쪽 <호미 끝 봄>도 어찌 보면 시인이 그리고 있는 시적 세계에 존재하는 그리움의 대상이면서 동쪽에 존재한다. 이미 시인의 지향하는 그리움의 발원지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시인의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는 현묘한 봄의 시작도 ‘호미 끝’에서 시작되었지만, 민들레가 충동한 시적 발현은 ‘달빛’처럼 시심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서정시의 전형이 추억을 소환하는 것이라면, 박미림 시인의 <봄날은 온다>에서도 그런 유형을 잘 보여준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할아버지의 “흰고무신”과 “개다리 소반”은 어렵던 시절의 정서를 시라는 형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원해 놓았다. 여기까지는 따뜻한 정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추억 속의 풍경이다. 그러나 낯설게 다가오는 개다리소반에 얹혀진 “동전 한 닢”은 망자에게 인간이 마지막으로 보내는 온정의 행위임을 할 수 있다. 박미림 시인은 봄꽃으로 찾아오는 민들레의 피고 지는 생명 현상을 보며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볍게 지나치지 않았다. 일상에 대한 천착에서 발현하는 특별한 행위가 시로써 형상화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길바닥 장터 푸성귀 종류들 틈에 놓인 <꼬막>을 통해서도 생경한 사람들의 모습을 환기한다. 그 모습은 언젠가 찾아갔던 “하바로프스키 뒤안길에 서러운 우리 아제”를 보며 느꼈던 슬픈 연민을 되살아난다. 낯선 땅과 이민족 틈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서러운 아재처럼 꼬막을 통해 치러지는 생존의 통증은 쉽게 아물지 못한다. 꼬막이 해람을 통해 바다의 기억을 버리듯 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고통을 감내했을 것까지도 시인은 감당해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
박봉철 시인은 내면에 충만한 사유를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감정에서 감성으로 전이되기까지 호흡의 격정이 거세다. <섬, 그 봇물>은 백두대간의 주 능선을 타면서 지형적 특성을 시로 환기해내고 있다. 그 섬은 한반도라는 상상 속 섬이다. 한반도는 그야말로 대륙에 붙어있는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시인의 내면에서 상상하는 섬은 시인만의 각별한 섬으로 한반도를 상징하기 이전 순수한 원시성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섬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촛대바위 괭이갈매기 갯제비쑥”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공감하는 것들을 말해준다. 두 번째 시 <흠과欠果>는 우리 땅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복숭아 맛에 대한 감흥을 시로 형상화한 시다. 그 맛은 춘분점으로부터 황도(黃道)를 따라 잰 천체의 거리 황경 175도에서 출발한다. 그 위치가 한반도로 대별되고 그 땅에서 자란 복숭아 맛은 한반도만이 갖는 사계의 구분마저 “완경完涇을 열망”하는 욕망까지 담아 독특하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라면 과일에 흠이 좀 있다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복숭아를 대상으로 시적 세계의 무한한 상상력을 끌어내는 사유의 진폭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그들만의 길을 찾아가며 생명을 유지한다. 사위가 어두워지면 하늘엔 달이 솟는다. 하늘의 달을 보지 못한 날에는 간혹 길을 잃게 된다. 그런 경우 되돌릴 수 없도록 아주 잘못되어버린 경우가 <고래 해체사>처럼 발생한다. 한반도 바다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고래가 그랬다. 박위훈 시인은 포항의 끝 동쪽 구룡포에 와 있다. 구룡포 바다에서 “만년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를 보며 우리가 잊고 지낸 바다의 시간들을 유추해간다. 그 시간 속에는 눈앞에 주검으로 누워있는 밍크 고래의 사인들이 고스란히 발라진다. 고래가 드나드는 길목에 놓인 폐그물이 문제였다. 고래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하늘의 달이 되었다. 하늘의 달이 되지 못한 채 세월만 얹고 있는 <남겨진 장독에 대한 단상>은 해체될 기미가 없다. 오히려 “그 집 장독대에는 난이 쳐진 서 말가웃 장독이 있”다며 시인은 시적 정감을 배가하고 있다. 서정시가 갖는 본질이 이미지에 대한 감각의 전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익숙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과정은 <고래 해체사>처럼 사물의 이미지에서 오는 단상을 내면화하는 상호작용을 원만하게 이뤄낸다.
