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항령에서 식사를 마치고
2019년 10월 13일 일요일(토요무박) 백두대간 43 회차 북설악
자유인 산악회
백두대간 43 회차 : 미시령 – 황철봉 – 저항령 – 저항봉 – 마등봉 – 마등령 – 비선대 - 설악동
산행거리 : 약 19 km 산행시간 : 약 12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728148
거리 19.5 km
소요 시간 12h 24m 11s
이동 시간 10h 25m 14s
휴식 시간 1h 58m 57s
평균 속도 1.9 km/h
최고점 1,386 m
총 획득고도 774 m
난이도 매우 쉬움
백두대간 (白頭大幹) 43 – 설악의 가을
가을이 온다면
어딜 통해 오겠어
강원도 금강산 줄기 타고
분명
여기를 거쳐서 오겠지
울긋불긋 색동옷 입고
미시령 고개를 넘어
설악에서 한 바탕 춤판을 벌이겠지
오늘
단풍빛에 내 얼굴도 때때옷 입는다
날 씨 : 맑음, 안개, 19호 태풍 하기비스 일본 상륙,
옷차림 : 바람이 거세고 추울 것으로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나 오히려 더움.
가평 휴게소에서 올려본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기만 하다. 일본에 공포처럼 몰려온다는 제 19호 태풍 하기비스의 간접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동해안 쪽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거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하다. 그러나 장담하기는 아직 이르다. 설악 휴게소에서 밤하늘 별을 보고도 설악에서 비를 맞은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다.
설악 휴게소에는 단풍 산행객들의 부푼 마음을 싣고 설악으로 가는 버스가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미 떠난 차도 있을테고 아직 오지 않은 것도 있을 테니 그 많은 손님 치례를 하느라 오늘 설악산이 몸살이나 걸리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미시령 (두루 彌 화살 矢 큰고개嶺 826 m )
한자로 이 고개 이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옛날 조선 문헌에는 미시파령(彌時坡嶺)이라고 적혀 있다 한다. 때 時자가 어떻게 해서 화살 矢자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이 고개의 이름을 지었을 때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고개가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은 그 뒤에 숨어 있는 뜻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설득력이 부족하다.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혹시 미시(未時 오후 1 시 ~ 3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고개가 길고 험하여 이 고개의 양쪽에 있는 마을에서 늦게 출발하면 깜깜한 밤에 고개를 넘어야 하는 것을 고려하여 미시가 되면 고개 출입을 막는다는 의미로 쓰였던 것은 아닐까. 미시파령(未時坡領)이라 쓴다면 미시 이후에는 넘을 수 없는 고개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자동차로 아무 때나 넘어도 괜챦지만 당시에는 산짐승이나 도적떼가 횡행하던 시절이니 행여 아직 해가 남아 있다고 고개를 넘으려 하다가는 도중에 날이 저물어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될 터이니 그 기준을 미시로 잡고 그 이후에는 지나가지 못하도록 아예 고개 이름도 미시파령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하고 나름 추측해본다.
그러던 고개를 우리는 축시(丑時 새벽 1시 ~ 3시)에 올라 산행을 시작한다. 보름날이라 전등불 없이 산길을 걸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워 우리는 차에서 내리자 마자 손전등과 헤드랜턴을 킨다. 비스를 고갯마루 조금 아래에 정차하고 두 명이 앞서 올라가 동정을 살핀 후 올라와도 좋다는 신호가 떨어지자 마자 모두 산행 채비를 갖추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고개를 오른다.
철조망을 따라 수풀이 우거진 비탈길을 돌아서 정상 등로를 찾았다. 옛날 군대 초소가 있던 자리와 6.25 때 전쟁에서 숨진 군인 유해 발굴지라는 설명을 들어가며 우리는 어두운 숲길을 오른다. 난 수명이2시간 밖에 안가는 손전등을 켜지 않은 채 앞 뒤 사람의 전등불에 의지하며 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부지런히 걷는다. 왼쪽으로 멀리 전등 불빛이 환하게 비치는 곳은 속초시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안개가 스물스물 흐르는 것이 불빛에 비추인다. 가끔씩 전등불 빛에 비친 단풍잎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오늘은 진정 멋진 단풍을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된다.
