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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떤 친구들은 내게 제2 해방, 제2 공화국의 동이 터오는데도 너는 여전히 불안, 비관, 불평, 분노만 쏟아내느냐고 비난한다. 과연 국민들과 더불어 기뻐하지 못하고 춤추지 못하는 나 자신을 저주하고만 싶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속마음을 감출 수도 없으니 그저 민망할 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 심중을 교만이나 독선으로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번 의거가 자각으로 되었든 또는 악에 받친 폭발이든 간에, 이것이 우리에게 정치적 자유와 해방과 구출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매, 다만 앞으로 우리는 이를 선용하여 국민이 대오각성 새로운 각오와 노력에 매진하기를 기원할 뿐이다.
하지만 요즘 신문지상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해방 후 10년 간 이 민족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저질러 온 무수한 죄악은 언제까지나 감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모든 것이 내외로 하루 속히 백일하에 드러나 민족 성격에 대한 일대 반성의 산 재료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민족의 이 고질, 이 죄악은 앞으로 자유화된 정치 환경에서 더욱 격심하게 계속될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신문지상을 통해 이를 접하고 있다. 우리는 다만 경악을 금치 못할 뿐이다. 이 때에 다만 뜻있는 국민들의, 특히 정치가와 지도자들의 깊은 회개와 자각과 선의와 선도를 빌 뿐이다.
분명히 밝혀둘 것은, 국민이 아무리 춤추고 떠들어도 우리가 동조하지 못하는 것이, 민족의 이 죄악상에 대한 소극적인 비관 때문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독교 복음의 높은 진리성과 이상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민족에 대해 받은 이상은 다음과 같았다. “많은 국민들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 우리가 그 길로 행하자 하도다. 그러므로 무리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2: 53-54).
예레미야가 본 이스라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31: 33).
산상수훈 중 예수의 말씀의 일절은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었다(마태 5: 44).
바울 선생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신자가 맺는 열매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자비와 선의와 진실과 관용과 절제”라고 했다(갈라디아 5: 22-23).
사도 요한이 본 우주 완성의 계시는 이러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졌고 ……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저들의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는 눈물과 애통과 괴로움이 있지 아니하니, 이는 처음 것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 1이하).
우리는 이 현실 죄악의 천변만화(千變萬化) 가운데서, 오직 이 복음의 이상과 구원과 실천 속에서 살고 싸울 뿐이다. 우리가 현실, 특히 정치 현실에 대해 근본적으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렇다. 진리 없는, 진리로 하지 않는 모든 움직임에 대해, 나는 사실 이를 저주하고 싶을 뿐이다.
<성서연구> 제87호(1960년 3,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