이윤희 시인은 대다수 시인들이 외면하는 <안부>, <뇌신>이라는 관념어를 통해 시의 내면을 구체화하고 있다. 물론 뇌신Noesin이라는 말이 약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관념어라는 것도 현실에서 일상어로 사용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굳이 시어로써 적절하지 않다고 단언할 필요는 없다. 얼마나 말을 잘 부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불쑥 찾아온 암덩이와 만나게 된다. 그 암덩이도 몸 안에 있을 때는 실체조차 확인할 수 없는 관념 속 언어에 불과했다. 통증을 더해가며 Code Blue라는 의사 판정으로 죽음에 이른 환자까지 보면서, 불안한 시인을 옥죄어 왔을 시간을 통해 구체적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뇌신>을 통해 시인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가족사의 아픈 속내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가슴속에 묻혀있을 때는 실체가 없다. 뇌신이라는 약을 알고 있는 요즘의 사람은 흔치 않다. 60년대 머리 통증이 극심할 때 먹던 진통제로 흰 종이에 싼 가루약을 입에 털어 넣던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추억을 갖고 있는 이윤희 시인의 시가 가슴 먹먹하게 다가온 것은 슬픈 어머니를 뇌신을 통해 소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가끔씩 흔들어 놓은 뇌신惱神으로 읽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임승현 시인의 첫 시를 읽으면서 둥글다는 것은 정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했다. 지구도 둥글고 어머니의 손에 들린 빨간 사과도 둥글다. 그런 심성으로 세상을 만나며 살아가는 시인의 심성을 본다. 상상과는 달리 <엄마 찾아 천리 길>은 의외로 반전되는 “개똥”이 시의 중심에 있다. 산책한 길가에서 만난 우연한 사건이 시로 틈입했다. 애완견을 기르면서 가져야 할 윤리 의식의 부재로 인해 야기되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 대한 불만스러운 마음을 시로 표출한 것이니 이 또한 시가 갖는 사회성으로 본다면 적절한 것이다. 사람의 욕망으로 키우기 시작한 개 때문에 벌어진 신 사회 풍속도를 보여준다. <잘 자라, 내 강아지>에서도 그런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힘겹게 걸어가는 할머니의 유모차에 아기 대신 들어앉아 으르렁대는 개를 보면서 시인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혼란스런 한계를 시로써 인내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에 대한 무관심이 빚어낸 단절된 사회가 빚어낸 단면을 잘 보여주는 임승현 시의 시가 갖는 매력에 대하여 상승을 기대하는 것도 독자의 몫에서 가능하다.
정재식 시인은 <광년光年>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안목을 초월했다. 하늘의 별을 보면서 그 별이 얼마나 먼 곳에서 오는가를 생각한다. 그 별이 그냥 먼 곳에서 달려온 것이 아니다. 시인이 그곳까지 달려갈 수 없기 때문에 시인의 가시거리까지 와 있다는 발상도 시인만의 상상 속의 세계다. 시인의 눈을 통해 밤하늘의 별과 시인 사이에 존재하는 목측이 불가능한 거리에 있는 시를 발견한다.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단한 인간의 삶을 별의 삶으로 환원해내는 상상력을 시인에게서 볼 수 있다. 그 별의 삶도 자신의 삶처럼 다르지 않다는 위안을 나누는 지극한 화자가 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서는 또 다른 시의 대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힘들다는 의미는 다른 의미로 변주되고 있다. 시인은 시어의 중의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힘들게 하였던 외부의 원인으로 그 힘듦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시는 어차피 시인의 생각을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드러나는 별이나 힘들게 한 것들에 대한 공감이나 인내마저도 시인의 속살 같은 경험임을 알 수 있다.
채동선 시인은 특별한 한 해를 돌이켜보면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매우 시사성이 강한 적절한 시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시인의 역할은 다양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시대의 사건에 대한 사회의식으로 응당 참여해야만 한다. 까발릴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채동선 시인은 <2020년, 그해 봄> 코로나 19로 급변해버린 사회 및 국제 환경까지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모든 결과는 시간이 흘러야 알겠지만, 결국 고통을 짊어지거나 해결해야 할 사람은 마지막 연에 들어 있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음을 자괴스런 것이라고 토로한다. <목어木魚>는 불가에서 사용하는 사물 중 하나다. 오래전부터 인간이 신물로 사용하며 구복을 위한 안위를 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물고기는 항상 눈을 감지 않는다 하여 목어의 목탁 소리를 통해 잘못된 세상을 깨우치려 한다. 종교적인 의미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천착해 간다면 시인의 향후가 더 많이 궁금해질 것이다. 시는 어차피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 가슴속에 진정한 심상으로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보여준 여덟 시인의 시들을 살펴보면서 시는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일상에서 체험된 사유에서 비롯됨을 잘 보여준다. 왜 쓰는가 그것보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지금도 고민하는 시인들을 생각해본다. 그것은 시에 대한 욕망이자 시인 개개인의 삶에 대한 열망의 과정임을 알게 해준다. 시인들의 시적 충동은 고스란히 정신적 충격의 결과임을 공감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