황철봉의 너덜겅 오름길
그렇게 한참을 앞서 가던 선두팀의 행보가 갑자기 느려진다. 황철봉의 악명 높은 마스코트인 너덜겅(바윗 조각이 널려 있는 지역)에 이르렀다. 난 아껴두었던 손전등을 켰다. 사람 키만큼 큰 검은 색 바위 덩어리가 켜켜이 쌓여 있는데 어둠속에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틈을 피해서 발을 옮겨간다. 안개비에 물기를 머금은 바위는 미끄럽다. 자칫 발을 헛딪기라도 하면 무릎뿐만 아니라 온몸에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안개가 없더라도 어두운 산길에 조망이 없을 터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짙어지는 안개로 인해 좀 떨어져 있는 사람의 전등불마처 뿌옇게 비친다.
삶과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주는 듯 - 분비나무
그렇게 너덜겅을 하나 지나고 <분비나무>가 자라고 있는 작은 숲을 지나고 또 다시 너덜겅. 이렇게 하염없이 오르다 보니 약간의 평지성 오르막길이다. 황철북봉을 지나 황철봉으로 오른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여만에 마침내 황철봉에 도착했다. 작은 스텐리스 철판에 인쇄된 산이름표가 나무에 걸려있는 모습이 정겹다. 여러 산행기에서 익히 보아오던 그 산이름표다.
황철봉 (黃鐵峰 1,381m)
이 지역에는 돌에 철광석이 섞여 있어 자석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잘못하면 길을 잃는다는 풍문이 돈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황철봉이라는 산 이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얼마전 러시아에 갔을 때 보았던 돌의 색깔이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철 성분이 섞여 있는 돌이 산소에 노출되면서 산화작용으로 붉게 변했다는 것이다. 황철봉에 있는 돌에도 철분이 섞여 있어 돌 색깔이 누른 황색으로 변하였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닐까 유추해본다.
우리보다 앞서가던 타 산악회 회원들이 쉬고 있는 것을 지나쳐 왔는데 황철봉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뒤따라 올라온다. 이들도 서울에서 온 사람들인 모양인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른 시간에 아침을 먹고는 밝은 날에 산행하려는 모양이다.
황철봉에서 별동대
6시가 넘으니 자욱한 안개가 흐릿하게 보이며 서서이 여명이 밝아온다. 황철봉에서 약간 왼쪽으로 작은 바위봉우리 위로 올라서자 또 다시 드넓은 너덜겅 내리막길이 나타난다. 그래도 날이 밝으니 넘어질 위험은 적다. 이끼가 없는 곳을 찾아 디디면 미끄럽지 않다. 비록 안개가 끼어 조망은 없지만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니 회원님들 탄성이 절로 나온다.
황철봉에서 여명을 맞는다.
이번엔 가파른 내리막 너덜겅이다.
새가 그랬을까, 쥐가 그랬을까 ? 분비나무 솔방울을 야무지게 파먹었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안개가 조금 옅어졌는지 노랗게 단풍 든 산이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아침 햇살에 물든 산이 정말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하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꺼내 렌즈를 닦으려고 안경 닦는 천조각을 찾았다. 어디에선가 천조각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할 수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사진을 찍으려 하자 밀려오는 안개가 다시 그 멋진 풍경을 덮어 버렸다. 혹시 그 신비로운 풍경이 다시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잠시 서서 기다렸으나 야속한 안개는 더욱 짙어져 난 아쉬움속에 앞서간 일행을 뒤따라 내려간다.
저항령 (低項領 1,100 m)
이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저항령이 있다는 총대장님의 설명이었다. 그 곳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였기에 조금 마음의 여유를 찾아본다. 저항령이 가까워졌을 때 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왁자지껄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그 곳에는 내려오면서 잠시 보았던 그 신기루 같은 풍경이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발 아래 조그만 계곡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산마루가 황금빛 안개에 덮일 듯 말 듯 장관을 연출한다.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메가박스 스크린에 펼쳐진 장엄한 영상이다.
