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대부분의 오해는 그것을 칼빈이라는 한 인물의 신학이라는 개념 아래에 가두는 것이다.그래서 칼빈의 저작과 그의 진술을 절대시하며 그의 진술로부터 구문 하나라도 벗어나면 잘못된 신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다.이러한 칼빈의 저작에 전적으로 의존하여서 개혁주의 신학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칼빈의 저작이 개혁주의 신학의 모든 것은 아니다.칼빈의 저작은 개혁주의 신학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한 부분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미 종교 개혁 이전에 잉글랜드의 위클리프와 로라드 그리고 프랑스의 왈도파와 헝가리의 후스파에 의하여서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주의 신학으로서 그 발아된 형태가 있었다.다만 그때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하나의 방향을 가지게 된 개혁주의 신학은 여전히 아직은 본격적으로 논의 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하였다.그러나1517년 마틴 루터의95개조 반박문이 기폭제가 되어서 전 유럽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었을 때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울드리히 쯔빙글리에 의하여서 후대 존 칼빈의 개혁 신학에 원형이 될 신학적 개요가 갖추어져 있었다.그러나 좀더 활동가였던 울드리히 쯔빙글리는 제2카펠 전투에서 패하여서 젊은 나이에 생명을 잃었다.그의 계승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쮜리히 개혁 교회를 목회하면서 쯔빙글리의 신학은 계속적으로 진전하였다.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주의자 마틴 부쳐가 쯔빙글리와 불링거와 동일한 신학적 입장으로 개혁신학을 개진하였다.그리고 마틴 부쳐의 개혁 신학은 존 칼빈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마틴 부쳐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에도 관여하였다.그는 토마스 크랜머의 초청으로 잉글랜드로 건너가서 개혁 신학을 가르쳤다.그 외에도 여러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있었다.피터 버밍글리 마터와 비렛과 주드와 카피토와 외콜람파디우스 등이 있었다.이외에도 더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존 칼빈이1536년[기독교 강요]초판을 출판했을 때 칼빈 이전의 모든 개혁 신학은 그에 의하여서 하나 노선을 갖게되었다.그래서 존 칼빈의 개혁 신학의 집대성자로 알려지게 되었다.그 만큼 칼빈의[기독교 강요]는 개혁 신학의 뚜럿한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간과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그러므로 존 칼빈 이전의 개혁 신학은 칼빈의 저작과 목회적 활동을 통하여서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는 존 칼빈이 당대의 개혁 신학을 하나로 종합하여서 방향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여전히 개혁 신학은 더 발전적으로 나아가게 될 여지가 있었다.개혁 신학은 존 칼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멈추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매우 위험한 오류에 빠진다.존 칼빈에게서 하나의 분명한 방향을 가지게 된 개혁 신학은 제네바에 개혁 교회에서 칼빈의 동료이면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데오도레 베자에 의하여서 프랑스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서로 산출되었다.프랑스 개혁 교회 신앙 고백서는 프랑스 개신교도들인 위그노들의 신앙 고백이다.낭트 칙령이 폐지되기 전까지 프랑스 땅에서 꽃을 피운 프랑스 개혁 신학은 개혁 신학에 있어서 거대한 흐름을 형성시켰다.프랑스 개혁 교회는 그 이후의 전 유럽 개혁 교회의 모태가 되었다.프랑스 개혁 교회가 낭트 칙령으로 크게 위축되었을 때 이미 개혁 교회를 하나의 국교와 같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화란의 개혁 교회가 오히려 상대적으로 큰 혜택을 얻었다.프랑스 개혁 교회 신자들의 망명이 화란으로 이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많은 위그노들이 화란의 개혁 교회로 망명하면서 화란의 개혁 교회의 견고한 형성에 기여하였다.그리고 프랑스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서는 대영제국 장로교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위그노의 신앙과 신학은 대영제국 장로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피의 메리 여왕의 서거 이후에 잉글랜드 국왕이 된 엘리자베스1세 시대에 대영제국 안에 청교도들의 활발한 세력 확장이 있게되었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잉글랜드에서 토마스 카트라이트이다.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앤드류 멜빌이다.그리고 스코틀랜드 노회 개척자 존 포베스도 빼놓을 수 없다.이러한 개혁가들의 활동에 힘입어서1603년 엘리자베스1세가 서거하고 그 권력이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6세였던 대영제국 스듀어드 왕조의 첫 왕이었던 제임스1세 시대에 큰 격변으로 치닫게된다.로마 카톨릭적 성향이 강하였던 스코틀랜드 제임스6세는 잉글랜드 국왕을 겸임하면서 더욱 국교회적인 교회를 추구하였다.그것은 좀더 철저한 종교 개혁을 희구하였던 잉글랜드의 장로주의 청교도들과 갈등을 일으켰다.