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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 종주 23 – 속리산권역 >
문장대구간 - 산들의 너울속을 걷다
< 일정 및 자료 >
[산행지 안내]
백두대간학교 제83강 2018년 8월 산행은 백두대간 종주 그 스물 세번째 산행입니다. 산행일은 8월 18일(토) <백두대간 속리산권역 문장대구간>입니다.
☛ 물결치는 산들의 너울 - 산그리메 Ⓒ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8월 백두대간학교 종주는 충청의 알프스이며 해동팔경 중에 하나이며 소금강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속리산의 문장대 구간입니다.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로 불렸으나, 조선시대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병을 치료할 때, 문무 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대상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로 바뀌었습니다. 화북탐방지원센터에서 속리산으로 들어갑니다. 문장대에 올라 일출을 보고 속리산의 주능선을 따라 걷습니다. 석문을 지나고 속리산의 지킴이 고릴라바위를 지나 물결치는 산들의 너울을 보며 천왕봉에 오릅니다. 피앗재로 이어지는 정겨운 마루금을 따라 형제봉에서 천왕봉에서 문장대로 이어진 속리산의 주능선을 뒤돌아보고 갈령삼거리에서 갈령으로 내려서며 사람을 버리지 않는 산에서 나옵니다.
[ 구간 소개 ]
-. 산행월일 : 2018년 8월 18일(토)
-. 산행출발 : 2018년 8월 18일(금) 오후 11시
-. 산행코스 : 화북탐방지원센터-문장대-천왕봉-형제봉-갈령삼거리-갈령
-. 산행거리 : 약 15.4km
-. 소요시간 : 약 9시간 30분(충분한 휴식 시간 포함)
-. 난 이 도 : 상중(★★☆)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8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8월 중순이 되면 폭염과 열대야(tropical night , 熱帶夜)로 끓어오르던 대지는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더위가 한풀 고개를 숙입니다. 맹위를 떨치는 여름도 시나브로 찾아오는 절기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8월 백두대간 종주는 폭염과 열대야로 지친 심신은 달래고 새로운 기운은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싱그러운 숲과 시원한 바람을 맘껏 느끼고 담으며 새로운 삶의 동력을 재정비하는 산행입니다.
김영미 시인은 산행을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헝크러진 머리 쌓인 두께들이 풀리고 쓸려 내려갈지도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산행
김영미
산을 오를 때는
말할 필요도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발을 옮기며
보이는 것을 보고
바람의 감각을 느끼고
나무의 향기를 맡기만 하면 된다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헝크러진 머리
쌓인 두께들이
풀리고 쓸려 내려갈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올 때는
많은 것이 담겨져 있지 않아도 좋다
잠시 머물 수 있었던 순간을 사랑하면 된다
오늘 산에 오른다
시인의 노래처럼 폭염과 열대야로 지친 삶의 두께들을 내려놓고 풀기 위해 ‘사람을 떠나지 않는 산’ 속리산으로 들어갑니다.
속리산은 우리나라 12종산 중의 하나이며 백두대간의 근간입니다. 산행의 시작은 화북탐방지원센터입니다. 예정대로 종주를 이어가려면 갈령에서 산행을 시작해야 하나, 문장대의 일출과 일렁이는 산들의 파도를 보기 위해 역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초승달과 별들이 촘촘한 하늘 아래 짙은 어둠을 속으로 들어갑니다. 해드랜턴의 불빛을 쫒아 졸졸졸 흐르는 계곡을 따라 숲으로 들어갑니다. 해발 1,028m의 문장대까지는 약600m의 표교차를 올라야 합니다. 약 2시간 30분 정도 앞뒤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주의하며 계곡의 물소리를 동무삼아 한발 한발 오릅니다. 백두대간의 원래 구간은 늘재에서 밤티재, 견훤산성, 문장대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구간은 암릉구간으로 백두대간 중 난이도가 최상에 속하는 매우 위험한 구간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습니다.