엷은 안개에 더욱 빛나는 단풍
단풍빛에 물든 저항봉
그리고 이어지는 병풍같은 암봉들
저항령이다. 왼쪽은 설악동이고 오른쪽은 인제군 백담사 계곡이다. 안개는 설악동에서 올라와 저항봉 사면을 타고 넘어 백담사쪽으로 흐른다. 한 장의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넓은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선두팀은 이미 저항령에 도착한 듯 계곡쪽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뒤에 남은 우리들은 멋진 풍경에 취해 그 동안 갈고 닦은 포즈를 취해가며 사진도 찍으며 잠시 노닥거려본다. 다른 이들이 아침밥을 먹을 동안 우리는 감동을 먹기로 했다.
저항령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단체로 인증사진을 남긴다.
식사를 늦게 마친 별동대는 볼도로 인증사진을 남긴다.
원래 고개가 길게 늘어져 ‘늘인목’이란 뜻으로 ‘노루목’과 같은 이름이지만 한자로 표기하면서 장항령(獐項領)으로 표기했다가 발음하기 편한 저항령으로 이름이 굳어졌다고 한다. 남진 진행방향으로 오른쪽은 길골(이것도 길다는 의미겠지)을 거쳐 백담사를 지나 북한강으로 이어지고 왼쪽은 저항령 계곡을 거쳐 설악동에 이어 쌍천을 흘러 동해안으로 빠진다.
저항봉(低項峰)
저항령에서 아침을 먹고 몇몇 사람들은 설악동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가고 나머지는 다시 너덜겅을 밟고 저항봉으로 오른다. 너덜겅을 오르면서 젊었을 때 하던 테트리스 게임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각각 모양과 크기가 다른 바위돌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어찌나 견고한지 바위 하나하나가 서로 꼭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만일 저 아래에서 바윗돌 하나를 쏙 빼내면 테트리스 게임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전에 어느 글에서 읽은 ’임계점’에 대한 이야기도 떠오른다. 이렇게 위에서 수 없이 많은 돌들이 무너져 쌓이다 보면 어느 한계점에 도달하는데 그 한계를 넘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는데 그 점을 임계점이라 부른다. 물론 그 임계점을 미리 계산해서 적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연유로 시설물 관리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조짐이 보일 때 철저히 대비하여 사고를 미리 예방해야 한다.
저항봉을 오르며 되돌아본 황철봉
저항봉으로 오르는 너덜겅
험한 바위틈에서 솔체꽃이 눈길을 끈다
너덜겅의 끝에는 아래에 있는 돌보다 표면이 거칠고 날카로운 돌들이 흩어져 있고 그 꼭데기에는 파편이 떨어져나간 바위가 큰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그런 모양을 보고 다 떨어진 걸레조각 같다고 하여 걸레봉이라고 낮춰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정식 이름은 저항봉이다. 원래 이 봉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았을 터이고 그 위에는 흙도 있고 나무도 자라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던 것이 오랜 풍파에 휩쓸리고 바위에 균열이 생겨 하나씩 둘씩 크고 작은 파편으로 떨어져 나가 지금의 저런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거친 바위틈에 물이 고이고 얼음이 얼고 또 날이 풀리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생기다 보면 저항봉도 점점 낮아질 것이다.
저항봉 바위 능선
저항봉에서 내려다 본 인제쪽 단풍숲
우회하여 다시 대간길로 올라서며 올려다본 저항봉
백두대간길은 저항봉에서 저 거친 암봉을 지나가지만 위험구간을 밟고 지나갈 수 없기에 산길은 저항봉 넘어 한참 아래로 내려갔다가 크게 돌아서 다시 올라가야 한다. 대간길 오른쪽 인제 방향은 이제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울긋불긋 햇빛에 반사된 단풍이 곱기만 하다. 우리는 사춘기 소년들처럼 자연이 빚어놓은 가을빛을 등지고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다시 대간길로 올라선 곳에는 멋진 바위가 늘어서 있다. 암봉에 올라 아름다운 설악의 가을을 감상한다. 저항령 계곡 끝에 울산바위와 달마봉이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 멀리 설악의 서북능선이 이어져 있다. 아침나절 갓 떠오른 해를 가지고 희롱하던 안개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었고 마등봉이나 귀때기청봉처럼 높은 봉우리 꼭데기에 앉아 놀고 있다. 서북능선 끄트머리에 귀때기청봉 너머로 가리봉도 삐쭉 솟아 있고 남교리쪽으로는 대승령 지나 안산도 또렷이 보인다. 오늘은 이제까지 보았던 설악의 또 다른 면면을 보는 날이다.
