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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는 이번 정변(4.19 학생의거)이 혁명이냐 혁명이 아니냐 하는 문제로 설왕설래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대체로 소위 혁명이 못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 평화가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는 이 때 이런 길로틴주의자들을 단연 배격하는 바이다.
혁명을 거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제 인류는 혁명 없이 오직 이성과 도덕과 정신력과 자기희생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각에 의해 진보의 궤도에 올라야 한다. 혁명과 전쟁은 언제나 사람의 진전한 자각과 진보가 아닌, 퇴보내지 단절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번의 정변 역시 이런 절대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악에 받친 분노의 폭발이지 진정한 자각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혁명이 곧 자각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각설하고, 금번 재판에서 대체로 피고들에 대한 언론의 태도가 시체에 매질하는 중세적인 것이어서 나 자신은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민중들이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일각에서는 재판을 권선징악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나, 이 역시 더러운 생각이며 국민을 모독하는 생각이다.
감히 말하지만 뉘우쳐야 할 것은 절대 저들만은 아니다. 온 국민이 모두 크게 뉘우쳐야 한다. 똥을 먹으라 하면 똥을 먹고 오줌을 먹으라 하면 오줌을 먹던 지난날의 그 도덕적 무기력을 우리는 다 함께 철저히 뉘우쳐야 한다. 사실 국민의 이 무자각, 무기력이 저들의 학정을 초래했던 것이 아니더냐?
나 자신은 사실 피고들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이런 부끄러움에 압도되었으며, 이 국가 민족의 무슨 망측스런 운명인가 하여 피고들에 대해서도 일말의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단테는 지옥에서의 동정심은 신의 정의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으니, 이는 나의 불의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도 전에는 누구 못지않게 저들을 미워했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증오는 필요치 않다. 모든 것이 새로 출발하는 이 마당에는, 적극적으로 나 자신의, 또 전 국민의 새로운 자각만이 시급히 요청될 뿐이다.
이번 재판에서 이미 사형 구형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절대평화주의와 절대 사랑에 서는 자로서, 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하한 경우든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증오나 복수로써 하는 살인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기독교 신앙에서 사람의 회심이란 오직 위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 교육적인 의미에서도 악인일수록 격리된 상태라도 좋으니 더욱 오래 살아야 할 필요까지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서 하나님에 의해 그나마 피를 적게 흘려진 것을 감사해야 하며, 희생자들의 높은 공적(公的) 정신을 읽어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우리는 정의의 존엄성과 엄혹성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양심에 의한 하나님의 지상적(至上的)인 요청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도덕적 존재이다. 모든 사람은 이제 조만간 신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 생애에 대한 심문을 받아야 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서연구> 제88호(1960년 5,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