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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결부된 언어의 유목遊牧과 생성
한정원 시집 《마마 아프리카》중심으로
박철영(시인,문학평론가)
한정원 시인의 시를 접하면서 쉽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먼저 왔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시의 난해성이 고도하고 정치적이어서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인의 상당한 삶의 시간이 용해된 시집을 받아 부분 부분을 읽어가다 더 많은 해독의 요구를 하는 횟수가 빈발해졌다. 시라는 것도 사실은 문학장을 통해 자신이 체험한 사회적 맥락이나 이념에 대한 빌미를 매개로 발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정원 시인의 시집 《마마 아프리카》(현대시학)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작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 속에 내재된 시어의 진폭이 갖는 상당한 거리감을 이해와 포옹으로 해소하여 의미를 깊게 해 주는 데 있다. 언어로 촉발된 실존의 깊이를 재단해볼 수 있는 기회를 다양하게 시도하고 다의성이 다분한 시어와 자유스런 사유의 종횡무진은 언어에 대한 감각적 기질에 근거한다고 본다. 그것마저 다양한 호기심을 통해 언어의 교차와 다층적 확장으로 유인할 수 있었던 것도 유목인적 사고에서 비롯될 수 있다. 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실천적 행위가 욕망으로 소실하거나 이완되지 않았기에 유용하고 가능한 것이다. 특히 기표로 청각된 텍스트에서 진정한 천착은 근원적 의미(기의)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렇게 발화된 유목의 기표들이 또 다른 의미를 생성하고 전사되듯 언어의 유용성은 감성 인지를 거쳐 실재(재현)가 된다. 한정원 시인의 남다른 시적 결들은 동일한 언어로 출발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환원하며 생성된 의미는 분열을 거듭하고 예상하지 못한 확장까지 수확하게 된다. 이런 까닭이 가능한 것은 현대인의 단선적 사고로는 확신할 수 없는 의식 회로의 단절에서 찾을 수 있다. 자칫 현재라는 시간에 갇혀버릴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과거나 미래를 포함한 시간까지 초월한 시적 응시는 식상하지 않고 오롯함을 충동하며 단절을 회복한다. 전체적으로 가볍지 않은 사변들은 끈질긴 동참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그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에너지의 근원인 사유는 긴장으로 몰아가지 않고 팽팽한 시적 비의로 되물어 온다. “이미 알고 있는 추위를 기억”한다는 삶의 곡절과 지난한 시절의 유폐를 자진 해제하여 내보인 민낯도 쉽지 않았을 내적 허용인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람이었다
바람 부는 파주의 끄트머리에서
이미 알고 있는 추위를 기억해낸다
살아가는 동안 가장 추웠던 곳
늙은 별이 생을 마치면서
뿜어내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벌판
소문으로 들은 안부는 꽃멀미 뿐이다
우리의 비극은 늙은 것이 아니라
한 때 젊었다는 것
고약처럼 달라붙어 있는 곤충의 시간을
서른 살은 폭염주의보와 함께 숨어버리고
오래된 사람들의 뼈는
출판 단지의 삼층 서가에서 둥글게
천 년의 꿈을 꾸며 잠들어 있다
파도의 마을에서 마주쳤을
서로의 보랏빛 사계절을
손을 놓을 수 없는 핏줄의 눈물주머니를
우리는 미래에도 지나간 사람처럼
과거에 대해서만 물어볼 것이다
-<근황> 전문
시인이 말하고 있는 파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경기도 파주만을 한정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다양한 세상이고 실재한 모든 곳을 가리킨다. 파주는 이 세상의 끝이거나 시작점이다. 시인은 끝단을 생각하며 절망과 희망을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간단없이 보여주고 있는 파주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비롯되었다. 시인의 관점에 대한 아포리즘은 비의적인 동기를 시간이라는 등속으로 함의하며 꾸준하게 관계한다. 파주라는 텍스트를 의문하며 다가가는 종착점에 대해서는 시인도 현재로서 답할 수 없다. 파주에서 과거의 한 시절 “파도의 마을에서 마주쳤을/ 서로의 보랏빛 사계절을/ 손을 놓을 수 없는 핏줄의 눈물주머니를/ 우리는 미래에도 지나간 사람처럼/ 과거에 대해서만 물어볼 것이다”라며 고통스럽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전부다. 그 시절 꿈은 보라색이 애당초 빨강과 파랑이었던 것처럼 시인만의 뚜렷한 문학적 꿈은 확연했을 것이다. 그런 시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파주 출판단지 창고에 빼곡히 쌓여있을 시간의 징표인 서적들에는 “오래된 사람의 뼈”처럼 남아 지난 세월의 <근황>을 전할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것은 “고약처럼 달라붙어 있는 곤충의 시간”같이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파주에서 DMZ는 심리적으로 가깝고도 먼 곳이다. 그만큼 사람 사는 환경은 변한 것이 없다는 방증일 것이다.
