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파영웅 조성두 용사
금년은 동북해방전쟁사에서 아군이 전략적방어전으로부터 전략적공격전에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기 시작한 휘남성해방 61돐이 되는 해이다. 또한 이 전역에서 지뢰와 함께 자신의 몸으로 적의 또치카를 폭파하여 아군의 진격로를 개척한 폭파영웅 조성두용사 순국 61돐이기도 하다.
동북해방전쟁에서 이룩한 조선족부대의 업적을 기리고 이 땅의 안녕을 위하여 청춘의 보귀한 생명을 다 바친 조성두용사를 비롯한 수많은 혁명렬사들에 대한 공훈을 기리는것은 우리 민족 후대들에게 애국주의사상교양을 진행하고 민족자부심을 키워주어 그들로 하여금 형제민족과 함께 시대가 부여한 력사적사명을 완수해나가는데 필요한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는 살아남은 견증인들의 미룰수 없는 사명이라고 본다.
“정치전사” 조성두
동북민주련군에는 “정치전사”라는 특수한 역할을 하는 전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공산당원들이 아니다. 그러나 당조직의 믿음직한 전사들로서 당과 전사들의 감정을 이어주는 교량적역할을 하는 적극분자들이다. 당시 부대에는 당조직이 공개되지 않아 당외에서는 누가 당원인지 알지 못했다.
1946년 2월 리홍광지대 제3퇀 1영 3련에는 “정치전사” 조성두가 배치되여왔다.
22살인 조성두는 키가 훤칠하고 균형잡힌 몸에 길을 걸을 때면 두 어깨를 앞뒤로 절주있게 흔들었으며 웅글진 평안도사투리를 썼다. 게다가 웃을 때면 언제나 소탈하게 소리내여 웃으며 작은 눈을 슴벅거렸다. 그는 코가 유난히 커 전사들은 그에게 “따비즈(大鼻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누가 별명을 불러도 개의치 않아하며 응대하군 해 모든 전사들이 친형제처럼 그를 따랐다.
그는 자신이 “정치전사”라는것을 항상 잊지 않고있었다. 전사들이 혁명을 위해 부모처자를 떠나 간고한 군생활을 하고있는만큼 서로 단결하고 사랑해야 한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그는 누구에게나 애로사항이 있을 때면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와했고 그것을 해결해주기 위해 서슴없이 발벗고 나서군 했다.
조성두는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전사들을 극진히 돌봐주며 사랑해주었지만 옳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는 양보없었고 날카로웠다. 괴벽하고 개성있는 그의 성격과 표현은 다른 사람에게 상급도 없고 조직규률도 없는 애군이라는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평소에 말수가 적었고 말을 할라치면 무뚝뚝한 평안도사투리를 쓰면서 언제나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군 했다. 그는 련장의 말에는 절대복종했지만 분대장이나 패장, 지어 지도원의 말도 귀등으로 넘길적이 많았고 자기의 견해와 같지 않거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즉석에서 반박해나서군 하였다.
한번은 반 생활회의에서 전사 차모가 발언에서 자기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의 내무정돈을 먼저 한후 다른 사람의 내무까지 정돈해준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조성두는 즉석에서 반박했다. “자기자랑만 해서야 되겠소? 실사구시로 말해야지. 지난번에 김동무가 차동무의 침구를 잘 정돈해준 사실은 왜 말끝에도 내놓지 않소?” 조성두는 이런 성격이였다.
전투임무를 출중하게 완수
1946년 초가을, 3련은 몽강현 남쪽 20여킬로메터 상거한 안수진에 주둔하여 휴식하는 한편 소고(訴苦)회를 열었다. 소고회의는 련부가 들어있는 진씨집 마당에서 진행되였는데 전련 120명이 빠짐없이 모였다. 조성두는 첫번째로 나서서 일제의 통치하에 겪었던 고생살이를 털어놓았다.
3련이 안수진에 주둔한지도 한달이 거의 되였다. 어느날 몽강일대에 정찰을 나갔던 변룡수가 돌아왔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무송현 만량툰에 무장토비 약 500명이 들어왔으며 래일 로수하쪽으로 이동한다는것이였다. 그런데 놈들은 아군의 형편을 잘 모르고있는것 같다는것이였다. 코앞에 닥친 적을 족치기 위해 련장과 지도원은 지도를 펴놓고 작전계획을 짰다.
부대는 오후에 출발해 100여리 강행군으로 이튿날 새벽 5시경에 만량툰 로수하 사이에 있는 987고지에 도착했다.