결국 제임스1세는 당대의 개혁 신학에 의거한 제네바 바이블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흠정역(King James Version)성경을 출간하였다.후대에 이 성경을 주교 성경(Bishop Bible)이라고 부른다.성경 안에 담겨진 교회 정치에 해당하는 본문들을 감독교회적으로 왜곡해서 역본시켰다.이러한 제임스1세의 종교적 핍박에도 불구하고 장로주의 청교도들의 종교 개혁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찰스1세 시대에 장로주의 신학으로 더욱 분명하게 개진된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찰스1세와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 무력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당대에 찰스1세의 책사였던 알미니우스주의자 윌리엄 라우드의 책략으로 잉글랜드 청교도들이 큰 핍박을 받았다.결국 개혁 신학을 지지하는 의회파가 장기 의회가 개회되고 나서 찰스1세 왕의 실정을 문제삼으며 공격하게 되어 왕과 의회간에 무력 충돌로 이어지게 되었다.그것이 잉글랜드의 시민전쟁이다.찰스1세 중심의 왕당파와 잉글랜드 하원 의회 중심의 의회 파는 곳곳에서 충돌하면서 내전을 치렀다. 이 와중에 의회의 명령으로 대부분의 장로주의 청교도들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렸다.스코틀랜드 성직자 총대5명과 잉글랜드 성직자 총대121명이 함께 모여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를 작성하였다.물론 그 총대들 안에 극히 소수의 독립교회파가 있었으나 대다수의 총대들은 장로주의자들이었다.이렇게 결성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3년 반 정도의 기간을 통하여서1647년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를 작성하여서 잉글랜드 의회에 제출한다.그리고 스코틀랜드 의회에도 전달되었다.스코틀랜드 의회는 그것을 비준하였다.그리고 스코틀랜드 총회가 그것을 받았다.그래서 후대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법이 되었다.프랑스 개혁 교회가 구현한 개혁 교회의 치리회 제도는 대영제국으로 소개가 되면서 장로회 제도로 완성되었다.여러 신학적 저술들이 이어지면서 대영제국 장로교회는 신학적 체계를 갖춘 명실공히 장로교회가 되었다.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업적은 프랑스 개혁 교회가 예시하여 주었기에 가능하였다. 존 칼빈의 개혁 신학은 프랑스 개혁 교회와 대영제국 장로교회를 통하여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로 더욱 명료하게 구현되었다.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는 그 이후에 그에 비견할 만한 거룩한 보편 교회의 공적 선포가 없었기에 가장 개혁된 신앙 고백 문헌으로 돌려야 마땅하다.그리고 존 칼빈이 개진한 개혁 신학의 정수로서 완성된 개혁 신학으로 보아야 한다.그러므로 존 칼빈의 개혁 신학이 후대 거룩한 보편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개혁 신학의 지침서와 같다면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가 반드시 역사적으로 개혁 교회가 어떠한 체제로 세워져야 할 것을 분명하게 제시한 개혁 신학의 결정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제 개혁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로 완결되었다.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프로테스탄트라는 의미의 저항 정신은 오직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개혁 신학으로 하나의 방향과 지침을 갖게되었다면 이제17세기 개혁 신학은 대륙의 개혁 신학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로 완성되었다.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대륙에서 프랑스 신앙 고백서와 화란의 도르트 신조로 공적 선포가 있었다면 대영제국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로 공적 선포가 있었다. 중세부터 위클리프나 왈도파와 후스파들에 의하여서 개진된 개혁 신학은16세기 쯔빙글리와 부쳐와 불링거를 통하여서 존 칼빈에게 와서 완결된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그러나 여전히 존 칼빈 이후에 개혁 신학은 좀더 명료한 논의 과정을 거쳐서 프랑스 신앙 고백과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로 이어지면서 거룩한 보편 교회의 공적 선포로서 모든 신자들이 따라야 할 하나의 신앙 고백서로서 결정되었다.그러므로 존 칼빈의 개혁 신학으로부터 발전된 형태의17세기 개혁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작성하는데 참여하였던 장로교 청교도들의 저작들을 살피지 않는다면 잘못된 개혁 신학에 대한 지식을 갖게될 것이 자명하다. 역사적으로 개혁된 신학(Reformed Theology)은 어떠한 특정한 시대적 인물의 신학이 아니다.개혁 신학(Reformed Theology)은 모든 거룩한 보편 교회가 수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보편 신학(The Universal Theology)이다.사도들의 디다케(διδαχὴ)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구든지 개혁된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그렇게 개혁된 신학(Reformed Theology)은 사도적 정통 교회(Apostolic Orthodoxy Church)의 회복을 추구하며 사도들의 가르침(Apostolic Doctrine)으로 전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정통 신학(Orthodoxy Theology)이다