☛ 문장대에 오르다 Ⓒ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어두운 밤을 지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울창한 조릿대 사이를 헤치고 올라서면 넓은 공터가 나옵니다. 옛날 문장대휴게소가 있던 자리입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더 오르면 문장대 표지석이 나타나고 표지석 뒤로 커다란 암괴가 우뚝 서있습니다. 바로 구름속의 봉우리라 불린 문장대입니다. 아찔한 철계단을 조심스레 올라섭니다. 사오백명은 넉넉히 서있을 수 있는 너른 바위가 펼쳐져 있습니다. 커다란 웅덩이가 여럿 보입니다. 비가 내리면 물웅덩이로 변합니다. 물이 차면 파란 하늘이 물에 담깁니다. 하늘이 문장대이고 문장대가 곧 하늘이 됩니다. 문장대에 서면 남으로는 천왕봉으로 이어진 속리산의 주능선이 용틀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 구병산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고 동북쪽으로는 늘재를 지나 청화산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의 마루금들이 유장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문장대에 오르면 산들의 일렁이는 물결을 볼 수 있습니다. 문장대에서 바라보는 산들의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산그리메를 그려내는 곳 중에 하나입니다. 넘실대는 산들은 파도처럼 밀려 옵니다. 정말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펼쳐집니다. 넘실대는 산의 파도를 뒤로하고 생전 세 번을 올라야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는 문장대를 내려섭니다. 기암절벽에 의연하게 서있는 꿋꿋한 기상의 소나무들과 작별하며 내려섭니다.
속리산에는 조선의 개국과 세조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린 곳도 이곳이고, 이방원이 왕권을 얻기 위해 형제들을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이곳 속리산입니다. 세조가 시를 지었다는 문장대, 세조가 행차할 때 가지를 들었다는 정이품송,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은폭, 학이 세조의 머리에 똥을 떨어뜨린 학소대, 세조가 7일간 법회를 열었다는 상환암 등등 곳곳에 수많은 이야기가 산재해 있습니다. 바람이 들려주는 조선 왕조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리산의 마루금을 이어갑니다.
문수봉을 지나 정법대로 이어진 마루금은 신선대를 거쳐 비로봉으로 이어집니다. 문수보살과 함께 신선이 되어 비로나자불을 맞으러 가는 길입니다. 성고석문을 지나 서서히 고개를 세우는 마루금을 올라서면 천왕봉입니다. 2009년에야 이름을 되찾은 표지석이 반겨줍니다. 백두대간을 걷다보면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접하게 됩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 보관된 ‘청동말뚝’과 속리산 최고봉이 ‘천황봉’으로 개명된 것이 대표적이 사례 중에 하나입니다. 백두대간을 걷는 것은 우리 문화의 속살과 우리 역사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백두대간 마루금 곳곳에 얽힌 이야기들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며 길을 이어갑니다.
속리산의 천왕봉에서는 한남금북정맥이 갈래 칩니다. 한남금북정맥은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分水領)으로 칠현산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래 칩니다. 다시 말해서 속리산 천왕봉에서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13개의 정맥 중 세 개의 정맥이 시작됩니다. 세 개의 정맥은 한강, 금강, 낙동강을 흘려보냅니다. 12종산 중의 하나인 천왕봉에서 내려서며 우측의 한남금북정맥과 인사 나누며 종주를 이어갑니다.
☛ 속리산 지킴이 고릴라바위 Ⓒ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천왕봉에서 급경사 내리막에 주의해서 내려서면 마루금은 순한 숲길로 이어집니다. 피앗재로 향하는 능선은 조릿대와 함께 하는 길입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피앗재를 지나면 암봉과 암릉이 연속됩니다. 알릉을 지나고 또 지나면 할배바위가 보이고 그 너머로 형제봉입니다. 문장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형제봉에 오릅니다. 좁은 암릉 위에 형제봉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표지석 뒤로는 속리산의 주능선이 병풍처럼 의연하게 서있습니다. 속리산의 아름다운 주능선을 뒤로하고 조심스레 형제봉을 내려서면 또다시 암릉의 연속입니다. 조심조심 바윗길을 지나고 돌고 돌아 올라서면 넓은 공터가 맞아줍니다. 갈령삼거리 이정표가 덩그러니 서있습니다.
잠깐 다리쉬임을 하고 갈령으로 내려섭니다. 49번 지방도로 향하는 능선길은 소나무와 바위들의 어울림이 진경수묵화를 보는 듯합니다. 소나무 사이로 천왕봉에서 문장대로 이어진 속리산의 주능선이 산수화의 배경입니다. 능선을 내려서면 가파른 비탈입니다. 미끄러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칡이 많은 고개인 갈령에는 덩그렇게 큰 표지석이 서있습니다. 작고 아담한 봉황산의 표지석과 비교됩니다. 갈령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다시한번 생각하며 속리산 문장대 구간 종주를 마칩니다
함께 걷는 백두대간학교는 도반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학교입니다. 혼자 걸으면 나만의 길이 되지만, 함께 걸으면 모두의 희망이 됩니다.