련장은 각 패장들에게 전투포치를 하고 조성두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그것은 적아간의 력량대비가 5대1로 현저해 정면전으로는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수 있으므로 조성두가 경기관총 한정과 20여명을 거느리고 고지남쪽 200여메터지점 강기슭에 매복하고있다가 토비들이 강을 건너 비탈길에 들어섰을 때 뒤를 차단하고 3분의 1이 강물속에 있을 때 일제히 사격하여 그놈들이 저쪽으로 도망치도록 하고 우리의 포위권에 들어온 3분의 2를 해치우는것이였다.
약 한시간후 토비들은 질서없이 강을 건느기 시작했다. 조성두는 련장의 명령대로 토비들이 3분의 2가량 강을 건넜을 때 사격명령을 내렸다. 기관총, 보총, 수류탄이 일제히 불을 토하며 적들에게 쏟아졌다. 강속의 적들은 뒤로 뛰였고 이미 강을 건넌 적들은 정신없이 비탈길로 해서 987고지쪽으로 달아났다. 적들이 987고지아래 당도했을 때 련장이 사격명령을 내렸다. 강가에서 얻어맞고 정신도 차리기전에 또 불벼락을 당한 놈들은 뿔뿔이 도망치고있었다. 그런데 달아나던 토비 80여명이 한 두목의 지휘하에 아군 지휘소를 향해 공격해오고있었다. 련장은 통신원을 조성두에게 보내여 고지왼쪽으로 우회해 동쪽산으로 올라가 지휘소를 공격하는 토비를 물리치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조성두는 기관총수와 두 전사를 남겨 대안의 적들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계속 사격하게 하고 나머지 전사들을 이끌고 동쪽산에 올라가 공격해오는 적들을 반격했다. 형세가 기울어진것을 안 놈들은 산아래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조성두는 앞장에 서서 도망가는 적을 뒤쫓으며 연거퍼 수류탄 세개를 던졌는데 적 11명이 즉사하고 13명이 부상당했으며 나머지는 도망쳤다.
전투는 한시간만에 끝났다. 이 전투에서 적 32명을 사살하고 25명을 부상시켰으며 8명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보총 31자루와 권총 8자루, 경기관총 1정, 그밖에 탄약과 수류탄 등을 로획했다. 부대에서는 그에게 대공 1차를 기입해주었다.
휘남해방전투에서
림강에 대한 두차례의 공격에서 실패한 적들은 4개 사의 병력을 동원하여 제3차 진공을 실시했다. 료녕군구의 명령을 받은 독립4사는 금천을 해방한후 휘남해방전투에 뛰여들게 되였다.
휘남은 장백산근거지의 북대문앞에 있는 현소재지였기에 국민당전연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였다. 국민당 60군 21사의 한개 퇀과 보안대 한개 퇀의 병력이 여기에 튼튼한 포대, 비밀또치카, 전호를 구축하고 철조망을 둘러놓는 등 우세한 화력망을 갖추어놓고있었다. 게다가 산이 가파롭고 큰눈까지 내려 원거리공격포가 없는 아군으로서 이 방선을 격파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3월 3일 저녁 5시, 드디여 휘남성해방을 위한 아군의 총공격령이 내려졌다. 사단참모장 로철용과 3퇀퇀장 조관이 전연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주공부대인 3퇀 1영이 두차례의 진공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지휘소에서는 두번째 작전방안대로 남산또치카를 폭파시킬 임무를 1영 3련에 주었다.
3련 련장 주재덕과 지도원 강응천은 명령을 받고 인차 부대를 공격출발점으로 진입시켰다. 련장은 3개의 지뢰소조를 집합시켜 적정과 전투형세를 설명하고 적의 또치카를 폭파시키는 중요성에 대해 재삼 강조한후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대담하고 행동이 민첩한 지뢰조장 조성두에게 제일 먼저 올라갈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전련의 화력을 집중시켜 적또치카의 화력을 봉쇄하도록 배치했다.
조성두는 횐 포목과 흰 수건으로 위장을 하고 30근이나 되는 폭약꾸러미를 안고 출발명령을 기다렸다. 이때 3퇀정위 황석이 전연지휘소에서 련부에 와 조성두의 두손을 꼭 쥐고 “조성두동무, 출발하기전에 무슨 요구가 없소?”라고 물었다.
“인민을 위해 몸바치는데 무슨 요구가 있겠습니까.”