<위험한 정원_DMZ에서> 도 사물의 본질이 갖고 있는 존재(DMZ)에 대한 불안감에서는 같다. 시인의 직관으로 거둘 수 없는 것들에서 난해함도 형이상학적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 의식 안에만 존재한 것들의 목록을 들춰 나의 “비밀문서”를 전달하지만 너에게서 되돌아오는 것은 “정적”뿐이었다고 말한다. 더 깊어진 단절은 “소리”와 “색깔”로도 불분명해져 세대 간 간격은 커졌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의 “고요의 냄새는 더 강”해 구분하는 것마저 무색해졌다. “새들의 국적은 모호하다”지만 당장 생과 사를 목전에 둔 우리가 사는 나라의 복판을 가로지른 “나와 너의 거리 비무장지대/ 너와 나의 위치 중무장 지대”라는 공황 장애처럼 불안은 더 심화되고 멀어졌다. 인간이 규정한 의식 속에 갇혀버린 현실을 보며 시인은 “무장되지 않은 지구의 깊숙한 곳”으로 탈출을 결행한다. 영혼의 자유를 갈구하는 시인의 착지점은 예상할 수 없다.
<유비쿼터스의 여자>가 되어 당도한 곳은 우주선 아폴로가 착륙한 달의 표면처럼 지금껏 알고 있는 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곳이다. “차도르를 걸친 아라비아의 여인처럼/ 겹겹의 머플러로 온몸을 감”싼 채 마케도니아 광장에 서 있다. 어디서나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처럼 “끈 없는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모국어의 풀씨를 흩날리던 여자”는 그곳에서도 모국어(모성)를 생각하고 있다. 낭만 짙은 기쁨보다는 심연 깊은 광장의 신전 기둥에 기대 알렉산더가 이끄는 전쟁터로 자식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눈물이 많은 여자”들을 상상해야 했다. 그 시대의 어머니들처럼 우리의 현실 저편 상처가 너무 깊어 아물지 못한 “한계령에서, 비무장 지대에서, 공항에서/ 뜨거운 편지를 쓰며 찔레꽃처럼 붉어지곤 했”던 어머니들의 기억도 떨칠 수 없다. 시인의 분방한 사유를 낚아챈 덫은 오랜 역사 속 한 때의 영광만 무상하게 남은 마케도니아 광장에서 어이없게 포획되고 만다.
장 폴 고띠에의 금속성 스카프가 잘 어울려
제5원소를 이야기하며 감독이 되었을지도 모를
사람은 불행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입술
사랑은 산소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정점에 왔을 때
숨을 놓아주는 것이라고
모히또를 마시며 아나바의 바닷가를 거니는 키가 큰 여자
나비처럼 팔랑이며 부에나비스타소쎨클럽을 두드리는
집시의 여자
분수처럼 눈부시게 솟아오르는 뒷모습은
그러나 왠지 쓸쓸 해보여
-<유비쿼터스의 여자> 부분
알렉산더를 향한 화살을 막아낸 금속의 갑옷이 작금에 이르러서 엉뚱하게 큐피드가 쏜 욕망을 유혹하는 징표가 되었다. 제대로 꽂힌 화살에 입은 상처 때문일까? 전장에서 입은 상처가 깊어 막무가내로 회군하던 알렉산더처럼 시인의 이정移定이 너무 멀리 아바나까지 와버렸다. 이제 놓았던 사랑을 다시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분명 기력을 회복한 것 같은 데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나 왠지 쓸쓸 해보여”라는 여운이 길어 보이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이럴 때 영화 속 댈러스와 릴루의 키스로 완성되는 ‘제5원소’를 떠올려야 한 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부에나비스타소쎨클럽’을 찾아 오마라포르투온도의 보컬을 들으며 은근하게 못다 해본 낭만을 즐기던지. 시인만의 분방한 사유 안에서 허용할 수 있는 목록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는 감옥에 갇혀서도 간섭받지 않는 공간을 꿈꾸는 것이 허구같이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이상향으로 묘사된 <Sing Sing 교도소>를 활용하는 방법을 잘 제시하고 있다. 