[ 산행 계획 ]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여러 전문가이드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 그리고 중간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 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기사님 전화번호는 010-3350-1055입니다.
8월 17일(금) 오후 11시
23: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23:3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23: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 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23: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 승차장
8월 18일(토)
00:05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 승차장
< 산행일정 >
03:00 화북탐방센터 주차장 도착 / 산행 준비 & 스트레칭
03:20 화북탐방지원센터 출발 – 산행 시작
05:40 문장대 - 일출
05:50 문장대 갈림길 – 아침식사
07:00 신선대 휴게소
07:50 상고석문
08:20 천왕봉
10:20 피앗재 – 점심식사
11:30 형제봉
12:00 갈령삼거리
12:50 갈령 – 산행 마감/버스이동
토종닭 백숙으로 뒤풀이
15:00 화서 출발
17:3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산행 준비물 ]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자켓, 우모복(다운자켓), 우의, 스틱, 물통, 여벌 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버프, 아침, 점심-도시락 등
[ 2018년 9월 백두대간학교 종주 중간 특별 산행 안내 ]
-. 산 행 지 : 설악산 1박 2일
-. 산행일시 : 2018년 9월 15(토) ~ 9월 16일
-. 출발일시 : 2018년 9월 15(토) 오전 06시
-. 산행코스 : 장수대-대승폭포-대승령-복숭아탕-12선녀탕계곡-남교리
용대리(1박)-특별 산행 및 천렵
-. 산행거리 : 1일차 - 약 11.3km / 2일차 – 약 5km
-. 소요시간 : 1일차 – 약6시간 30분 / 2일차 - 3시간
-. 난 이 도 : 중상(★★)
*. 상기 일정은 현지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 산행 자료 ] 속리산권역 문장대구간
◆[속리산국립공원]
속리산 천왕봉(1,057M)이 주봉이며 많은 봉우리들이 기암 절경을 이루고 있다. 천왕봉에서 가지 친 한남금북정맥은 충청남도 서산시 안흥진으로 갈래치는 금북정맥과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으로 갈래친 한남정맥의 분기점이요 시발점이다. 또한 속리산은 해동팔경의 하나이며 전에는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속리산 서북릉 최고의 위엄을 갖춘 문장대-문수봉-청법대-경업대-신선대-입석대-비로봉-천왕석문지나 천왕봉까지 1.000m의 봉우리 들이 줄지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수백 년 된 노송들이 의연하게 서있는 암릉 아래 고산의 조릿대들이 온 산을 뒤덮고 있다.
속리산은 선유동계곡을 경계로 백두대간 마루금을 월악산으로 넘겨준다. 산세가 지리산이나 설악산만큼 크지는 않지만 암릉과 암장의 연속으로 그 위엄을 남다르다. 중부 내륙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크게 속리산 주능선과 대야, 청화산 능선 등 두 개의 산괴로 형성되어 있다. 해발 1000미터 이상의 높은 봉우리 대부분이 속리산 주능선에 주변에 집중돼 있으며, 대야산 지역의 봉우리들은 900미터를 넘나드는 정도이지만 산세가 자못 험난하다.
법주사(法住寺)를 중심으로 4km 가량의 반경으로 호를 그리면서, 북쪽에 관음봉(觀音峰)이 있고 이어 문장대(文藏臺)·신선대(神仙臺)·입석대(立石臺)·비로봉(毘盧峰)·경업대(慶業臺)·천왕봉(天皇峰:1,058m) 등이 병풍처럼 회뤼하고 있는 형세이다. 속리산국립공원의 입구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舍乃里)이며 법주사의 사하촌(寺下村)으로 발달하였다. 이 사하촌은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옛 마을이 철거되고 청주 나들이골이라는 곳에 새로이 관광촌이 조성되었다.
속리산은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산의 이름은 원래 아흔아홉개의 연봉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구봉산 혹은 소금강으로 부르다가 신라시대에 들어 지금의 속리산이 되었다.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인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다.’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속세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제2금강(金剛),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광명산, 지명산, 미지산, 구봉산,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 등의 이름으로 불리 워 왔다.