육탄으로 진격로 열어
새벽 4시 30분, 엄호사격이 시작되면서 고요하던 새벽의 적막을 깨뜨렸다. 조성두는 용수철처럼 튕겨일어나 쏜살같이 령마루를 넘어 골짜기밑으로 달렸다. 행로를 판단한 그는 또치카를 향해 포복전진했다. 적들은 조성두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폭파약을 안고 수십메터 전진하던 조성두는 그만 적탄에 맞아 전진을 멈추었다. 시간은 1분 1분 흘렀다. 지휘소에서 두번째 지뢰수를 파견하려는 순간 조성두가 다시 움직였다. 조성두가 흰눈우에 검붉은 피자국을 남기며 적진을 향해 계속 전진하여 적의 또치카에서 약 50메터지점에 이르렀을 때 또 적탄을 맞았다. 지휘원들과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이를 악물며 적또치카를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지뢰수들도 앞다투어 명령을 재촉했다. 이때 조성두는 상상할수 없는 의지로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여 철조망에 다다른 그는 멀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철조망에 기대여 손을 흔들어 고별의 인사를 보내고 이를 악물고 폭파약도화선을 당겼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철조망과 또치카는 날아갔고 적의 사격이 중단되였다. 불멸의 영웅 조성두는 육탄으로 전우들의 진격로를 열어놓았다.
대기하고있던 3퇀 주공영은 함성을 지르며 맹호처럼 남산고지로 돌격했다. 전사들은 번개같이 적 중심또치카를 점령하고 나머지 두 또치카를 공격했다. 황급히 도망치는 적들을 섬멸하고 끝내 남산고지를 점령하고 모닥불신호를 새벽하늘에 피워올렸다. 남산이 열리자 1퇀 3퇀은 휘남성안으로 밀고들어가 시가전을 벌려 적의 거점들을 하나하나 까부셨다. 3월 4일 오후 3시, 휘남현성은 완전히 해방되였다.
휘남전투는 독립4사가 성립되여 처음으로 국민당정규군과 싸운 전투일뿐아니라 빛나는 승리를 취득한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리는 제3차림강보위전의 중요한 배합작전으로 그 의의는 아주 컸다. 장학사사령원과 해방부사령원은 료녕성위와 군구를 대표하여 휘남음식점에서 독립4사 퇀이상 간부들을 청해 전공축하연을 베풀고 위로했다.
휘남전투에서 독립4사 전사 40여명이 희생되였고 많은 전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전우들은 지뢰수 조성두용사의 흩어진 몸과 뼈를 하나하나 찾아맞추어 다른 렬사들과 함께 휘남 대장원에다 안장하고 그들을 추모하는 비장한 추도회를 가졌다.
조성두는 어떤 사람인가?
조성두는 1923년 평안북도에서 화전민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부모는 끼니를 굶으며 그에게 소학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중학교를 다닐 형편이 못되여 호미자루를 쥐였던 그는 1943년 겨울 일본군징병으로 끌려가 중국 남경 일본군 륙군부대에 편입되였다. 1944년 4월초순 조성두 소속 일본군은 남경에서 서남쪽으로 60여킬로 떨어진 곽장요방향으로 소탕하러 가게 되였다. 곽장요에 도착한 이튿날 다시 서쪽으로 30여리 나가 자그마한 마을을 소탕하게 되였다.
마을에서 약 300-400메터 상거한 곳까지 다가갔을 때 마을안에서 한방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민병들의 신호였다. 일본군은 그자리에 엎드려 마을의 동정을 살피고있었다. 이때 조성두는 대오의 맨옆으로 자리를 옮긴후 옆에 있는 물도랑으로 굴러내려가 약 50메터 기여나갔다. 돌아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시 100여메터 기여가 앞을 보니 집들과 울타리가 어렴풋이 보였고 이따금 발자국소리도 들렸다. 조성두는 일어서서 허리를 굽히고 마을안으로 내뛰다가 민병들에게 붙잡혔다. 조성두는 조선말 일본말을 뒤섞어가며 손시늉으로 투항하러 왔다는것을 알렸다. 민병들도 조성두가 총을 들고 탄알 80알이 든 탄띠까지 메고온것을 보아 대략 짐작하고 신사군에 넘겨주었다.
조성두는 신사군 13퇀에 배치되였는데 마침 부련장이 조선족이였고 련에서는 환영모임까지 열어주었다. 그는 신사군에서 1년남짓 싸우다가 일본이 투항한후 신사군내의 조선족들과 함께 로철용(후일 리홍광지대의 참모장)의 인솔하에 동북으로 나와 리홍광지대에 편입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