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명순 - 글자 쓰는 골목
시(詩)/시(詩) 2017. 7. 18. 11:47
바람이 녹슨 자물통을 잡아 흔들며 대답을 강요한다
복덕방에 고여 있던 시간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풍경으로 위장한다
잡풀들이 잃어버린 번지를 기웃거리며 대궁을 내민다
가옥들이 파산한 사내 등을 기댄 여자의 고개 숙인 각도로 슬픔을
진열하고 있다
칠성댁이 행방불명된 딸의 얼굴을 안고 골목을 나선다
전단지 속 눈빛이 별의 온도로 반짝인다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무게의 발자국을 남기며
발걸음을 덮어쓴다
사전에도 없는 기호로 음각된 골목이 침묵의 색깔로 굳는다
<마지막 처분 95% 세일>
전봇대에 묶인 밥상 크기 현수막만 새카맣게 시끄럽다
한 번도 팔린 적 없는 동네에는 어둠이 먼저 퇴근한다
북두칠성이 끼니 거른 외등을 하나둘 깨운다
우거짓국 냄새가 낮은 지붕마다 방점을 찍는다
손잡이만 반들거리는 고물 리어카가 파지를 가득 싣고 와
골목 한편을 복원한다
칠성댁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돌아온다
다리로 침묵을 지고 나갔던 사람들이 입으로 다리를 끌고 온다
유리창에 그림자를 맡긴 사람들이 뿔뿔이 집으로 들어간다
유리창 풍경이 몇 년 전 시간으로 창문을 복원시킨다
갸우뚱대는 바람이 지도에도 없는 동네를 밤새 읽는다
제 발로 쓴 골목을 저승길로 읽는 사람은 문맹이 아니다
(그림 : 김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