속리산은 ‘세속이(을) 떠난 산’이라는 이름 뜻과는 달리 가장 세속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곳도 이 산이고,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 즉 태종이 왕권을 쟁취하게 위해 형제를 둘씩이나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이곳이다. 이뿐이 아니다. 세조의 가마가 지나가자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 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열고는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심회를 담았다는 상환암(上歡庵),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은폭(隱瀑)과 그 때마다 학이 세조의 머리에 똥을 떨어뜨렸다는 학소대 등 가장 세속적인 얘기가 곳곳에 배어있다.
속리산 명칭의 유래는 첫째로 신라의 승려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율사가 구봉산(속리산의 그 전 이름)에 오르기 위해 보은에 다다랐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으며 이를 본 농부들이 줄줄이 ‘속세를 떠나’(俗離) 출가해 여기서 ‘속리산’이 되었다 하며,
다른 하나는 최치원의 시에서 그 연원을 찾기도 한다.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는구나/ 산은 사람(俗)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속리산이 속한 보은군에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쯤 되는 ‘금(金)돼지’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미뤄 최치원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백호 임제의 것이다.
분방이 지나쳐 스무 살이 넘도록 스승을 구하지 않던 임제는, 스물두 살이 되던 겨울 어느 날 벼슬을 멀리하고 속리산에 은거하던 성운(成運·1497-1579)을 만나 3년간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따라서 위 시는 중용에 나오는 공자의 말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나(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도 사람을 멀리 하면(人之爲道而遠人), 도를 이룰 수 없다(不可爲而道)”고 한 데서 차운(次韻)을 한 것 같다.
임제의 이 시는 1614년에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에 보이고, 근년에 간행된 백호집(白湖集)의 번역본에도 기록돼 있다. 그런데 속리산에 관한 대부분의 글에서 위의 시를 최치원의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최치원도 도불원인(道不遠人)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의 비문을 쓰면서 ‘도불원인(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경우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고 새길 수 있겠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돌의 형세가 높고 크며, 겹쳐진 봉우리의 돌 끝이 다보록하게 모여서 처음 피는 연꽃 같고, 또 횃불을 멀리 벌여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산 밑은 모두 돌로 된 골이 깊게 감싸고 돌아서, 여덟 구비 아홉 돌림이라는 이름이 있다. 산이 이미 빼어난 돌이고,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다. 빛깔 또한 아청빛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충주 달천의 상류이다.' 문헌비고에는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石峯)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처럼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이라 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속리산 팔봉팔석문팔대 (八峰八石門八臺)
*. 여덟개의 봉우리 : 천왕봉(天王峰, 1,058m), 비로봉(毘盧峰, 1,032m),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 1,031m), 보현봉(普賢峰), 관음봉(觀音峰, 982m), 묘봉(妙峰, 874m), 수정봉(水晶峰, 566m)
*. 여덟개의 돌문 : 내석문(內石門), 외석문(外石門), 상환석문(上歡石門), 상고석문(上庫石門),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 비로석문(毘盧石門), 금강석문(金剛石門), 추래석문(墜來石門)
*. 여덟개의 돌 : 문장대(文藏臺, 1,054m),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학소대(鶴巢臺), 은선대(隱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
◆[문장대] 1,054m
문장대는 법주사에서 약 6km 지점,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위치한 석대다. 정상의 암석은 50여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규모다. 이곳 북서쪽 바위틈에는 가물 때가 아니면 늘 물이 고여 있는 석천이 있는데, 이를 감로천이라 한다.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로 불렸으나, 조선시대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치병할 때, 문무 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대상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로 불린다. 이곳에서는 천왕봉과 관음봉을 비롯해 속리산의 고봉들이 한눈에 보여, 속리산의 정상인 천왕봉보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문장대 안내판에는 문장대를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을 전하고 있다.
◆[문수봉]
속리산 8봉 가운데 하나로 그 모습이 매우 단아하다. 문장대와 마주 바라보고 서 있으며, 남서쪽 암릉 아래에는 청법대가 있다.