제시한 대로 따라 하면 되고, 그 안에서 갖는 특권은 실천하면 된다. “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방 있어요?/ 스위트룸이요/ 저흰 어제 결혼했어요/ 3박 4일 동안 머물 예정이에요/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Don’t Disturb라고 쓰인 팻말 하나 걸어주시고요/ 믹 재거가 다녀간 방 혹은/ 아네트 베닝이 묵었던 방이면 좋겠어요/ 침대는 플러그를 빼주세요/ 종이로 만든 전기의자도 치워주세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꽃을 걸어주세요/ 노래해요 싱싱 모두들 싱싱 프리즌/ 바다가 보이네요/ 30주년 기념일에 다시 올게요/ 그때는 박물관으로 안내해주세요/ 아치형 창문에 통 유리를 끼우고/ 건너편 부부의 동선이 보이는 원형의 발코니/ 이오니아식 기둥도 괜찮겠네요/ 저흰 어제 결혼했어요/ 어제는 히스토리, 미래는 미스터리/ 현재는 선물 스위트룸이 있는 감옥/ 노래하는 감옥에서요”라는 시에서 반전은 사랑의 결말을 예감하는 데 있다, 그러기 전 화려한 은막의 주연으로 기억되는 믹 재거와 아네트 베닝이 머물렀을지 모를 호텔 방을 상상하며 사랑의 낭만을 맘껏 즐길 수 있다. 묵은 방에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꽃을 걸어” 환상적인 시간을 장식하지만, 길지 않아 파경으로 닥칠 고통까지 예상하기는 이르다. 시인은 ‘싱싱 교도소’가 갖는 의미와 위치적 특성을 잘 알고 있다. 허드슨 강변을 끼고 있는 싱싱 교도소를 통해 전달하려는 의도는 사랑에도 지켜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박물관으로 바뀐 그곳을 보기 위해 찾아온 연인들을 위해 시인이 묵었던 호텔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을 것이다. “Sing Sing 교도소”가 갖는 언어의 중의성처럼 현실적으로 과도한 기대이자 선망의 세계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설령 그곳을 찾아간다 해도 문학 현상만큼이나 장소에 대한 욕망은 시간 속에서 유연해질 것이다.
혈연과 단절된 인간이 한계에 이르러 깨닫게 되는 이성적 판단은 현실적으로 정치精緻하게 재현되어야 한다. <Memory Cue>는 감독의 신호처럼 그렇게 시작되었다.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잘 훈련된 연기자처럼 자연스럽게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 출발점은 “삼선동”이다. 단역 배우처럼 “이곳이 분명 내가 자란 동네에요”라는 대사도 적절하다. 더 리얼한 실연實演처럼 “다섯 살 때 벨기에로 떠났다가 돌아온 여름”에 걸맞게 눈물도 흘려야 한다. “이 냄새가 분명해요. 흠,/ 흙 냄새, 나무 냄새, 비린내, 비련 같은/ 트럭을 좇아가며 회가 동하던 휘발유 냄새/ 엄마는 어디 있죠? 아빠는 어디 가셨죠?/ 너는 홀트 재단에서 챙겨주었던 삼선동 236번지/ 누렇게 말라붙은 잠자던 서류를 들고 돌아왔다/ 이 냄새는 브뤼헤에서도 맡고 싶었어요”까지가 배우처럼 해야 할 몫이다. Cue는 끝났어도 횡격막까지 차오르는 슬픔의 여운을 최대한 오래도록 울먹여야 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맴도는 모국어의 기억들을 퍼즐처럼 맞춰보지만 매번 그 자리에서 어긋나버린다. 안타깝게도 모든 것이 사실일 때는 항상 드라마와 다르게 끝이 났다.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시인이 아름다운 것은 사회의 그늘처럼 슬픈 것에 진정하게 다가갈 때일 것이다.
아프니까 아프리카에 갔었죠. 엄마를 아프게 했어요. 상처는 어두운 곳에서 잘 아물어요. 이코노미 클래스 관에 팔 다리를 접어 넣고 뼈가 우는 소리를 들었어요. 사막에서는 화장火葬이 필요 없다고, 짐바브웨에서는 몸에 불을 대지 않는다고 했어요. 엄마를 모시고 왔어야 했는데, 따뜻한 피는 솜으로 지혈시키고 살이 부패하는 지구의 언덕에서 검은 음악을 들었어야 했는데, 초베에서 만나 전생의 동물들을 불러 모아 줄을 서게 했어요.