인제쪽 사면에는 가을이 서늘서늘 익어가고 있다.
멀리 불쑥 솟아 있는 귀때기청봉과 마루금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
뒤돌아본 저항봉 - 왼쪽 아래는 백담사 계곡으로 이어지겠지.
마등봉(馬嶝峰 1,327 m)
단풍 숲길을 걸으며 간간이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저항령 계곡을 내려다본다. 어쩌면 태고적부터 아무도 밟지 않았을 처녀림일 터이다. 깍아지른듯 뾰족뾰족 솟은 바위 봉우리와 직각에 가까운 절벽에도 다양한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다. 형형색색 가을의 절정을 보여준다.
왼쪽 멀리 달마봉이 보인다. 저항령 계곡을 지켜보는 저 비탈은 이제까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처녀림 같다.
오늘도 앞서 간 선두팀은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산행을 마친 후 속초항에 가서 점심으로 회를 먹기로 했는데 너무 뒤쳐지면 앞에 간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앞으로는 사진도 찍지 않고 부지런히 가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불타오르는 단풍빛에 공염불이 되고 만다. 단풍은 왠만한 꽃보다 더 아름답다.
마등봉으로 가는 길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마등봉을 오르는 길은 다시 너덜겅이다. 그런데 돌의 모양이나 크기가 이제까지 보았던 것들에 비해 사뭇 다르다. 우선 크기가 작다. 황철봉이나 저항봉에서 보았던 돌은 어른 키보다 큰 것들인데 마등봉에 있는 돌은 얇으면서 크기가 작다. 그리고 표면이 거칠고 날카롭다. 이 돌들은 발밑에서 체중에 밀릴만큼 견고하지도 않다. 가파른 잔돌 너덜겅에 지그재그로 길이 나 있다. 그 가파른 돌 경사면에 누군가 군인들의 방공호처럼 가운데를 움푹 파고 앞쪽에 높은 담을 쌓아 놓은 것이 여럿 보인다. 별동대장님은 아마 누군가 이곳에서 야영을 한 흔적이 아닌가 싶다고 한다.
마등봉을 오르기 전 발 아래 펼쳐진 단풍 숲
마등봉으로 오르는 잔돌 너덜겅 경사면
이제 다 와갑니다. 별동대원들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마등봉에 걸려있는 구름은 우리의 눈을 하얗게 가려 버린다. 천지사방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지나온 단풍길도, 저 멀리 아스라이 펼쳐졌던 서북능선도 그리고 설악산 어디에서나 잘 보이는 최고봉 대청봉도 모두 구름에 가려져 있다. 아마도 늦은 걸음을 탓하며 서둘러 내려가라고 산신령님이 조화를 부린 것 같다.
마등령에서 비선대로 가는 단풍길.
마등봉에서 마등령 삼거리는 잠깐이다. 비탐길에서 정식 탐방길로 넘어와 홀가분한 기분으로 별동대 단체사진을 남긴다. 여기서 직진하여 조금만 더 내려가면 오세암을 거쳐 백담사로 내려가는 길과 공룡능선을 타고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우리는 마등령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틀어 비선대를 향한다.
그동안 여러 번 지나다닌 길이라 모든 것이 낯이 익었다. 봄에 하얀 꽃을 소담지게 피웠던 팥배나무에는 빨간 열매가 익어간다. 작은 너덜겅길 옆으로 촛대처럼 길쭉한 꽃대를 올렸던 부게꽃나무는 벌써 단풍잎을 다 떨구고 바람개비 같은 씨앗만 몇 개 달고 있다. 여름 내내 피고 지기를 반복하던 함박꽃 나무에는 잎도 다 져버리고 빨간 열매마저 떨어져 나목(裸木)으로 남아 겨울맞을 채비를 갖추고 있다.
비탐길을 훔치고 난 도둑님들의 얼굴
마등령 갈림길에는 멋드러진 팥배나무가 서 있다.
설악산의 나침반 세존봉이다.