[상고석문]
상고석문을 지나 비로봉과 상고암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상고암으로 가는 문이라는 뜻에서 상고석문인 듯하다. 상고암은 신라 성덕왕 17년(720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주사를 지을 적에 천왕봉에서 벤 소나무를 이곳에 저장해 두었다 하여, 上庫(창고 고)라 한 것으로 보인다. 암자에는 어지간한 속병은 씻은 듯 고쳐내는 신비한 약수가 하나 있는데, 늘 마르지 않는다는 상고암의 팔공덕수가 바로 달래강의 발원 샘이다.
◆[비로봉] 1,032m
비로(毘盧)란 비로자나불을 줄인 말로써, 인도말로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자, 광명을 의미한다. 진표율사가 속리산에 온 다음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밝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췄다.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 무지개를 띄고 사방팔방 비추고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배례를 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 한다. 이곳을 비로봉이라 이름 하였다.
◆[천왕봉] 1,058m
속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天王峰)이다. 2007년 12월 중앙지명위원회가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는데 동의한데 이어 국토지리정보원이 지명 변경을 고시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붙여진 천황봉이란 이름이 일본 왕을 뜻하는 일제 잔재라는 게 개명 이유였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정확하게 ‘천왕봉’으로 기록돼 있다. 1911년 5월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한국지형도에까지 천왕봉으로 적혀 있으나,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1918년 지도(근세한국오만분지일 지형도)부터 천황봉으로 표기돼 있다. 조선이 천황의 식민지로 그 이름을 따서 ‘황(皇)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말 경에야 이르러 ’천왕봉‘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 졌다.
☛ 제 이름을 찾은 천왕봉 Ⓒ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천왕봉은 우리나라의 십이지종산의 하나이자, 한남금북정맥의 분기점이다. 정맥은 말티고개를 지나 청주의 산성고개, 괴산의 모래재, 음성의 행티고개를 지나 안성의 칠현산까지 이어진다. 천왕봉은 세 갈래의 큰 물, 한강(달래강-남한강) 낙동강 금강의 물길이 갈리는 곳(三派水)으로, 삼파수봉으로도 불린다. 삼파수는 달천수 우퉁수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명수로 알려진다. 조선시대에 이행(李行)이라는 선비는 우리나라에서 “충주 달천의 물이 천하에 으뜸가는 물맛이고 한강의 우통수(牛筒水)가 둘째이며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가 셋째”라고 그 품격을 매겼다. 여기서 삼타수는 달래강 상류 속리산의 삼파수가 변한 말이니 달래강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동시에 석권한 셈이다.
달래강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삼백 리 길을 북쪽으로 흐르다가 충주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흘러드는 강이다. 달래강 인근 지명에 아직도 남아있는 ‘달천’, ‘단월’, ‘단호’, ‘감물’ 등은 모두 그 물맛이 달다는 뜻으로 달래강에서 말미암았다. 그 물길의 발원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렇게 적었다.
“속리산 산꼭대기에 문장대(천왕봉이 맞다)가 있는데 천연암벽이 하늘로 치솟아 그 높이를 알지 못한다.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한 넓은 암반 한 가운데 가마솥만한 샘이 나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와도 늘지 않는다.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중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한줄기는 북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가 금천(金遷,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한반도에는 ‘천황’이란 이름을 가진 산(봉)이 계룡산 등 20개 가까이 있는데 대개 일제가 바꾼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어쨌든 그동안 녹색연합 등 시민단체와 개인들이 나서 개명운동을 펼친 결과로 지자체와 정부 관련기관이 뒤늦게나마 천왕봉의 이름을 바로잡은 것이다.
◆[법주사] “부처님의 법이 머무는 사찰”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14년)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법주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의신조사는 불법을 구하고자 머나먼 천축국(인도)으로 유학을 떠났다. 공부를 마친 후 흰 나귀 한 마리에 불경을 싣고 신라로 돌아왔다. 의신조사는 귀경길에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고 있었는데, 나귀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범상치 않은 생각이 들은 스님은 주변을 살펴보고 수려한 산세가 가히 절을 지을 만한 곳이라 여겨 그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절 이름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뜻에서 ‘법주사’라 지었다고 한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 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갈령 삼거리]
형제봉 오르는 중에 1Km 떨어진 곳의 ‘갈령’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갈령은 ‘칡고개’라는 뜻이다.
◉자료출처 : 아름다운소통(협), 백두대간학교, 국리공원관리공단, 한민족문화백과 등
☛ 문장대구간 산행지도 Ⓒ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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