-<마마 아프리카> 부분
시에서 환기하는 세계의 정황은 개별성을 통해 지상의 존재에 대한 주체들과의 대면으로 시작된다. <마마 아프리카>도 예외는 아니다. ‘엄마’와 ‘마마’라는 언어를 차용한 의미는 시적 모호성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계를 중의적 의미로 아우를 수 있다. 온전한 모성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세계는 통합된 상징이다. “마마와 아프리카”는 상호 보완적이고 은밀한 중의성을 전제로 완전해진다. 엄마와 아프리카의 연관성도 그렇게 기인한다. 인류의 어머니인 호모 사피엔스 루시(Lucy)가 발견된 아프리카, 검은색 어둠을 의미한 문명 부재와 흑인들의 무지와 야만,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득한 땅, 세계사의 변방에서조차 아예 존재하지 않는 대륙으로 각인시켜버린 유럽 중심주의 빌미를 만든 헤겔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그곳을 찾아간 한정원 시인의 속내는 여행만큼 한가한 것은 아니다. 엄마에 대한 내면의 불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참회하기 위한 목적이었는지 모른다. 어머니에 대한 시적 발화는 다른 시에서도 모음처럼 드러난다. 시인에게 엄마로 상징되는 의미는 그만큼 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 시대 엄마의 부재는 곧 모성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극히 개별성으로 한정된 슬픔을 환경이 다른 아프리카에서 사후死後 이미지로 소환한다.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아프리카에서 엄마를 떠올렸고, 시인의 엄마가 항상 그랬듯이 아프리카는 언제나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파온 것이고 슬픔처럼 밀려오는 원초적 공감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엄마’만의 텍스트에서 마마(엄마)라는 외연의 지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몇 가지의 서사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시상의 전개가 단속적인 것 같지만, 연속적인 문장으로 읽어야만 의미 전달이 용이하다. 현재의 시간 속에서 오래되지 않는 시간을 회상한다. 3연으로 나뉜 연의 중심에는 ‘엄마’가 있다. 1연에서 엄마 때문에 마음이 아팠고 그런 마음을 달래려 아프리카를 찾았다. “엄마를 아프게 했어요”하는 말에서 심리적 우울감은 오래도록 깊다. 팔다리를 비틀어 관에 넣는 장면까지 통상적 우리의 화장 장례문화이다. 그래야만 한 줄 알았는데 죽은 사람을 화장하지 않는 아프리카 짐바브웨는 우리와 달랐다. 2연에서 모母국國어語”를 통해 존재의 근원인 어머니를 회상한다. 이어 “홀로코스트에서 엄마를 버리고 보호색을 잃어버린 파충류의 눈물”처럼 온전하게 흙으로 돌려보내지 못한 자책감은 또 다른 대상으로 변주된다. “마케바의 엄마는 40년 동안 고립된 눈물을, 딸은 그 몸이 우는 소리를 진동으로 들었죠”라며 남아공의 흑인 가수 미리암 마케바를 생각한다. 그녀가 불렀던 ‘마마 아프리카’를 들으며 온전한 고향(흙)에 묻히지 못한 안타까움에 가슴 아파한다. 이 시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회상으로 그치지 않고 세계의 확장을 통해 갱신하는 문학적 공감에 있다. 한정원 시인의 시 속에서 관류하고 있는 노마드적 기질은 언어의 사유에서도 반복 재현된다. 낯선 곳에서 낯익은 무언가를 탐색해낸 시인의 상상력은 언어 일반성을 초과한다. <아메바 뮤직>도 그런 면에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아메바라는 생명체는 단세포이니 굳이 엄마라는 상징에서 특별하지 않다. 그런 의미를 넘어 단세포가 갖는 절대적 자기애로 이해한다면 궁극에서 다를 수 있다. “유물을 발굴하듯 먼지의 경계를 털어내고/ 레코드판의 글자를 문질렀지”라는 오래된 LP판으로 접속된 시적 동기는 오래된 연대기부터 충실하다. 예사롭지 않은 가사를 품고 있는 “삼엽충 화석으로 퇴적된 입자들이/ 모래 꽃을 피우고 있는 동굴/ 언젠간 불러야 할 너의 성대가 숨죽이고 있는 곳”임을 알게 된다. 그곳에도 시인의 가슴에 깊숙하게 각인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가 들려주는 어머니에 대한 서사는 극심한 고통을 전염하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즉흥적인 것처럼 노랫말로 들려줄 뿐이다.