설악골로 이어지는 계곡에는 이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산에 와야, 그것도 이처럼 깊은 산에 들어야 비로소 진정한 계절을 느낄 수 있나보다. 비선대로 가는 길에는 단풍나무가 천상의 빛깔로 물들어 있다. 신갈나무는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중이고 단풍나무는 노란색, 빨간색으로 멋진 조화를 이룬다. 가끔씩 조망바위에 올라 공룡능선쪽으로 시야를 돌려 뾰족뾰족 솟아 있는 공룡의 등허리를 바라본다. 공룡능선의 마스코트인 1275봉은 허리부터 구름에 가려져 있다. 멀리 대청봉도 하늘과 땅의 경계로 갈라져 있다. 눈이 미치는 땅의 경계 아래만으로도 신비로움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뜻인가보다.
단풍나무 우거진 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는 산객
1275봉 허리 위로는 천상이요 그 아래는 선계다
화채봉마저 구름이 가려버렸다
그러나 가까운 주변은 단풍으로 활활 타오른다
비선대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금강굴을 잠깐 보고 갈 마음도 있었으나 그냥 지나친다. 긴 너덜겅길을 걸어온 다리가 이끄는대로 가야한다. 오늘은 눈.코도 호강하고 머리도 맑아졌는데 내 두 다리만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발가락에 마른 습진이 있어 무릎까지 아파온다는 큰형님도 고생한 두 다리보고 수고했다며 토닥토닥 두드려가며 금강굴을 그냥 지나쳐 비선대로 향한다.
하산길에 바라본 천불동 계곡
가을이라 어김없이 좀작살나무 열매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누리장나무 열매도 진주보석처럼 익어간다.
무얼 그리 빤히 올려다 보시나요?
크라이머들이 장군봉과 적벽에 매달려 있다.
가을은 설악에 들어야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언제나 이맘때면 평소보다 몇 십 배나 많은 사람들이 설악을 찾는다. 설악동으로 들어서니 수 많은 사람들로 큰 시장을 방불케한다. 다행히 선두팀이 비선대로 내려오는 도중 금강굴에 들러 구경하고 오느라 우리보다 조금 앞서 내려온 것 같다. 신흥사를 지나 조금 내려오니 아는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일주문에 이르니 우리 회원님들이 다 모여 있다. 원래 청봉지구에서 대기하기로 한 버스가 우리의 편의를 고려하여 A지구 주차장까지 올라오기로 했단다.
저항령 계곡 입구에서 바라본 황철봉과 저항봉
케이블카로 오르내릴 수 있는 권금성
신흥사 부처님의 가호로 산행을 무사히 마침에 감사드리는 큰형님
무사한 산행에는 이 곰님의 은덕도 한 몫 했겠다.
설악항에서 늦은 점심을 먹다
버스를 타고 설악동을 빠져나가 곧바로 바닷가에 면해 있는 ‘설악항’으로 향했다. 일본을 휩쓸고 지나간 제 19호 태풍 하기비스의 간접 영향인지 설악항의 파도가 거칠게 몰려온다. 미리 예약한 식당에 들어가 콜라로 목을 축이고 신선한 회로 주린 배를 채웠다. 새벽부터 산과 바다를 두루 구경하며 맛난 음식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우리는 진정 자유인이다.
오늘 생일을 맞이한 두 회원님들을 위해 큰형님이 어렵게 (식당 주인에게 부탁하여 속초시내에 있는 파리바케트에서 배달해온) 생일 케잌을 준비하여 다 함께 축하자리를 마련했다. 식사를 마치고 6시쯤 출발하였는데 행락철 고속도로 정체로 서울에는 9시쯤 도착했다. 기사님께 부탁하여 지나는 길에 집 앞 올림픽 대로에서 하차한 덕분에 9시 10분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젯밤 10시 집을 나선 후 만 23시간만에 원점회귀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를 마감한다.
설악항의 파도
오늘 생일을 맞은 두 분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일본을 휩쓸고 지나간 19호 태풍 하기비스는 유례없이 강한 바람과 강수량으로 100여명의 인명피해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혔다. 우리나라 상공을 덮고 있던 찬 공기에 밀려 일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지만 만일 그 태풍이 한반도에 들어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찔함이 느껴진다. 아무리 인류문명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아직은 아니 어쩌면 영원히 자연앞에서는 한갖 먼지 가루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연은 우리에게 자만하지 말고 한없이 겸손해지라고 가끔씩 선명한 메시지를 보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