세상의 엄마들은 다 같은 종족이었지
죄인인 나를 숨겨주었던
거꾸로 흘러가는 너에게 지혜의 목소리로 속삭이던
방아쇠를 당긴 보헤미안에게 천국의 문을 듣게 한
마리아, 메리, 마더, 마마, 맘
그냥 내버려 두라고 진통제를 삼키는 엄마
재봉틀을 돌리며 너의 옷을 바느질하던 해 뜨는 집
스테이시의 엄마처럼 세상은 자주 어지러움이었을까
-<아메바 뮤직> 부분
화자는 보헤미안이거나 양철북을 흔들고 가는 오스카 마체라트일 수도 있다. 특정하지 않은 채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더 많은 시적 상상력을 배가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모성으로 세상을 포옹해낸 감성을 전제하고 있다. 한 사내가 치마폭에 숨어들어 목숨을 건진 스토리로 시작되는 양철북의 긴박한 상황도 알고 보면 무의식 속 똬리를 튼 모성으로 견인한 위대한 행위다. 즉흥적인 상황 같지만, “네가 찾는 광시곡은 햇살 아래서 또 만들어질” 개연성으로 모성에서 기능한 발현이다. 어머니에 대한 많은 각주를 부차副次해도 현실적 언어체계에서 한계가 있어 ‘아메바 뮤직’의 레코드는 반복해서 돌아갈 것이다. 미묘한 시적 공감으로 와 닿는 감동은 효과를 가늠하기에는 이르다. 단절된 의식 안으로 침입한 시인의 공감각적 인식의 회로는 모든 곳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게 불어오는 황사 먼지에서 현대인들이 잊고 있는 원죄적 향수를 생각한다.
북경이라고 발음하지 않았다. 베이징이라고 들려왔다. 밤이 내리고 있는 가로수길 근처에서 너의 얼굴과 어깨는 간자체처럼 해독이 어려웠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너의 모래바람 속 서러움을 찾아낸 뒤 묘사가 가능했다.
전보를 치려고 쓴 문장처럼 너의 서울 일 년은 단절과 서두름과 생략의 진눈깨비 속이었다.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빼앗아가는 골목들, 고비 사막의 황사가 도시를 덮을 때 너의 향수는 내몽골까지 역으로 불어갔다.
-<서해 바다 먼 해상> 부분
‘서해 먼 바다 해상’ 이라고 말하는 기상 캐스터의 말, 그때부터 의문이 시작되었을 터이다. 시인이 말 한대로 따지고 보니 바다가 세 개나 중첩 사용되고 있었다. 언어의 분석보다 더한 상상력은 시적 사유의 근원인 오래된 응시를 빠뜨릴 수 없다. 한정원 시인의 축적된 시 세계는 단속적이거나 근경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곳까지 찾아 들어간다. 그 말은 많은 시인들이 여행을 통해 시의 소재를 찾아내는 것처럼 그와 다른 배후로 대상에 대한 국경이라는 거리 간격을 수시로 와해한다. 직접 본 것에 대한 대상보다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결여를 더 주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해 바다 먼 해상’은 기상 캐스터를 통해 익숙하게 들어온 ‘북경’과 ‘베이징’은 동일한 지명이다. 시인은 기표로 발성된 이미지를 정체모를 모호성에 근거한 의문과 긴장에 편승하지 않고 긍정이나 특수성으로 해체한다. 발성에 숨어있는 의미를 지리사적 사변으로 포용하고 그런 환경을 외면하지 않는다. 거대 국가 중심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언어체계를 통해 시인은 일말의 서글픔도 가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의 함축된 의미에서 퇴행하지 않고 인간적 그리움을 포옹해낸다. “밤이 내리고 있는 가로수길 근처에서 너의 얼굴과 어깨는 간자체처럼 해독이 어려웠다”는 의미는 개별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만큼 시의 언어 범위는 다양한 내, 외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시의 상상력은 더 멀리까지 가 있다. 서로 간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보라는 수단이 필요했다면 그마저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모든 말들이 초스피드로 전달되는 시대에 살고 있어 ‘전보’라는 기능이 상실된 지 오래다. 일상의 변화를 통해 소식을 곧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대한 이동은 시간으로 환산하는 시대가 아닌 모든 정보가 속도로 유통되는 첨단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옛것에 대한 향수마저 언젠가는 유물처럼 해독할 없는 문자로 남을지 모른다. 시시각각 변하는 속도가 그리움으로 축적될 시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비 사막의 황사가 도시를 덮을 때 너의 향수는 내몽골까지 역으로 불어갔다”는 시인의 마음속 그리움은 거리를 불문한다. 어차피 지구라는 세계는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한정원 시인이 추구하는 문학의 세계는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바다에는 우리 삶과 관계되지 않은 정처의 세계도 흘러들기 때문이다. 언어의 바다에서 좌초된 밀물들이 뭍에 닿아 포말로 흩어져 개체가 되듯 사람에 닿아 공감한 언어의 파문이 긴 여운으로 남길 바란다.
-《미래시학》2020년 여름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